지난 주말 3일간 제주답사를 청년들과 다녀오면서 유행한 말 중에 '새로고침'이란 말이 있었다. 이는 함께 간 청년 중 자매 한 명이 중간 중간 화장을 고치는데 스스로 이것을 '새로 고침'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컴퓨터에서 인터넷 화면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클릭하는 것인데, 중간 중간 화장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로 고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모습인 것이다.

느헤미야 13장은 그와 같은 것이다. 새로고침.

이전에 세팅하고 정했던 것들이 원래의 모습을 잃고 다시 옛모습(생얼)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간 중간 새로 고치는 과정을 통해서 개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반복적인 연약함과 죄 때문에 이스라엘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보면서도, 어쩌면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해서 '새로고침'(계속되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정리1. 본문에 나온 내용 정리]

1. 섞인 무리 중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시킨 이유

  1) 그 날(이전의 어떤 날인듯)에 모세의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모압과 암몬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알게 됨

  2) 이는 과거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오는 과정 속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따듯하게 영접해주지 못할망정,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셨다.

  3)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하였다.

2. 그런데 암몬 사람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를 잡게 되다.

  1) 성전의 방을 담당했던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2) 도비야를 위해 큰 방을 만들어주었는데 원래 그곳은 소제물을 보관하고,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었다.

  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왕에게 잠시 다녀와서 보니 이와 같은 악한 일이 벌어져있었다.

  4) 느헤미야가 도비야의 세간을 다 치워버리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소제물과 유향으로 다시 채워넣음.

3.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1 (레위인을 불러옴)

  1) 레위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함으로 레위인들이 각기 자기 밭으로 도망하여 성전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되었다.

  2) 느헤미야가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오고 책임을 맡기고, 그들의 필요한 양식을 채워 넣었다.

  3)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느헤미야가 한 선한일을 기억하소서.

4.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2 (안식일을 다시 지키도록 함)

  1)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여러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장사를 함.

  2) 느헤미야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책망함.

  3) 문지기를 세워 안식일에 문을 닫고 장사하는 사람이 없도록 함.

  4) 자신이 주를 위하여 한 이 일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함. 주의 큰 은혜로 나를 아끼소서!

5.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3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킴)

  1) 유다사람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다.

  2) 그 통혼한 자녀들 중에 아스돗 말을 반쯤 하면서도 유다 말은 못하는 자녀도 있었다.

  3) 느헤미야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고 그들 중 몇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다.

  4) 그들에게 우리의 딸을 주지 말고, 그들의 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맹세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던 왕 솔로몬도 아내로 맞은 이방여인들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어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큰 악을 하나님께 범하겠는가?

  5) 느헤미야는 대제사장의 아들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것을 알고, 그를 쫓아내어 제사장의 직분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들로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했다.

  6)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와 같은 일을 기억하사 복을 달라고 소망했다.

[정리2. 본문의 재구성]

느헤미야 13장은 느헤미야 12장과 잠시 시간적인 공백이 있다. 성벽재건과 성벽 봉헌식을 마치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과의 약속(다시 돌아오겠다는) 때문에 왕에게도 돌아갔다. 그리고 몇 일후 다시 왕에게 요청하여 말미를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왕을 만난 시간은 몇 일이지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시간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1년 이상되지 않았을까?)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에서는 그 짧은 시간에 다시 옛 모습을 돌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4가지의 큰 죄악이 있었다.

1. 과거 발람 사건으로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는 들어올 수 없는 암몬 사람인 도비야가 버젓이 제사장 엘리아십과의 관계 속에서 성전에 곳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른 본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다 꺼내고, 다시 원래의 것으로 채워 넣었다.

2.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과 문지기, 노래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할 것들을 주지 아니함으로 이들이 생계 때문에 다 성전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다시 이들을 불러오고 직분을 맡기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도록 했다.

3. 안식일을 지키도록 한 것을 어겼다. 안식일임에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문을 닫게 하고 그 주변을 얼씬 거리는 사람마저 경계하여 있지 못하도록 했다.

4.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도 심각했다. 대제사장의 자손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어 있을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느헤미야는 이들 중에 일부를 때리고 털을 뽑아 버림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리고 맹세하여 그렇게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개혁을 행할 때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와 같은 노력과 애씀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사람들은 하드웨어적 요소와 인적 자원, 컨텐츠 만으로 개선이 일어나지 않는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을 통해서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내적 개혁을 통해서 말씀과 성전 제사와 직분과 이들이 장기적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이전의 모세의 때와 같이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남은 자 이스라엘은 온전해 질 수 없었다.

즉, 이와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람과 인류가 변화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모든 개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옛 죄악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메시지도 함께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멋진 개혁과 변혁을 일구어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는 한계가 있다. 뭔가 더 필요하다. 이들의 외부적 환경이 아닌 내부적으로부터 오는 개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내적 생명의 탄생,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새생명의 탄생이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란 불가능한 것이 된다.

2. 반복적인 새로고침이 필요하다.

중간 중간 화장을 고쳐야 하듯이, 우리의 신앙은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출동하고, 에스라가 출동했어도 개혁은 다시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탁월한 지도자의 부재가 아니라, 그 만큼 우리의 본성이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느헤미야처럼(미리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개혁을 일상으로 생각하고 정기적인 자기 평가와 새로 고침의 사역을 꾸준히 감당해야 필요성을 가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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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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