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정리]


1.너희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를 대하는 것 같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와 같기 때문이다.


2.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사람(바울,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따라 서로 시기와 분쟁하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3절) 신령한 자들은 영적인 이치를 알아서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알고, 사람은 각자 자기 역할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을 아는 자(7,8절)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동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신령한 자이다. 


3. 육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불타 없어질 것을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15절)


4. 중요한 것은 교회(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성전을 거룩(온전하게 하는 것, 분리되고 나누게 하는 것이 아니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5.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것처럼 사람(유명한)을 따르고 추앙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21절) 만물이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도,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나 다 너희의 것이다.(22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cf) 엡 1:20-23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만물도 교회를 위해 두신 것이다.)



(엡 1:20-23)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묵상]


1.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 적어도 고린도전서에서의 개념은 교회 안에서 사람을 추앙하여 분열과 시기를 정당화하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이다. 그 사람이 바울이나 게바나 아볼로 일지라도... 반면 신령한 자라는 것은 영적 진리와 이치를 알고 분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정작 중요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자신들의 역할은 심는 것이나 물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며, 동시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만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성전인 교회의 거룩은 분열되지 않고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2. 성도는 내게 위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를 추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나'를 위해 두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우리가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안된다. 바울일찌라도, 아볼로나 베드로라 할찌라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 바울도 사용하시고 아볼로나 베드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나를 위한 조연인 것이다. 물론 나를 위한 그들의 수고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를 통해 얻은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를 동원하신 분, 하나님에게 우리의 초점이 맞춰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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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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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해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권면은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권면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권면이다. 6장 1절이 '한 사람의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6장 2절에서는 성도 중 누가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이 힘겨워할 경우 그 짐을 서로 져주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교회는 지상의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죄'가 있고, '연약함'이 있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그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죄가 드러나게 된 <공동체>의 문제도 개선되어야 한다. 죄는 그냥 발생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토양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란 것이다. 그와 같은 토양이 형성되도록 방치한 공동체도 문제가 없지는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다루는 방식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약한 지체>에 대한 교회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서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 주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각자 개인의 짐을 개인에게만 두어서는 안된다. 기본적인 원칙은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개인의 주변 환경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고(게으름이 아니다.)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룬 지체다. 지체가 지체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한 몸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 몸이라 말할 수 있고, 한 몸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을 때에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자랑할 만큼 스스로 높이지를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도 사람들에게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곳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높여서 자리를 옮겨주면 모르지만, 괜히 높은 곳에 먼저 앉다가 나중에 낮은 자리로 쫓겨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연약한 자의 짐을 많이 져주었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자랑이 되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일수록 자신의 일을 늘 살피어, 겸손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묵상] 


1. 바울의 권면은 개인 경건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2. 죄를 범한 자에게 대해서는 바로잡도록 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3. 연약한 자에 대해서는 서로 짐을 져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남의 일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4. 능력있어서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까지 섬긴 자는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회 공동체는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사람을 공평케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약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고, 강해도 자만할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약한 자도 함께 존중받으며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강한 자의 능력은 섬기기 위한 능력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심지어 '죄'가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 죄를 일으킨 사람을 '옳게 세우는 곳'이며 심지어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새롭게 갱신되는 곳이다. 교회를 이런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에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를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자 강한 공동체로 만들려고하는 시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죄'와 '연약함'을 부정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와 '연약함'으로 불완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키우고, 한 사람의 연약함이 공동체의 한 몸 됨을 드러냄으로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죄와 연약함을 부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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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였다. 


  *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 주전 538년 이후 18년인 주전 520년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가 왕이 된지 2년째이다. 그 해 6월 1일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2.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따지심

  1) 이 백성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함.(여론이 그러함)


   * 몇 몇 사람들은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수도 있지만, 다수의 여론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반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공동의회를 통해서 성전을 다시 짓자는 의견은 부결되었는지 모른다.


  2)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게 되었는데, 너희들은 판자로 만들어진 집에 거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피고 스스로 다시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지금 너희가 많이 뿌려도 수확이 적고, 먹을 지라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듯하지 못하며, 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같이 되지 않느냐?

   * 넉넉하지 않아서 내것으로 채우고 모으기에 힘쓰지만, 그것이 전혀 쌓이거나 배부르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심. 자기가 채우고 나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논리에 빠지도록 하는 사단의 유혹일지 모른다.


3. 하나님이 귀환한 백성들을 방해하심


  1)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2)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3)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집으로 가져가면 하나님이 불어버렸다.

  4) 왜그런지 아느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는 것에만 빨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수고하여 얻으려고 했던 모든 것에 한재를 들게 하였다. 


  * 하나님은 백성들의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하시는 분이기도 하시다. 훼방꾼처럼 여겨지기도 하신다. 그러나 왜 그리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엉뚱한 일에 집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집착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는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의 핸드폰을 빼앗고, 텔레비전을 끄며, 용돈을 제한한다. 그래야 부모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물론 상한 감정으로)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귀환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을 하신 것이다. 


4. 그제서야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


  1)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다. 

  

  2) 학개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었다. 

  3) 하나님께서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4) 그리고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다. 


  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2년(주전 520년) 6월 24일이었다. 



[묵상 한 모금]


1. 성전 재건에 대한 의욕이 꺾이고, 제도적인 방해가 있자 성전 재건이란 사명은 잊혀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고 그곳에 정착하여 사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곳에서 생존을 위한 삶도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여도 충분한 채움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채우기 위해서 고민해 보고, 노력해보며 살았다. 그러나 충분하지 못했다. 그렇게 18년의 시간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성전을 돌아볼만큼 여유롭게 되지 못했다. 


2. 기다리고 참고 인내하셨던 하나님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학개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명을 잊고(부르심을 잊고) 자신의 생활에만 집착하여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에 책망하셨다. 더불어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서 형편은 좋아졌는가? 라고 묻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충분한 것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풍요를 막고,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으나 이들은 오히려 재물과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고 정작 하나님을 보진 못했다. 


3.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에 비해 지속적으로 충분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 7절) 자시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기도원도 가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부족하면,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누우며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 못하거나 인생길이 막혔다면,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적어도 신앙인들은 말이다. 


4. 학개 시대의 성전 재건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 건축과 기계적으로 대응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이 당시 성전 재건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과 부르심 속에서 진행된 것이지만, 우리가 짓게 되는 교회라는 것은 그와 같은 사명과 부르심은 성경 안에서 명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개서를 보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의미를 살펴야지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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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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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http://news.nate.com/view/20130218n00351?mid=n0411

영성 2.0 ④ 김용택 목사
신앙, 자녀교육, 살림 모두 함께
초기기독교 공동체 6년째 실험
기성 교회·가정 반성에서 출발
최소한의 자급자족, 할 수 있어요

경기도 연천에서 신앙공동체 실험을 하는 김용택 목사 가족.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 목사, 성은군, 성찬(아들)씨, 아내 김지숙씨, 성경(딸)씨. 사회적 기업 해피 트리도 운영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교회는 원래 신앙공동체였다. 함께 생활하고 나눠 쓰며 하나님을 섬기는 모임이었다. 예수 제자들의 복음을 전파한 기록인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모습이다. 당시 교회는 요즘처럼 예배당 건물이나 교회 세습에 연연하지 않았다.

 감리교 김용택(53) 목사는 그런 초기 교회의 실현을 꿈꾸는 목회자다. 2008년부터 ‘주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뜻 맞는 이들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자녀 교육, 신앙 생활을 함께한다. 살림살이도 합쳤다. 함께 벌어 똑같이 쓴다.

 교회 건물, 물론 없다. 공동체 식구들이 식사를 함께하는 공간이 주일이면 예배 장소가 된다. 현재 구성원은 김 목사 가족 7명을 포함해 8가족 30명. 휴전선과 한탄강 유원지가 지척에 있는 경기도 연천군 초성리가 근거지다. 20∼30평대 저층 아파트 5채에 나뉘어 산다.

 지난 8일 공동체를 찾았다. 제도권 교회와 학교, 일자리 등을 등지고 ‘극단적인’ 공동체 실험을 하게 된 이유와 의미가 궁금했다.

 김 목사는 ‘해피 트리’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 나와 기자를 맞았다. 2011년 가을 세운 사회적 기업이다. 새터민(탈북 정착민)을 고용해 우리밀 빵을 만드는 해피 베이커리, 동네 도서관과 재활용 의류매장을 겸한 카페 행복한 나무, 지역특산물인 자색 고구마 등을 재배하는 해피 팜 농장 등을 거느리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공동체 식구들의 한 달 월급은 모두 600만원. 김 목사는 “그게 공동체 수입의 전부”라고 했다. 모기 눈물만한 돈으로 대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 비결은 큰 교육비가 들지 않기 때문. 아이들은 학교·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 어른들이 과목별로 돌아가며 가르쳐 검정고시를 치르게 한다. 그런데도 김 목사는 2011년 큰딸 민애(24)와 둘째 딸 신애(21)를 캐나다 토론토의 세나카 칼리지에 나란히 입학시켰다.

 농장 덕분에 먹거리도 웬만큼 해결된다. 어른은 한달 13만원, 청소년은 6만원씩 용돈을 준다. 이에 비하면 도시의 우리들은 너무 많이 먹고 쓰는 것은 아닐까.

 김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것을 잘 모아 나눠 쓰면 최소한의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공동체는 기성 교회와 가정,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김 목사는 감리교신학대 운동권이었다. 목사 안수 이후 경남 마산에서 도시빈민 등을 상대로, 소위 민중사목을 했다. 하지만 나날이 거칠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 서울의 번듯한 교회에서 한 10년간 교회 성장을 위해 뛰었다. 그러나 교회 바깥의 시대와 역사에서 동떨어졌다는 회의가 들었다. 아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 교육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채 이중적 생활을 하는 ‘선데이 크리스천’ 신자들도 목사로서 보기에 안타까웠다.

 김 목사는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살아온 배경이나 성격,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이라는 파이의 크기는 어떤 사람과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게 공동체다. 그는 “신앙을 새로운 형식 안에 담아내라는 시대의 명령 앞에서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 그릇, 새로운 가치를 찾아 순례하는 신앙적 보헤미안들의 기착지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젊어서부터 영성운동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그에게 영성운동은 신앙이 깃드는 처소인 영혼, 그걸 살펴 바른 신앙의 길로 향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공동체는 그 밑바탕인 셈이다.

 그의 실험은 여태까지는 성공적인 것 같다. 원년 멤버 정연훈(43)씨에게 만족스러운지를 물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인천에서 아내와 함께 사설 공부방을 운영하다 공동체에 발을 들였다. 다음은 그의 대답이다.

 “사람들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함께 못 살 정도는 아니다. 누가 물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우선 기도를 드리고 상대방 의사를 존중하며 해결책을 찾아 나간다.”

연천=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신준봉.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박종근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jokepar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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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수녀의 차이
_자하철에서 생긴 일.(2012.7.2. 제훈교 월요반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어제 저녁 늦게 용산에서 급행을 탔습니다. 전철칸을 이동하면서 빈자리를 찾았는데, 빈자리가 하나 보였는데 연세가 있으신 수녀님이 앉아계신 자리였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기위해 이어폰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 다음역에서 많은 사람이 탔고 그 중에는 술취한 분이 수녀님 앞을 비집고 들어와서 그 앞에서 몸을 늘어뜨린채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도 자칫하면 수녀님에게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 보였습니다. 술이 꽤 취했고 아저씨가 그리 교양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수녀님도 좀 당황하시고 움츠리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만약 이 아저씨가 수녀님에게 약간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거나 그러면 도움을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마음 한편으로 이 아저씨의 불안함을 보면서 말입니다. 수녀님을 보호해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은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것으로 인한 두려움도 있었지요. 그러나 주님도 그리하시지 안으시겠나는 생각을 하면서...암튼, 그 술취한 아저씨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은 짐을 주섬주섬 챙기시더니 자리를 피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히 험한 일 안당하시는게 낫겠다는 생각에.

그런데 수녀님은 술취한 그 분께 자리를 양보하시고는 자기는 멀리서 왔으니 술도 많이 드신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서 가시라는 것이다. 술치한 아저씨는 과도하게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난, 수녀님이 자리를 옮기실 줄 알았다. 그런데 수녀님은 그 앞에 서시고 술취한 분의 쓸데없는 주정에도 성의껏 답해주셨다. 난 당황하며 그 모습을 다 지켜보게 되었다.

술취한분은 수녀님의 손을 잡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고, 수녀님은 그분의 횡설수설에도 귀 기울여 주셨다.

수녀님 본 인이 있는 곳은 강원도 인제인데, 거기서 노인들을 돌보시고 있다고 오늘은 일이 있어 멀리 부천에 가는 길이라고... 술 취한 분에게 인제 오실일 있으면 들리시라고...

부천역에 내리실때까지 술 취한 아저씨의 무례함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따듯하게 대해주시는 것을 난 보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난 생각했다.

목사인 나는 싸우려고 준비하고
수녀님은 품고 안으시려고 준비하시는 구나...

내 모습 속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게 됩니다. 물질과 성공의 종이되어 버린 교회도 있지만, 싸우려고만 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분은 충분하다. 나를 희생해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양극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가독교는 속물이거나 싸움꾼이거나. 나도 그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제 저녁 수녀님은 제게 많은 것으 가르쳐 주시고, 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많은 짐을 손수 들고 가시는 연세 많으신 수녀님의 모습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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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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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에서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된다. 특히 구원사역과 관련된 천사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장차올 세상올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5절)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혈과 육을 가지고 온 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곧 교회를 붙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16절)

즉,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만물을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앞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한 교회인 성도들을 위한 사역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해서 천사는 하나의 도구는 될 수 있어도, 구원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을 대상도 아니고, 구원 사역을 통해서 직접적인 은혜를 입는 대상도 아닌 것이다. 구원 사역과 관련해서 천사들이 전면에 나올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측면에서는 교회, 곧 성도와 비교해도 우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등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가 받을 그 보응에 대한 것이다.(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큰 은혜로 베푸셨는데 이것을 알고도 그 은혜를 거절한다면(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거기에 따라서 보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장을 받고도 여러가지 말도되지 않는 이유를 들어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한 보응이 당연한 것처럼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도 그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그 보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은혜가 크면 클 수록, 하나님편에서의 노력과 열심이 크면 클 수록 그들의 거절은 더욱 큰 악이되며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14절)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가 고난을 통과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0절)

2.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하셔서 그 아들이신 예수는 우리와 같은 처지에 처하심을 통해서(모든 시험을 받으심)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실제적 정서적 동질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18절)

3. 우리를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고,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평생에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자유하게 해 주셨다.(14,15절) 즉 우리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신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시려고 말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 위해서 행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큰(은혜를 베푸신)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소식을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3,4절)

큰 은혜를 받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전혀 다른 운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서 그 큰 은혜 아래 오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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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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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3장은 두 부류의 권위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2:15을 포함해서) 첫째는 그레데에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도의 권위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 정치권력의 통치자에 대해서 권면한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적 사고가 편재하고, 탈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권면같지만,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1. 목회자의 권위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2:15)

목회자가 권위로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이 말이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것이다. 권위주의란 자기 스스로가 권위의 근거가 되어 언제든지,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건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면과 책망의 내용에 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권면하고 책망하는 근거가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을 때, 그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시행하는 목회자는 평소에 권위있는 내용이 가벼운 것이 되지 않도록 품위를 잃지 않아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포장보다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용에 맞는 포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들려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하고 보여주는 목회자와 성도(교회)가 걸맞는 포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의 권위, 불교의 권위는 사제와 승들의 자기 희생적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목회자와 교회의 삶에 모습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품위있는 겉모습을 가져야 한다. 정직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며 자신의 꾸밈에 있어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편하다고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2. 통치자의 권위

  통치자들에게 대해서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복종하고 순종하며 선한 일을 하기에 준비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악을 지양하고 선을 격려하는 것이 기본일찐데 우리는 마땅히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고 복종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를 잃게 만드는 것은 공직자들(권세자들)의 부정과 부패다. 권위는 인정하되 그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책임을 묻고, 밝혀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방치된다면 국가의 권위라도 정당한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반드시 감시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교회든 국가든 권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잃어지지 않도록 목회자와 성도는 품행을 단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도다운 높은 수준의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공직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권력을 가지고 사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의 권위가 살고, 그들이 권위를 주장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제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절차가 옳아야 한다. 절차가 합법적이지 못하면 그 권위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적이다, 비민주적이다라는 것은 그런 절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통진당의 행태를 보면서 만약 당권파가 다시 당 권력을 장악한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권위가 실리겠는가 생각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다시 당을 장악한다고 하더라고 그 당은 금세 무너질것이고 지리멸멸해 질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의 권위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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