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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7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절.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절.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절.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절.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둘씩 파송하셨다.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1) 여행을 위해서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2) 여행을 위한 신만 신고 심지어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3)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4) 혹 너희를 영접하는 곳이 없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면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내가 와서 전하고자 했으나 너희가 환대하지 않았고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여길 떠난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지침을 따랐으며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했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주었다. 


[질문하기]

1.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예수님을 통해서 권세를 위임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을 하였고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 일이 일어났다.

   (1)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자들에게도 위임되었고,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제자들의 위임받은 권세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확장될 수 있다. 

   (2) 실제로 제자들은 그 권세를 위임받아 갔고, 주님과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귀신이 쫓겨가고, 병자들이 나았다) 


  2)많은 귀신이 쫓겨가고 병든자가 낫게 되는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제자들이 어떤 마인드로 전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하겠다. 

   (1) 전도의 일을 위해서 이곳 저곳을 다닐 때 필수적이고 필요한 도구(지팡이, 신발 등)만 있으면 나아가고

   (2) 전도의 일을 하면서 환대해 주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이 제공해주는 것을 먹고 머물며 전도하라. 만약 아무도 환대하지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 지역에서 발 아래 먼지를 털고 나오라. 


[묵상하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시고, 이 땅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전파되며, 제자들의 위임받은 권세를 통해서도 이 땅에서 실현된다. 예수라는 독특한 분의 능력만이 아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첫 백성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동일한 성취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직접 가지 않았지만 그 곳까지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났고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다. 예수님께 위임받은 열 두 제자는 예수님께 위임받은 이 땅의 교회로 봐도 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직접 가시는 대신 교회가 이 땅의 구석 구석 찾아가고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이 사명을 위임받은 자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생계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다. 최소한의 것만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며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공급받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환대를, 어떤 곳에서는 배척을 받겠지만 전도자는 환대받는 곳에 안주해서도 안되고 배척받았다고 낙심해서도 안된다. 물흐르듯 흘러가되, 거친 돌이 있다면 돌아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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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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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6-12>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원리1)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라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절)

(정리) 혀를 제어하거나 관리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함을 말한다. 온 몸과 삶을 불태울수 있다.

(질문) 야고보는 왜 이리 혀(말)의 문제를 심각하게 집요하게 지적하는가? 교회 안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문제가 심각했던가? 아니면 기독교가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것인가? 

(묵상) 지금까자 말과 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영역이다. 처음은 행함이 없고 말만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함부로 쉽게 함으로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두 문제 모두 말이 앞선다는 것이고 말이 삶으로 뒤받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측면에서 기독교 인들이 말을 잘 한다는 이미지는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말을 더디해야 한다. 말을 줄여야하고 행동에 뒤 따라야 하며 빨라도 행동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원리2)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7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정리) 사람이 다른 동물과 생물을 다 길들일 수 있으면서도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둘러 스스로를 해롭게 한다는 말로 혀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질문) 야고보는 혀가 통제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두른다고 봄을 혀를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앞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된다. 

(묵상) 본인의 지체로 본인의 의지로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관이 있다. 내부의 장기들이 그렇다. 내 몸에 있지만 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율적 기관이다. 그러나 손과 발은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은 말의 실수가 많으며 그로 인해 혀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우가 되고 만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말(혀)는 통제하는듯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지체가 된다. 

혀와 말의 문제는 말과 행위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앞에서 행함과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행함과 믿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는데, 말의 문제가 그렇다. 행함이 없이 말만 있을 때 믿음을 보일 수 없는 신앙이 되고 만다. 또한 말이 우리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품격)과 괴리된 내용으로 나오게 될 때 그것도 문제가 되고 만다. 정리하면 두가지 문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과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담고 있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생각 밖의 말을 하는 것(내용이 채워지지 못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경박함 등)을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원리3)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9절)

한 입에서 찬송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10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쓴 물을 내겠느냐?(11절)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2절)


(정리) 한 입 안에서 서로 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이 나온다는 것이 말이 되냐? 안된다.

(질문) 말이 안되는 이야기,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지금 교회 안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깨닫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 이런 의미로 야고보는 계속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묵상) 교회는 이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 지속되어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현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야고보 사도는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혹독하게 한다. 집요하게 한다. 왜 이런 모순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지 명쾌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 지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감추거나 숨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있음에 한탄하고 지적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리고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외부에서 밝혀내기 전에 교회가 수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서 고치도록 해야 한다. 야고보는 그렇게 했다. 문제가 없는 척하지 말고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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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3>(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권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3.(권면)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1) 동역자: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2) 동역자: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은 1,2장의 권면, 3장의 권면을 마치면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그 정리하는 권면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 서라>이다. 이것은 한 개인을 향해 주는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투기와 분쟁이 있는)를 향해 주신 권면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만약 교회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못하고 서로 투기와 분쟁을 지속한다면 교회는 설 수 없게 될 것이란 의미다. 빌립보서의 내용을 근거로 정리하면 교회 내의 분쟁으로 인한 것이라면, 큰 그림을 보면서 서로 돌아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한다.(2장) 반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육체의 자랑, 의에 근거한 신앙)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쫓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장) 이 둘을 잘 구분해야 연합할 때 연합하고, 경계해야 할 때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구별이 모호한 영역이 있지만, 늘 이 두 영역이 혼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빌 4:4-7>(정리하기)

1. (권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2. (권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3. (권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6절)

 <정리>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뻐하라'가 아니다. '주 안에서'이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묵상] 그것은 빌 1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바울은 매임에 있었고, 경쟁자들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18절) 이유는 그의 시선이 자기 자신의 형편이나 상대방의 성공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복음의 전파', '그리스도의 확장'에 그 삶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뻐하라'는 명령은 '주 안에서'라는 의미가 명확해 질 때 가능한 것이지 당위로서의 기뻐하라는 또 하나의 무거움 짐이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두번째 권면은 '관용'이다. '관용'은 갈등이 있는 두 집단 이상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한 편이 되기 위해서 품는 마음이다. 이는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품어야 할 마음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관용'이라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종말론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관용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자가 오셔서 최종 판단을 내려 주실테니 서로의 주장을 강요하지 말고, 입장은 다르지만 최종 결정을 기다려보자. 곧 판결난다. 이 일로 서로 원수가 되지는 말자! 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서로에게. 아내와 내가 부부싸움이 현저하게 줄어든 결정적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종말론적 태도 때문이다. 


3. 이런 바울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입장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결정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입장이 다른 입장과 싸우거나 적을 만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입장이 진실하기에 그 입장에 서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다. 

  [묵상] 바울은 교회 안에 파당이나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그것을 정죄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을 경고하고 있지만 다른 입장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시기와 질투, 분쟁으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긴장이 있을 때, 

<주 안에서> 우리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한 집안 사람임을 잊지말라

<관용> 곧 주께서 오셔서 선명하게 판단해 주실테니 좀 참고 서로에게 관용하라.

<기도> 그러면서도 네 입장에서 네 마음이 소원을 하나님께 구해라. 하나님께 맡겨라.(그 분이 정답을 알려주실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하나님의 정답이는 너는 따르든지 감사하든지 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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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7-21>(정리하기)

1. (권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2. (권면)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17절)


 (설명) 

  1) 바울은 여러번 말했고, 이제 다시 눈물로 말한다. 

  2)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18절)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2)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다.(19절)


  3)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4)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20절)

  5)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1절)

   -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여기서 빌립보 교회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는가? 

  [답변1] 바로 앞에서 말하는 바울의 논조를 본다면,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하는 태도(3:13)을 말하는 것일게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게 되었냐를 따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신이 지금 바라고 지향하는 것(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가듯이 빌립보 교회도 괜한 논쟁(분쟁)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보다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답변2] 좀 더 앞으로 가면 바울이 자신이 매임을 당했을 때, 투기와 분쟁의 목적으로(그릇된 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로 인해 분해 하거나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거국적인 관점(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넉넉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 바울이 말하는 원수들의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의 바른 태도와 소망은 무엇인가? 

  [답변]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데, 그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대속,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을 훼손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의미(낮아짐과 죽기까지 순종하심의 정신)를 무시한다. 그들의 결국이 멸망이다. 그들은 육적인 것이고 땅의 일에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반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 거기서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영광의 주님은 우리의 낮은 몸을(낮아진 몸, 죽은 몸) 자기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우리도 하나님의 올리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 이런 표현을 통해서 보면 2장에서 약속한 내용의 반복을 보여준다.(2:9-11)


<1,2장, 3장과의 연계성>

3장은 1,2장과는 주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1,2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이 있는 대상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 파당이 다른 대상으로서 서로 투기와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3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교회를 위협하는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복음 외에 할례와 같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도 그들과 논쟁에 힘쓰기 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심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나가라고 요청한다. 

2장 마무리하면서 디모데 이야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제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3장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연결되는 면도 있는데 1,2장에 나오는 대상이나 3장에 나오는 대상 모두 십자가의 정신을 훼손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잊지 않고 바울처럼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는 연계성이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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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4-6>(정리하기)

1.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뒤질게 전혀 없는 자격을 갖췄다.(4절)


 (근거)

  1)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2)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3)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4)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5)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질문하면 묵상하기)

1.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3:1-3)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손할례당)에 대해서 잘못됨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육신적이 조건으로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육체적인 조건으로보면 누구 보다도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들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히려 자신이 왜 그들처럼 육체를 신뢰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육체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7절 이후)


<빌 3:7-9>(정리하기)

(전에는 육체를 신뢰했던 사람이었으나)

1. 지금은 바울이 자신이 신뢰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로 여긴다.(7절)

  (왜? 이유)

  1)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육체의 자랑)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다.(8절)

   - 따라서 지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육체의 자랑)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9절)


 (앞으로 지향하는 바)

  2)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10,11절)

   - (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 (어떻게?) 그의 죽으심으로 본받아

 [정리]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는 육체를 신뢰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위해 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의의 근거도 달라졌고, 삶의 지향도 달라졌음을 말한다. 


  (바울의 결심)

  3)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2)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


  [정리] 육체의 의를 의지한자는 자신에 대한 육체적인 의를 의지하고(과거) 앞으로도 계속해서 육체적인 의를 지향(미래)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은(과거, 확정된 미래보장)은 의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상>을 위해 산다. 

  [묵상] 육체로 사는 사람들은 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는 만족된 의에서 더 나아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산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매임을 당하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공동체 내부에서도 오해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향해서만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시기하고 다투는 자들과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힘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그 푯대만을 보고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권면) 

  4)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온전히 이룬자들: 바울처럼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을 근거로 의롭게 된 자들)

   (1) 만약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2)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정리]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어떤 것이 참되게 하나님의 뜻인지 알수 없을 때) 우리가 옳다고 깨닫고 믿는대로 그대로 행하라(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다투기 보다는) 만약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이 그것도 너희에게 나타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그러니 죽자살자 싸우지 말라. 서로 다른 입장에서 토론을 할 수 있겠지만)


<질문하기>

1. 왜 바울은 처음에는 육체의 신뢰문제(자기 의냐? 하나님의 의냐?)로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자신은 부활의 문제로 넘어간 것일까?(3장 10절 이후)

  - 빌립보 교회의 갈등 원인이 의롭게 된 이후의 삶에 대한 갈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는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칭의 이후는 율법적 방법으로 상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의 입장이 바울의 가르침과 달랐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 신앙적 입장 차이가 발생한듯 하다.(악의적이라기 보다는 아직 정확하게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니 그렇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첨언> 주석을 좀 살펴보니, 빌 2장까지는 교회 내부의 경쟁관계에 있는 부류들과의 논의라면, 3장은 교회를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라는 내용을 본다. 확실히 2장과 3장에 언급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바울의 태도가 많이 다르긴 하다.(포용적, 배타적) 그렇다면 3장에 언급된 대상들은 예수를 믿는 것 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미 얻은 것이 아니라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한다.(13절)는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믿음으로 의롭게 됨 이후 상급을 받기 위한 헌신으로 봐야 할 것인가?)(17년 4월 14일. 추가해서 넣음)

  - 빌립보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이 지점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아직은 개인적인 생각이다.) 바울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그룹이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바울은 이 부분에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장 결론을 배타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 입장에 대한 바른 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냐? 하면 마무리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물론 결론 바울의 입장이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다 권위를 가지고 결정해주는 사람들은 없을테니.. 논쟁하면서 입장이 후대에 정리되어 왔을 것이다.)

 - 과제: 바울과 다른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면 좋을듯 하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바울이 매여있을 때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과는 어떤 면에서 입장이 달랐을 것인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칭의 이후의 입장이 달랐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적어도 바울이 빌립보서는 쓸 당시에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과 확신을 기록하고 있지만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후에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알려주실 것이라는 태도로 말한다.(바울이 확신하는 지점은 있지만 모두가 확정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태도를 통해 바울은 교회를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만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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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3>(정리하기)

1. (권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1절)

  -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말이다.(너희에게 안전하다.)

2. (권면) 삼가해야 할 것

 1) 개들을 삼가고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3)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권면) 해야할 것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질문하고 묵상하기)

1.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할 수 있는 키가 '주 안에서'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주 안에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묵상] 감정적으로 상식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바울이 '기뻐하라'는 권면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상황은 감정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뻐할 수 없는 중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에 의한 기뻐하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라는 수식어가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상황, 빌립보 교회의 상황이라는 맥락을 염두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고백했다.(1:18) 그것은 자신의 매임의 몸이지만, 시기하는 자는 득세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복음의 전파는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치관이 자기 자신 중심의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사역자들의 성공여부가 복음의 진전여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여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는 내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초라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도 한다. 그럼 왜 하필 그 낮아져야만 하는 사역자가 나인가? 그렇게 물으면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자신의 형편도 해석해 낼 수 있는 수준이 될 때,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수고스럽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빌립보 교회에게는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가치관임을 말한다. 이는 그만큼 간과하기 쉬워서 그릇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2. 2-3절에 삼가하라는 것과 행하라는 권면은 앞에서 언급한 주제와 전혀 다른 주제로의 전환인가 아니면 연관성있는 권면인가? 

  - 이는 2,3절에 말하고 있는 권면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 이후 앞의 내용과 연관되는 주제인지 아니면 별개의 또 다른 주제인지를 확정하면 될듯 하다. 

  [정리, 묵상] 개들이나 행악하는 것, 몸을 상해하는 것(손할례당)은 다른 3가지 행위라기 보다는 경계해야 할 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이미지에서 행위로 구체화 되어과는 표현으로 보면 좋을듯 하다. 바울이 지적하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할례를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할례를 통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행위로 의를 자랑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대상을 말하는 듯 하다. 이들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복음을 훼손하고, 교회를 나뉘게 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을 삼가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진짜 할례파는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진짜 할례파라는 것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위해서 봉사하거나 사역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손할례당과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일하면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바울은 옥중에서 이 싸움을 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 때문에 속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의 일을 하는데 왜 내가 드러나야 하지? 왜 꼭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셔야 하지? 나는 잠시 필요할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인데 왜 도구인 내가 하나님께 나를 써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 더 좋은 도구가 있다면 기꺼이 그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이 맞을텐데.. 이 비밀을 바울은 옥중에서, 경쟁자와의 경쟁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1:18)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도 그와 같은 입장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교회는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했다. 사람을 자랑으로 삼고, 육체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언제나 하나님을 봐야지 하나님께서 지금 쓰고 있는 '도구'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도구는 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 한 마디로, 너희가 바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지금 뜨고 있는 그 사역자에게도 집착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해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아닌 성령으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이런 분별력이 중요하다. 반복해서 말하노니 중요하다) 

이렇게 정리해 본다면 3장 2-3절의 권면은 앞의 주제와 큰 맥락에서 같은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3절의 권면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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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25-30>(정리하기)

(바울이 디모데를 당장 보내기는 어려운 상황임을 설명한 후에)

1.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것에 대해서 설명한다.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설명]

  (1)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다.(형제와 같은 관계)

  (2)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자다.

  (3)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왔던 자다. (25절)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로 가기를 요청함]

  (1)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2)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에 빌립보 교회가 알았다는 것에 근심함(26절)

   -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에바드로디도와 바울을 긍휼히 여겨 회복시켜 주심으로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해 주셨다.(27절)


  [바울도 우선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것이 낫다 생각함]

  (1) 바울은 디모데보다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2) 빌립보 교회도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3) 바울이 가졌던 근심(에바브로디도가 병들므로 서로 걱정함)도 해결됨(28절)


2. (권면) 이런 이유들로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니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 그리고 존귀히 여기라(29절)

  1)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나 바울을 섬겼다. 

  2) 너희 빌립보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교회를 대신해서 바울을 돕고자 보냄받은 사람이기에)(30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에서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지만, 에바브로디도는 아직 충분히 인정받은 일군은 아니었던 것인가?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디모데를 보내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바울에게 인정된 자일뿐 아니라 빌립보 교회에서도 인정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에게 인정된 디모데를 보내서 서로의 형편을 알고 전하는 것이 매우 유리할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차선이었던듯 하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보냄을 받아 바울에게 온 사자이지만 아직 사역자로서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일꾼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첫 임무를 부여받고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제대로 섬기지도 못하고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빌립보 교회는 오히려 에바브로디도가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근심했던 것 같고,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병때문에 많이 위축되고 교회가 알고 있다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디모데 대신 에바브로디로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드로디도를 오해하지 않도록, 또 에바브로디도가 너무 낙심하지 않도록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신을 돕자가 병이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에바브로디도는 원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과 정성만큼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묵상] 디모데 같은 일꾼도 있다. 모든 검증이 끝난 일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일꾼도 있다.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 검증해가야 하는 일꾼 말이다. 모두가 디모데 같을 수는 없다.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검증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떻게보면 실패로 여겨질 수 있는 에바브로디도의 과제에 대해서 바울은 낮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 결과는 취약했지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태도를 봤고, 지금은 그 태도 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고 보았다. 

디모데를 만들고 싶다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그 수준에 맞는 적절한 격려와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2.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첫 사역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바울을 충분히 돕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바울의 근심(그가 병들었으므로)이 되기도 했다. 교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보낸 사역자의 실패(?)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묵상] 단순히 그 일의 결과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태도도 함께 봐야 하고 그의 노력과 희생도 함께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종합적인 검토가 함께 되어야 한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양한 측면을 교회는 평가해 보아야 한다.(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 반대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역자에 대한 평가는 더욱 다각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아니면 다른 사역의 장으로 가이드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디모데도 중요하지만 에바브로디도가 디모데가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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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2-18>(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 너희가 나 있을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정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한다. 구원의 현재성을 고려할 때 이는 구원을 바라는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늘 긴장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종말론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함을 말한다. 바울이 없을 때에라도(마치 주인이 잠시 떠났을 때 종의 태도가 그의 구원을 결정하듯) 성도는 늘 주인 앞에 있는 것처럼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복종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의 상태. 모든 것을 행해도 최종 결정권 주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1) (원리설명)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정리] 한 마다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 성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도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요청한다. 

  2) (권면) (그러니)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정리]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싶은 내용이다. 교회 안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원망은 투덜거리는 것이고 부당함에 대해서 원망하는 것을 말한다.(행 6:1, 벧전 4:9) 빌립보 교회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원망이 나왔고, 지지받았을 테니까) 또 시기(논쟁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의견이 나뉘었고, 견해차이로 인하 분파나 파당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 같다. 

   (1)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2)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3) 생명의 말씀을 밝혀

   (4)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5)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정리] 그러나 빌립보 교회 안에서 발생한 원망과 시비가 잘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자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의 순수성과 성도의 순전성이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지만 교회는 그 세상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교회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와 같이 원망과 시비로 가득하다면)

그렇다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운 바울의 수고와 헌신은 모두 헛되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우려한다. 빌립보 교회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바울의 수고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좀 있지 않겠는가 말하는 것이다.  


2. (바울의 소회)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정리] 만일 빌립보 교회를 위해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후회되거나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가치가 바울에게는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하며, 자신의 생명이 드려져도 전혀 후회없음을 말한다.(교회를 위한 자신의 죽음조차)

  (권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정리]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 교회(빌립보 교회)에 대한 가치를 알아서 교회를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원망과 시비가 생기겠지만 그러나 교회의 가치를 잊지말고 교회 자체를 혐오하거나 교회를 훼손하는 방향으로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것이고(우주적 교회), 바울이 목숨 걸고 세운 교회(지역교회)이기 때문이다.  


(질문하며 묵상하기)


1. 구절구절을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각 구절별로 [정리]를 해 놓았기 때문에 따로 질문하며 묵상하는 내용이 길 필요는 없을듯 하다. 

2.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원망'과 '시비'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교회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이끄는 사람들(리더십과 일반성도)의 불완전성에 있다. 따라서 지상 교회는 언제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3. 따라서 '원망'과 '시비' 거리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망'과 '시비'를 원천적으로 할 수 없는 교회가 지상에서는 위험한 교회가 되고 만다.(이단이나 폐쇄적인 공동체) 건강한 교회는 '원망'과 '시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교회를 세워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 교회가 원망과 시비를 극복하는 길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강한 인식이다. 종말론적 긴장감이다. '원망'과 '시비'를 지속하거나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원망'과 '시비'를 정리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함을 말한다.(개인의 견해와 취향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옳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도 시점을 고려하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5. 아직까지는 본문의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정도에서만 묵상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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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6.7.10)

 

제목: 마음이 뜨거워지다.(부활, 재림)

본문: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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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6. 1. 31)


제목: 축복의 공동체

본문: 시편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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