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김세빈


 <운수 좋은 날>은 예전에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읽은 지 오래되기도 했고 가볍게 읽어서 더 자세하고 깊게 읽고 싶어 다시 읽게 되었다. <운수 좋은 날>의 저자는 ‘현진건’이다. 그는 사실주의 작가로 치밀한 구성과 반전의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염상섭, 김동인과 함께 초기 사실주의 문학의 확립자로 위치를 굳혔다. 초기에는 주로 식민지 시대에 절망한 지식인들의 일상을 다뤘지만, <운수 좋은 날>을 이후로 주요인물이 노동자나 빈민으로 초점이 맞춰지면서 <운수 좋은 날>은 1920년대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다진 획기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운수 좋은 날>의 주요인물은 인력거꾼 ‘김첨지’로 몸 져 누워있는 아내와 젖먹이 아기가 있지만 돈이 없어 아내에게 약 한 첩 사주지 못한다. 운수 좋은 그날, 아내는 김첨지에게 오늘은 나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김첨지는 거칠게 말을 뱉으며 무시하고 인력거를 끌며 나간다. 겨울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웬일인지 손님이 끊이질 않고 지금껏 만져보지도 못한 큰돈을 만지게 되면서 불안한 마음을 떨치며 친구와 술집에 간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김첨지가 친구와 술을 마시며 호기를 부리다 아내의 죽음을 직감하며 눈물을 쏟은 부분이다.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버린 김첨지가 어리석고 원망스러웠지만, 1920년대 식민지였던 조선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니 김첨지 즉, 하층민 식민지 민중들의 삶이 공감되어 가장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먹고살기 위해 아내의 애원을 묵살하고 일하러 나가야 하는 김첨지의 속이 얼마나 안타깝고 절망스러울지 마치 내가 김첨지가 된 것처럼 김첨지의 상황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1920년대 문학이 바라본 식민지 조선은 가난과 병마, 죽음의 고통이 혼재되어있는 공간으로, 1920년대의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김첨지는 특수한 개인이 아닌 식민지 민중의 고난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쓰인 것 같다. 또한 <운수 좋은 날>에서 내리는 ‘겨울비’는 아내의 죽음을 예시하는 기능적 배경뿐만 아니라 김첨지(하위 식민지 계층)가 놓인 환경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작가 현진건은 제목을 ‘운수 좋은 날’이라는 반어를 통해 김첨지의 비극적 효과를 증폭시키며 치밀한 구성 속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그런지 정말 몰입되고 여운 남는 단편 소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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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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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6.2.14)

제목: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본문: 욥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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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이선교회 캠퍼스 리더훈련 중 저녁집회


본문: 시편 131:1-3

제목: 젖 뗀 아이 같은 성도


 *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 젖 뗀 아이의 상태(배움,성장)

 * 영적 긴장이 필요한 영역: 복음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이해,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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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 여러분께 설 인사를 드리며 간략한 보고를 드립니다.


올 사역을 준비하며 선교한국 등과 관련되어 특별사역모금을 기획하고, 올 1월에 더죠이(죠이 소식지) 안에 특별사역모금과 관련된 별지를 넣어 2700여명의 후원자 분들에게 발송해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소식지를 받아보신 분들 중에서 몇 몇 분들이 소리없이(?) 특별사역계좌로 후원을 보내주셨습니다.


2월 5일 날짜로 확인하니 9,630,000원이 모금되었습니다. 백만원을 후원해 주신 분이 6명, 그 외에도 50만원 30만원 20만원 12만원 10만원 5만원 만원 등 25명이 후원에 참여해 주시어 총 31명을 통해 모금된 액수가 그렇게 됩니다.


성도가 3명인 개척교회에서 50만원을 후원해 주시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사역 1/100" 이란 이름으로 30만원을 후원해주신 분, 해외에 계신 선교사, 70년대 동문, 중국에 계신 동문, 이제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 투병 중인 동문 그 외에도 많은 동문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출석하는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도 몇 몇 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제가 교회에서 설교 중에 한 번 이런 부분에 대해 기도제목을 말씀드렸는데 들으시고 참여해 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떤 동문은 한 때 저와 함께 간사로 사역했던 분인데, 큰 액수의 후원을 해주셨길래 겸사겸사 연락했더니 그간 빚진 마음이 컸는데, 이번 기회에 후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종 후원내역과 후원하신 분들의 성함을 확인하면서 큰 격려와 힘을 얻었습니다.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지, 마음이 없던 분들이 아니었구나... 죠이의 배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계셨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가 절로 나왔던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들어온 헌금을 해준 동문은 작년에 졸업한 동문으로 아직 취업이 되지 않은 상황으로 본인의 재정도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지를 보고 계속 생각했다며 5만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이런 소식들을 바로 그 현장에서 보고 듣게 되니 어찌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관련글 참고: http://hunmill.tistory.com/1155



그러나 은혜가 큰 만큼 대표로서의 '책임'도 더욱 크게 느낍니다. 큰 책임감을 가지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하게 됩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오고가는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가시는 모든 자리에서 죠이 스피릿이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죠이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 주 안에서 강건하시고 평안한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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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에서 “그런즉 우리도”까지


글: 김수억 대표


성도들로 하여금 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대다수 성도는 단연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뽑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선교를 위해 ‘지상 명령’으로 제시한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는 예수님의 선교적 명령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18절) 받으셨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파송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격려의 약속(20절)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제자로서 선교적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내적 능력에 대한 불완전성과 외적인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이런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는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예수님이 청년들을 파송하고 있고, 청년들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으니 그 약속만 믿을 수 있다면 청년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교한국 1988 대회부터 2010 대회까지 선교한국의 주제를 단순하게 정리해 보면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너희는 가라고 도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교한국 2016 대회 주제는 “그런즉 우리도”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문구를 따왔다.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백성들을 위해 수치를 당하셨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그런즉 우리도” 선교적 삶을 위해 예수님의 삶을 본받자는 내용이다. “그런즉 우리도”라는 구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의 배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권세와 그분의 함께하심에 대한 ‘격려’는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당한 수치’, ‘예수님이 당한 고난’만 있을 뿐이다. “그런즉 우리도”라는 이번 대회의 주제는 선교하려는 청년 대학생들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오히려 진지하게 묻는다. “자네, 정말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의 길을 가려나?”하고 말이다. 선교한국 2016 대회의 주제 구절은 선교사로의 도전이 아니라 제자다운 삶에 대한 도전에 가깝다.


선교한국 2010 대회의 주강사, 자크 니링기에(David Zac Niringiye, 우간다 성공회 소속) 주교는 당시 대회 주제 구절인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라는 선교적 명령을 강해하면서 대회 참가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선교사로 가기(Go)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로 와야(Come) 한다고 했던 것이다.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선교한국 2010 대회 이후 6년만에 선교한국 대회는 본격적으로 ‘제자도’와 긴밀한 주제가 되었다. 이런 흐름의 변화는 단순히 주제가 선교에서 제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적 명령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할 제자도에 대한 영역이 그동안 축소되거나 간과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과거 ‘동원’에만 치중함으로 ‘제자로서의 선교사’의 측면이 약화되었던 것이 결국 한국 교회 선교의 문제로 드러나고 있음을 반성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선교한국 대회의 흐름은 지난날 성장 중심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교묘히 닮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선교한국 2016 대회는 선교 동원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선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 제자로서의 삶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시대를 향한 선교한국 대회의 메시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런즉 우리도”의 메시지는 한국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외침이기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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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골짜기에서 만나는 샘

글: 김수억 대표


2016년 새해에 들어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15년 마지막 달입니다. 그러다 보니 앞 날을 말씀드리기 전에 지나간 날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2015년은 제가 죠이선교회 대표가 되고 처음 맞는 해였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일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죠이 간사로서는 누구못지 않게 익숙하지만, 죠이 대표로서는 초짜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현직에 있는 간사로서는 누구도 이 길을 가본 경험이 없기에 대표 역할을 수행하는 여정 속에서 겪어야 할 무게는 고스란히 저만의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공동체를 따듯하게해 보겠다고, 그간의 공동체적 숙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 보겠다던 의욕은 초짜의 섣부른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 시간이었습니다. 대표로서 더 지혜롭고 더 치밀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많은 부분 의욕을 잃지 않으면서도 때를 만들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고통 속에서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기가 죽어 있을 즈음에 시편 84편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6절)라는 말씀을요.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저는 많은 샘이른 비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제주에 살고 있는 동기 목사에게 뜸금없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죠이선교회 본부 주소를 알려달라고. 귤을 샀는데 제가 생각나서 죠이로 몇 박스를 보내 주겠다고 말입니다. 죠이와는 연관도 없고 제 처지와 낙심을 알 수도 없는 그 동기 목사의 문자에서 격려의 샘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오후에는 연차가 어린 간사 한 명이 제 방을 찾았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메모가 적힌 작은 엽서히트텍이었습니다. 생일날에 드렸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하다며, 그래도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며 15일이나 지난 제 생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따듯한 겨울 보내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고요. 정말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쯤 제 이메일로 온 한 후원자의 답신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가 2015년 11월말에 보낸 제 기도 편지 마지막 부분에 대표로서 추가적인 사역을 위해 3천만 원을 모금해야 한다고 기도 부탁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 편지를 보신 후원자(죠이어 목사님)께서 마음이 뜨거워졌다며 성도 두 분(전교인)과 함께 논의하여 50만 원의 후원금을 보내겠다는 이메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많은 샘이고 이른 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제가 얻은 것은 도 아니고, 히트텍도 아니고 50만 원도 아니었습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었고,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죠이선교회 대표로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담력이었습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골리앗을 상대할 수 있는 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자신의 힘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설명밖에 할 수 없는 작은 경험을 누적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은 다윗에게 많은 샘이 되기도 했을 것이고, 이른 비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의 누적이 골리앗 앞에 설 수 있는 담력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새해에는 많은 샘이른 비가 있음을 믿고 눈물 골짜기의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힘있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죠이선교회의 2016년 여정에 많은 샘이른 비가 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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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넌 도대체 누구냐?

글: 김수억 대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학’이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하실 것인가)를 아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그 본질을 강조할 때,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빌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上)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곤 한다.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에서 나온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성경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듯 하지만 하나님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 요나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받는 선지자다. 요나가 ‘모세오경’과 같은 당시 가장 핵심적인 ‘신학서적(?)’은 일찌감치 마스터했을 터, 신학적인 기본기는 충분했을 것이다. 게다가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더불어 그 지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까지도 분명하게 파악해 내는 능력이 있는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라는 말씀 하나만 듣고도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았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렇다. 요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자였다. 그러나 요나서는 흥미롭게도 하나님으로부터는 가장 엇나가는 인물이 요나임을 알려 준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심각한 죄인이라 할찌라도 ‘그 생명을 살리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죄에 대한 심판을 기본 법칙으로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만 있다면 그 기본 법칙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인간을 대하기 원하신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하와에 대해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창 3:20)라는 이름을 부여하심으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신다. 또한 유다의 죄로 인해 결국 유다라는 나무를 베어 버리기로 작정하셨으면서도, 그루터기는 남겨 놓으심으로 ‘생명의 지속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고전 15:45)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되고 있다. 

반면 요나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법칙에 갇힌 선지자였다. 심지어 요나는 하나님조차도 그 법칙 안에 가두고자 했다. 그 법칙을 넘어 ‘은혜를 베풀고, 자비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요나의 합리성이었다. 그 합리성의 결과는 ‘내 자신이 죽어서라도 니느웨를 죽여야 한다’는 ‘죽이는 합리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확신했던(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확신)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대척점(對蹠點)에 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드는 인물이 되고 만다(욘 4:10-11).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고, 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정죄를 받았다. 심지어는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 그들은 또 다른 요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도 요나는 존재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데는 발 빠르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작은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오늘의 요나인 것이다. 자신은 그와 같은 논리가 “합당하다”(욘 4:9, 개역한글)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은혜 아래 구속받은 백성들에게는 ‘바리새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 가고 신앙하는 우리 자신을 향해 묻는다. “넌, 요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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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복음적 삶’이다.

글: 김수억 대표


신약 성경에는 빌레몬서가 있다. 사실 있다지만 ‘없는 듯’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 서신 중 가장 적은 분량인 한 장이라 우연히라도 보기 힘든 책이기 때문이다. 종종 설교 본문이 빌레몬서일 경우 색인의 도움으로 찾을라치면, 영락없이 ‘빌레몬서’가 아닌 ‘빌립보서’가 나오고 만다. 빌레몬서의 약자가 ‘빌’이 아니라 ‘몬’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지만, 그도 이내 잊는다. 빌레몬서는 성경에서 ‘오래된 단역 배우’처럼 그 존재감이 약하다.

빌레몬서는 내용면에서도 그렇다. 보통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은 예수님의 생애나 교회의 확장,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가지는 복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등 교회를 위한 중요한 주제들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빌레몬서는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문제를 다룰 뿐이다. ‘바울이 빌레몬을 향해서 오네시모라는 종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빌레몬서의 내용이다. 매우 개별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내용인지라 빌레몬서가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 어색할 정도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찬찬히 읽다 보면, 빌레몬서의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잘못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바울의 권면 속에는 ‘대속’, ‘회복’, ‘환대’라는 굵직한 복음적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해 빚진 것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바울 자신이 대신 갚겠다는 것(18절, 대속)에 있어서나 오네시모를 마지못해 받아 주는 척 하지 말고 잘 받아 달라고 요청한 점(17절, 환대) 그리고 오네시모는 종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이제 주님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해 달라(16절, 회복)는 면에 있어서 그렇다. ‘대속’, ‘회복’, ‘환대’라는 복음의 진리가 바울의 개인적 태도를 다룬 빌레몬서에 완연하게 묻어나고 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오히려 빌레몬서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울의 복음적 삶이 온 우주의 복음적 진리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지극히 개별적 현상이 온 우주의 원리인 만유인력의 법칙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고 확대되었는가? 개별적 삶을 통해서 전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의 복음적 삶은 바울에게 복음을 심어 주었고, 바울의 복음적 태도는 빌레몬에게 복음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훗날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빌레몬의 복음적 삶은 오네시모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복음은 성도 개인의 복음적 삶을 모태 삼아 확장되었고, 교회는 종이라는 신분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 갔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제도 혹은 교리의 문제인가? 아니면 도덕과 윤리의 문제인가? 이런 것들은 세상에 합리성과 명분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감동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거대 담론이 배제된 개인화된 신앙이 문제인가? 앞에서 살펴본 관점으로 빌레몬서를 본다면 그것도 아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태도 속에 ‘우주적 복음’이 녹아 있고 그것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치듯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복음적 삶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룻과 보아스의 개인적 사랑과 신의 속에서 ‘다윗’이 나오고 ‘이스라엘 왕국’이 형성되며,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개별적 성도들의 ‘복음적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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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감을 넘어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려 내는 부활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다. 11장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방치(?)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위독한 것을 알고도 ‘이틀’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의도적으로 흘려버리셨기 때문이다(6절). 요한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통해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4절). 이것이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일차적인 메시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복음을 처음 대하는 1차 독자 입장에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어떻게 읽혔을까?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은 1세기 말엽 대략 주후 90년경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교회의 형편은 어땠을까? 교회는 로마의 직접적 박해와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는 ‘죽음의 위협’을 받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당시 교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나사로와 같지 않았을까? 지금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데, 곧 오실 것 같은 주님은 오시지 않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사로의 위독함을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무셨던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성도들의 위협에 대처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의 태도에 성도들은 불안해했을 것이고, 그중에 일부는 믿음까지 흔들렸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요한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언급하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25절)를 다시 한 번 의지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26절)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라고 성도들의 믿음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읽는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요한의 말씀 앞에서 다시 용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로마의 박해를 받지도 않고, 신앙이 있다고 해서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박해나 한국전쟁 중에서 공산당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 시대는 평안의 시대요, 풍요의 시대요, 자유의 시대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안정감을 빼앗기는 것’이다. ‘안정감’은 이 시대의 ‘생명’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목적도, 좋은 직장을 다니려는 근거도 ‘안정감’에 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줄 수 있는 안정감’이 우선이 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불안정감’이다. 안정감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 안정감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안정감’을 보장해 준다면 예수는 성도의 ‘신’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도들의 안정감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순간 예수는 더 이상 성도들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짓 ‘안정감’을 약속하는 ‘우상’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안정감’을 보장해 준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안정감을 깨기 위해서 온 분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 주님은 재물이 많은 청년에게 재물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요청하신다. 불안정감의 세계로 초대한 것이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 12:1)라고 말씀하신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불안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으로 오라 하신다. 이 시대는 ‘안정감’이 없다면 죽을 것 같은 시대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주님이 빨리 오셔서 지금 불안정한 나의 상태를 안정케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이틀’을 더 머무심으로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키시고,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신다. 왜? 주님과 함께한 ‘불안’ 속에 참된 신앙이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세상이 주는 허망한 ‘안정감’을 넘어 참된 평안이시기 때문이다.


불안정이 엄습한 시대, 그래서 안정감이 우상이 된 시대. 우리는 다시 한 번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안한 상태’를 견디고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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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에서 ‘표적’으로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만을 강조하려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을 언급하기 전과 그 기적이 마친 이후의 묘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요한이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오히려 여기에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고 언급하고 있다(요 6:2).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좇은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miraculous signs)’을 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 표적이란 아마도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과 같은 치유의 기적일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많은 무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찾는다(요 6:24).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miraculous signs)’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26절) 그를 임금 삼으려는 마음에서였다(15절). 아쉽게도 예수님은 표적(miraculous signs, 요 6:2, 26)을 보이셨으나, 무리는 ‘기적(miracle)’을 보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육으로 난 자인 자연인이 가지는 한계가 바로 이것이다. 영적인 것(표적)을 보고도 육적인 해석(기적)밖에는 해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무리 지어 예수님을 좇았지만, 예수님은 이내 난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로 이들을 돌려보내셨다.(요 6:66).


전도가 힘들어지는 현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뭔가 ‘화끈한 기적’을 보여 주시면 사람들이 여기에 굴복해서 교회로 찾아올 것이고 당연히 믿음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래서 믿은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내 곧 무능한 하나님, 변덕쟁이 하나님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고 ‘더 확실한 기적’을 제공하는 우상을 찾아 자신의 하나님을 삼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만으로는 무지한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기적이 지향하는 바 곧 표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빛을 보게 되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죠이선교회 사역은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떤 사역이 되어야 할까? ‘기적’을 자랑하는 단체가 아니라 ‘표적’으로서 “생명의 떡 되신 예수”를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죠이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요구한다. 아니 내 안에서부터 큰 함성으로 외치는 소리가있다. 죠이선교회가 한국 교회 안에서 ‘기적’이 되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 되어야 한다. 기적은 육을 지향하고 표적은 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한 것이다. 죠이 스피릿에서 예수님을 첫째로 둔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우선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죠이선교회의 모든 사역이 예수를 지향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죠이를 통해서 배출하는 죠이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참된 죠이어란 예수를 우선에 두는 죠이어이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지향하는 죠이어를 말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육의 생명을 거듭나게 하사 영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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