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신앙 속으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2장 13절 이후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나온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본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과격한 행동’으로 성전을 혼란케한 사건으로 예수님의 생애 중 특이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은 초입에 성전정화 사건을 다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격한 행동을 통해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도(메시지)를 엿볼수 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찾아오신 예수님’이라는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은 ‘빛이신 예수님이 어두움을 찾아오셨다’(1:5)는 선언으로 메시지의 포문을 열고 있다. 그 시각으로본다면 성전 정화사건은 ‘거룩하신 예수님이 세속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찾아오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때 예수님이 성전의 세속성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예수님은 절기를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을 봐왔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 장면이 이전과 달리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상할 것이 없을만큼 세속적으로 변해’버리고, ‘장사꾼들의 소굴’처럼 타락한 성전을 향해 일성을 발하신 것이다.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중대한 결단을 하기전 현충사를 찾아가는 정치인들처럼 예수님은 본격적 사역을 시작하면서 성전을 찾아갔고,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행동을 통해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고 있다. 비판을 받아 경각심을 얻고 오히려 새롭게 될 수 있다면 그 비판마져도 은혜라고 생각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비난과 질타는 있지만 내부적 반성과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한국 교회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한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세상의 질타와 비판에 대한 소리를 ‘사단의 계략’이라 치부하고 아예 귀를 닫고 자신의 신앙만을 곤고히 하려는 무리와 세상의 질타와 비판을 마치 ‘하나님의 진리’처럼 받아들여 제도적 신앙으로부터 이탈하는 무리로 말이다. 한 무리는 교회를 ‘무조건 지켜내야 할 대상’으로 보고, 한 무리는 교회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찾아오셨다. 그 빛은 이미지와 영으로서가 아니라 ‘실체’와 ‘몸’으로서 불순물로 가득한 이 땅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속’으로 가득하고, ‘장사꾼’으로 넘치는 성전 속으로 찾아 들어오셨다. 세속에 물든 무리들은 세속화된 성전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하나님과 거래하는 삶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갔다. 그러나 세속화된 성전과 타락한 제도적 종교를 거부했던 무리들은 세속화된 성전에서는 희망을 버리고 ‘광야’로 나갔다. 그러나 빛이신 우리 예수님은 ‘더럽혀져 장사꾼의 소굴이 된 성전’ 속으로 찾아오셨다. 왜일까? 


어떤 신앙인은 말한다. “당신은 아직도 교회에 머물러 있는가?” 이 말은 아직도 더럽혀진 교회에서 희망을 찾고, 신앙적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이다. 그 의도를 모르지 않기에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부끄러운 교회가 ‘나’이기에 나는 나를 버릴 수 없어서 여전히 그 세속적이고 타락한 교회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성전임을 후에 알았다.(요 2:21) 예수님은 부끄러운 성전에 동화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셨다. ‘그 안으로’ 들어가 새롭게 하려고 하셨다. 남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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