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주일낮예배 (2015.8.30)

본문: 욘 3:1-10

제목: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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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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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주일낮예배(2015.8.23)


본문: 욘 1:11-17

제목: 죽이는 논리 살리는 논리


 * 담임목사님 안식월로 주일낮설교 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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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주일낮설교(2015.8.9)


본문: 욘 1:1-10

제목: 말씀하시는 하나님


 * 담임목사님 안식월로 자리를 비우셔서 주일 낮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네요.(1-3부 예배인도. 다리가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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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4.7.20)


본문: 눅 18:9-17

제목: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_자기 의


 *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자는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의'가 없음으로 인해 애통해하고 하나님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자주 그 신앙의 토대 위에 '자기 의'를 쌓으려고 하는 경향을 가진다. 바리새인처럼. 그래서는 안된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의'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의'로 완성됨을 알고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할 일을 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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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른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내 보여주신 것.


1.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교회에 쓴 편지(2절)


2. 바울의 문제제기(6-7)

  1)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준 갈라디아 교인들아, 어찌 그리 빨리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몇 몇 사람들이 복음을 교란한 것에 영향을 받음.


3. 바울의 정답(8-10)

  1) 다른 복음은 없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나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과 심성에 잘 부합하는 내용의 것인듯 하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매우 빠르고 쉽게 그 가르침에 넘어간듯 하다. 



----------[부연설명]

4. 바울이 사람(사도)의 영향을 받은 자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들은자다.(11)


  1) 내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이다.(12)

  2)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유대의 전통에 강력하게 미친자로서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까지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오히려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배운 것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서의 역할만 했다.13-14)


  3) 그런 나를,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불러주시고,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시려고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직통. 16절)

  4) 또 내가 예수를 만나고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왔다.(17절. 즉 사도의 영향을 받은 것도 없다)

  5) 그 후 3년 뒤에 게바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에 왔지만, 주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보지 못했고. 그것도 15일 밖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고 거짓말이 아니다.(18-20절)

  6) 그 뒤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그래서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다.(21-22절) 다만 바울은 소문으로만 전해졌는데, 그것도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24절)




[2장] 거짓 선지자의 요구 / 이방사역을 사도들로부터 인정받은 바울 / 오히려 사도인 게바가 그릇된 행동을 행함 / 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15-21절)


1. 14년이 지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계시를 따라 간 것인데, 그들에게 이방 사람에게 전한 복음을 설명하고 특별히 유명한 사람(사도들?)들에게도 따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1-3)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우리의 권위가 낮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그 동안의 이방인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디도에 대해서 <할례>에 대한 요구를 받지 않았다.


2. 그런데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이 디도의 할례를 강요하였다.(디도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고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몰래 끼어들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5절) _ 할례를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거짓 복음을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기 때문.


3. 이 때에 유명하다는 사람(사도들)들도 바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다. (7-8절) 교회의 기둥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역은 인정해 주었다.(9절) 다만 한가지 요구한 것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 자신도 열심히 해오고 있던 것이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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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복음(할례 없이도 의롭게 됨)을 유대인 사도들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이렇듯 바울의 복음은 유대 사도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것임을 지금까지 강조했다.



4. 바울이 오히려 게바를 나무란 사건(11-14)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아마도 유대인일듯)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위선을 만들었고 바울의 동력자였던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은 게바의 잘못을 모든 사람 앞에서 지적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처럼 되라고 강요합니까?"


  * 더 나아가 바울은 유대 사도 중에 기둥같은 게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복음을 왜곡시키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됨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한 사건을 언급한다. 즉 유대 사도들도 유대인의 인간적인 전통으로 인해서 복음을 훼손시키는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


5. 바울이 자신의 믿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 함(15-21)_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1)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죄인인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것도 의롭게 될 수 없다. 


  2) 이런 복음으로 우리가 과거의 것(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헐어버렸는데, 지금와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율법 앞에서는 죽었다.(율법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 그 방법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기 위함이다.)


  3)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의를 의지하는 나만이 살아있다.(율법을 의지했던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나만 살았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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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성도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 / 이 언약이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는 없다. /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_ 그리스도가 오기 전 임시적 역할 /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을 이유가 없다.


1.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질문과 책망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1)


  2)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2) 여러분은 왜 어리석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까?(3)


2.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훈계과 가르침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7)

  2)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아시고,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셨다.(8절)


  3)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 아래 있다.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5) 이렇게 하심은 아브라함에게서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으로 시작한 성도들이 율법으로 마치려 하자 이에 대한 책망과 바른 복음의 설명을 한다. 성도들은 믿음을 따라 의가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롬 4장) 이 일은 이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때 모든 민족을 말씀하심으로 이방인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율법으로 사람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이방 사람들에게도 미치게 되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이다.


3. 추가적인 설명: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430년 뒤에 나온 율법이 그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1) 보통 한 번 언약을 맺으면 아무것도 그것을 무효화할 수 없다.(15)

  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했는데, 그 자손은 '자손들'이 아니다. 단수로 '자손'과 언약을 맺은 것인데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다.(16) 

  3)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을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다.(율법을 통해 주신 것이 아니다. 18절)


  4)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인가?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 전까지 죄를 밝히려고 주신 것이다. (19)


   ----[부연설명] 율법의 역할

   (1)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로움이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것이다.(21-22)

   (2)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다.(22)

   (3)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에 갇혀 있었는데, 율법은 우리의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23-24)

   (4)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개인교사 밑에 있지 않는다.(25)


  * 율법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과 맺은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율법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먼저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가 오기전까지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있었다.(율법이 우리의 개인교사였으므로) 그러자 지금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도들의 신분]

   (5)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그것에 차이가 없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26-29)

   (6)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이다.


  * 따라서 더 이상 율법에 매여있고, 그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4장]

율법은 임시적인 역할만 한다 / 때가 되면 종이 아닌 자녀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체적 문제,할례, 절기.../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각오함 / 하갈과 사라처럼 종이 주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을 내쫓으라.


1.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1) 어릴적에는 주인의 아들이지만, 종과 다름없이 누군가의 다스림과 관리를 받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적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서 종노릇 했다.(율법 아래에 있었다. 1-3)


2.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놓이게 함.(4)

  -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5)

  -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시어 우리로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심(6)

  -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권면]


1.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 아닌 것에게 종노릇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는데 어찌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왜 다시 종노릇하려 합니까?(8-9)


  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습니까?(10절) 그것은 내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11)


  *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할례>의 문제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였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할례와 날과 달의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함]


  2)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바울의 육체가 병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따듯하게 영접하여 주었다. 전에는 이들이 자기의 눈을 빼서라도 바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진심어린 애정을 표현했다. (13-15)


  3)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자(즉 이들이 좋아해서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강조하자) 이들이 바울에게 원수같이 대했던 것이다.(16절)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바울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17) 

  4)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19)

  5)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 이런 문제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중 다수가 바울에게 대해서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전에는 눈이라도 빼서 줄 것처럼 바울에게 애정을 가졌던 교회 였는데, 바울이 이들의 잘못됨을 지적하자 바울에게 반감을 품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바울은 많이 당황스러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번 해야함을 각오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4:13-20)

 



2. 여전히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적 비유]

  1)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에게서 육신을 따라 났고 다른 하나는 본처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의 자녀들이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21-28)


  2)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하다.(29)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유업을 함께 받을 자가 아닙니다.(교회 안에서 다시 율법의 종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리고 말하는 것이다.30절)


  3) 여러분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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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배경/역사/내용 정리]


1. 바울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했으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빠르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쓴 글이다. (1:6)

2.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갈라디아 교회에서 생각처럼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유대 사도들에 비해서 열등한 사역자라는 피드백이 돌아온 것 같다.(4:13-20)

3.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바울은 적지 않게 당황한듯 하다.(4:20) 그러나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한다.(4:19)

4.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유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고, 그 이후에도 유대의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배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조차 나를 잘 모른다. 다만 교회를 피박하던 자가 변화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1:11-24)

5. 거짓 신도들(할례를 강조하는)로 인해 위협을 받았지만(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라) 바울은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명한 사도 야고보, 게바, 요한은 이것을 인정했고, 인정하는 의미의 악수도 했다. 그리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역(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임을 인정해 주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부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2:1-10)

6. 사실 바울은 게바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책망까지 한 적이 있다. 게바가 유대인을 의식해서 가식적인 행동을 했고 그것이 교회에 큰 영향(심지어 바나바까지 따라하게 됨)을 받게 되었다.(2:11-14)


[복음의 내용]

7.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함(2:15-21)

8. 율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임을 잊지 말라.(성령을 인치심, 구약의 할례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함) 

   - 유대인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할례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율법과 믿음 논쟁에서 그 결과를 성령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침이 유업(기업)의 보장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복을 미리 아시고 이제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그 유업을 얻게 된 것이다. 언약이 먼저이다. 나중 온 율법이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자녀(하갈)가 되지 말고, 자유자의 자녀(사라)가 되라.(3:15-29) 율법은 어린 아이를 위해(종과 같은 상태) 있지만, 커서는 아들이 된다. 


  * 왜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가? 왜 다시 종노릇하는가?(4:8-11)



[5장]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된 자유로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할례에 매이지 말라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는 사랑을 향해 살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 


1. [핵심 메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1)


  [논리] 

  1) 할례를 받아들이면,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2.3)

  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에게서는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떨어진다.(4)

  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5)

   - 사실, 할례를 받는 것, 안 받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2. [권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 달려왔지만, 여러분을 진리에서 왜곡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8)


  1) 거짓된 진리는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심판받는다.(9)

  2) 만약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했다면, 내가 왜 아직도 박혜를 받겠는가?(11)

    - 할례를 가지고 선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체에서 잘라버리라. 


  3)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성도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1)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13)

   (2)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다 들어있다. (14)

   (3) 그런데 네가 서로 물고 먹으면 둘다 망하는 것이다. (15)



 * 그런데 이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네 육체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자유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얻은 자유로 육체의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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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따르는 삶]

   (1)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16)

   (2)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18)

   (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행실은 분명하다. 음행, 더러움, 방탕,.. ..(19-21)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21)

   (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와 친절, 선함과 신실, 온유, 절제...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는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음

   (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25)



 * 복음 안에서 주신 자유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쫓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자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을 쫓는 자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6장] 겸손히 자기의 할 일을 하고 / 할 수 있으면 남의 짐을 져주라 / 사람은 심은대로 거둔다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기회있는대로 선을 행하라 / 할례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 /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권면] 

1. 어떤 교인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거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피라.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1절)


2.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내가 의로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으려함/비판)를 가진자가 타인의 짐을 져주라.


3. 각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을 성취한 것처럼 생각지 말라.(3-4)


4.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 (5)


5.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6)


6.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7)

   -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8)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넘어지지 말자. 때가 이루면 거둘 것이다. (9)


   -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10)



[전체 정리]


1.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말합니다.(11)


2. 육체의 겉 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그들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12)


3. 할례받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13)


4.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14절)


5.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15)


6. 이제부터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있다.(17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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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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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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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께서 말씀하심: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스라엘의 답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여호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이스라엘을 택하심)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다. 

에돔이 무너뜨림을 당해도 황폐된 곳을 다시 쌓겠다고 하나, 나는 헐 것이다.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할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은 그 특별한 사랑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다. 에돔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셔서 그들이 회복하려고 해도 그들을 헐어 버리시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치시고 징계하셨지만, 다시 세우고 회복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밖에서는 크다 인정을 받고 경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사랑하여 공들인 자기 백성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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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1)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는데 

  2) 내가 너희의 아버지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없고, 네가 너희의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없다. 멸시하였다. 

  3) 너희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는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한다.

  4) 너희가 눈 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5) 너희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도 이와 같이 행하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는가?

  6) 오히려 내 제단이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누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온 땅에,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이들이 드리는 제사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거룩하지 못한 떡과 온전하지 못한 제물을 가져오면서도 문제 의식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이방 세계에서는 인정을 받고, 오히려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하기 위해서 오지만,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소홀이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한다. 아버지이고 주인이데 공경함도 두려워함도 없는 자기 백성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한탄하시며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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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너희들은 말한다. 


  1)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다. 

  2)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가 하며 코웃음치고는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다. 

  3)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서 받겠는가?

  4) 짐승 중에 흠 있는 것으로 내게 속여서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5)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단이 더러워졌다고 말하고, 제물을 드리는 기준이 너무 번거롭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봉헌물을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이런 대우에 낙심하신다. 그렇게 많은 기다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방자히 행동하는 이들에게 실망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큰 임금, 이방인들이 두려워하는 분이 되었으나 그의 자녀인 이스라엘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묵상 한 모금]


1. 구약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과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하게 드러나셨다. 바벨론 포로 이후 고레스 칙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한할 수 있게 되고, 성전과 성벽을 제건하면서 모든 제국의 왕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하나님으로 위상이 입증되게 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낳으시고 사랑과 인내와 헌신으로 키우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른다. 동물도 주인을 알아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름으로만 부르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방자히 행한다. 이들의 이런 태도에 하나님은 말라기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들춰내신다.


2. 말 1장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결별할 수 밖에 없으셨는지에 대해 쓴 것 같다. 말라기 이후 400년간의 침묵이 있기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고발하신다고 할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런 수모와 대우를 받고도 계속해서 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 같다.


3.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인내하심이 크고 인자와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지, 마냥 착해빠진 분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자한 분이라고 해서 쉬운 분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쉬운 상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용납하심이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나 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하심이 그렇게 평가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성전 문을 닫으시려 한다. 외부에 의해서 파괴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영업을 정지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왜곡하는 경향을 가진다. 은혜가 풍성한 것을 쉬운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은혜를 왜곡하는 것으로 금새 나타난다. 은혜를 베푼 사람을 우습게 알거나, 왜 또 그런 은혜를 주지 않느냐고 따진다. 은혜를 강요하고 은혜를 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마치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요구한다. 이 정도되면 이제 하나님은 알라딘의 램프 요정이 되고만다. 이런 왜곡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은혜를 거두고, 관계를 접는다... 은혜가 이렇게 되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늘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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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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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의 또다른 단언적 명제는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다. 이 표현은 보통 <전도>할 때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다. 성도가 복음 전하는 행위가 물론 부끄러워서는 아니되겠으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좀 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기질과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이란,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지리산의 천왕봉 정상을 1시간 만에 오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했으나, 정상 근처도 못가보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때, 이것을 부끄럽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는 그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고 자기의 가진 것으로 준공하기까지 족할 것인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계산이 없이 덤벼들었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는 자가 다 비웃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온다.(28-30)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시작은 했으나,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을 시작한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만다. 


또한 우리가 의지한 것이 우리가 목표한 곳까지 온전하게 이르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입시학원에서 월 천 만원씩 내면 실력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보장하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하자. 그 만큼 그 학원의 노하우와 강사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 하겠다. 학부모는 학원비가 부담스럽지만 자녀를 일류 대학에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리해서 학원을 등록시키고 그 학원에서 지도하는대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일류가 아니라 이류대학에 입하게 된 것이다. 학원의 노하우와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나, 그 자녀의 수준이 너무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학원을 믿고 월 천만원씩을 들여 공부시켰으나, 부모의 기대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 그 학원을 믿고 의지해서 자신의 자녀를 맡긴 부모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나를 의지했는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부끄럽게 되고,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대(믿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의지했다. 율법을 따르고 의지하면 반드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고 말았다. 율법을 의지하며 쫓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어서 중간에 결국 낙오하고 만 것이다.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전 인생을 걸고 율법을 쫓아 살아왔던 바리새인들 조차도 우리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민끝에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3장) 결국 <율법>을 철저하게 의지한 삶 조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할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고자하는 그 복음은 어떤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명의 예외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절) 그것이 지금 바울이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함으로 자신의 확신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1-13)



<율법>이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믿음/은혜>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가운데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기대를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열심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갈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의지할 것인가? 이 땅의 교육과 학원 시스템을 의지할 것인가? 나의 직장을 의지할 것인가? 은행에 맡겨진 돈을 의지할 것인가? 부동산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의지할 것인가? 


나라마져 부도가 나고 파산에 이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 땅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단언컨데 없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 가운데 표류하며 살아갈 것인가? 과연 그것은 가능할 것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 보장할 수 있는가?



바울은 복음을 접하고 깨닫고 나서,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는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복음> 말고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복음>을 전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신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을 담고 있길래, 율법을 의지해서 살아가던 바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다음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조금씩 다루어 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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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

저 같은, 목회자도 명절에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겠네요. 
하나님의 호의(은혜)가 계속되는 것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신앙은 재앙이되니까요..

웹툰 <쌉니다 천리마마트 2부48화> 김병년 목사님께서 링크걸어주신 것.

인상적 문구, 캡쳐해서 올립니다.(저작권 문제있으려나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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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영상이네요. 구도자 박진영.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넘지 못한 상황(자신이 넘을 수 있는 문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이지만, 곧 누군가 그 문을 넘어와 인도하시리라 기대합니다. 구원해 달라고 부르고 있으니까요...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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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8편] 나의 죄는 나의 머리에 넘쳐서 감당할 수 없는 짐같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책망하심은 너무 강력하여 내 살과 뼈가 성한 곳이 없고, 내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질려 떠나고 내 원수들은 나를 넘어뜨리고자 음모를 꾀하니...누구를 의지할 수 있으랴! 

나의 죄를 생각한다면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찾을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구원하소서!" 저는 죄인이지만,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멘]



[정리]


1. 주의 노하심 너무 심하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1절.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절.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3절)



2. 나의 죄가 너무 크고 심합니다. 


4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5절)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6절)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7절)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8절)


3.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를 떠났습니다. 나의 대적자는 음모를 꾸밉니다. 


11절.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절.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13절.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4.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21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정리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커서 힘들다고 호소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괜한 것은 아니다. 내가 지은 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죄가 내 머리에 차고 넘친다고 했으니 내 죄에 대한 징계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할 수 있다. 내 가까운 자가 모두 나를 떠났고, 나를 해하려고 하는 대적자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음모를 꾸미니, 나는 아무런 대책을 세울 능력도 없고 그들을 반박할 힘도 없다. 


내 죄악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죄 지은 중에 일어난 일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 큰 것같고 나의 적은 더욱 강력한 것 같은데 나를 도와줄 친구들마져 모두 떠나 버리니 나는 도움을 요청할데가 없다.


이런 처지에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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