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



3. 복음의 내용은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리가 쉽게 가지는 오해 중에 하나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이 5분 안에 설명이 가능한 ‘소책자’ 전도지 안에 소개된 것이 전부일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은 복음의 내용이란 대단하다. 그 웅장한 내용을 5분 안에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화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한 것이기도하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방대한 분량의 글이 필요했고, 수천년간의 역사가 필요하기도 했다는 것에 있어서도 그렇다.


복음이란 짧게는 5분 안으로 그 내용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배우고 알아가도 다 이해하고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풍요로운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전 15:1)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전에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전 15:1 ...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그것은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고린도교회가 복음을 굳게 지키어서 헛된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전 15:2) 이 말은 복음의 내용은 한 두 번 전해서 될만큼 그리 간단한 내용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서 볼 때, 이미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구두로 전하여 세운 교회들이지만 다시 편지를 써서 그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복음적 대답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전하는 사람의 불완전함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충분히 오해될 수 있고 왜곡될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복음은 언제든지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부분에서부터 다시 보충 설명을 해 가면서 복음의 내용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복음이란 단순한 내용의 전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복음의 내용을 토대로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복음을 세상의 가치로 전환시키기도 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도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적으로 살도록 촉구하고 자극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러하듯이 복음은 그 내용의 전달에서 뿐 아니라 그 복음의 효과를 위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된다. 즉 청중의 상황에 따라서 생각보다 다양한 옷을 입으면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동적인 복음은 하나의 ‘정형화된 내용’이라기 보다는, 복음의 굵직한 내용에 대해서는 변형될 수 없으나 듣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게 되기도 한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


신학교에서 배우는 ‘구원론’ 책을 보면, 구원의 여정에 대해서 나오고 그 과정 중에 ‘회개’라는 과정이 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알아서 그 자리에서 돌이키게 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인데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회개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아직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도 요한 뿐 아니라 예수님도 천국으로의 초대 전에 ‘회개’를 요청하셨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필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대상을 향해서 ‘회개’를 공개적으로 요구하셨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은 오히려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 ‘회개’에 대한 요청없이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들이 회개했다는 언급과 표현이 없음에도 주님은 그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보셨고 만져주셨다. 그리고 구원을 선포해 주셨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과정에 대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소개하거나 요청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회개’가 없는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란 내가 공개적으로 말로 고백해야 하는 형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란 그 사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자와 병든자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 이미 ‘회개’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추가적으로 ‘회개’를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삶의 형편을 통해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라는 공개적인 요청없이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론에서 말하는 공개적인 ‘회개’란 절차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들의 심령의 가난함을 보시고 이들을 구원하셨을 뿐, ‘회개’를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혹은 자기 의와 자랑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다르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서는 언제든지 ‘회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로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처럼 복음의 내용이란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전해야 할 내용까지도 변경이 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복음의 내용이란, 간단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큰 맥락에 있어서는 같겠지만,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중간의 어떤 한 두 부분들은 그 때 그 때 달라지게 된다. 이것은 곧 복음이 매우 개별적이고 복잡성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를 통해서 본 복음(막 10:17-22)


재물이 많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진지하게 물었다.(달려와 꿇어 앉아 예수님께 물었던 것을 보면 사뭇 진지한 고민 속에서 예수를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테니 가서 계명을 지키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주셨다. 그러나 그 부자는 그와 같은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던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자는 그것 외에 혹은 그것 이상으로 ‘영생’을 더욱 확고하게 할만한 것이 무엇이 더 있는지 알고싶은 열심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진정성을 보셨는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생을 위한 교훈을 하나 주신다. 그것은 ‘그 부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요청하셨다. 그러자 이 부자의 진 면목이 드러났다. 그는 재산이 많은 고로 재물을 다 팔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고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선뜻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한채 고민하며 돌아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신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시고 간절히 들어오기를 원하시나(벧후 3:9),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오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재산이 많은 부자라도 마찬가지다. 부자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컸던 사람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기울일수는 있어도,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불편하겠지만, 그 사람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들춰내신다. 이 부자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이 부자를 향해서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를 요청하지 않으셨다. 재물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 부자가 돌이켜야 할 회심은 도덕적 부분에서의 깨끗함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설사 이 부자가 회개를 한다고 고백한다고 한들 그 회개는 표면적 회개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자가 정말 회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물질)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회개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점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는 매우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이다. 그는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도 충실하게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경건해지길 원했고, 더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는 종교적인 열심도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율법과 종교성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이었다면, 이 사람은 구원에 충분히 이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마 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착각에 빠져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요구에 대한 이 부자의 선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 복음은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종교적 열심이 확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더불어 복음은 우리를 시민으로 부르는 것이지, 천국행 티켓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