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3장] 거짓 선지자들은 서슴지 않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했다고, 내가 하나님과 무척 가깝다고 그리고 매우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는 말씀을 들었다고... 그들은 너무나 확신하여 타인을 현혹한다.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열정적인 종교인을 주의하라.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1. 하나님의 양떼들을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말씀하신다.(화가 있도다.)

  1)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않았다. 그 악행에 너희를 보응하리라.

  2) 내가 그 몰려갔던 양 떼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번성하리라.

  3) 내가 그들을 위하여 목자들을 세우리니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지 않으리라. 

  4)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할 것.

  5)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않고,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 땅에 살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대해서 말씀하시다.

  1)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하다. 여호와의 집에서도 그들의 악함이 발견된다. 그래서 그들은 우둔하게 되었고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었다. 그들은 엎드러진다. 

  2)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우둔함: 바알을 의지하여 예언하고 이스라엘로 그릇되게 한다. 

  3)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가증함:

   (1)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사람으로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한즉, 그들은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쑥을 먹이고,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라. 

  4) 따라서 너희들은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1) 그들은 헛된 것을 말하고,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길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들었는가!

   (3)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끝 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4) 이 선지자는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 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다.(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선지자들)

  5) 하나님은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1) 누가 자신을 숨기려고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않느냐!

   (2) 그들이 내 이름으로 꿈을 꾸었다고 하나, 그것은 단지 그들의 꿈에 불과하다. 내 말을 받은 사람은 성실함으로 내 말을 전하라. 어찌 겨가 알곡과 같겠느냐?

   (3) 하나님은 거짓 꿈을 예언하고 거짓과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을 방망이로 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3. 여호와 하나님의 엄중한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1) 이 백성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네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거든,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를 버리리라고 말하라. 

  2) 그들이 엄중한 여호와의 말씀을 묻는 대로 그들에게 엄중하게 행하시겠다고 말씀하는 듯.

  3) 여호와께서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려 내가 너희 조상과 너희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풀어보자]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이들은 목동이 아니라 유다를 이끄는 지도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돌보지 않아 흩어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자기 백성들은 흩어진 곳에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고, 다시 목자들을 세워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전 장에서는 다윗의 왕 위가 여호야긴 왕으로 마치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으로 유명한 하나님이 아니라, 출바벨론으로 더 유명한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향해서도 말씀하신다. 사마리아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섬기며 이스라엘로 그릇되게 하였고,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다. 결국 그들의 타락을 방조한 것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언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꾸었다는 꿈도 믿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찌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했으며 마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처럼 잘 안다고 말할수 있느냐? 하나님은 보내지 않는 선지자들의 거짓을 책망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묻는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그래서 하나님은 답하신다. 그들이 엄중한 메시지를 물었으니, 내가 엄중하게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조상들과 너희들에게 준 성읍을 하나님 앞에서 버려서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깨닫게 되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묵상]


1. 출애굽의 하나님에서 출바벨론의 하나님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있어서 구원의 하나님의 출애굽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흩어져 있던 자들을 북방에서 불러모으는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측면에서는 출애굽과 유사하다 하겠으나, 이번에는 전역으로 흩어져있는 백성들을 다시 한 곳으로 불러 모은다는 측면에서는 전과 다른 구원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보면 두 번의 구원이 있다. 하나는 출애굽, 다른 하나는 출바벨론... 이것은 구원 사건이지만,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아니다. 구원의 한 모형인 것이다. 참된 구원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가 왕이 되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지혜로 다스릴 것이다. 그것이 참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의를 이루셨으며, 정의와 공의를 성취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 모든 기적같은 구원의 종착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선지자라는 사람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단은 오늘날에만 번성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유다의 역사 속에서도 이단과 같은 미혹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있어 왔다. 이 당시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자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회의에도 참석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했다. 때로 이들은 꿈이라는 신비로운 방식을 빌어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정색하신다. 이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들의 꿈이라는 것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회의에 들어왔으며, 하나님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근거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신비한 방식으로 현혹하여 그릇된 평화를 전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라는 말에 속으면 안된다.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다는 말에도 속으면 안된다. 신학을 했다는 말에도 전도사나 목사라는 말에도 속으면 안된다. 그들의 직함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을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력을 상실하면 결국 우리는 브랜드나 직함에 속게 된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절히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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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4장] 선지서를 읽을 때 우리가 당황하게 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것이지요. 죽일듯이 달려들면서도, 끊임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말씀하면서도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것 같을 때, 성경의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의 죄 앞에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밖에 없는 복잡한 심정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자식을 키워본 분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은 복잡한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1.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 여호와

  1)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2)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라.

  3)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소결론]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끌자가 없으리라.


2. 이스라엘을 명망하게 하는 자가 나아오리라.

  1)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2)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않음.

  3)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3. 백성에게 단지 멸망을 주기 위한 심판이 온다.

  1)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오는데, 키질하거나 정결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기 위함이다. 

  2)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18절)

  [소결론]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4. 선지자의 탄식

  1) 선지자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었기에 그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 한다. 

  2) 자기 백성이 확실하게 멸망하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계속 듣는 심정이 고통스럽다.

  3) 그런데 이 백성은 미련한 자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 


5.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될 것을 보이심. 따라서 현재의 화려함은 헛될 것이다. 

  1) 선지자는 전쟁의 폐허가 되어 완전히 초토화된 땅을 환상으로 본다. 

  2) 하나님이 이미 말하고 정하셨으니 작정하고 후회하지 아니하셨은즉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3) 그럼에도 소망을 주심은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심(27절)

  4) 지금의 화려함과 넉넉함은 착각이다. 

   (1)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 화장이 헛되리라.

   (2) 네가 초산하는 자의 고통 같은 소리를 내며,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_내 방식으로 정리]


예레미야 4장은 선지서들을 볼 때, 우리가 혼란스러운 전형적인 본문이다. 선지자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거듭 강조하면서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요청이 함께 이루어지는 메시지이기에 독자는 좀 혼란스럽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처음에는 여호와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강력한 요청을 한다. 그러나 곧 이어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불어 심판하게 될 것인데, 이 작업은 키질이나 정결케 하는 작업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연당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심판하는 과정임을 분명히 한다. 북방에서 큰 재난과 전쟁이 올 것이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돌이키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그 날은 왕과 지도자들이 낙심하게 되고, 제사장들도 놀래고 선지자들도 놀라게 된다. 경고인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멸망하게 되자. 놀라고 당황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 말한다. 선지자는 이모든 미래적 멸망에 대한 경고를 듣고 있으면서도 이들 돌이킬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들은 미련한 자고 이들은 악한 자라 악을 행하기에는 빠르나 선을 행하기에는 미련하다. 결국 이 땅은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기에 미래를 낙관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착각이다. 곧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죽음의 고통을 호소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요청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들 전부는 진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 진멸에서 살아남은 자를 위한 회복, 돌아옴을 요청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회복이 아니다. 그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주시는 기회며 깨달음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_ 내용의 흐름을 따른 설교의 대지 형식으로 작성함.


1. 이제 이스라엘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이 확정된 것이다. 

  1) 이는 너희들을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다.(11절)

  2)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12절)


2. 현재 자신을 꾸미고 단장할 수 있는 화려한 시대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곧 멸망은 온다.(30,31절)


3. 왜냐하면 너희들은 악하기 때문이다. 

  1)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심판과 멸망)을 부르게 했다.(18절)

  2) 너희들은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22절)

  3)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한다. (심판하는 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할 것이다.(28절)


4. 그러나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27절)

  1) 심판당해 멸망하고 황폐화 되겠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5. 이스라엘아 돌아오려거든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1절)

  1) 살아남은 자들 중에 너희들은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2)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라. 할례를 해도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 

  3) 살아남은 너희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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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중립적 상태에서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구원이란 기근, 종된 삶,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애굽땅에서 종 되었더니...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다.

따라서 구원이란 말은 안식으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없다는 것은 안식이 없는 삶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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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_느헤미야_에스더를 마치고 다시 원래 나가던 진도에 맞춰 벧전으로 이동하여 옵니다. 설화체에서 강화체로 옮겨와서 모드 변경에 잠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곧 좋아지리라 봅니다.

[정리1. 본문을 정리: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되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를 따라 정리하도록 합니다. 서신서 중에는 논리적 이야기가 종종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고, 어떤 것은 논리적 연관성을 우리가 잘 이해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런 것이 정리되도록 합니다. 가장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시간인듯 합니다. 강화체에서는 말이죠^^]

1. 너희들은 흩어진 나그네이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3-12)

  1)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2)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셨다.(이것을 너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셨다)

  3)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

    (1) 그래서 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시험을 받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2) 왜? 너희의 믿음의 확실함이 순금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주님오실 때 존귀와영광을 받게 함)

    (3) 너희들은 주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 기뻐하니.. 구원의 증거다.

    (4) 이 구원은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펴서, 누구와 때를 알도록 했다.

    (5) 이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 전도자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도 살펴 보기를 원할 만큼 귀한 것이다.

 

3. 위와 같은 은헤와 복을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13-25)

  1)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13)

  2) 철이 들면, 철이 없던 시절의 행위를 버리고 행실을 바르게 함같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

  3)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니,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4) 그래서 우리 영혼이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1) 우리의 구속이 금이나 은처럼 없어질 헛된 행위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그래서...

    (2) 우리의 거듭남이 썩어질 것이 아닌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됨.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너희들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 말씀이다.

 

[정리2. 위에서 정리한 것은 핵심 뼈대만 정리합니다. 그래서 뭘 이야기 하려고 하시는데요. 요점만 간단히 핵심만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1.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일깨움

  1) 흩어진 나그네

  2) 삼위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

2.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

  1) 주님의 부활이 산소망을 줌

 2) 영원한 유업을 하늘에 간직

 3) 말세에 나타날 구원을 얻기 위해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

  4) 그러니 지금 잠시 받는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 너희들은 믿음에 확실한자다.

3.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환경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구원의 확실성을 가지고)

  1) 소망을 갖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

  2)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

  3)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4)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베드로 전서의 독자가 환난가운데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쓴 서신이다.

  삶의 현실에서 무력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택함받은 자라는 영적 측면을 확인시켜주고, 또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영적이며 미래적 보상에 대한 약속을 강조하고 재확신 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적 진리의 토대위에 권면하고 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나그네라고 막살지 말고 마음가짐을 똑바로 하고 근신하라고 한다. 또한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긴장하며 살라고 하신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든 행실에 거룩하기를 힘쓰도록 요청한다. 형제들과 뜨겁게 사랑하도록 요청한다.

  이와 같은 요청은 나그네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요청이 아니다. 나그네라는 정체성 자체가 이 땅에 기반을 두지 않고, 둘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원한 거주민보다도 더 거주민답게 살라고 요청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성도는 이 땅의 시민권이 아닌,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이 땅에 영구적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처럼(집착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성실과 정직과 도덕적 깨끗함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신다. 이 땅의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신다. 참 아이러니한 정체성이지만,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다.  

2. 이와 같은 권면의 근저에 있는 전제는 <확실한 구원>이다.

  이 땅에서 나그네면서도 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이 의미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소망이 확실한 자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이 편지를 받는 흩어진 나그네들은 구원의 확실함을 인정받은 것 같다. 이들은 구원 만큼은 검증된 사람들이다. 그 소망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더 피곤하고 과도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로서의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행하라고 하는 몇 가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불가능하다.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한다. 분명한 성도의 의식이 있어야 하고,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서 성도로서 근신과 성실과 거룩, 그리고 사랑의 삶에 대한 촉구가 가능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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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는 벽이 우측에는 높은 낭떨어지 가 있는 좁은 길을 갑니다. 그런데 길은 막히고 좌측에 있던 벽이 천천히 우측으로 움직여 제가 서있을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좁아집니다. 조금 있으면 벽에 밀려 낭떨어지로 떨어질 형편입니다.

다행히 제 위로 여러개의 줄이 달려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에 제 몸을 묶는다면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줄에는 각각 이름이 있는데 하나의 줄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모든 줄은 튼튼해 보였습니다. 오히려 가장 허술하게 보인 줄이 예수라는 줄이었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가 아닌 다른 줄에 자신의 몸을 묶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다른 줄에 비해 굵기가 두배라고 해도, 그것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썩은 동아줄이기 때문입니다.

2. 여러 개의 줄을 내 몸에 감는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많은 줄을 감으면 아무래도 한 줄에 감기는 것보다는 나을테니까요. 그런데 이것도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중에 예수라는 줄이 혹 있더라도 말입니다.

3. 먼저 예수라는 줄에 몸을 감습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덤으로 옆에 있는 줄도 시간이 되는대로 감아봅니다. 날 구원해 줄 줄은 당연히 예수라는 줄이겠지만 다른 줄을 보테면 그래도 더 튼튼할테니까요... 뭐라도 하나 더 있으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시간이 있는대로 감아 봅니다. 여기에도 구원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다른 것도 추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4. 구원 얻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를 제외한 나머지 줄을 끊어 버립니다. 촉박한 시간이지만 먼저 그 일을 합니다. 예수 외에 다른 것에 대한 부인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라는 줄만이 나의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줄이라는 의식 속에서 그 줄에 내 모든 무게를 실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다른 것에 대한 부인, 그리고 유일한 소망으로 예수를 의지해 내 몸의 모든 하중을 거는 것.

다른 줄을 끊느라 시간이 없어 예수라는 줄을 자기 몸에 제대로 묶지못해도 괜찮다. 오히려 예수라는 줄이 당신을 묶어줄테니... 따라서 구원 얻는 믿음이란  다른 줄을 끊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에게 관대했던 것은 그들은 자의적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든 끈에서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바리새인들에게 까다롭게 한 것은 그들에게는 다른 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가요?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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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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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이다. 2장은 1장보다는 주제가 간단하다. 빈부의 격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과 참된 신앙은 말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특히 빈부의 문제로

사람들은 빈부에 따라 대접을 달리한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같다. 그런데 두 가지 이유에서 야고보는 충고한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믿음의 풍요와 약속한 나라의 상속을 받게 하셨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업신여긴 꼴이 된 것이다.

2. 우리가 호의를 가지고 대우했던 부자는 오히려 우리를 법정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그들은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서만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 수 있으니까...)

3. 그런행동은 율법의 정신(이웃을 사랑하라)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인격과 성품의 문제가 아닌, 빈부의 문제로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떤 자리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일은 제도적으로 있어서 안되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속되어서도 안된다.

교회에서는 그 사람의 재물이 아닌,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 그리고 진정성이 있는 희생을 통해서 인정받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특정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유독 광고해주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것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 국회의원이 우리 교회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일은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이런 모든 일이 부한 자를 대접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2. 행함이 없는 믿음(말과 지식)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선 야고보가 말하는 본문에서 행함없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행함이 구체적으로 선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보다는 말과 지식만 있지 실제적인 행위가 결여된 신앙(신앙외의 일반적인 것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하겠다.)은 생명력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말과 지식이 있다고 신앙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마귀도 그 정도는 있기에.

2. 핵심은 우리 신앙에 행함(deed, action)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각론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행함이 따라와야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총론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자연스럽다 본다.

 

지금까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 <선행이나 경건의 삶>을 잘 이루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내 신앙이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과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에 어떤 대립되는 각이 있다는 측면에서 본문을 살펴본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야고보서 2장의 흐름을 통해 본다면 야고보는 성도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의 칭의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 보여진다. 다만, 말과 지식(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는 좀 다르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이다. 헐벗고 가난한 형제를 향해서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야고보는 말한다.)으로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가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행위가 따랐고, 기생 라합도 행위가 따랐다. 말과 지식만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다.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말이다.(26절)

바울은 믿음(자기 의를 쌓아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닌)을 통해서 의롭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는 것을 통해 의롭다 인정하셨다는 논리로서 칭의론을 말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이 말과 지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말과 지식뿐 아니라 행함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맞는 말이고, 어떤 충돌도 없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바울의 칭의론은 매우 기독교적 독특성을 가지는 반면, 야고보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논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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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4일 직장인 제자훈련학교에서 했던 강의. 로마서 5번째.

5-7장은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중심으로

8장은 성화의 동력체로서 성령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서..

 

음질이 안좋습니다. 감안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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