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8 새벽기도회

본문: 시 88:1-18

제목: 나는 갇혔으나 주를 바라봅니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3. 본문읽기: 시 88:1-18

4. 본문의 내용

 

시편 88편은 2절에 있는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라는 시인의 간구가 절실한 이유로 가득한 시편입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시인은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다’(3절)라고 말하고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깝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죽어 마땅한 자라고 인정받아 무력하게 죽음에 던져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은 상태와 다를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3-5절)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처럼 아무 희망이 없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와 같이 죽을 처지에 놓인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고(6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7절) 그래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친구들이 나를 모두 떠나게 했고 그들에게 가증하게 여겨져 더더욱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6-8절) // 그래서 시인은 쇠약해 졌다고 말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도움을 구할 곳이 없어서 주를 부르며 두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합니다.(9절) 그리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떻게 주를 찬송할 수 있고 주의 성실하심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10-11절) 그러니 일단 자신을 이 죽음의 고통과 재난에서 구원해 달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4절) 호소합니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고난을 당했고, 주께서 두렵게 하여 당황하였으며, 주의 진노가 내게 넘쳐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일이 ‘종일’ 시인을 에웠고, 둘러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까지 멀리 떠나게 함으로 고립 가운데 있게 하셨다는 것으로 시편의 내용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찬양과 감사에 대한 언급보다는 자신이 처한 고난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절박한지에 초점이 맞춰진 시편입니다. 어떤 부분은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며 원망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도움을 구하기도 하는 내용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함께 묵상하고 나누고 싶은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8절 ...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제가 볼 때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한 마디로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라고 탄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시인의 고백은 과장된 묘사가 아닌 듯합니다. 환경적으로 ‘재난’이 가득했고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던 상태’(3절)였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그런 환경과 싸워보고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힘없는 용사’처럼(4절) 너무나 무력하게 패배하여 다시 도전할 용기조차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재적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외부의 도움을 얻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8절) 지금 시인은 자신의 힘으로도, 친구들의 도움을 통해서도 이 재난의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게 된 것입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 재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고백한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라는 표현이 단순히 상징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때를 경험하게 되곤 합니다. 내적으로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도움을 줄 것 같은 친구들이 나의 처지에 놀라 멀리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텐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셨는가에 대한 원망과 불평 그리고 무력감이 지배할 때가 있습니다. ‘갇힌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소서’(2절)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합 3:2)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혼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은혜와 자비)을 구할 수 있고 마침내 그 은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갇혀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셔서 마침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됨을 확인하시는 복된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2) 13절.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우리의 소망과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우리는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집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간구를 돕고 계십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한 것이 그것 아닙니까? 우리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구하고 찾는 성도되길 축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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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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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새벽기도회

본문: 히 11:32-40

제목: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3. 본문읽기: 히 11:32-40

4. 본문의 내용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가나안 정복 이후의 인물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믿음에 대해서도 다룰 이야기가 많지만 모두 다루려고 하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인물과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이들이 믿음으로 이룬 일들을 나열합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 역사를 죽 나열하고 있습니다.(33-34절) 

 

그 이후에는 믿음으로 고난과 박해를 극복한 일들을 나열합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고 바랐기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을 받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심지어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기도 했습니다.(35-38절)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같은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런 각오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세상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굴복시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을 뿐 약속된 것(예수 그리스도)을 아직 받지 못했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을 누리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신 온전한 구속의 열매를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약속의 실체를 알고 있으니 우리는 누리고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34절 (믿음으로) ...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며...   

 

성도들이 가지는 믿음이 주는 실제적인 능력을 표현하고 있는 중에 나온 하나의 표현입니다. 그 중 저는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며’ 라는 이 표현이 마음에 남게 됩니다. 우리가 연약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사사들(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이 모두 인간적으로는 결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의지해 나아갈 때 백성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한 우리가 강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대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나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골리앗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골리앗 보다 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한 자를 이길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연약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강해지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강하고 위대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강하게 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조롱하고 박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부활을 바라고 소망하기에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조롱하고 박해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부활을 기대한다고 찬송하는 사람을 무엇으로 돌이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부담스러워하는 이상한 사람이어서 감당할 수 없다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너무 확고하고 분명해서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박해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일 수 있으나 우리의 영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게 저의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한 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양보하는 삶을 살지만 믿음의 결단 앞에서는 한없이 엄격하고 경직되고 타협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타인이 볼 때 이 사람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지기 보다는 오히려 이 사람의 믿음은 확고하구나. 적어도 이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구나. 절대로 이 영역에서는 타협이 불가능한 사람이구나! 놀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우리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은 본향에서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다른 무엇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하게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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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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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1 새벽기도회

본문: 히 11:23-31

제목: 믿음으로 두려움과 유혹을 이기라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3. 본문읽기: 히 11:23-31

4. 본문의 내용

 

계속해서 믿음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의 부모와 모세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를 도운 기생 라합의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모세의 부모로부터 시작해서 모세 그리고 출애굽 백성들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석 달 동안이나 모세를 숨겨 키웠습니다. 어떤 믿음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모세의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왕의 명령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어떤 결단을 만들어 냈을까요?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는데 이는 모세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23-26절) 모세는 믿음이 있어서 1)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2) 유월절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해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했으며 3)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반면 애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그 홍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27-29절)

 

뒷부분은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이를 도움 기생 라합의 믿음에 대해서 다룹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여리고를 돌았고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정탐꾼을 영접하여 여리고 백성들은 멸망당했지만 그는 살아남았습니다.(30-31절)

 

정리하면,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기도 했고(23절/모세의 부모님, 27절/모세) 믿음으로 죄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당하기도 했으며(24절, 모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참기도 했으며(27절) 믿음으로 유월절 예식을 정해서 장자의 죽음을 막기도 했고(28절/모세) 믿음으로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홍해를 가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구원을 받기도 함) 그러나 하나님을 시험한 자들은 홍해에 빠져 죽거나 여리고 백성들과 함께 멸망당하게 되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와 같은 낙을 누리는 것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왕자의 자리에서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풍요에 붙잡혀 살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회피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 믿음이 오늘의 환난과 불편함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더 좋은 본향을 소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곳에 성을 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믿음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상을 주신다는 것과 더 좋은 본향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불편함을 견디고 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행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중을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상 주실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 보다는 옛 자리로 돌아가 이미 주어진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지혜로운지는 여러분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가졌던 그 믿음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하루 되소서. 

 

  2) 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 건너는 과정에서 두려움도 있었고 걱정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로 그들이 다 건널 때까지 홍해의 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길을 애굽 사람도 건너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길이 열려있으니까 자기들에게도 열려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애굽 사람들이 시험하다가 빠져죽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자는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열어주는 구원이 아닙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이와 같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싸움입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믿을만한 분이신지를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약속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 가운데 단번에 영원히 한 일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믿으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면 옛 날로 돌아가지 마시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의 유혹을 넘어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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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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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0 새벽기도회

본문: 히 11:13-22

제목: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 날까지
  3. 본문읽기: 히 11:13-22

4. 본문의 내용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할지니라(11:6)라는 말씀처럼 오늘 본문은 그 믿음을 가지고 죽기까지 그 약속을 굳게 붙잡았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니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믿음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음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응시하며 환영하면서 나그네의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야할 본향을 늘 바라보았지만 그 본향은 이 땅에 있는 육체적인 본향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 본향을 바랐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이었고 그것은 곧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이와 같은 믿음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3-16절)

 

이와 같은 믿음을 지킨 구체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이 있을 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약속으로 받은 외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약속으로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행위)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7-19절)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되게 됩니다.(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삭은 믿음으로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고, 야곱도 믿음으로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축복하였고’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다’(20-22절) 이와 같이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믿음으로 축복했던 모든 것들이 이후에 다 성취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성취를 바라고 이들이 축복한 것이고 이들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본향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친척과 아비의 집이 있는 곳이고 자신이 자라온 곳이기에 익숙하고 편한 곳입니다. 때로 닥쳐올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곳이 바로 본향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에 의지해서 낯선 땅 가나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그저 외국인이요 나그네에 불과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떠나온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여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안과 염려 속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머물러 살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더 나은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다시 옛날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모테 신앙이라면 교회가 아니라 세상은 좀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세상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왜 예수를 믿어 이런 고난과 수모를 겪어야 하는가 불평을 할 때도 있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고난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옛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광야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너 나은 본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자랑스러워하시면 짓고 계신 하나님의 성, 하나님 도시의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닙니다.(10:39) 본향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2) 20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해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은 임종을 앞두고 아들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야곱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좀 더 축복하는 일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축복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모세회의 한 집사님께서 영상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시는데 ‘축복’을 해 주시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도회니 축도는 안하더라도 축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더욱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축복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서 축복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그런 믿음으로 축복을 했고 그것이 성취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축복을 듬뿍 담아 기도하시라. 특히 이번 주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있는데 우리의 다음 세대를 향한 축복이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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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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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9 새벽기도회

본문: 히 11:1-12

제목: 죽은 자와 같은 자라도 믿음으로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 뵈어도
  3. 본문읽기: 히 11:1-12

4. 본문의 내용

 

오늘부터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을 다루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믿음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은 믿음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라 아직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란 측면에서 ‘실상’입니다. 또한 현재 보이지는 않지만(그 성취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음,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믿음은 그 드러난 것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근거는 믿음에 의해서다. 이미 이루어진 모든 세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아 알지만 그 근원은 보이는 것으로는 알 수 없다. 믿음은 막연한 신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믿음은 현재 보이지 않는 것,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  

 

4절에서 ‘아벨’을 다루면서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그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아벨이 비록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5절에서 에녹에 대해 다룬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인물인데 그는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옮겨진 것이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두 가지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입니다. 

 

7절에 노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노아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경고하심을 받아서 방주를 준비해서 자기 집을 구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고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정죄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의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일입니다. 8-10절에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고 믿음으로 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장막에 거주했는데 이삭도 야곱도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것을 바라고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임을 믿었기에 아이를 낳지 못해 죽은 자와 같은 사라를 통해 허다한 별과 또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낳게 하셨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현대시대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해주어야 믿고 신뢰해 주는 시대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증명된 것만을 믿으며 살기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고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진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확인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진화라는 것이 수천 수 만 년을 거쳐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기록을 근거로 그럴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때 그 현장으로 돌아가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기초한 신앙과 하나님이 우리가 가운데 주신 말씀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한 분으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관계의 신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근거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믿을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증거가 되어 믿음으로 바라고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실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 없는 바람과 소망입니다. 성경의 많은 위인들은 이 믿음을 근거로 약속을 받고 그것을 성취했던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향해서도 그 믿음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다음 해 아들 이삭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이 야곱을 낳았고 그 야곱이 12 아들을 낳아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번성한 이후에 보면 앞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과학적으로나 인간의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태가 끊긴 여인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이면 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무수히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고 그 백성들의 선조가 된 사라가 90세가 되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어떤 원리를 통해서 된 것인가!

 

오히려 우리는 이 내용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을 만 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길래 모든 가능성이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시는 분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에 실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이 실상으로 들어나게 되시길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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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8 새벽기도회

본문: 히 10:26-39

제목: 우리는 뒤로 물러갈 자가 아닙니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3. 본문읽기: 히 10:26-39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완전한 구원에 이른 자들인 우리는 이 믿음의 내용에 대해 의심하거나 흔들려 다시 옛날 구약의 율법이나 제사 제도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절) 이와 같은 주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시 옛날의 방식(율법과 제사)으로 회귀하는 것은 큰 죄라는 측면에서 다룹니다.(26-31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고의적으로) 다시 옛날의 방식인 율법과 제사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29절) 그러니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던 역사(28절)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 옛날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갚는 분이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함으로 완전한 구원의 계시를 부정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자가 받게 될 형벌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다시 옛날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의도의 말씀이십니다. 

 

두 번째는 이전에 이와 같은 유혹과 시험에서 이겼던 경험에 비추어서 독려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과거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즉 완전한 제물과 제사장으로서 예수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혜를 받은 후에 유대교도들로부터 받았던 고난 속에서도 잘 견디고 이겨 왔던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32절) 예수를 통한 구속을 믿고 의지했을 때 우리가 당했던 박해와 조롱, 또 그런 자들과 함께 하며 우리가 돌아서지 않고 서로 독려하며 심지어 소유를 빼앗기는 것조차 기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34절) 그러니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36절) 예수님은 곧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옛날의 방식인 율법과 제사를 의지하여 멸망할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완전한 의와 거룩을 힘입어 구원에 이른 자들이며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39절)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29절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을 향해서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생각해야 하고 지금의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믿는 사람도 아니고 생각 없이 믿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생각없이 고민없이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처럼 여기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 옛날의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앞에서 계속 설명해주고 있는 내용들이 그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로는 우리가 온전한 의에 도달할 수도 없고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완전한 성소인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가지는 제의적인 측면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옛날의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26절)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29절) 그러니 그 형벌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설명하고 설득하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생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생각없이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생각하며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왜 고난을 주셨는지 생각하고, 왜 축복을 주셨는지 생각하고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지 생각하고 왜 나의 기도는 응답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시고 은혜의 자리로 날마다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예수의 속죄하심을 믿는 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오길 기다리고 기대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인내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성취를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그 결실을 손에 잡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믿는 바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거나 머뭇거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의 신앙이며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행할 바인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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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5 새벽기도회

본문: 히 9:23-28

제목: 공식적인 구원결과를 기다리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3. 본문읽기: 히 9:23-28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속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으로서 이 땅에 있는 제사 제도는 송아지와 염소와 같은 제물의 피를 통해서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성막에서는 더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송아지와 염소는 제물로서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정결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성막에서 드려질 제물은 완전한 제물이어야 합니다.(23절)

 

그리스도는 바로 그 완전한 제물이 되시면서 동시에 그 제물을 드린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의 모형인 이 땅의 성소에 들어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참 성소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서신 대제사장인 것입니다.(24절)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오래 전부터 해마다 다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했으나 그리스도는 매번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의 제사로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입니다.(25-26절)

 

사람들은 모두가 한 번 죽게 되고 그 이후에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한 번 죽으셨는데(단번에 드리신바 되었고) 그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죽음이었고 이제 곧 다시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바라는 자들에게 구원을 확증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27-28절)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24절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으로 오실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막의 원형인 하늘 성막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하나의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전혀 주저함이 없이 당당하게 나아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주저함이나 머뭇거림이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면에서 주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를 대변하시기 위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가 나서듯 예수님은 우리가 잘못한 문제를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고 모른척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우리가 했지만 우리의 부모처럼 주님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재판장 이십니다. 그의 판단으로 정죄를 받기도 하고 용서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이 당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제물로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흠이 없고 그 흠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대제사장 역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완전한 제물과 완전한 제사로 나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주저함없이 나아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을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로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2) 28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백성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제물을 잡아 드리고 나서야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다시 살아서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래야 죄 용서에 대한 확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는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이 다시 나오길 고대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고 고대하게 됩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믿고 확신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한 구원의 형태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로도 손상이 없으셨고, 대제사장으로서도 문제가 없이 완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시험을 치뤘고, 답안지를 다 맞춰 봤습니다. 넉넉하게 합격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저 최종 공식적인 확정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믿음으로 넉넉하게 구원을 바라고 소망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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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4 새벽기도회

본문: 히 9:11-22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역할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3. 본문읽기: 히 9:11-22

4. 본문의 내용

 

히 9:1-10까지의 내용이 개혁되기 이전까지의 예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면 9:11-22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혁된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막을 통해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하늘에 있는 성막으로 말미암아 섬기는 대제사장이십니다. 또한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통해 속죄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는 제사를 주관하는 온전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린 제사는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11-12절)

 

그도 그럴 것이 염소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여 지게 되는데 하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그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하겠는가!! 그 피는 충분히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에 충분한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13-14절)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볼 때,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22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죽으셔야만 그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언약은 마치 유언과 같아서 유언한 사람이 죽을 때에라야 그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 언약도 피 없이(죽음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고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첫 언약도 그렇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더 좋은 언약도 마찬가지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11-12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과 관련하여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제물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어린 양의 제물과 같은 역할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향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땅의 제물은 불완전하기에 흠이 없을 수 없고, 반복적인 제물이 필요했기에 사실 구약의 제사는 온전한 효력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제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매번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흠이 없이 완전한 제물이었기에 ‘영원한 속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을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소의 대제사장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완전한 성막의 대제사장이신 예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분이 행하신 절차를 따라 나아간다면 우리 또한 그 분과 함께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가운데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의지하고 또 다른 제물을 의지해야 한다는 율법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완전에서 불완전으로 퇴행하는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담대하고 당당하게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2) 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 구약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한 제사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동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인 ‘죽음’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도 마찬가지랍니다.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8절) 모세가 언약을 맺은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우슬초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피뿌림이 백성들과 장막,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피 뿌림을 통해 정결하게 되는 의식을 가지듯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먼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얻은 생명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장기를 이식 받아서 생명을 얻거나 건강을 얻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의 삶에 좀 더 진지해 져야 합니다. 더 의미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고 간 사람의 생명이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시고 나누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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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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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3 새벽기도회

본문: 히 9:1-10

제목: 새집 줄게 헌집 다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3. 본문읽기: 히 9:1-10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첫 언약 속에 있었던 제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데 첫 언약 안에 있었던 그 제도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그 제도는 다음에 올 온전한 것을 위해 임시로 주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비된 첫 장막이 있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 그리고 진설병이 있었고 이를 성소라 했습니다. 그 안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고 말하는데 그 안에는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돌 판이 있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같이 예비되어 있었고 제사장들은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둘째 장막(지성소)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때 대제사장은 반드시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린 후에야 들어갔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첫 장막과 그 예법은 참된 구원의 길이 아니고 하나의 비유이고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의 방식대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를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방식은 먹고 마시는 것(음식 예식)과 여러 가지 씻는 것(성결 예식)과 같은 육체적 예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라 완전한 것이 오기 전까지(개혁의 때까지) 임시적으로 맡겨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8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구약의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오히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씀인데,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입니다. 좀 전까지 장막에 무엇이 있고 그 안에서 제사장이 일을 하고, 지성소에는 무엇이 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만 들어가는데 그것도 자신과 백성의 허물을 위해 드리는 피가 없이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다 했는데 갑자기 왜 첫 장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히려 첫 장막을 통해서 성소로 들어가는 구약의 그 예법이 오히려 참된 장막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가리는 것이 되지 않았는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율법에 대한 확신이 너무 크고 강해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유대인들처럼 과거 약속으로 주어졌던 방식에 사로잡혀 그 한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첫 장막의 방법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길, 완전한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보이시기 위해 옛 언약의 성소를 폐하시고 참된 성소를 보여주신 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새 것을 보기 위해서는 옛 것이 사라지고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이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참된 길을 만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안전해 보이는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새로운 안전과 평화를 만나고 경험하게 해주시기도 합니다. 옛 것이 허물어지질 때 새 것을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10절.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성막과 지성소 그리고 제사 제도는 이제 과거의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니 거기에 더 이상 매여 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가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과거의 것으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행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과거의 것일뿐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고 제한적인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혁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맡겨둔 것일 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개혁되었으니 더 이상 거기에 매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신 후로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겉으로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왔고 그 나라의 통치 원리가 이 땅에서도 적용되어지기도 하고 요구되어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통치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잠시 연습용 악기를 통해서 그 악기에 대한 감을 익히고 절차와 방법을 알려주었던 것인데 그 악기로만 연주를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제 실전용 악기, 전문가용 악기를 주어 진짜 연주를 하라고 하는데 정작 옛날 연습용 악기를 고집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시로 맡겨둔 것은 이제 뒤로하고 새롭고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면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연주할 것이고 마침내 관중들의 박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그 은혜 가운데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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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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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2 새벽기도회

본문: 히 8:1-13

제목: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92장 위에 계신 나의 친구
  3. 본문읽기: 히 8:1-13

4. 본문의 내용

 

히브리서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기가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내용을 일일이 다 언급하기 보다는 큰 맥락에서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구약의 제사장(스스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과 다른 계통의 제사장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제사장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며 더 확실한 언약의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제사장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믿고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자랑하듯 말하고 있습니다.(1절)

 

더불어 그 예수는 성소와 참 성막에서 섬기는 분임을 말합니다.(2절) 그러나 그 성막은 사람의 세운 성막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 땅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며 그 성막에서는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이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의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는 이 땅의 제사장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습니다. 그것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는 것입니다.(6절) 왜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이 필요했겠습니까? 그것은 첫 언약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언약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열조와 출애굽하던 날에 맺은 언약(첫 언약)은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지 아니함으로 하나님도 그들을 돌보지 않게 된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이스라엘 집과 맺은 언약은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이와 같은 새로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새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함께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 

 

 1) 5절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구약 시대에 있어서 성막과 성전 그리고 제사장의 역할을 절대적이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죄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사장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백 년의 시간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규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성막과 제사장도 불완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운 성막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막의 모형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이 땅에 있는 성막이라는 것은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임하실 수 있는 성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신의 죄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을 위한 제사를 매번 드려야 할 뿐 아니라 자신도 죽음으로 인해 제사장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는(영원한 제사장일 수 없는) 한계를 가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다릅니다. 그 예수는 완전한 제사장일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참된 성소와 성막에의 대제사장으로 우리 각 사람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기억하시고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마시고 담대히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2) 6절.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과 새 언약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옛 언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는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실효성에는 언약의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새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은 이전에 맺은 언약과 다른 방식으로 효과를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그 백성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 법을 기록하게 함으로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결과이고 그 언약의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옛 언약을 근거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을 근거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지 않도록 하시는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혼자 좋은 일을 하시고 알아서 하라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그 좋은 일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도록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과 함께 복된 하루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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