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7 새벽기도회

본문: 요 13:31-38

제목: 작은 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3. 본문읽기: 요 13:31-38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나서 예수님은 오히려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 순종하심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정하심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잠시 더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들은 내가 머무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작은 자들인 제자 공동체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확인되는 공동체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 따라가겠노라고 맹세합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면서까지 주님을 쫓겠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진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여 본 구절은 우리 귀에 익숙한 구절로 33절의 말씀입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죽으심을 향해 나아가셔야 하는 순간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묵상해 봅니다. 

 

‘작은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이들은 모두 성인들이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신앙적인 측면에서 성숙하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셔야 하는 예수님께는 너무나 여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작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작은 자이겠습니까? 우리는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의 본문에서도 우리가 살펴봤듯이 우리는 언제나 환경과 조건이 바뀌면 변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침에 감사했다가도 저녁이면 불평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작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아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죽으심을 향해 가십니다. 이제 주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어린 자녀들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부모가 조금이라도 더 자녀들과 함께 있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잠시 더 제자들과 함께 있으시면 꼭 필요한 말씀을 유언처럼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이 마지막으로 작은 자들과 같은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제자들이 서로를 충분히 사랑해 왔다면 주님께서 이들을 향해서 이런 요구를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쟁의 대상으로 봤던 사람들입니다. 서로 으뜸이 되고자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자들이라고 불린 것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십시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이 인정된다고 말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치길, 우리 산울공동체 안에 풍성하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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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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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6 새벽기도회

본문: 요 13:18-30

제목: 누가 주님을 배반하나?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3. 본문읽기: 요 13:18-30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세 부분을 나눌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배반을 당하실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말씀이었겠습니다만 이런 내용을 제자들에게 알리신 것은 나중에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났을 때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이후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베드로는 머릿짓을 하여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에게 누가 예수님을 팔 사람인지를 직접적으로 물어보도록 요구합니다. 요한은 ‘주여 누구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그 배신자라는 것을 우회적이지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현장에 있으면서도 가룟 유다가 그 배신자라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명절에 뭔가를 시키시는구나 정도로 생각합니다. 오직 당사자인 가룟 유다만 그 밤에 무리를 떠나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주목하여 본 구절은 21절의 말씀 중 일부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어오면서 예수님을 위협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반복해서 봐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로서 대제사장이나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고 나서부터는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작 로마 병사들에게 잡히게 된 것은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가룟 유다’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 한 명에게 배신을 당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의 실제적인 삶을 다 지켜보았던 제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에 팔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가룟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절대적으로 그럴 리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제자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돈 궤를 맡았다는 것이 믿을 만 했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 때까지도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믿을만 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배신은 어디에서나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리더로 한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도 배신이 일어났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리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의심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얼마든지 형편만 바뀌면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고 그래서 주님의 자비와 용서하심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 배신했다고 해서 너무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로 모인 공동체라도 배신은 있을 수 있습니다. 배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관계에서 냉소적이 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혹 믿었던 누군가가 배신했다고 ‘너무 놀라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 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놀라고 당황하고 무너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신이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실망이 없는 관계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망과 배신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만 배신한게 아닙니다. 나중에 12명의 제자가 모두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 사랑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배신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희망을 갖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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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새벽기도회

본문: 요 12:44-50

제목: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때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3. 본문읽기: 요 12:44-50

 

4. 본문의 내용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본 자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 도 있고 하나님을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왔는데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선명하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은 빛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오셨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바로 잡아야 할 무지와 왜곡 중 하나는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메시야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바로 이 땅을 심판해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모습을 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심판과 무관한 분은 아닙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으나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오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오늘 본문에서 제가 주목하여 본 구절은 우리 귀에 익숙한 구절로 47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한없이 받아주고 용납하시기만 하시는 그저 좋은 분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2000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구원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오신 것이지만 나중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을 때는 자비와 용서가  아니라 공의로운 심판의 행하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한없이 너그러운 자비로운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미지로만 보는 것을 잘못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아직 심판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용서의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는 때에 속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에 대한 촉구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곧 다시 심판의 주로서 등장하셔서 회개하지 않은 모든 자를 엄중히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하게도 지금은 여전히 구원의 때입니다. 용서의 때이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때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은혜 받을 때입니다. 오늘 내게 보여주시는 죄가 있다면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릇된 마음을 돌이켜 새롭게 출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중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을 의지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기회를 잃지 않으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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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1 새벽기도회

본문: 요 12:12-19

제목: 끝을 알고 있는 사람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3. 본문읽기: 요 12:12-19

 

4. 본문의 내용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 계시다는 것이 소문이 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갑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치는 자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게 되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장면이 연출됩니다. 무리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의 등장은 너무 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건장한 말이 아닌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황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이 모든 장면이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행한 놀라운 일을 증언합니다. 이들의 증언과 예수님께 몰려드는 인파를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방행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쓸데없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본문에서 제가 주목해서 본 구절은 16절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절)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얻게 된 이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스가랴 9:9의 말씀 후반부에 있는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스가랴 9:9의 전반부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라는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도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이 스가랴 9:9 말씀에 대한 정확한 성취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을 맞이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지도 상상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장면이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이후에야 이해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는 그 결말을 다 알기 전까지는 그 중간 중간에 벌어진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 때론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일이 그릇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끝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고 그 끝 날에는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끝 날을 살지 못하지만 역사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답답한 일과 억울한 일이 나중에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억울함을 때로는 참을 수도 있고, 견딜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면서도 우리가 마음에 병 들면서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인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역사의 끝을 아는 사람과 역사의 끝을 모르는 사람과 삶의 태도와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운영해 가실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가실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장애 속에서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복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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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새벽기도회

본문: 요 12:1-11

제목: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3. 본문읽기: 요 12:1-11

 

4. 본문의 내용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계셨습니다. 나사로는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람입니다. 그런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이 가셨으니 당연히 잔치가 준비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느라 바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당연히 향유 냄새가 집안 가득히 났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가룟 유다가 한 마디 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낭비하는가?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도 이런 논리에 당연히 동의하시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마리아가 향유를 팔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장례할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언급하심으로 마리아의 향유 붓는 행위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의외의 반응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룟 유다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에 손을 대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들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으나 예수님은 항상 함께 잊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동을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적절한 행동이라고 보셨던 것입니다. 

 

당시 그 집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모였는데 이는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가 살려낸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나사로까지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예수를 믿고자 하는 일을 막기 위해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요약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본문에서 제가 주목해서 본 구절은 5절과 6절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겉으로 한 말과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달랐던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중간 과정에서 일부를 챙기려고 하는 거짓된 마음이 있음을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유다가 이런 왜곡된 삶의 방식을 고치지 못하고 지속함으로 나중에는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예수를 팔아넘기는 행위를 했는지 모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대제사장의 모습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은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는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위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예수님에게 집중되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반면, 마리아의 행동은 다릅니다. 마리아는 그동안 정성껏 모아왔던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아낌없이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감사해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더 깊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행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행위가 되어 계시적인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자기 희생적 헌신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드러내는 감동적 장면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겉은 화려하고 말은 멋있지만 속은 더럽고 추악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고 대제사장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어리석게 시간과 재물을 허비하는 것 같고 너무 과하게 희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기도 하고 준비하기도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자가 아니라 진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 그 분의 오심을 예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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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9 새벽기도회

본문: 요 11:47-57

제목: 사람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65장.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3. 본문읽기: 요 11:47-56

 

4. 본문의 내용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더욱 경계하게 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언급하는데 하나는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민란이라도 나면 로마가 허락해 준 자신의 지배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당시에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대의를 위해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 정도로 들렸습니다. 아마 예수를 죽여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를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뉴앙스를 전했고 그 날로부터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모의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야바의 이 말이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정확하게 알려준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 한 말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영적인 진실을 말한 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빈들에 머무셨으나 사람들은 절기 때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일 때마다 이번 명절에도 예수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이를 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커져 갈수록 지도자들의 경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본문 중에서 주목해서 보게 된 구절은 50절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말로 자신은 인간적인 지혜로 한 말이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자 하는 사역의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낸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가”

여기서의 한 사람이란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지금 사람들을 선동해서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니 이 한 사람을 죽여서 혼란을 잠재우자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로마 정부가 개입하게 되어 현재 누리고 있는 자치권마져 빼앗길 수 있으니 신속하게 하는 것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도 유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쏠리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은 언제나 이기적입니다. 그럴 듯 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그 안에 자신에 대한 안위와 타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 탐욕과 시기 질투를 통해서도 당시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창 50:20) 요셉의 이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의 계획대로 잡혀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도 자신들이 예측한대로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시도록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막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를 완악함 가운데 두신 것은 그를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다툼과 분열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랑과 용서와 하나됨입니다.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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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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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8 새벽기도회

본문: 요 11:38-46

제목: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삶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3. 본문읽기: 요 11:38-46

 

4. 본문의 내용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문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우려했지만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의 무덤 문을 옮겨 놓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말씀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하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요청대로 나사로를 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시신이 있는 무덤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말씀과 함께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풀어 놓아 다니도록 하십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부활한 나사로를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태도는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숫자가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서 예수님을 위험에 놓이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본문 중에서 주목해서 보게 된 구절은 39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시신이 있는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그래봤자 소용없습니다 라는 의미로 말씀했던 내용입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지금 무덤의 문을 열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가망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죽은게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현상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사흘을 지나 나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죽은 자의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없을 뿐 아니라 시신이 부패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냄새입니다.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나사로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죽은 시체가 살아나 무덤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내기 원하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간구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입니다. 

 

성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운데 질문하고 계십니다. 너는 죽지 않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죽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늘 조급합니다. 동분서주하며 누가 나를 살려줄 수 있을까를 찾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이유도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게 되었을 때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죽음이 두려운 인생, 죽지 않기 위해 사는 인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음 넘어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침이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금 부활의 소망과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분주히 살고 있다면 혹시 아직 완전히 죽은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여전히 내 안에 내가 주인이 된 채 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죽지 않아서 부활의 새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시고 우리 자신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인생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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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7 새벽기도회

본문: 요 11:28-37

제목: 죽도록 내버려 두다

 

1. 본문의 내용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가 마중을 나가 마을 입구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21절)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지만 마르다는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11:17-27)

 

마르다는 마리아를 불러오라고 했고 집에 있던 마리아가 황급히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마리아가 황급히 나가자 함께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마리아를 따라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말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마리아가 울자 함께 왔던 사람들도 함께 울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반응했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사랑한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맹인도 고친 능력으로 그것을 할 수 없었던가! 하며 의문을 던졌습니다. 

 

2.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지금까지 진행된 나사로 이야기를 보면 왜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두셨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셨지만 오히려 그 소식을 알고도 지체하심으로서 나사로가 죽도록 방치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6절)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본문은 몇 차례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절, 36절)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지도 않았습니다.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이 나사로를 고치지 못해 죽도록 하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지금 위기의 상황에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맹인을 고치신 능력으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고, 사랑하셨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로가 죽음에 이르도록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하나님도 이와 같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셨는데 이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막을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으나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소원을 외면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은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5,2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활을 맛보고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죽음을 맛보아야만 합니다. 절망을 맛보지 않고 주 안에서의 소망을 경험할 수 없고, 고통을 맛보지 않고는 주 안에서의 기쁨을 누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서도 절망과 고통을 피해가도록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니는 이유인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가운데 현재의 절망과 고통을 (은혜 가운데) 잘 통과해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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