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4 새벽기도회

본문: 요한복음 15:1-17

제목: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3. 본문읽기: 요한복음 15:1-17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포도나무 비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비유하십니다. 하나님을 농부라고, 우리들을 참포도나무의 가지라고 비유하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잘 맺게 하기 위해서 농부가 관리를 해줍니다. 그러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가지는 포도나무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못한 것이기에 오히려 그 가지를 제거를 해 주십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는 가지 쪽에 양분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비유를 들면서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그 권면의 내용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너희 안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참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님께 가지인 우리가 잘 붙어 있어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5절)는 것은 가지가 나무줄기와 유기적으로 잘 붙어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2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계명을 따라 살면 우리는 주님의 친구로 여김을 받는데, 주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정도로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화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이고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열매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좋아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맥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까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신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일단 이 말씀은 포도나무의 줄기인 예수님과 가지가 잘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유기적으로 잘 연락되고 있어서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우리도 주님의 뜻과 의지를 반영하게 되는 상태 즉 서로의 호흡이 잘 맞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가 형성되면 팀워크가 잘 맞는 선수처럼 서로의 필요를 보면서 움직여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 맘대로라기 보다는 서로의 호흡을 잘 맞춰서 구하고, 공급하는 모습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필요와 요구를 살피면서 동역하기 때문에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 막 치고 나가면 하나님은 뒤에서 모든 것을 수습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호흡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 10절.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주님의 안에 거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슨 신비한 경험이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너무 분명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2절)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계명입니다.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님이 가지인 우리를 향해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기도를 많이 하거나 깊은 영적 체험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오히려 다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사랑의 열매)이 드러남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기억하시고 그 구체적인 형제 사랑을 실천하시기에 힘쓰는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401 새벽기도회

본문: 요한복음 14:1-14

제목: 과정이 목적이 되는 삶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3. 본문읽기: 요한복음 14:1-14

 

4. 본문의 내용

 

오늘부터는 다시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그리고 그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들을 데리고 함께 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안심을 시켜 주려하고 있습니다.(가족 여행을 준비하는 아버지가 자녀들에 앞에 답사를 갔다 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이미지)

 

도마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 불안해했던 것 같은데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기만 하면 결국 하나님께 도달하게 될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자녀들에게 걱정마, 아빠만 따라와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이미지)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알았고 보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알고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자신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믿을 것을 요청하십니다. 믿겨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그 동안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했던 일을 통해서 믿고 따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 자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께로 가셔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자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것을 행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예수님께 구하면 시행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처음 시작은 예수님게서 제자들을 떠나는 것에 대한 걱정과 근심에 대한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나중에 오히려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계심으로 제자들은 더 담대하고 용기를 얻게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진리요 생명은 궁극적인 목표이기에 주님께서 궁극적인 존재가 된다는 측면에서 쉽게 이해가 가지만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길’은 궁극적은 목표라기보다는 정해진 목적지를 가기 위한 과정 정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길’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인 좀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목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목표을 얻고 목적지에 도달하는게 최고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으로서의 ‘길’도 중요한 것이고 그 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를 통해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이고 그 분이 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그 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길 되신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길에 서서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가 개인적인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는 근거가 이 말씀에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요 14:13)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거나 막 구해도 예수님께서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 관심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하시는데 있습니다.(13절) 그런 입장에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주님의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모두 행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이라고 믿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상달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응답된다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시면 잊으셔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보자 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진지하게 들으시고 내용을 접수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시고 어떤 결과이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받으시길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31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7:1-16

제목: 우리의 형편을 봐주시는 하나님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3. 본문읽기: 레위기 17:1-16

 

4. 본문의 내용

 

레위기 17장은 공동체 예배의 규례에 다루는 1-15장과 개인 삶의 규례를 다루는 18-25장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규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하나는 가축 도살과 관련된 규정이고, 둘째는 피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고기를 먹은 자의 정결의식에 대해서 다룹니다. 먼저 도축과 관련된 규정에 대해서 다룹니다.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아니면 진영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피를 흘린 자로 여겨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규정은 식용을 위한 도축의 경우에도 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성막으로 가져가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 드리는 것처럼 짐승은 무조건 회막 앞에서 잡아야 하고 피와 기름은 감사 제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규정은 광야 생활 동안에는 회막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가나안 정복 이후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변경되었다.(신 12:21) 

 

피에 대한 규정은 ‘무슨 피든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라도 피를 먹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거류민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짐승이나 새를 잡거든 피를 흘려 흙으로 덮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와 생명은 일체라고 보아서 피를 생명처럼 여기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을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는 자는 부정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거류민이나 동일합니다.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그 이후에 정해집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죄를 담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절대적인 규정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변경되는 규정도 있습니다. 

광야 시대에는 제사를 위한 도축 뿐 아니라 식용을 위한 도축도 회막 앞에서 하도록 했고 피와 기름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불편한 일이긴 했겠지만 짐승의 피를 처리하는 문제라든지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하게 됨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사 뿐 아니라 식용까지 이렇게 하는 것이 번거롭기는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 시대는 회막을 중심으로 12지파가 진영을 치고 함께 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러 지역으로 땅을 분배받고 흩어지게 되었을 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려면 식용으로 위해 도축할 때 상당히 먼 거리를 위해 이동해야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 규정에 대해서 변경을 해 줍니다. (신 12:21-23)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 /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을 것같이 먹을 수 있거니와 /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 너무 멀면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 피는 먹지 말도록 새로운 규정을 정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원칙을 정해서 그 원리에 따라 백성들이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 원칙이라는 것이 절대 불변의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도록 융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유통성을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임의대로 한다면 혼란이 오겠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형편과 필요를 보시면서 예외적인 규정을 만드시고 어느 정도의 규례를 변경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이라고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소통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 소통을 하신다는 것이고 우리의 형편이 하나님에게 설명이 되고 설득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 제도라는 것도 그와 같은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기준만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거룩을 유지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을 아시고 죄와 부정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와 부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인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고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정한 일이 불가피할 때 옷을 빨고 몸을 씻고 저녁까지 자숙하는 시간을 통해서 부정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사와 정결의식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사람에게 배푸시는 은혜와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 주시는 인격적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형편을 이해하고 때론 용납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다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는 하루, 누리시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30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6:23-34

제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린 제사의 완전함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 본문읽기: 레위기 16:23-34

 

4. 본문의 내용

 

제사장은 속죄일 제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고 물로 몸을 씻고 본래 제사장의 옷의 입고 자기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해서 속죄하는 일을 합니다.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도 돌아와서는 자기 옷을 빨로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한 속죄제를 드린 후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에 내다 불사른 자도 그의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돌아옵니다. 이렇게 속죄일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규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죄일을 ‘안식일 중의 안식일’로 명하시고 다음과 같은 규례를 지키도록 하십니다. 일곱 째 달 십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합시니다. 이는 금식을 말하는 것으로 9일 저녁부터 10일 저녁까지 하루 온전히 금식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도록 명하십니다. 본토인이든지 거류민이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이 날에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죄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영원한 규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론 이후 기름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일에 세 가지를 위해서 속죄해야 하는데, 첫째는 지성소를 속죄해야 하고, 둘째는 회막과 제단을 속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해야 합니다. 이는 영원히 지킬 규례이면서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해서 속죄해야 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인간의 죄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사람은 죄를 짓고 그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죄에 맞는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설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 것입니다. 그 내용과 절차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러나 최근 본문에서 속죄일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드려오는 제사라는 것인 완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속죄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죄를 해결한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죄의 요소들이 남아있고 그래서 온전히 정결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사장도 그렇고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었던 회막과 제단 심지어 지성소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죄와 부정의 찌꺼기들이 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에는 1년에 한 번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를 특별히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1년에 한 번 속죄일을 통해서 드렸던 그 제사는 완벽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매일 매일 드렸던 제사에도 아주 작은 부족함이 있었던 것처럼,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이 속죄일 제사도 온전하지 못한 요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정함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이 말은 인간의 제도로는 우리의 죄와 부정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벽을 기한다고 해도 늘 빈 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우리를 온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아무리 순도가 높은 상태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함 앞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완전한 상태가 될 때까지 우리의 불완전함을 간과하시거나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용납하심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구름가운데 말씀하시고 향연에 가운데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다 보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하시고 죄와 부정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설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온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영원한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완전과 거룩에 이를 수 있는 방법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제물로 드리기로 작정하십니다. 흠이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그 분으로 하여금 완전한 제사를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사셀 염소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친히 다 짊어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셔서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름이나 향연 가운데서가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신 복음의 소식이 이런 내용이 담겨있음을 기억하시고 매일 매일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는 성도되시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29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6:11-22

제목: 우리는 누구의 아사셀이 될 것인가?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3. 본문읽기: 레위기 16:11-22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속죄일에 대한 상세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림으로서 자기와 집 안을 속죄하기 위한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 향로를 가지고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도록 합니다. 그래야 그가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림으로서 자신과 집안의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립니다. 이렇게 행함으로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합니다. 또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해서도 그 같이 합니다.

 

아론이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온 회중을 위해서 속죄하고 나오기까지 누구든지 회막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론은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속죄해야 하는데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 이후에 살아있는 염소(아사셀 염소)를 드립니다.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염소는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면 그는 염소를 광야에 놓습니다.(그 염소가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죽지 않기 위해서는 지성소에 들어갈 때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려야 한다. 

 

속죄소 위를 향연으로 가려야 하는 이유는 그 속죄소 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레 16:2) 죄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은 자가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될 때 죽을 수 있습니다.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해도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자는 아닙니다. 제사의 일을 하고 제사 업무를 위해서 따로 구분되었다고 하더라도 제사장도 여전히 죄의 문제가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는 불완전한 사람들에 의해서 드려진 불완전한 제사였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불완전성을 감안해서 용납하시고 받아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도록 한 것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구름이나 향연으로 가려진채 우리를 보기 위함이 아닐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 없이 너무 선명하게 우리 자신이 노출될 경우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흠과 죄를 어느 정도 선에서 간과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하는 묵상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적절한 적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도 모든 것을 너무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고, 때로는 어느 정도 희미한 채로 아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서로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불완전성이 상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데 불완전한 이해와 판단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오픈하지 말고 숨기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타인의 말과 행동을 좀 더 면밀히 살피고 판단을 할 때 참 신중을 기해서 하자는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불완전성도 상대의 불완전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극단적인 판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아사셀 염소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의 아사셀 염소일까? 

 

보통 속죄의 제물로 가져온 것은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데 아사셀 염소는 다릅니다.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론이 두 손으로 그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죄를 아룁니다. 이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 그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돌아올 수 없는 광야로 데려가 놓아줍니다. 

 

이 아사셀 염소가 우리에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성문 밖으로 추방되셨기 때문입니다.(히 13:12)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도 주님을 따라 주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주님의 고난과 수치를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28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6:1-10

제목: 불완전한 인간, 완전한 제사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3. 본문읽기: 레위기 16:1-10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속죄일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나기 때문에 완전한 준비없이 속죄소에 들어왔다가 제사장들이 죽을 수 있으니 아무 때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장에 있어서도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써야 합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하며 그 전에 몸을 물로 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해서는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 삼기 위해서 숫양 한 마리를 가져와야 합니다. 

 

아론이 가져오는 수송아지는 자기와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제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서는 염소 두 마리를 드려야 하는데 두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해서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서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보내 돌아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는 죄를 짊어진 염소를 광야로 추방하여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한 분이시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른 불을 드림으로서 죽임을 당했던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아론에게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던 같고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전체에 큰 두려움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속죄소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본 자가 죽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에 지성소 안으로 들어올 제사장이 어떤 준비를 하고 들어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인애가 크신 분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하나님께 편하게 대해서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마치 인자하신 할아버지를 연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왠만한 장난과 무례에 대해서도 허허 하고 웃어넘기신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게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구체적인 준비를 하도록 규례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아마 때나 호출해서 불러오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불가피하게 온라인으로도 병행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한 일이지만 만약 우리의 마음이 온라인을 핑계 삼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에배를 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이지만 우리의 중심이 더욱 잘 준비되도록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인 속죄는 완전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죄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든 속건제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해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무에 언급된 속죄일은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이 본인과 자기 집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회중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번 제사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지중에 지은 죄나 공동체 전체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죄의 문제들이 쌓여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일을 정해 절차를 따라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인간적인 제도로 만든 속죄에는 한계가 있고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에수님을 통해 드려진 제사는 단번에 영원한 효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드리신 제사는 완전한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그 백성과 지금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부정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날마다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담대히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25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4:33-57

제목: 부정한 것은 허물고 새로 지어라.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3. 본문읽기: 레위기 14:33-57

 

4. 본문의 내용

 

나병에 대한 규례를 지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피부와 관련한 내용을 다루더니 이후에는 의복에 발생한 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오늘은 집에 발생한 나병(구체적으로 곰팡이)에 대해서 어떻게 분별하고 처리하고 그 이후 정결의식을 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보건상으로도 상당히 청결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먼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떤 집에 나병 색점이 발생하게 되면 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신속하게 알려야 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색점을 살펴보러 가기 전에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우도록 합니다.(이는 부정함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이 그 집 안에 들어가서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고 벽보다 우묵하면 일단 의심하고 그 집을 일주일 동안 폐쇄합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살펴봐서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제사장은 색점 있는 돌을 빼내어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집 안 사방을 긁어 그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돌과 흙으로 새로 바르도록 합니다. 

 

돌을 빼고 흙을 새로 발랐는데도 만약 색점이 재발하면 제사장은 또 가서 살펴봅니다. 만약 그 색점이 집에 퍼졌으면 이는 악성 나병이라고 보고 부정하다 판단합니다. 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그 재목과 집의 모든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으로 가져가 버리도록 합니다. 폐쇄하는 동안 그 안에 들어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게 되고 그 집에서 자고 먹는 자는 그 옷을 빨아야 합니다. 

만약 고쳐 새로 발랐는데 제사장이 살펴보고 색점이 집에 퍼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고 판단하고 그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그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렇게 그 집을 정결케하고 살아 있는 새는 성 밖 들에 놓아주어 그 집을 위하여 속죄합니다. 그러면 정결하게 됩니다. 이상 나병의 규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신앙적인 문제가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 들어서 나병과 관련하여 정하다 부정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 이전에는 먹을 수 있는 생물에 대해서도 정하고 부정한 규례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나병과 관련하여 우리의 의복 문제 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공간인 집에 대해서도 오늘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정하다 부정하다는 종교적인 문제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 한정해서만 종교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거주하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에서도 늘 부정함을 멀리하고 정한 것을 선택하며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진심이 주일이라는 시간과 교회라는 공간에 한정되기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합당한 예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상의 자리에서 거룩함을 추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선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시는 이 아침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부정함이 악성이고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면 헐고 새로 지어야 합니다. 

집에 곰팡이가 생겨 돌과 주변의 흙을 긁어서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돌과 흙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곰팡이가 생겼다면 그것은 악성이라고 보고 성경은 그 집을 헐라고 말합니다. 돌과 재목과 모든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 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수리하고 고쳐서 새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완전히 헐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것도 있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일부 수리를 해보고도 문제가 여전히 반복해서 발생한다면 그것은 ‘악성’이라고 봐야 하고 ‘구조적’인 문제로 알아서 이전의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지어야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런즉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 것이 와야 하는 것은 이전 것의 개선과 수리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우리가 작은 수리와 개선으로는 불가능한 구조적인 죄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죄된 나의 죄성은 허물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거룩하게 새로 짓는 은혜가 있으시길.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24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4:21-32

제목: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3. 본문읽기: 레위기 14:21-32

 

4. 본문의 내용

 

개인적으로는 피부병에서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기 위해서 정결의식을 치루어야 했고 이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제 다룬 본문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제사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오늘은 가난한 자의 경우에 대해서 다루어 줍니다. 가난한 자라고 하더라도 속건제와 소제는 모두 드려야 합니다. 다만 그 제물의 양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에 비해서 1/3 정도로 제물의 양이 적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숫양 2마리와 암양 1마리인데 가난한 자는 숫양 1마리만 드리도록 했습니다. 소제도 일반인들은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드리도록 하는데 가난한 사람의 경우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드리도록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제물의 양이 줄어들긴 해도 그 제사의 효력이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그 효과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차이를 두어 가난한 사람도 동일한 속죄를 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추가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드리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속건제사라도 그 방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제사장은 속건제의 어린 양과 기름 한 록을 가져갑니다. 어린양의 고기는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제물의 피는 가져다가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제사장은 기름을 왼손에 따르고 오른손으로 찍어서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 이후 기름을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를 바른 곳에 바릅니다. 그리고 남은 기름은 정결함을 받을 자의 머리에 발라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저희가 레위기를 계속 살펴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표준적인 제사 방식을 제시해 주시면서도 그 예외의 상황에 대한 규정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매우 경직되어 있고 절대적이라 작은 것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피부병으로 인해 부정하다고 판단 받았다가 다시 회복되어 돌아오게 된 경우에 있어서 반드시 제사장에게로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경우는 제물의 양을 조정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준적인 기준에 비해서 1/3에 해당하는 정도의 제물로도 온전한 제사가 이루어지는데 전혀 문제가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표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준적인 기준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만약 제사장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규정을 어기고 자기 임의대로 함부로 할 경우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표준은 매우 중요합니다. 레위기에서 다양한 제사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절차를 가르치시고 그 절차대로 할 것에 대해서 요구하실 때 제사장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절차를 온전히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하고 허락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대로 변경해서도 안 되고 단순히 우리의 편의를 따라서 행동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직된 분이 아니십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조정 가능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부정한 자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하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제물의 양이 부자가 느끼는 것과 가난한 자가 느끼는 것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제물을 드리는 것이 너무 부담이 되어서 빚을 지게 된다든지 부정함에서 깨끗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리지 못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형편에 있는 자를 살펴보셨고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속죄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높고 엄격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그 기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의 능력이 그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의 영적 상태가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마음이 어려워 하나님의 기준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준에서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완전한 제물이시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온전하게 하사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23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4:1-20

제목: 부정한 중에도 발견하는 소망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70장,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3. 본문읽기: 레위기 14:1-20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나병환자가 완치되었을 때 따라야 할 절차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완치자를 위한 정결 의식에 대한 것이고 나중 부분은 완치자가 드려야 할 제사에 대한 절차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병환자였던 사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 같으면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보여야 합니다. 자기 임의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 사람을 진찰합니다. 그리고 환부가 나았으면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해서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 중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잡은 새의 피를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로 찍어서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서 정하다고 하고 나머지 한 마리 새는 들에 놓아 줍니다. 그리고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습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정결의식을 마친 것입니다. 그리고 진영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바로 자신의 장막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장막 밖에서 머물고 일곱째 되는 날 다시 모든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몸을 물로 씻고 나서야 자기 장막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가족들과 함께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치되어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온 자는 여덟째 날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년 된 흠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그리고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속건 제사를 드리는 방식과 비슷하게 제사를 드립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발가락에 피를 바랍니다. 제사장은 이어서 기름을 자신의 왼쪽 손에 기름을 바르고 오른 손가락으로 찍어서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그 남은 기름을 찍어서 정결함을 받는 자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리고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릅니다.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을 말미암아 정결함을 받는 자를 속죄하고 번제물을 잡으면 그가 정결하게 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1. 왜 환자가 완치되었으면 빨리 집으로 보내주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해보게 됨

 

공동체에 나병 환자가 있으면 공동체 전체가 알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한 자로 확정받게 되면 사람들 앞에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영 밖으로 나가서 혼자 지내야 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구성원 대부분은 그 사람이  부정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정하게 된 사람이 완치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 시라도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반드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먼저 제사장이 직접 진영 밖으로 나가 진찰을 해야 합니다.(당시 제사장은 오늘날 의사와 같은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정말 다 나았으면 제사장은 정결의식을 치릅니다. 새의 피를 그에게 일곱 번 뿌리고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몸을 씻는 절차를 밟습니다. 그렇게 진영 안으로 들어가고도 일주일을 장막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몸을 씻고 그제서야 자신의 장막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 나았으면 빨리 집에 보내주지 왜 이런 번거로운 절차와 시간을 드리는 것일까요? 

 

저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째는 공동체 모두가 이 사람을 이제부터는 정하다고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했던 자가 스스로 정하다 하거나 자격없는 자가 정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인정하지 못할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권위를 가진 제사장이 정당한 절차를 통해 판단할 때 공동체 전체가 믿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공개적이면서도 신중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부정하게 되는 것에 대한 경계를 강화시킨 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부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도 큰 피해와 불편함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공동체 밖으로 나가야 했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완치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어려서부터 보며 자란 사람은 자신이 부정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단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만약 내가 잘못해서 혹은 원인을 알지 못하지만 내가 부정하게 될 경우 공동체 전체의 안전과 거룩함을 위해서 내가 일정 기간 격리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나에 대한 거부와 거절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질병과 내가 행한 죄에 대한 것이기에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다시 공동체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는 것이라 봅니다. 

 

더불어, 사람 사이에서의 문제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해결(제사)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모든 절차를 걸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다시 온전히 세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부정함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시는 하루 되시길.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20220322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3:40-59

제목: 교회의 거룩함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3. 본문읽기: 레위기 13:40-59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서 피부 질환에 따른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는 내용인데 그 부위가 두피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의 피부가 아닌 사물에 생긴 문제를 어떻게 판단하고 처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머리털이 빠져서 대머리이거나 앞머리가 빠져 이마 대머리가 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정하다)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것은 나병이 대머리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 제사장이 확인하게 됩니다. 머리에 돋은 색점이 희고 불그스름하여 피부에 발생한 나병과 같은 것이 있으니 제사장은 나병이 머리에 난 것으로 보고 부정하다고 판단합니다. 이와 같은 나병환자들은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합니다. 그는 병이 있는 동안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물의 표면에 곰팡이가 생겼을 경우에 대해서도 판단을 해야 합니다. 털옷이나 베옷이나 가죽이나 가죽으로 만든 것에 병색이 푸르거나 붉으면 이는 나병의 색점으로 보고 제사장에게 보여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색점을 이레 동안 관찰하는데 퍼졌으면 악성 나병으로 보고 그것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이 퍼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그 색점을 빨게 하고 일주일 동안 지켜 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색점이 변하지 않았으면(흐려지지 않았으면) 불살라야 합니다. 만약 빤 후에 색점이 엷어지면 그 색점이 있는 부분만 찢어 버리면 됩니다.(번지지 않을 것으로 본 것입니다) 만약 그 색점이 다시 보이면 재발한 것으로 보고 색점 있는 것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것을 빤 후에 그 색점이 벗겨졌으면 그것을 다시 빨고 나서 정하다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나병 색점이 발생한 사물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진단하는 규례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도님들과 함께 두 가지 내용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1. 부정하다고 판단된 자는 그 부정함이 전염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오늘 본문에서 나병환자로 확정된 사람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 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지금처럼 인권이 중시되고 있는 사회에서 어떤 병에 걸린 사람에게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개인 인권에 대한 중요성 보다는 공동체의 안전이 더 크고 중요하다고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부정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함과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확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자가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때 엄중한 벌을 가하도록 했습니다. 그 당시에 공동체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가 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피부질환과 같은 문제는 아니지만 영적인 문제나 목양적인 문제로 이해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 적절한 판단과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공동체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고 질서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표지가 세례와 성찬과 더불어 ‘치리’에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건강한 교회는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런 판단을 해야 하는 이유는 공동체를 보존하고 회복가능한 대상을 살리기 위함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의심이 간다고 모두 부정하다고 속단하지 않습니다. 나병이라는 명확한 근거나 드러나지 않으면 일주일을 더 두고 관찰하면서 판단을 합니다. 그 이후에 전염성을 가지고 확산되고 있는 증거가 있다면 부정하다고 판단하고 사람들과 격리해서 지내도록 한다든지, 의복의 경우는 불태워 버립니다. 물론 태워버린 의복은 회복할 수 없지만 사람의 경우는 그 병이 회복되면 다시 그 사회 안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합니다.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복의 경우 물로 빨아서 색점이 더 흐려졌다면 그것을 태우거나 없애지 않습니다. 한 번 더 빨고 나서 정하다고 규정해 줍니다. 처음에는 나병의 흔적이 있어 보여서 의심했지만 물로 빨아 색깔이 옅어지면 한 번 빨아서 정하다고 정해주는 것입니다. 의심을 받은 입장에서는 억울 수 있겠지만 공동체의 거룩함을 중요하게 보는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점검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 못지 않게 거룩함은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