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3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3:1-17 

제목: 안수에서 믿음으로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3. 본문읽기: 레위기 3:1-17

 

4. 본문의 내용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고자 할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화목 제물로 ‘소’를 드릴 때와 ‘양’을 드릴 때와 ‘염소’를 드릴 때를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그 절차는 비슷합니다.   

 

먼저 화목제의 제물로 ‘소’를 드릴 경우 1) 제사하려는 사람은 수컷이나 암컷 중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번제의 경우 수컷으로만 제한하고 있지만 화목제의 경우는 수컷이나 암컷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2) 그리고 예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회막 문에서 소를 잡습니다. 3)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4) 그리고 화목제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게 되는데 그 내용은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과 콩밭을 떼어 그것을 제단 위의 불에 불사릅니다. 

 

만약 화목제의 제물을 ‘양’으로 드릴 경우 절차는 모두 같습니다. 다만 하나 다른 것은 양의 경우는 내장에 붙은 기름과 두 콩팥 외에 ‘꼬리’까지 떼어서 제단 위에 불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염소’를 제물로 드릴 경우는 ‘소’를 드리는 것과 동일한 절차를 따라 제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용을 마무리 하면서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고 따라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규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규례는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기름은 생명과 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콩팥은 구약에서 생각이나 감정, 생명의 자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름과 콩팥을 따로 구분해서 하나님께 불태워 드린다는 것은 제사 드리는 자의 가장 중심에 있는 생각과 가장 소중한 생명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본문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구절은 2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라고 한 부분입니다.(2,8,13절) 번제를 다룰 때(레 1:4)에도 나왔던 내용입니다. 제사드리는 자가 예물을 가지고 나와서는 그 예물을 여호와 앞에 잡기 전에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를 먼저 합니다. ‘안수’라는 것은 소유권을 상징하는 것이며, 안수 행위를 통해서 ‘제물과 제사자가 하나 되고, 제물은 제사자를 대체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레 1:4은 제사자가 안수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아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예물로 제사자는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릴 때 반드시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드려진 제물이 제사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과정을 통해서 제사자와 하나님은 다시 화목의 관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화목 제물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물에 안수하여 바치는 방식으로 화목제물을 삼으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대속 제물로 믿음으로써’ 그 효과를 얻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화목의 제사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레위기의 말씀을 따라 소나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는 것을 준비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짓게 된다면 그 죄로 인해 발생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찾아가 ‘제물에다 안수’하고 제사드리는 절차를 진행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우리의 죄를 매번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무수히 많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다 해소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로 인해 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관계를 이제 ‘믿음으로’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을 붙잡으시고 또 다시 화복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화목하게 된 관계가 더욱 풍성한 관계로 성장해 가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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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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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2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2:1-16 

제목: 한 움큼, 플러스 알파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08장.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3. 본문읽기: 레위기 2:1-16

 

4. 본문의 내용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소제를 드리고자 할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익히지 않은 것을 소제로 드리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 이후에는 익힌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다룹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소제를 드릴 때 주의사항에 대해서 말하고 첫 이삭의 소제에 대해서 다루면서 끝맺고 있습니다.  

 

익히지 않은 소제를 드릴 때 우선 고운 가루로 준비해서 가져가야하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해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가져갑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을 취하여 기름과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이것이 화제로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그 소제물 중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게 되어 있는데 이는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익힌 소제로는 ‘화덕에 구운 것’과 ‘철판에 부친 것’, ‘냄비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모두 고운 가루에 기름을 넣거나 바르는 방식으로 드려야 했다. 특히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소제물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그 중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위에 불사르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이어서 소제를 드릴 때 주의해야 할 내용이 있는데, 소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넣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소금’입니다.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 이삭의 소제를 드릴 경우는 이삭을 볶아 찧는 것으로 소제를 삼아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도록 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에서 주목해서 보게 된 내용은 두 부분입니다.

 첫째는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라고 한 부분입니다. 익히지 않은 소제물을 드릴 경우도 그렇고 익힌 것으로 드리는 소제물에 대한 설명에서도 반복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3절, 10절) 소제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곡식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와서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양이 얼마나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해준 기준이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은 그 중에 한 움큼만 하나님께 소제로 드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한 움큼 이상의 곡식 가루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은 한 움큼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곡식 가루는 자신들의 몫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 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제사를 드리는 자가 곡식 가루를 넉넉히 가져왔다면 제사장은 한 움큼을 최대한 잡아 하나님께 드려도 남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드리는 자가 남는게 아까워서 최대한 한 움큼의 양만을 챙겨서 온다면 제사장에게는 제사를 드리고 남는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의 것을 챙기기 위해서 자신의 한 움큼을 조절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울한 상상입니까? // 

저는 제사를 드리는 자가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제든 소제든 제사는 자기의 희생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것만 드리고 여유분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여유분으로 제사의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제사장의 마음에 시험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의 본연의 업무는 제사하러 나오는 백성들의 제사가 최대한 온전하게 드려지도록 해야 할 것이지 자신의 몫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약해질수록 제사장과 레위 인들의 생활이 불안정했고 그로 인해 신앙이 퇴락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누룩과 꿀을 넣은 소제물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누룩과 꿀이 당시 이방인의 제사 제물에 사용되었던 식품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만 저는 좀 다른 의미로 묵상을 해 보게 됩니다. 누룩과 꿀을 넣게 되면 우리의 입맛이 더 좋아집니다.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서 먹기에 좋은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세속적인 것의 유입을 막으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의도적으로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우리의 입 맞에는 좋지만 우리의 신앙에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소제물을 ‘소금’은 반드시 넣어야 했습니다. 이는 그 소금이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한결같음과 신실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방식은 부드럽고 달콤한 방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여 드려야 합니다. 그 신실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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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1 새벽기도회

본문: 레위기 1:1-17 

제목: 희생이 없는 제사는 없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3. 본문읽기: 레위기 1:1-17

 

4. 본문의 내용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자 할 때 어떻게 들여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릴 때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시지만 구체적으로 다룰 때에는 소나 양 뿐 아니라 새의 번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 부분은 소의 번제에 대해, 또 하나는 양과 염소의 번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새의 번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소의 번제를 드릴 때 1)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도록 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게 되는데 이는 제물과 제사자가 하나가 되고 제사자의 대체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제사자의 죄가 속죄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수송아지를 잡고(제사자), 제단 사방에 피를 뿌리고(제사장)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제사자) 그 이후 제단 위에서 불살라서 번제로 드리는데(제사장)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만약 제물이 양이나 염소일 경우에도 1) 흠 없는 수컷을 드려야 합니다. 그 이후 과정은 소의 번제를 드리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만일 새의 번제를 드릴 경우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새를 번제로 드릴 경우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예물로 드릴 수 있는데 이는 소나 양 혹은 염소로 예물을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제사자가 예물을 가져가면 제사장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고 새의 내장 안에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날개를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 불살라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 또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에서 주목해서 보게 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번제로 드릴 제물의 조건으로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리는데 ‘흠 없는 수컷’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수컷’은 제의적으로 볼 때 더 우월하게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의 조건을 단순하게 정리해 보면 자신이 기르는 가축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가축이란 단순히 기르는 동물이 아니라 그 가정의 재산이라 볼 수 있기에 자신의 소유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제물의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소중한 것’을 우선적으로 들여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고, 우리가 얻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먼저 구분해서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희생을 드리는 것이 억울하거나 손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하고 값진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먼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갚을 수 있겠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또 하나 주목하여 보게 된 것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의 새끼’도 예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의 경우는 ‘흠 없는 수컷’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고 있습니다. 새의 경우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특히 새의 새끼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새의 경우 사람이 잘 관리하기 어려운 곳에서 키워지기 때문에 흠이 없도록 관리하기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예물로 소나 양, 염소를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되 그들의 형편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까다롭고 힘든 규정을 만들어 사람들을 힘들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제사자가 아무렇게나 대충 드려도 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하시고 그 분 안에서 쉼과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없는 자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희생이 없는 제사, 희생이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오히려 희생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복을 경험하시는 복된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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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새벽기도회

본문: 시 78:56-72 

제목: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3. 본문읽기: 시 78:56-72

 

4. 본문의 내용

오늘 읽은 시편 78:56-72은 시편 78편의 마지막 부분으로 시편 기자가 하고 싶은 메시지의 내용이 좀 더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6-58절까지를 보면,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동안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손들도 자기 산당과 조각한 우상들을 만들어서는 하나님의 노여움과 진노를 만들어 냈음을 지적합니다. 

 

59-66절까지를 보면,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태도에 하나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셨고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1)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2) 대적의 손에 능력을 주셔서 3) 백성들을 칼에 넘기십니다. 아마 전쟁을 통해 심판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참아 보지 못하시고 용사처럼 일어나셔서 대적을 물리치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마지막 67-72절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되 요셉(에브라임)의 장막을 버리시고 유다 지파를 선택하십니다.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십니다. 양을 기르던 다윗을 이끌어서 이스라엘을 기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하는 구절은 72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그가(다윗이)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선택하시고 그 중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이 다스려야 하는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배반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 있겠다고 하셨던 장막에서 떠나기도 하시고 대적의 손에 자기 백성을 파시기도 하셨을 만큼 이 백성은 참으로 하나님을 힘들게 하는 백성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대적의 손에 파셨다가도 다시 구원해 오시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새로 세우셨습니다. 양을 치던 자 중에서 다윗을 이끌어 내었고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기셨습니다. 어찌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릅니다. 들판에서 양이나 치고 있던 목자에게 하나님도 다루시기 까다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긴다는 것은 리스크가 큰 모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이끌고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표현되어 있듯이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2절) 다윗은 마음의 완전함을, 손에 능숙함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꾸준히 사역해 왔지만 중심사역은 선교단체였고 청년대학생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 교회를 섬기게 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서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막상 저희 교회에 청빙을 받아 사역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늘 그런 부족함과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윗도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양 만 기르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다가 국가의 지도자를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에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 다윗이 양을 기르던 그 때의 마음과 그 때의 능숙함을 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기르고 지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 또한 그와 같은 마음과 능숙함을 선교단체를 통해서 배우고 훈련했기 때문에 그 같은 원리 가운데서 우리교회 성도님들을 잘 섬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특별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손의 능숙함으로 지도할 수 있는 목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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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5 새벽기도회

본문: 시 78:1-11 

제목: 우리가 행하고 전수해야 할 하나님의 법도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3. 본문읽기: 시 78:1-11 

 

4. 본문의 내용

오늘 읽은 시편 78:1-11은 78편 전체 72절까지 있는 내용 중 일부입니다. 앞으로 몇 일간은 시편 78편의 말씀을 묵상하게 될 듯 합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는데

 

1-4절까지를 보면,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자기의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인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전에 들어서 아는 것이고 조상들이 이미 전해 준 것이다. 그것을 자손에게 숨기지 않고 후대에 전하라는 것이다. 

 

5-8절까지는,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 법도를 정하고 명령하여 그들의 자녀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태어날 자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1)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기 위함이요 2)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3)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4) 조상들의 죄를 따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9-11절에서는, 그 예시로 에브라임 자손의 경우를 듭니다. 에브라임 자손이 무기를 갖추고 활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날에 물러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1)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2) 그의 율법을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3)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기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대한 간략한 내용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하는 구절은 5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준이 바로 율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도를 자손들에게 대대로 알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사항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고 마땅히 자녀들에게 그 법도를 가르치고 지키도록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의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세워주신 법과 질서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 국가의 시민이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잘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 나라의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나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 내용을 알아서 그 나라의 가치관과 질서대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도를 배워서 그 법도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상의 법에 휩쓸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저항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명령은 그 법을 나만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다음 세대에게도 가르쳐서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는 위기 중에 하나는 신앙이 다음 세대에 제대로 전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대간 신앙의 전수가 어려워질 뿐 아니라 인구도 줄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더욱 급격한 세대가 단절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속화가 심해지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자녀 세대에게 전수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성경의 내용만 전달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교회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운영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과 질서라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도 반영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세상과 비교해 봤을 때 우월하다고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음 세대도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산울교회 성도들 가운데 함께 하길 기도해야 할 줄 압니다. 교회와 가정 안에 하나님의 법도가 바로 세워지고 그 교훈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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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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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새벽기도회

본문: 시 77:1-20 

제목: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나이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3. 본문읽기: 시 77:1-20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분량 좀 많은 편입니다. 일단 전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시편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 전반의 흐름을 살피고 그 중 한 구절을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4절까지를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막상 환난 날이 되어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 같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응답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도 있지만 기도를 들어주시는 않는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에 심령이 상하고 마음이 괴로워합니다. 

 

5-9절까지는, 시편 기자의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곰곰이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혹시 주님이 나를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닐까? 이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인자가 끝났고, 하나님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여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욱 고통스럽고 두려운 듯합니다. 

 

10-15절까지를 보면, 여기서부터 시편 기자의 태도가 좀 달라집니다. 처음 하나님을 탓하던 분위기에서 자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옛 적에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겠다고 말하고 정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되뇌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 중에서 자기 백성들을 주의 팔로 속량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찬양합니다. 

 

16-20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옛 일 중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떠올립니다. 그 때 주의 길은 바다에 있었고, 주의 길이 큰 물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물에는 주님의 발자취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발자취가 물 위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일하셨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주목하여 본 구절은 19절 말씀입니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우리도 종종 시편 기자와 같은 고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필요한 순간,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질 때입니다. 물론 한 두 번의 기도와 하루 이틀의 금식이 아닙니다. 더 많은 시간 더 긴 씨름을 하며 찾고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른 척 하신다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우리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괴롭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몸부림치던 시편 기자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바다에 구원의 길을 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 바다 위에 주님의 발자취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홍해를 갈라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던 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인데 그 흔적이 지금 홍해에는 없다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그 흔적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옛적에 행하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 길이 나있지 않다고 해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심판하셨던 역사적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 자신이 바로 그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거두어진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것들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그 흔적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 믿음이 흔들리고 내 마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에서 정말 중요한 순간에 ‘주님의 발자취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을 때’(77:19) 낙심하거나 의심하지 마시고 주 앞에 나아와 주의 행해신 모든 일을 읊조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근거로 믿음으로 인내로 기도하며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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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3 새벽기도회

본문: 시 76:1-12 

제목: 평화를 유지하는 비결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3. 본문읽기: 시 76:1-12 

 

4. 본문의 내용

 

오늘 함께 읽은 시편 76편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3절로, 여호와 하나님은 강하고 힘 있는 분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처소가 있는 곳은 안전하고 평안하여 전쟁의 무기가 필요없는 곳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4-9절에서 하나님은 대적의 산을 빼앗는 분이십니다. 마음이 강한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도움을 얻을 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야곱의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면 모든 병거와 말도 무력해지고 맙니다. 감히 주님의 목전에 설 자가 없고 땅은 두려워 떨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실 때  대적자들은 떨고 무력해질 정도로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십니다.  

 

마지막 10-12절은 하나님 앞에서 노여움을 발하던 자들은 오히려 주를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노여움을 제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경외하고 예물을 드리게 될 정도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편 76편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주목하여 본 구절은 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하나님께서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머무는 곳, 자기 백성의 땅에 전쟁과 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오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인류가 구하고 바라는 궁극적인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게 하신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살과 방패와 칼과 같은 전쟁 무기를 모두 꺾어 버리고 녹여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무기들이 필요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전쟁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주변 나라에 평화의 마음이 갑자기 넘쳐흘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강하고 힘있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서와 외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적이 감히 우리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도 그와 같은 자신감이 있으니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여 전쟁 무기를 많이 만들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예전과 같이 칼과 방패, 화살을 만들어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든 대상과 함께 전쟁을 치르듯 경쟁하며 싸워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예민하고 민감합니다. 작은 일에도 과도하게 방어적이 되거나 쉽게 공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늘 피곤해 지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평안을 잃고 사람과의 대면을 축소하거나 거부하곤 합니다. 그래야 그 나마 자기 자신의 멘탈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하게 되는 것은 회피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맞부딪혀 싸워 이길 힘을 기른다고 평안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를 믿고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그 해결의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선을 행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고 확신하게 될수록 우리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의 성을 지켜주시고 우리 가정의 파수꾼이 되어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좀 더 안심하게 되고 타인에게 대해서도 좀 더 여유있게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덜 예민해 지게 되는 것이지요. 예민함을 극복하는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풍요로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화살도 칼도 방패도 버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화살도 있고 칼도 있고 방패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대를 공격하는 도구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무리하게 공격하는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크고 힘있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는 하루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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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2 새벽기도회

본문: 시 75:1-10 

제목: 더딘 심판도 복음입니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3. 본문읽기: 시 75:1-10

 

4. 본문의 내용

 

오늘 함께 읽은 시편 75편의 말씀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정한 기한이 이루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시편 기자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악인들의 오만함과 악인들의 교만함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경고하십니다. 세상 곳곳에서 자신을 높이는 자들이 일어나지만 참된 재판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낯선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라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손에 있는 잔은 ‘진노의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하다는 것은 포도주의 강도를 더 쎄게 하기 위해서 섞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으로 하면 폭탄주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독한 술이 손에 들려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더 강력한 것인지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의 찬송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악인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의인들은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주목하여 본 구절은 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우리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질문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데 왜 세상은 악인들이 승리하는 것같고 오히려 의로운 자들이 박해를 받는가? 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들은 부정하게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힘을 얻고 부를 얻으면서 오히려 힘없고 정직한 자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현상들을 날마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반은 더욱 견고해 지는 것 같고 무너지지 않는 산성 같습니다. 그러나 공의로운신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바로 잡지 않고 방치해 두고 계시는 것 같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르게 심판하시는 날이 분명히 있고 그 날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기약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보이면 바로바로 해결하지 않으실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보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소 모순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신 듯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정말 누군가를 믿는 다는 것은 내가 믿던 대로 나타나지 않는 순간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혹은 믿음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악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이 잘못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바로 최종적인 징계와 심판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다시 회생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즉각적인 심판이 아니라 다소 긴 시간을 기다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혹 돌아서지 않을까?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을까? 시간을 주고 기다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악한 행동에 대해서 심판이 더딘 이유는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인내와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기회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더딘 심판이 우리에게 복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한 기한이 되면 모든 것을 바르게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가시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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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1 새벽기도회

본문: 시 74:12-23 

제목: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3. 본문읽기: 시 74:12-23

 

4. 본문의 내용

 

오늘 본문은 시편 74:1-11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74:1-11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 진노하시고 영원히 버리시는 것 같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이라면 그 나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의 악행을 방관하시고 모른 척하셔서 이스라엘이 수치와 모욕을 당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표적도 없고 선지자도 없습니다. 고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에 대한 기약도 없기에 답답할 뿐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거두어들이신 손을 펴서 다시 일해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고,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십니다. 또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셔 사막에서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기도 하시고 흐르는 강을 마르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며 질서를 부여해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자기 백성을 도와주지 않으시고,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모른 척 하고 계신 것 같아서 시편 기자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원수의 비방과 조롱 속에서도 가난한 자들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언약을 눈여겨 봐 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학대받는 자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와 억울한 자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대적자들의 소리를 잊지 마시고 심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요청으로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볼 때 시편 기자의 억울함이 아직 다 해결된 것 같지 않습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주목하여 본 구절은 18절에 있는 짧은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시편 기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주를 비방하고 있고 모욕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으로 오래 간직해 달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그와 같은 악행을 기억하사 반드시 심판해 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의 악함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시거나 잊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있으십니다. 그 행위를 차곡차곡 쌓아 놓고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죄악에 대해서 심판을 쏟으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는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의 또 하나의 간절한 소망은 이것입니다. 약한 자를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 억울한 자의 생명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약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들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은 늘 그들을 주목하고 챙겨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관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자들의 삶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금전적인 가난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선교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세상은 그들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크고 대단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작은 것부터 시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대단한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처럼 작고 약한 것,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귀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주목하고 기억해 섬길 수 있는 은혜가 있는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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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8 새벽기도회

본문: 시 73:1-16 / (추가로 17-19절)

제목: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1. 환영과 대표기도
  2.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3. 본문읽기: 시 73:1-16

 

4. 본문의 내용

오늘부터는 묵상 본문이 요한복음에서 시편 말씀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으신 시편 73편1-16절의 말씀은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첫 부분은 시편 기자가 직면한 신앙적 위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으로 배우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라고 볼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바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편 기자는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악인들의 형통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 되고 맙니다.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능욕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신성모독의 말을 하는데 하나님은 아무런 심판을 하시지 않고 그들은 여전히 평안하고 부유해 지는 것을 시편 기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낙심하게 됩니다. 그 동안 정결하고 흠이 없게 살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이 실로 헛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신앙의 내용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에서 그는 종일 재난을 당하는 것 같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와같은 시편 기자의 고민과 고통을 고스란히 오늘 본문이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5. 함께 나눌 구절과 말씀

 

제가 오늘 시편 말씀 중 주목하여 본 구절은 2-3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믿음과 신앙이 좋은 분들이 종종 시험에 빠지거나 낙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현실 세계에서 적용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될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길 때입니다. 

 

분명히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자에게 선으로 갚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악으로 갚으시는 분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세상의 모습을 보면 선을 행하는 자가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악을 행하는 자는 부당한 이익을 취하면서도 마치 정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처럼 당당하고 오히려 자신이 빼앗아 가난하게 된 자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강포합니다. 

 

이런 현상을 반복적으로 직면하게 될 때 신앙인들이 직면하는 위기는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걸려 넘어지거나 미끄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지거나 낙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믿음의 내용들을 버리고 세상의 질서를 따라서 악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믿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의 위기는 신앙을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악인들의 잘 됨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신앙의 자리에 있고 종교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자꾸 그들을 향하고 있고 그들의 잘됨에 대한 부러움을 가지게 됩니다. 질투하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님의 품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앞의 경우가 신앙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신앙 안에 있지만 세속을 지향하는 세속적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다루고 있지 않지만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7-19절) 시편 기자는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깨닫게 됩니다. 내가 부러워했던 그들의 자리가 얼마나 미끄럽고 위태로운 곳인지를 인식하게 됩니다. 잠시 후면 그들은 모두 파멸에 떨어지고 황폐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시편기자가 느끼는 고민과 갈등이 있으셨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그 믿음 포기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인내하심으로 견디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 예배할 때 주시는 주님의 말씀,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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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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