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시편 39편] 때론 누군가에게 성경의 해석학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사치처럼 들립니다. 가난하고 억울하며 병들어 절망한 인생들에게, 높이시는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고쳐주시는 하나님은 학문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배움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른 해석을 요구해 성경 읽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면, 기독교는 우리에게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순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까워지게 그리고 바르게. 바르게 하겠다고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리]


1. 시편 기자가 느끼는 인생의 한계성(끝이 있으며, 길지 못하다)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라.(셀라)


 : 그래서 인생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순간에도 모두가 허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만큼 우리 인생은 장담할 수 없이 짧고 약한 것이다. 하루살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2.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1~3절. 자신이 조심하여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려고 잠잠한다고 고백, 그래서 답답하다고 고백)


   : 이 짧고 약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잠잠하며 삼가하는 시편 기자의 모습을 본다.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도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1절) 혹 선한 말도 조심함은 그 와중에 작은 잘못이라도 하나님께 할까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작고 미력한 인생이라... 작은 죄도 조심스럽다. 


11절.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셀라)


3. 시편 기자의 구체적인 상황


13절.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 시편 기자는 병 중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 또한 인생의 한계를 느끼며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병은 중병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조심하게 된다. 특히,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악인을 앞에 두고서라도... 선한 말일지라도... 작은 실수와 범죄로도 쉽게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겸비하고 있다. 


그래도 그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묵상]


나의 간절한 바램도 마찬가지다. <나의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나의 아내가 난소암 3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마친 것이 만 2년 전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항암치료 후 중요하다는 2년의 시간이 지난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재발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왔다. 내일 병원에서  PET CT 를 찍고 그 결과를 들으면 지난 2년간의 시간에 대한 중간 평가(한 텀의 기말평가와 같은)를 받게 된다. 시편 기자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싶다. 


주여, 나의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지난 2년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강건하게 지켜주소서! 연약한 육체의 한계를 목도하고 나와 아내를 겸비하게 하신 주여,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해석이 필요없이, 이 구절은 그 쓰여진 그대로 나의 기도가 되고, 소망이 되며 응답이 되리라 믿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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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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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3편]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많이 하게 될 말 중에 하나가 "할렐루야"보다는 "어찌하여"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까지"일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자연스러움이고 성숙으로 가는 과정이다. 거기에서 자신의 한계와 복음, 그리고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주님도 마지막 순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씀하셨다. 


[정리1]


1. 시편 기자의 탄식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절.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 시편 기자는 고통의 끝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지 가늠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고통의 원인자(원수)에 대한 신원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탄식이며 불평이라 볼 수 있겠다. 


2. 시편 기자의 간구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4절)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 이런 식으로 더 가다가는 자기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기도 하면서, 결국 자신이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너무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달라고, 지켜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할 것 같다고, 질 것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 참된 신앙과 기도란 바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토설이다. 그 토설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기독교다. 


3. 시편 기자의 의지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고 했다. 그것이 더 늦기전에 도와주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포기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후자의 개념도 있으리라 본다. 



[정리2]


1.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보다 늦게 혹은 훨씬 늦게까지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생각한 최선을 다하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지점까지 힘들게 참고 갔더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 그래서 우리는 견딜 수 없어, 실패하거나 배신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게 된다.

  우리 힘으로만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배신과 실패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의 무력함을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요청할 뿐이다. 


3. 그래서 우린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게 된다. 

실패하거나 배신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실패와 배신 속에서도 사랑으로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은혜며 하나님의 구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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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5장 묵상과 적용] 평화란 선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선을 지키는 배려와 양보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용납하실 수 없는 예루살렘의 죄

  1) 만일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며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2)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 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에 불과하다. 

  3) 하나님이 그들을 치고 때리는데도 자신들이 징계를 받는 줄을 모른다. 얼굴이 바위같이 굳어 돌아오기를 싫어한다. 

  4) 하나님께서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어찌 이 일들에 대해서 벌하지 않겠느냐?

   (1)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 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인다. 

   (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

   (3)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하다. 무시하고 귀 기울이지 않음.

  5)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되고 이 백성은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를 것이다. 

   (1) 네가 모르는 나라를 통해서 너와 너희 자녀들이 먹던 것을 그들이 먹게 하겠다. 

  6)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 여호와께서 왜 이렇게 되도록 하셨는가? 하고 묻는 자가 있다면

   (1)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땅인 아닌 곳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도록 하리라 하라. 

  7)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한다.

   (1) 만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정함. 그래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넘지 못한다. 

   (2) 그런데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한다.

   (3) 너희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고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면,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한다. 

   (4)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5)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정리2. 내용을 풀어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말씀하신다. 


1. 단 한사람이라도 정의와 진리를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이 없다. 

2. 하나님이 잘못하여 때리고 징계를 해도 이들은 얼굴이 굳은 바위라 깨닫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를 기대하겠는가!

3. 내가 잘 먹여서 풍요롭게 하면, 그 힘과 여유로 창기를 찾아가니 어찌 재앙이 없겠는가!

4. 여호와의 존재감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 따라서 여호와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5. 만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한다. 심지어 성난 파도조차도 그렇다. 그런데 이 백성은 반역하는 마음에 그 한계를 넘는다. 

6. 악인들이 자기의 이익을 얻겠다고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 

7. 선지자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또한 좋게 여기니... 이 나라에 변화과 개혁은 물건너 갔다고 봐야 한다. 


이 정도니, 어찌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시겠는가!!


[정리3. 내용에서 묵상하고 적용해 볼만한 것은....다음과 같습니다.]


1. 만물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하는데, 사람 만큼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군요.


하나님께서는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으셨습니다.(22절) 그래서 성난 파도가 거세게 불어도 그것을 이길 수는 없게 하셨다고 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정하신 한계 안에서 움직입니다. 성난 파도라도 결국 그 한계를 넘어 육지를 삼키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그 정한 한계를 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의 죄는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고 맙니다. 하나님을 향한 죄의 허용도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허용된 죄(용납하실 수 있는 죄)까지도 넘어서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은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심판을 받고 재앙을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이 허용된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팍팍한 한계를 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고 하셨으니까요. 어찌보면 매우 넓은 한계를 주신 것이고 그 한계는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마침내 그 한계를 넘어설 때 심판과 재앙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고,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 어떤 행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오만과 부주의함이 그 선을 무시하곤 합니다. 그 때 관계는 깨지고 평화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평화란 선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선을 지키는 배려와 양보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부조리한 사회: 거짓말하는 선지자,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을 선호하는 백성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5:31)


진리를 말해야 할 선지자가 거짓말을 한다. 하나님의 권력을 대변해야 할 제사장이 자신의 권력으로 다스리려 한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질서를 왜곡하는 것이며 본질을 훼손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문제는 백성들이 그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진리를 선언하는 선지자를 백성은 싫어하며, 하나님에게만 의존된 제사장을 백성들은 싫어한다. 누가 누구에게 악영향을 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서로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상황 속에서 누구하나 이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도 내부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외부적인 파괴가 들어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내부적 변화를 이끌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외부적으로 이들을 흩으시며 이들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가? 악의 구조, 변화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지금은 내부적으로 변화를 열망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자정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이번 대선도 그런 자정 능력의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이런 노력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아직 소망이 있다는 것이니 다행이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이런 모든 자정능력이 그 결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구조적 악의 패턴에 의해 잠식당할 때, 그래서 역시 안돼라는 의식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생각을 짓누를때... 정말 그 때가 되면 우리의 마지막이 어찌될찌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외부적인 힘으로 깨뜨려지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번 대선 이후를 기대해 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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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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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4장]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으로 한계를 느끼게 끔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한계를 느끼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참담한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선하심을 무시했는가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무시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봅시다]


1.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해서

  1) 여호야김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바벨론을 섬기게 되었다.(친 애굽적 왕) 

  2) 3년간 바벨론을 섬기다가 애굽에게로 돌아서고 바벨론을 배반한 셈이 되었다.

  3) 바벨론에 의한 큰 침공을 당하게 됨(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

   (1) 갈대아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의 부대를 통해 유다가 고통당하게 됨

   (2) 이런 일이 임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으로, 유다를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려 함.

   (3)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이를 사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4)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됨.

  5) 이 때를 기점으로 애굽 왕이 다시는 유다로 오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성함 때문에.


2. 유다 왕 여호야긴에 대해서

  1) 여호야긴의 나이 18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림.

  2) 그의 어머니는 느후스다요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3) 여호야긴도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4) 바벨론의 침공

   (1) 바벨론 왕 여덟 째 해에 바벨론이 올라와서 유다의왕과 신하들이 끌려옴

   (2)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다. 

   (3)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버림.

   (4) 비천한 자만 그 땅에 남게 됨.

   (5)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권세자들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갔다. 용사 7000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1000명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갔다. 

  5)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의 숙부(요시야의 아들)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시드기야라 함.


3. 유다 왕 시드기야에 대해서

  1)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림. 

  2)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름.

  4) 시드기야가 나중에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내 표현으로 바꾸어 정리합니다.]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워진 여호아하스는 석달만에 애굽 왕 느고에 의해서 잡혀가고, 애굽은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으로 세운다. 여호야김은 친애굽적인 왕이었으나, 바벨론이 침공으로 어쩔 수 없이 바벨론을 섬기게 된다. 3년을 그렇게 섬기다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으로 돌아서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된다. 결국 유다는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이와 같은 사건을 성경기자는 하나님이 유다에게 내린 재앙이며 예언하신 바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평가했다. 특히, 므낫세의 죄가 너무 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사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국제 정세적으로는 이때부터 애굽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여호야김이 죽자 유다는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왕으로 세운다. 여호야긴은 석달 밖에는 다스리지 못한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유다의 왕인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지 그리고 신하들, 용사와 장인들을 모두 사로잡아 갔다. 그리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이름을 시드기야라고 바꾼다. 이로 인해 엘리트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유다 땅에는 비천한 자만이 남겨졌다.


시드기야는 11년간을 통치했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선을 행하지 못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신함으로 바벨론의 미움을 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도 한계를 느끼셨다.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4절)


우리 하나님도 한계(?)가 있으시다는 말이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인내가 무궁하시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용서에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히 언급되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내와 사랑의 크기는 우리의 모든 죄를 넘어서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없이 끝없이 그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방종으로 치닿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참으심을 무시하듯 행할 때, 하나님은 그 용납의 한계를 정하시고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신다. 유다의 상황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과 내일 살펴보게 될 왕하 25장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방종을 방관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용납하시지만 무시를 받거나 조롱을 받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지만, 쉬운 분은 아니신 것이다. 그분의 자비를 개선의 기회로 잡지 못하고 방종으로 행하고, 그 분의 선하심을 은혜와 감사로 알지 못하고 쉽게 여길 때 하나님은 모든 자비와 용납과 선하심을 거두시고 그들의 오만 방자함에 진노의 잔을 쏟으신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으로 한계를 느끼게 끔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한계를 느끼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참담한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선하심을 무시하셨는가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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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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