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9-11>(정리하기)

지금 본문을 살피기 전에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논리적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고 그 마음은 자기비움을 통한 낮아짐 곧 죽음에까지 낮아지는 태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바로 그와 같은 낮아짐의 절정이 담긴 것임을 예로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2:1-8)

1.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를 지극히 높였다.(9절)

  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절)

  2)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0절)

  3)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11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이 말씀은 어떤 논리적 전개로 이어지는 것인가?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끝이요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하나됨을 이루고, 교회의 하나됨(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이 허물어짐)을 이루었듯이 교회 안의 성도들간의 갈등(시기와 투쟁)도 성도들 상호간의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서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2)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희생한 사람들의 결말은 무엇인가? 아무도 그를 인정하거나 높임이 없이 잊혀지고 무시됨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오히려 지극히 높이셨던 것처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한 성도의 가치를 높이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도 복음 전하는 중에 '매임'을 당하고, 바울을 시기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위임받은 사역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확대되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넘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속에서 담긴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허무한 자와 같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죄를 구속하여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를 의지해서 살아가고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소망의 근거가 되고 메시지가 된다. 

[묵상] 지금은 십자가의 시대다. 기독교적 상황이 우울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도 내적 소망이 없는 냉소적인 시대다.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적극적인 열심도 아니고, 낭만적인 희망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듯이 성도와 사역자들은 죽음과 절망임을 보면서도 십자가로 나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수치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갔던 자들을 높이사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보이실 것이란 믿음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복음과 함께 수치를 당하고, 지금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낮아지고 녹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살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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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5-8>(정리하기)


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직접적인 권면)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데.(5절)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새번역)(6절)

  2)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8절)

  3)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8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정리해서 말하면, 바울이 품으라고 요청한 예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가?(태도인가?)

  1)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나, 동등함을 당연한 것(권리)로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아버지의 권리, 시민의 권리, 대통령의 권리, 목사의 권리, 성도의 권리 등)조차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주장하지 않았다.) 

    [묵상] 요즘처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가 있었을까? 민주사회가 되면서 소비자지상주의가 되면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시민, 어리석은 소비자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권리주장'의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해 주어야 하는 재판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은 취할 권리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장하며 긴장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주장하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다. 권리 주장에 자신이 누려야 할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양심이 증언할 것이다.)


  2)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사람이 되셨다. 이와 같은 낮아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상] 낮아짐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낮아지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기 위함이고, 낮아짐을 통해서 인간의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지만 인간의 수준(죄있는 인간의 수준)이 되지 않으셨다.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낮은 방식으로 상대하셨지만, 예수님은 높은 수준으로 상대하셨다. 이는 그들과 같아지시기 위함이지만 그들을 높이시려는 그 분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자기를 낮추는데 그 낮추는 지점이 '죽음'까지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대속'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사건이다. 죽으심이 없이교회의 하나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묵상] 우리가 성숙한 성인이라면, 성숙한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이 어느 정도 낮아지는 자리까지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양보는 있고, 어느 정도의 자기 희생이 있다. 교회는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이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만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죽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거기서 하나됨의 꽃핀다. 문제는 누구를 죽이느냐다. '상대를 죽여서 하나를 만들 것인가?' 아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예수님은 누구를 죽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셨고, 자신이 직접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셨다. 


2. 바울의 이와같은 '옳고, 자기희생적 권면'에 저항하고 싶은 논리는 없는가? 

  이쯤되면 우리는 묻는다. 그 말씀이 숭고하긴 하지만 결국 자신만 오해받고 희생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더 악하고 더 부족한 사람이 남아서 그들의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선한 자가, 겸손한 자가 희생하고 사라지면 그 교회는 덜 선한 자와 덜 겸손한 자들에 의해서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빌 1장에서 매인 상태에서 받았던 생각들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복음 전하는데 탁월하고 복음의 메시지가 분명한 제가 왜 잡힌 것입니까? 저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메시지가 불분명한 자들은 저렇게 활개치고 있는데... 저를 시기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애쓰는 자들이 저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왜 이 시기에 접니까? 뭔가 실수하신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을텐데, 그는 답을 찾은 것이다.(빌 1장에서) 그러니까 오히려 빌립교 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다.(예수님도 그러셨으니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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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 (2016.6.26)


제목: 다 예수를 버리고

본문: 마 26:31-46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직면해야 했던 것에 대해서. 

  홀로가심, 배반당하심 -> 배반한 자를 위해서 십자가로 향하심. 


 * 음질이 좋지 않습니다. 이어폰을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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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다. 


2.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1) 하나님께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하리라. 

  2) 그 날에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의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라.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다. 


  3)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지만, 여호와가 그 날에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고, 탄 자를 미치게 할 것이라.

  4) 유다의 우두머리들은 마음 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는다 할 것임.

  5) 그 날에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하고,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할 것이니,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다 

  6)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할 것이다.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하려 함이다. 

  7)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 그 날에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편에 서고 주변 나라들은 취하게 하여 그들을 상하게 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스가랴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와 많이 중첩된다고 여겨지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스가랴의 이미지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3.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라. 

  1)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와 장자를 위해 통곡하듯 하리로다. 

  2)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라. 

  3)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한다.

   - 그 고통과 아픔이 개별적으로 모두에게 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그래서 각 지파와 사람들이 애통해 한다고 말하는 것인듯)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으로부터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회복된 예루살렘으로 인해 주변 나라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예언)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스가랴 서는 회복(성전)이 지지부진하던 중에 이들을 독려하면서 주어진 말씀, 더 나아가 단순히 성전의 회복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회복될 것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반면 요한계시록은 고난과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스가랴서를 포함한 묵시의 말씀들을 통해서 종말론적인 회복과 승리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2. 그 날에는 그 중에 약한 자가 그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사자 같을 것이라.(8절) 완전히 새로워지고 강해지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말한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부활체의 약속(고전 15장)이 생각나는 말씀이다. 


3.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을 애통(11절)은 매우 크고 절절한 애통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한다.(10절) 자신이 찌를 자를 보고 애통하게 된다는 말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죽인 사건이 연상된다. 유대인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심으로(성령을 부어주심) 그들이 자신들이 행한 악에 대해서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신약적 맥락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스가랴와 신약 사이에 이런 신학적 가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는 어렵다. 다만, 스가랴서의 표현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신약의 내용(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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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22편]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육체적 아픔이 아니라 영적 아픔이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에 대한 아픔이다. 왜 마지막 순간까지 없는 자처럼 침묵하시며 나를 구원하시지 않는가! 우리가 어찌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정리1]


1. 신음하고 있는 향해 대답이 없으신 하나님(1-21절)


  1절.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2절)


: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자가 도움이 있지 못하고, 오히려 비참한 형국에 빠져 사람들의 놀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벌하시지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비참하다. 원수들이 자기의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가지려고 하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절규하듯이, 한탄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2.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라.(22-31절)


[정리2] 


1. 앞 부분의 내용과 뒷부분의 내용이 아직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2. 앞 부분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는 중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예수님의 처지를 잘 묘사해주고 있다. 


3. 예수님이 당한 고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단순한 육체적 아픔과 죽음이 아니라, 버림받은 것과 같은 느낌과 상황.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음과 그 동안의 나의 믿음과 신앙이 헛된 것이었다는 지울 수 없는 후회...


4.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렸다가 아니라, 자신를 보낸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고통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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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3편]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많이 하게 될 말 중에 하나가 "할렐루야"보다는 "어찌하여"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까지"일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자연스러움이고 성숙으로 가는 과정이다. 거기에서 자신의 한계와 복음, 그리고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주님도 마지막 순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씀하셨다. 


[정리1]


1. 시편 기자의 탄식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절.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 시편 기자는 고통의 끝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지 가늠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고통의 원인자(원수)에 대한 신원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탄식이며 불평이라 볼 수 있겠다. 


2. 시편 기자의 간구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4절)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 이런 식으로 더 가다가는 자기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기도 하면서, 결국 자신이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너무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달라고, 지켜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할 것 같다고, 질 것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 참된 신앙과 기도란 바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토설이다. 그 토설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기독교다. 


3. 시편 기자의 의지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고 했다. 그것이 더 늦기전에 도와주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포기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후자의 개념도 있으리라 본다. 



[정리2]


1.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보다 늦게 혹은 훨씬 늦게까지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생각한 최선을 다하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지점까지 힘들게 참고 갔더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 그래서 우리는 견딜 수 없어, 실패하거나 배신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게 된다.

  우리 힘으로만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배신과 실패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의 무력함을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요청할 뿐이다. 


3. 그래서 우린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게 된다. 

실패하거나 배신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실패와 배신 속에서도 사랑으로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은혜며 하나님의 구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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