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뉴시티교리문답03


문3] 하나님께는 얼마나 많은 위격이 있습니까? 

답] 한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있습니다. 


[암송구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핵심덕목] 경외

보고(see), 느끼고(feel), 행하는(do) 태도

- 산이나 바다에서 멋진 장면을 보면, 감동하게 되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자 한다.    

- 대상은 크고 위대해 보이는 반면, 상대적으로 나 자신은 작아지고 초라한 느낌


[문답목적]

  1. 하나님을 완전하게 예배하려면 하나님의 존재(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 한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성품(존재)과 행한 일(사역)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2. 하나님께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있고 각 위격은 온전한 하나님이자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 존재 방식에 대한 이해를 도움


<활동 퀴즈> (교재. 34쪽) 질문하면서 답하면서 교육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1.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거짓)

 2. 하나님은 한 분이다.(참)

 3. 성부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다.(참)

 4. 하나님은 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참)

 5. 성자 하나님은 마리아가 잉태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셨다.(거짓)

 6.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시다.(참)

 7. 삼위일체의 위격은 저마다 구별된 역할을 맡고 계시다.(참)

 8. 성부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거짓)


[토론문제]

 1. 성부, 성자  성령으로 역할이 구별되지만 가치는 동등하다는 마은 어떤 뜻인가? 

- 쌍둥이 조차 차이와 차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르다. 

 2. 하나님 한 분 안에 계신 세 위격이시라는 것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 하나님의 형상 안에 공동체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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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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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해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의 권면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의미를 살펴보자.


1. 바울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서 서로 종노릇 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서로 별개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권면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삶>과 연관된 삶이다. 


2.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다. 이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이 대조됨을 말한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육체의 욕심을 쫓지 않는 삶과 관련되어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바울은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단순한 대조라기 보다 적극적으로 서로를 대적하는 관계로까지 대조시킴으로서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택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3.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한다.(18절)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순수 복음>이 주고 있는 삶이다. 자가의 의를 근거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근거로 살아가는 삶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임을 알수 있다. 


 정리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구원을 위해 율법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삶(의무 혹은 정죄)에서 자유로운 삶이지만,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랑의 종노릇 하는 자리로 자신을 드리도록 하는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인 것이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인 항목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언급된 내용만이 전부는 아니다. 육체의 일이란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16절)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이, 육체와 관련된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영육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한, 육체의 일이란 육체의 욕심(즉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행동을 하는 삶)을 따라 사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다.(17절)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육체의 욕심, 소욕>대로 살지 않는 삶을 말한다. 본능적, 동물적 욕구와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으로 다스리며 사는 삶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인 것이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육체의 소욕을 쫓는 것에 혈안이 되어 사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순수 복음'을 자신의 육체적 소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한 사람이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의 열매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를 말한다. 그 내용들이 모두 동물적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없는 것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운 삶(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열매인 것이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순수 복음>을 올바로 믿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순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육체의 소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그의 인간적인 욕망도 함께 못 박혔듯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와 같은 존재여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헛된 영광을 구하거나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는 식의 절제되지 않은 육체적 소욕으로 말미암은 행위들을 삼가해야 한다. 


[묵상]


1.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의 의미


2.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


3.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의 의미


4. 순수 복음 안에서 '거룩한 삶'의 위치(율법적 의의 근거는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의 삶)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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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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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정리]


갈라디아서 내용의 큰 덩어리 중 하나는 1:6-2:21(본론1)까지다.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난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해서 바울 자신의 사도성과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사람,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2:15-16을 통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전해지는데,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로마서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근거해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폐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세운 것이기에,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받은 후 추가적으로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요구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지를 통해서 볼 때, 바울이 경계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변질시켰던 <다른 복음>의 내용이 의로움을 얻게 하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추가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의 말씀 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할례'를 덧붙임으로 의와 완성을 이루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다.(할례와 더불어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본문]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해설]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본론을 3장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은 첫번째 내용은 <책망>이다. 첫번째 본론의 시작도 책망(1:6-10)이었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써내려가면서 중간 중간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한 복음을 통해 세운 교회인데 너무나 속히 <다른 복음>에 넘어지는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차분하게 편지로서 잘 가르치고자 하지만, 문득문득 올라오는 감정이 그의 글에 모두 묻어난다 하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 보는 것 같다. 인간적이라고 할까? ... 바울의 감정이 묻어나는 글이라 함께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1.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꾀임에 넘어갈 수 있는가!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미음이 아니더냐!)

3. 너희가 어리석게도 성령으로 시작해놓고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 복음(믿음으로 의롭게 되는)을 받기 위해 많은 괴로움을 통과해서 받았는데..헛된 것이란 말인가!


본문에서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 3절)


갈라디아 교회들의 어리석음을 두 번이나 말하고 있다. 바울의 답답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보인다. 바울이 생각할 때는 왜 이렇게 생생한 복음을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어리석게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는지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바울의 심정이지 않나 싶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표현은 그 당시 북 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런 표현을 들어서 갈라디아서를 받는 수신자가 북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들임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1차 전도여행이 아닌, 2차 전도여행 이후라고 기록연대를 잡으려 한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인데, 여기는 처음부터 갈라디아 지역은 아니었고 북갈라디아지역이 확대되어서 후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흡수된 곳이라 한다.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 교회들이 받은 성령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이 표현은 2장 15-16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곳에서는 '의롭게 됨'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받은 것이 <의롭게 됨>이라는 표현에서 <성령을 받은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주제와 관점을 조금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보인다.(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그러나 칭의와 성령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는 아니다. 의롭게 됨과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주제를 넘기고 있는 것은 새로운 논지로 들어가기 위한 바울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 본문에서 볼 수 있겠지만, 살짝 맛만 본다면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이라는 관점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게까지 확대된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약속>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본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자.



[적용]


1. 바울의 흥분과 감정 노출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덜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어리석다는 표현을 2번이나 반복하고, 1장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두번이나 반복했다. 


매번 그러면 안되겠지만, 오히려 감정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상대로 하여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논지 뿐 아니라 <강도>까지도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글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읽어낸다.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바울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 낸다. 아니 어쩌면 바울은 감정까지도 전달되도록(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오해를 피해 안전하게 글을 쓰는 것보다 자극적이고 그래서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길로 빠지고 있는 자신의 양들을 향해 목양적 차원에서 정신이 번쩍 나도록 호통을 친다. 그리고 주목을 하면 그제서야 차분히 또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바울이 화가났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비이성적인 분노라기 보다는 부모로서 내고 있는 화라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갈 4:19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역자인 우리도 감정을 잘 드러내야 한다. 이성적이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감정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충동에 의한 감정 표현이 아닌, 애정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상대를 해산하는 수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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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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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른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내 보여주신 것.


1.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교회에 쓴 편지(2절)


2. 바울의 문제제기(6-7)

  1)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준 갈라디아 교인들아, 어찌 그리 빨리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몇 몇 사람들이 복음을 교란한 것에 영향을 받음.


3. 바울의 정답(8-10)

  1) 다른 복음은 없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나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과 심성에 잘 부합하는 내용의 것인듯 하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매우 빠르고 쉽게 그 가르침에 넘어간듯 하다. 



----------[부연설명]

4. 바울이 사람(사도)의 영향을 받은 자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들은자다.(11)


  1) 내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이다.(12)

  2)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유대의 전통에 강력하게 미친자로서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까지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오히려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배운 것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서의 역할만 했다.13-14)


  3) 그런 나를,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불러주시고,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시려고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직통. 16절)

  4) 또 내가 예수를 만나고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왔다.(17절. 즉 사도의 영향을 받은 것도 없다)

  5) 그 후 3년 뒤에 게바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에 왔지만, 주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보지 못했고. 그것도 15일 밖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고 거짓말이 아니다.(18-20절)

  6) 그 뒤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그래서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다.(21-22절) 다만 바울은 소문으로만 전해졌는데, 그것도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24절)




[2장] 거짓 선지자의 요구 / 이방사역을 사도들로부터 인정받은 바울 / 오히려 사도인 게바가 그릇된 행동을 행함 / 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15-21절)


1. 14년이 지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계시를 따라 간 것인데, 그들에게 이방 사람에게 전한 복음을 설명하고 특별히 유명한 사람(사도들?)들에게도 따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1-3)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우리의 권위가 낮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그 동안의 이방인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디도에 대해서 <할례>에 대한 요구를 받지 않았다.


2. 그런데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이 디도의 할례를 강요하였다.(디도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고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몰래 끼어들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5절) _ 할례를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거짓 복음을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기 때문.


3. 이 때에 유명하다는 사람(사도들)들도 바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다. (7-8절) 교회의 기둥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역은 인정해 주었다.(9절) 다만 한가지 요구한 것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 자신도 열심히 해오고 있던 것이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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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복음(할례 없이도 의롭게 됨)을 유대인 사도들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이렇듯 바울의 복음은 유대 사도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것임을 지금까지 강조했다.



4. 바울이 오히려 게바를 나무란 사건(11-14)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아마도 유대인일듯)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위선을 만들었고 바울의 동력자였던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은 게바의 잘못을 모든 사람 앞에서 지적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처럼 되라고 강요합니까?"


  * 더 나아가 바울은 유대 사도 중에 기둥같은 게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복음을 왜곡시키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됨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한 사건을 언급한다. 즉 유대 사도들도 유대인의 인간적인 전통으로 인해서 복음을 훼손시키는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


5. 바울이 자신의 믿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 함(15-21)_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1)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죄인인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것도 의롭게 될 수 없다. 


  2) 이런 복음으로 우리가 과거의 것(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헐어버렸는데, 지금와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율법 앞에서는 죽었다.(율법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 그 방법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기 위함이다.)


  3)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의를 의지하는 나만이 살아있다.(율법을 의지했던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나만 살았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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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성도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 / 이 언약이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는 없다. /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_ 그리스도가 오기 전 임시적 역할 /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을 이유가 없다.


1.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질문과 책망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1)


  2)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2) 여러분은 왜 어리석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까?(3)


2.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훈계과 가르침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7)

  2)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아시고,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셨다.(8절)


  3)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 아래 있다.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5) 이렇게 하심은 아브라함에게서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으로 시작한 성도들이 율법으로 마치려 하자 이에 대한 책망과 바른 복음의 설명을 한다. 성도들은 믿음을 따라 의가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롬 4장) 이 일은 이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때 모든 민족을 말씀하심으로 이방인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율법으로 사람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이방 사람들에게도 미치게 되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이다.


3. 추가적인 설명: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430년 뒤에 나온 율법이 그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1) 보통 한 번 언약을 맺으면 아무것도 그것을 무효화할 수 없다.(15)

  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했는데, 그 자손은 '자손들'이 아니다. 단수로 '자손'과 언약을 맺은 것인데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다.(16) 

  3)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을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다.(율법을 통해 주신 것이 아니다. 18절)


  4)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인가?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 전까지 죄를 밝히려고 주신 것이다. (19)


   ----[부연설명] 율법의 역할

   (1)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로움이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것이다.(21-22)

   (2)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다.(22)

   (3)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에 갇혀 있었는데, 율법은 우리의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23-24)

   (4)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개인교사 밑에 있지 않는다.(25)


  * 율법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과 맺은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율법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먼저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가 오기전까지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있었다.(율법이 우리의 개인교사였으므로) 그러자 지금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도들의 신분]

   (5)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그것에 차이가 없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26-29)

   (6)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이다.


  * 따라서 더 이상 율법에 매여있고, 그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4장]

율법은 임시적인 역할만 한다 / 때가 되면 종이 아닌 자녀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체적 문제,할례, 절기.../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각오함 / 하갈과 사라처럼 종이 주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을 내쫓으라.


1.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1) 어릴적에는 주인의 아들이지만, 종과 다름없이 누군가의 다스림과 관리를 받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적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서 종노릇 했다.(율법 아래에 있었다. 1-3)


2.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놓이게 함.(4)

  -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5)

  -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시어 우리로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심(6)

  -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권면]


1.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 아닌 것에게 종노릇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는데 어찌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왜 다시 종노릇하려 합니까?(8-9)


  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습니까?(10절) 그것은 내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11)


  *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할례>의 문제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였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할례와 날과 달의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함]


  2)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바울의 육체가 병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따듯하게 영접하여 주었다. 전에는 이들이 자기의 눈을 빼서라도 바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진심어린 애정을 표현했다. (13-15)


  3)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자(즉 이들이 좋아해서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강조하자) 이들이 바울에게 원수같이 대했던 것이다.(16절)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바울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17) 

  4)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19)

  5)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 이런 문제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중 다수가 바울에게 대해서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전에는 눈이라도 빼서 줄 것처럼 바울에게 애정을 가졌던 교회 였는데, 바울이 이들의 잘못됨을 지적하자 바울에게 반감을 품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바울은 많이 당황스러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번 해야함을 각오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4:13-20)

 



2. 여전히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적 비유]

  1)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에게서 육신을 따라 났고 다른 하나는 본처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의 자녀들이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21-28)


  2)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하다.(29)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유업을 함께 받을 자가 아닙니다.(교회 안에서 다시 율법의 종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리고 말하는 것이다.30절)


  3) 여러분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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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배경/역사/내용 정리]


1. 바울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했으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빠르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쓴 글이다. (1:6)

2.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갈라디아 교회에서 생각처럼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유대 사도들에 비해서 열등한 사역자라는 피드백이 돌아온 것 같다.(4:13-20)

3.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바울은 적지 않게 당황한듯 하다.(4:20) 그러나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한다.(4:19)

4.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유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고, 그 이후에도 유대의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배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조차 나를 잘 모른다. 다만 교회를 피박하던 자가 변화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1:11-24)

5. 거짓 신도들(할례를 강조하는)로 인해 위협을 받았지만(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라) 바울은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명한 사도 야고보, 게바, 요한은 이것을 인정했고, 인정하는 의미의 악수도 했다. 그리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역(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임을 인정해 주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부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2:1-10)

6. 사실 바울은 게바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책망까지 한 적이 있다. 게바가 유대인을 의식해서 가식적인 행동을 했고 그것이 교회에 큰 영향(심지어 바나바까지 따라하게 됨)을 받게 되었다.(2:11-14)


[복음의 내용]

7.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함(2:15-21)

8. 율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임을 잊지 말라.(성령을 인치심, 구약의 할례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함) 

   - 유대인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할례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율법과 믿음 논쟁에서 그 결과를 성령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침이 유업(기업)의 보장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복을 미리 아시고 이제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그 유업을 얻게 된 것이다. 언약이 먼저이다. 나중 온 율법이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자녀(하갈)가 되지 말고, 자유자의 자녀(사라)가 되라.(3:15-29) 율법은 어린 아이를 위해(종과 같은 상태) 있지만, 커서는 아들이 된다. 


  * 왜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가? 왜 다시 종노릇하는가?(4:8-11)



[5장]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된 자유로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할례에 매이지 말라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는 사랑을 향해 살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 


1. [핵심 메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1)


  [논리] 

  1) 할례를 받아들이면,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2.3)

  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에게서는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떨어진다.(4)

  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5)

   - 사실, 할례를 받는 것, 안 받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2. [권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 달려왔지만, 여러분을 진리에서 왜곡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8)


  1) 거짓된 진리는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심판받는다.(9)

  2) 만약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했다면, 내가 왜 아직도 박혜를 받겠는가?(11)

    - 할례를 가지고 선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체에서 잘라버리라. 


  3)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성도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1)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13)

   (2)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다 들어있다. (14)

   (3) 그런데 네가 서로 물고 먹으면 둘다 망하는 것이다. (15)



 * 그런데 이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네 육체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자유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얻은 자유로 육체의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따르는 삶]

   (1)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16)

   (2)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18)

   (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행실은 분명하다. 음행, 더러움, 방탕,.. ..(19-21)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21)

   (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와 친절, 선함과 신실, 온유, 절제...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는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음

   (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25)



 * 복음 안에서 주신 자유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쫓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자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을 쫓는 자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6장] 겸손히 자기의 할 일을 하고 / 할 수 있으면 남의 짐을 져주라 / 사람은 심은대로 거둔다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기회있는대로 선을 행하라 / 할례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 /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권면] 

1. 어떤 교인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거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피라.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1절)


2.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내가 의로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으려함/비판)를 가진자가 타인의 짐을 져주라.


3. 각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을 성취한 것처럼 생각지 말라.(3-4)


4.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 (5)


5.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6)


6.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7)

   -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8)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넘어지지 말자. 때가 이루면 거둘 것이다. (9)


   -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10)



[전체 정리]


1.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말합니다.(11)


2. 육체의 겉 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그들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12)


3. 할례받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13)


4.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14절)


5.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15)


6. 이제부터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있다.(17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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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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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범 (2013.1.28)
영을 분별하라.
이승구교수님(합신대학원)
요한일서 4장1~6절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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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분별하라.
이승구교수님(합신대학원)
요한일서 4장1~6절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우리의 생애에 없어지고 있는 것들.
어린이수요예배, 주일저녁예배 등이다.
주일저녁예배. 수요예배가 잘 유지시키자.
모든 예배는 헌신예배이다.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안되는 세가지
 1.이단이 되어서 안된다.
 2.열심이 없어서는 안된다.
 3.모이기를 폐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진정 심각한 것은 이단이 되는 것보다 열심과 헌신을 잃어가는 것이다.
교회성도의 20%만 헌신해서는 안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박해당할수록 교회가 세워짐

사탄은 전략을 바꿨다.
  예수를 믿어라 그러나 절대 헌신하지 말아라.
사탄은 절대 헌신하지 못하게 한다.
이단으로 가는 것은 열심은 있으나 잘못된 영을 따라 가기때문이다.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
천주교 연옥 개념은 성경에 없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사람의 공로를 가르치는 것은 이단적 가르침인데 오늘날 교회내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영을 따르지 않는 것이 이단이다.
교회와 온전한 신학자가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이단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은 40만이다.
큰믿음교회,  신천지 등  이런 이단들의 공통은 신사도주의이다.

성경시대에는 계시가 끝났으나 계시를 받았다는 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적으로 행하지 않고 이적을 중심으로 따르는 것이 이단이다.

성락교회라는 이단은 모든 질병에 귀신이 있다는귀신론을 강조한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제대로 믿는 성도는 뛸듯이 기뻐해야 하나 
안믿는 자의 패턴(부정→간청→수용)을 더 많이 보인다.

죽어도 좋고 더 살아도 좋은 신앙을 만들어야 한다.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병마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단 (성락교회)이 쓰는 유사한 말을 자꾸 사용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이단화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객관적으로 알도록 성경공부를 하라.
이단은 세상의 말을 해서 세상이 따른다.

성령님이 아닌 것을 분별하는 시금석
 1.성경에서 멀어지는 경우
 2.비인격적관계를 맺는다→반발로 요구하여 주종관계가 되는 것.
 3.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 →욕설등을 하는 것.
 4.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에 관심이 없다→자기만족이 최우선이고 제국으로 교회를 확장시켜 가는 것만 관심을 가짐.

성경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인격적으로 변해가야 성령적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시간이 지나 갈수록 인격적으로 변해가자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는 교회를 만들자.
좋아요 ·  ·  · 3시간 전
  • 김동국님이 좋아합니다.
  • 김용범 개인적으로 교회신앙이 열성이 없어져가고 있다는 사실과 이단에 대한 경각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경고의 메세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말씀을 들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영적인 부분 특히 "계시"등과 관련한 영적인 측면에 대해선 신사도주의나 이단과의 유사성에 빠질 우려 때문에 단정적으로 "오늘날 신약교회에서는 계시는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마치 이단에 빠질 위험성때문에 풍성한 선물의 일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것 처럼 들렸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삶은 참으로 기준화하기도 명문화 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인데 말이다...이런 아쉬움에 대해 우리교회 목사님들이 설교시간에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 Sooeuk Kim '오늘날 신약 교회에서는 계시는 없다'는 말씀이 성령하나님께서 각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생생하게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 그런 역사가 신약 시대에는 없다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이후에도 성경의 권위와 같은 권위 혹은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지는 '계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 Sooeuk Kim 신사도운동의 문제점은 성령님이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거나, 마치 지금 성령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말씀하는 것으로(직통으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그것에 신약의 사도들(성경의 기록자)과 같은 권위로 규정하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것 같다는 정도로 말하면 좋은데, 그것이 성령 하나님께온 명확한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적 권위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더 보기
  • 김용범 목사님..답글에 지난주일 한가족예배때 이후 답답했던 부분이 시원하게 해소되는것 같습니다^^....하나님을 느끼는 영적인 자유함과 관련해서 는 마치 부부관계처럼 지극히 비밀스러움이 요구되지만 거부되어서는 안될 소중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학자입장에서 성경과 교회라는 조직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의미로 강조하시는 것은 알겠지만 조금 영적인 부분에 대해 평신도가 편협한 시각을 가지게 하시는 것같아 내심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 Sooeuk Kim 신학자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성도와 목회자들이 정통 교리로부터 선을 넘지 않도록 가이드 라인을 정해 주는 것입니다.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은 듣는 대상들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단이라는 주제를 다루며선 <신사도 운동>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좀 더 엄밀한 선을 긋는데 치중하다 보니, 성도님들 입장에서는 너무 팍팍하게 들리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신종플루가 돌 때 손을 깨끗히 하는 것을 평소보다 심하게 강조하...더 보기
    6분 전 · 좋아요 · 1
  • 김용범 성령의 검은 양날이라더군요^^..잘못다루면 손이 다칠까봐 부모의 심정으로 세심히 교훈해주시는 것 감사합니다..ㅋㅋ거룩한 부담을 드린 것으로 알겠습니다..우리 교회공동체가 더 감사하고 사랑스러워지는 건 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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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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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3일간 제주답사를 청년들과 다녀오면서 유행한 말 중에 '새로고침'이란 말이 있었다. 이는 함께 간 청년 중 자매 한 명이 중간 중간 화장을 고치는데 스스로 이것을 '새로 고침'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컴퓨터에서 인터넷 화면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클릭하는 것인데, 중간 중간 화장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로 고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모습인 것이다.

느헤미야 13장은 그와 같은 것이다. 새로고침.

이전에 세팅하고 정했던 것들이 원래의 모습을 잃고 다시 옛모습(생얼)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간 중간 새로 고치는 과정을 통해서 개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반복적인 연약함과 죄 때문에 이스라엘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보면서도, 어쩌면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해서 '새로고침'(계속되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정리1. 본문에 나온 내용 정리]

1. 섞인 무리 중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시킨 이유

  1) 그 날(이전의 어떤 날인듯)에 모세의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모압과 암몬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알게 됨

  2) 이는 과거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오는 과정 속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따듯하게 영접해주지 못할망정,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셨다.

  3)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하였다.

2. 그런데 암몬 사람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를 잡게 되다.

  1) 성전의 방을 담당했던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2) 도비야를 위해 큰 방을 만들어주었는데 원래 그곳은 소제물을 보관하고,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었다.

  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왕에게 잠시 다녀와서 보니 이와 같은 악한 일이 벌어져있었다.

  4) 느헤미야가 도비야의 세간을 다 치워버리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소제물과 유향으로 다시 채워넣음.

3.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1 (레위인을 불러옴)

  1) 레위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함으로 레위인들이 각기 자기 밭으로 도망하여 성전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되었다.

  2) 느헤미야가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오고 책임을 맡기고, 그들의 필요한 양식을 채워 넣었다.

  3)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느헤미야가 한 선한일을 기억하소서.

4.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2 (안식일을 다시 지키도록 함)

  1)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여러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장사를 함.

  2) 느헤미야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책망함.

  3) 문지기를 세워 안식일에 문을 닫고 장사하는 사람이 없도록 함.

  4) 자신이 주를 위하여 한 이 일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함. 주의 큰 은혜로 나를 아끼소서!

5.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3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킴)

  1) 유다사람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다.

  2) 그 통혼한 자녀들 중에 아스돗 말을 반쯤 하면서도 유다 말은 못하는 자녀도 있었다.

  3) 느헤미야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고 그들 중 몇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다.

  4) 그들에게 우리의 딸을 주지 말고, 그들의 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맹세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던 왕 솔로몬도 아내로 맞은 이방여인들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어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큰 악을 하나님께 범하겠는가?

  5) 느헤미야는 대제사장의 아들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것을 알고, 그를 쫓아내어 제사장의 직분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들로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했다.

  6)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와 같은 일을 기억하사 복을 달라고 소망했다.

[정리2. 본문의 재구성]

느헤미야 13장은 느헤미야 12장과 잠시 시간적인 공백이 있다. 성벽재건과 성벽 봉헌식을 마치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과의 약속(다시 돌아오겠다는) 때문에 왕에게도 돌아갔다. 그리고 몇 일후 다시 왕에게 요청하여 말미를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왕을 만난 시간은 몇 일이지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시간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1년 이상되지 않았을까?)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에서는 그 짧은 시간에 다시 옛 모습을 돌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4가지의 큰 죄악이 있었다.

1. 과거 발람 사건으로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는 들어올 수 없는 암몬 사람인 도비야가 버젓이 제사장 엘리아십과의 관계 속에서 성전에 곳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른 본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다 꺼내고, 다시 원래의 것으로 채워 넣었다.

2.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과 문지기, 노래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할 것들을 주지 아니함으로 이들이 생계 때문에 다 성전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다시 이들을 불러오고 직분을 맡기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도록 했다.

3. 안식일을 지키도록 한 것을 어겼다. 안식일임에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문을 닫게 하고 그 주변을 얼씬 거리는 사람마저 경계하여 있지 못하도록 했다.

4.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도 심각했다. 대제사장의 자손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어 있을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느헤미야는 이들 중에 일부를 때리고 털을 뽑아 버림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리고 맹세하여 그렇게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개혁을 행할 때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와 같은 노력과 애씀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사람들은 하드웨어적 요소와 인적 자원, 컨텐츠 만으로 개선이 일어나지 않는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을 통해서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내적 개혁을 통해서 말씀과 성전 제사와 직분과 이들이 장기적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이전의 모세의 때와 같이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남은 자 이스라엘은 온전해 질 수 없었다.

즉, 이와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람과 인류가 변화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모든 개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옛 죄악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메시지도 함께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멋진 개혁과 변혁을 일구어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는 한계가 있다. 뭔가 더 필요하다. 이들의 외부적 환경이 아닌 내부적으로부터 오는 개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내적 생명의 탄생,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새생명의 탄생이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란 불가능한 것이 된다.

2. 반복적인 새로고침이 필요하다.

중간 중간 화장을 고쳐야 하듯이, 우리의 신앙은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출동하고, 에스라가 출동했어도 개혁은 다시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탁월한 지도자의 부재가 아니라, 그 만큼 우리의 본성이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느헤미야처럼(미리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개혁을 일상으로 생각하고 정기적인 자기 평가와 새로 고침의 사역을 꾸준히 감당해야 필요성을 가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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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4일 직장인 제자훈련학교에서 했던 강의. 로마서 5번째.

5-7장은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중심으로

8장은 성화의 동력체로서 성령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서..

 

음질이 안좋습니다. 감안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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