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 화종부 목사 / 죠이선교회(270-271쪽)


갈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이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육체적인 부족함을 안고 있는 바울을 귀히 여겨 받아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주신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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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교회를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높이고, 너무 쉽게 무자비하게 짓밟습니다. 중직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귀하게 여기고 사모해서 돈도 받지 않고 많은 시간과 수고를 하면서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데, 성도들은 그들의 모습이 자신들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너무 쉽게 중직자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비난하는 것은 이제 거의 습관적입니다. 참으로 마음 아픈 시대가 되었습니다. 


목사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죄송합니다. 하지만 혹시나 제가 여러분을 실망시키거나 상처를 주면 절대로 욕하고 돌아서지 마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미련한 자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신 줄 알고, 제가 말씀을 왜곡하지 않도록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이 닫히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덮고 가려서 하나님의 천사를 대하는 것처럼, 주께 대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물론, 섬기는 연장선에서 하는 일인 줄 알고 허물을 덮어 주고 아껴 주십시오. 그것이 교회요, 성도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얼마나 차가운지 모릅니다. 교회 안과 밖이 너무 차갑고 날카롭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씨가 다르게 태어나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실수로 대학 졸업 두 달 남겨 놓고, 하나님께서 "너도 한 번 목회를 해 봐라"해서 목사가 되었을 뿐입니다. 목사가 되려고 소원한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주님이 잘못 선택하셨다고 수도 없이 말씀드렸는데도 포기하지 않은 그분 때문에 어떤 면에서 억지로 이 길을 울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목사니까, 장로니까, 권사니까라고 말이죠. 그러나 완전한 목회자가 이 땅 어디에 있습니까? 이상적인 교회가 이 땅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으로 빚어 가고, 그런 교회로 함께 수고하며 빚어 갈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사나 교회가 당연히 완전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뭔가 거듭거듭 요구만 할 뿐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니까 바울이 가진 수 많은 허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침을 뱉어 경멸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눈이라도 뽑아서 주고 싶어하던 성도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목회자들을 깊이 존중해 주십시오. 그들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살찌기 때문입니다. 중직자의 수고와 땀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애쓰고 수고하는 가운데 직분을 귀하게 여기고 수고하는 분들입니다. 그들의 허물이 드러날 때, 덮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수 있는 절회의 기회인 줄 알고 비난이나 나뿐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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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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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사역을 시작한 사람은 아니다.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 필요를 느끼고 신학을 했고 그러다 보니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목사이기 전에 사역자였고, 사역자 일때 한 때 '서리집사'였다. 어떻게 보면 일찌감치 목회로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신 분들과는 약간의 다른 과정을 거친 셈이다. 물론 뒤늦게 부름을 받아 직장 혹은 사업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신 분들도 있긴 하지만 그 분들과도 약간은 다른 경로를 밟아 목사가 되었다.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부천 상동에 있는 '중동교회'다. 예장 합신 측 교회로 교단 안에서는 규모가 있는 교회다. 중동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목사직과 연관이 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친구가 개척하여 목회하는 곳에 출석했다. 조금이라도 개척하는 친구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그 친구의 아들과 우리 두아이를 데리고 주일학교를 시작했으니 약간의 도움은 되었으리라. 물론 그 친구 목사로부터 내가 받은 도움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도우며 지내다가, 목사 고시를 보고, 면접을 보는데 노회 어른신들이 조건부 안수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합신 측 교회가 아니고, 현재 하고 있는 사역도 교회 사역인 아닌 선교단체 사역이기 때문이란다. 다음 봄 노회까지 우리 교단으로 옮기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목사 안수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옮기지 않아도 그것까지 따져 묻지는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장로교 목사가 되려고 하는 이상 기분이 내키지 않더라도 장로정치의 원리를 따라야 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고, 결국 지금 중동교회로 옮기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중동교회로 옮기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중동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처음 중동교회를 출석하게 된 것은 2006년 1월 1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이면서 새가족이 되었다. 사역을 위해서 교회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일에는 한가했다.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교회에서 먹고 좀 있다가 집으로 갔다. 오후 예배가 있었지만 집이 멀었기 때문에 가족들을 데리고 일찍 갔고, 아무도 협동목사인 나를 사역자로 알아보거나 눈치주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정말 중동교회의 새가족이 되어 조금씩 적응해 가야하는 성도였다.그 한해 동안 식사 후 교회 1층 로비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으면 찾아와 인사를 먼저 건네주신 분들이 있었다. '교회에 새로 오셨냐?'고 물으시면서. 그러면 우리는 그건 아니고 '협동목사'라고 하면 갑자기 당황스러워하며 무안해 하셨다. 교회에 협동목사로 내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아무도 그 이름의 얼굴이 누구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을 것이기에. 내가 협동목사로 오기 전에 협동목사로 계시던 분은 이름만 있었지 실제로 교회에서 본적은 거의 없다. 다른 교회를 다니시거나 주일에 다른 사역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우리 교회에 적만 두셨던 것같다. 성도들에게도 협동목사는 이름만 있고, 얼굴은 없는 목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나와 가족은 그렇게 새가족으로 1년의 교회 생활을 했다. 한 번은 금요철야를 가겠다고 인천 집에서 출발했다가, 인천대공원 앞 도로에서 길이 막혀 교회에는 정작 다 끝날때 도착해서 얼굴만 비치고 돌아왔던 경험도 있었다. 집이 멀었기에 교회의 공예배를 충실히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성도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는 노력했다. 난, 목사이기 이전에 성도이니까 말이다. 


2006년 말 교회에서 '유치부'사역을 제안을 받고 2006년 12월부터 유치부 사역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공식적인 사역하는 목사였다. 교회 주보에는 여전이 협동목사로 표시되었지만, 유치부를 하면서 유치부 교사들과 대면하고, 종종 주일 오후 혹은 저녁 예배 때 설교도 하면서 성도들은 내가 교역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지나고, 교회 청년부 설교자가 없을 때에는 청년부 설교도 하곤 했으니 좀 더 많은 분들에게 인식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올 해까지 만 8년동안 중동교회의 부교역자로 사역했다. 물론 선교단체 사역을 하면서 해야 했기에 주말에만 사역했지만, 오랜 기간 사역했고, 4년 전에는 교회 주변으로 이사해서 동네 주민이 되었고 3년전부터는 주일 저녁 설교를 자주했으니 중동교회와는 긴밀하게 되었다. 게다가 1년에 한 번 정도 담임 목사님께서 선교지 사역을 다녀오실 때는 주일 낮설교까지하곤 했으니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의 위치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목사지만, 한 사람의 성도라는 인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성도됨을 잃어버린 목사는 권위와 특권 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여겨졌기에.


2014년 11월 말, 나는 만 8년동안 섬기던 유치부를 사임했다. 사역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20년 가까지 사역하던 단체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고, 교회 부서 사역과 겸해서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교회의 허락을 받아 사임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서사역은 사임했지만, 교회를 옮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교회 사역지를 찾아봐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래서 나는 다시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성도로 교회를 다닐 생각이었다. 교회를 옮겨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적어도 나와 우리 가족에게 '중동교회'만큼 좋은 교회는 없기 때문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교회를 소개할 때,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교회' 라고 소개한다.그만큼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우리의 진로를 묻는 성도님들에게 여러차례 이야기 했다. 유치부만 사임하고 중동교회는 계속 다닐 거라고. 우리는 할 만큼 많이 이야기 했지만, 성도님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으셨나 보다. 계속해서 재차 물으셨고,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렇지 않다고 웃으면서 말씀드렸지만, 11월 말까지 성도님들은 미더워하지 않으셨던것 같다. 


생각해보니, 성도님들의 경험 속에서 이런 교역자는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일로 교회를 사임하든, 교회에서 더 이상 일할수 없어서 다른 교회로 옮기든(사역지가 결정되든 그렇지 않든) 사임과 동시에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을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성도님들이 경험했던 교역자들은 모두가 그랬던 것이다. 부교역자로 있다가 협동목사로 바뀌면 당연히 교회에 매이지 않고 사역이든 다른 교회든 다니셨기 때문에 그랬다. 성도님들의 경험하셨던 교역자들은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아무 사역도 없이 성도의 한 사람으로 교회에 출석만 한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묻고 또 묻고 다시 묻고 하셨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이후 감사하게도 담임목사님께서 주일 저녁 설교를 제안해 주심으로 작은 역할이 생기기는 했다. 그러나 마음은 동일하다. 목사이기 전에 성도임을 말이다. 이 마음을 잘 간직해야겠다. 이 마음을 잊게 되면서부터 목사는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목사가 되는 과정이 귀하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해서, 중고등부 청년부를 거치고 결혼하고 서리집사를 한 후에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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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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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해설]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은혜와 사랑, 자비와 구제를 힘써야 하는 것이 교회이지만 교회는 구제단체는 아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도와야 하는 대상은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개인의 병과 환경 그리고 제도적인 문제로 인해 개선하기 어려운 대상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가 해야할 혹은 할 수 있는 복지의 영역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제도적으로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찾아 도와야 하는 것이 교회의 구제 사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구제하기 이전에 교회는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교회가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보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개인의 짐을 스스로가 져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책임져야 할 대상의 가족은 먼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서로의 짐을 져주어야 한다.(갈 6:2)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 말씀은 가르침을 주는 대상을 존중하고 잘 대접하도록 힘쓰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단순히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대접을 잘 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그 중요함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이 권면은 더 나아가서 '가르치는 자'를 선정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전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참석했던 한 성도는 집회를 인도했던 부흥사에 대해서 큰 실망을 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저런 분을 모셨는가?'에 대해서 분개해하셨다.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교사를 선택할 때도, 또 가르침을 받는 자를 대할 때에도 매우 신중하고 또 그에 대한 대우를 함으로서 계속해서 그와 같은 좋은 가르침을 기대하로 바란다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교회는 '가르치는 자'를 고용(?)하듯 데리고 와서는 함부로 하려고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가르치는 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종'을 데리고 온 것에 불과하다. 그 교회의 수준이 어찌 될지는 뻔한 것이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사람들의 행위는 그 행한대로 대우를 받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있다.(갈 6:7) 육체의 소욕을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반면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된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육체와 성령의 대조를 다시 한 번 언급해 준다. 


갈 6:1-6까지의 여러가지 권면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우리 육체의 소욕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썩어질 것 밖에는 거둘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쉽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때가 이르게 되어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때가 되어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듯이, 우리 인생에도 때가 되면 결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묵상]


1. 특별법을 가르치기 전에 일반법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복음이라는 특별법이 선포되기 전에 우리는 윤리라는 일반법이 선포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율법이 온 이후에 복음이 온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마땅히 해야할 윤리를 배우고 그 다음에 관용과 자비인 복음을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서로의 짐을 져주기 전에 우리는 자기의 짐을 자기가 지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이 져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복음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때로는 복음이 사람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게 된다. 


값싼 복음에 물든 한국 기독교가 바로 그 지경에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한다. 특별법 이전에 일반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2.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의 일을 자신이 하는 것(책임감)도,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는 것(돌아봄, 섬김)도 서로 종노릇 하는 것도 모두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공동체 있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섬김'을 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성도들이 많을 때 교회 공동체는 성숙함으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특별법을 가르치기 전에 보편적인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보편적인 법을 모른채, 특별법만 강조하게 되면 이상하게 되는 것처럼 '은혜라는 측면에서의 특별법'만 가르친 것이 오늘 많은 한국 교회 성도를 방자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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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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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가난이 스펙이 되고, 목사가 스펙이 된다는 글에 대한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이 설명은 한 두차례 올린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해답도 되고요.


결과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집 큰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희 큰 아들은 부모의 기대와 달리 중학교에 들어와서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는 일찌감치 큰 아들의 특별함을 접었지요. 그래서 사실 꼭 대학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마음 한켠에서는 내려 놓았구요. 대학을 가려고 한다면 어디든 갈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중3이 되고, 고등학교를 정해야 하는 시즌이 다가오면서 큰 아이가 경기도에 있는 기독교 학교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것보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인데, 신앙 있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스스로의 신앙이 성장하지 않을까 해서요. 제가 캠퍼스 사역을 할 때 그 학교 출신들을 몇 명 보았는데, 자아상도 건강하고 신앙도 좋은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는 실력이 상당히 있어야 입학이 가능한 학교였기 때문에 막연한 바람에 불과했습니다. 


그 학교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던 중 일반전형이 아닌, 사회균형발전 전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적보다는 저소득층 자녀, 다문화가정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전형이었습니다. 웃으며 아내에게 우리 아이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겠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자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큰 아이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던 중 그냥 흘려가는 말로 아내가 선생님께 그 학교에 사회균형발전을 위한 전형이라는 것이 있어서 함 생각해 봤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그제서야 그런 전형이 있다는 것을 아셨는지... 그 앞에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더니 제 아내에게 '현빈이 어머님, 현빈이 이거 한번 해봐요!' 하면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하셨고, 선생님은 학교 측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내는 얼떨결에 떠밀리듯이 서류를 준비해서 학교에 냈고, 학교에서는 급히 서류를 만들어 주어 경기도에 있는 자사고에 서류를 넣었습니다. 서류 마감 1주를 남겨놓고 일어난 일입니다. 


서류는 접수해 놓고도 실은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되면 좋지만, 실력면에서는 도저히 입학할 수 없는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희 아이가 넣은 전형은 저소득자녀들만이 지원하는 거라 좀 차등은 있겠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죠. 원서지원 마감일이 지나고 저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전형, 그 지역 학생 전형 모두 지원자들이 모집인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는데, 저희 큰 아이가 지원한 전형은 모집인원보다 3명 적은 미달인 것이었습니다.(작년에는 같은 전형도 미달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랬는지 1차 서류 전형에 통과하고, 2차 면접도 무사히 통과하였습니다.(큰 아이가 지원한 전형은 다른 전형 지원자들과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경쟁없이 되었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저희 큰 아이가 막연하게 바랬던 그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 저희들에게는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이에게 말했죠... 아버지가 잘 살지 않아서 네가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요. 가난이 스펙이 된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큰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학교가 저희 집에서 매우 멀기 때문에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편도로 거의 1시간 40분의 시간이 드는데, 고등학생이 그렇게 다닌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지요. 기숙사가 안되면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야 한다고 하는데, 아이 혼자 자취를 시킬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기숙사가 안되면 오히려 입학하지 아니한만 못한 경우가 생길수도 있는 것이지요. 


지난 12월 7일, 큰 아이가 기숙사 지원자 면접을 보러갔습니다. 그날은 저도 시간이 되어 함께 갔습니다. 신입생 중 100명을 뽑는데 약 150명 정도가 지원한듯 합니다. 정원이 600명이 넘는데, 그 지역 지원자들은 기숙사 지원이 안되고 비기독교인은 또한 기숙사 지원이 안되기 때문에 그나마 지원이 그 정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희 큰 아이가 다닌 중학교에서 큰 아이 빼고 2명이 그 학교에 합격(이 친구들은 일반전형으로.. 공부를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죠..)했는데 그 중에 한 아이의 부모님은 저희 큰 아이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목사라서 말입니다. 학교 기숙사에 목사 자녀들은 수월하게 입사할 수 있다는 소문이 항간에 돌기때문에, 공부 잘하는 큰 아이 친구의 어머님이 저희 큰 아이를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스펙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기준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성적과 형편을 고려해서 뽑는다고 하니까요... 암튼 지난 수요일 저희 큰 아이는 기숙사 지원에도 합격했다는 발표가 났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11월초부터 있었던 큰 아이의 고등학교 입시과정이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아내랑 함께 운동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큰 아이가 그 학교에 들어가게 된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입니다. 무엇하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아서 된 것이라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셔서 일을 이루셨으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큰 아이가 그 고등학교를 입학 허가를 받고 나서 입학금 관련 안내를 받았습니다. 수업료와 학교발전기금 그리고 교과성 구입비 일부해서 110만원가량의 입학금을 내년 초까지 입금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중학교때까지는 의무교육에 급식비도 들지 않아아 기본적인 교육을 위한 비용이 거의들지 않았다가 갑자기 고등학교 수업료 통지를 받으니 매우 당황스럽더군요. 이런 금액을 3개월마다 한번씩 낸다고 하면 1년이면 440만원, 게다가 기숙사와 하루 세끼의 급식비를 합하면 1년이면 근 9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대학교 등록금 1년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반고등학교 였다면 훨씬 덜 들었겠지만, 자사고인데다가 기숙사비까지 포함되니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더군요.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바로 이 때, 6년전부터 큰 교회의 복재재단에서 매년 해외선교단체 선교사와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들을 위해서 병원비와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저희 죠이선교회에서도 매년 병으로 힘들어 하는 간사님 가정과 자녀들 학자금 지원이 필요한 간사에게 한 명씩 선정이 되어 해당되시는 분들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병원비 지원이야 그 때 그 때 아픈 분들에게 전해지지만, 장학금 지원은 자녀들이 큰 순서대로 지원을 받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순서가 저희 큰 아이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 복지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지급받은 것이 바로 지난 수요일이었습니다.(큰 아이가 기숙사에 합격발표가 난 날이지요) 게다가 이번 장학금은 다른 때 장학금보다 액수가 컸습니다. 큰 아이가 1/4분기 입학금을 내고, 첫 기숙사비와 식비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여러가지 일들이 아구가 서로 맞아 들어가는 그 현장을 경험하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은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그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지난 한 달간 저희 가정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 기도제목과 스펙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고, 나중에 저희 큰 아이가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공부를 잘해서 입학한 것으로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더불어 저희 가정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도 나누고 싶어서 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마음이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기도부탁을 드립니다. 


1. 큰 아이가 입학하면 십중팔구는 600여명의 학생들 중에서 성적을 깔아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큰 아이가 내면이 강한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큰 기대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성적을 향상해 가면서 내면이 강해지는 아들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2. 기숙사에서 신앙의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성장하는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이 학교를 보내고 싶었던 가장 큰 마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건강한 신앙, 자기 자신의 신앙, 성장하는 신앙의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3. 큰 아이가 아직 어린데, 가정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하니 사실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너무 어린데 가족과 떨어져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염려도 됩니다. 좀 이른감이 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독립적인 생각와 힘을 기르도록 기도해 주세요.


4. 재정 문제는 한편으로 걱정도 되지만, 사실 제일 걱정되지 않는 부분중에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채움을 입고 왔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희가 늘 그 믿음과 신앙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가는 부모가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긴, 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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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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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3장은 두 부류의 권위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2:15을 포함해서) 첫째는 그레데에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도의 권위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 정치권력의 통치자에 대해서 권면한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적 사고가 편재하고, 탈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권면같지만,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1. 목회자의 권위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2:15)

목회자가 권위로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이 말이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것이다. 권위주의란 자기 스스로가 권위의 근거가 되어 언제든지,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건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면과 책망의 내용에 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권면하고 책망하는 근거가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을 때, 그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시행하는 목회자는 평소에 권위있는 내용이 가벼운 것이 되지 않도록 품위를 잃지 않아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포장보다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용에 맞는 포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들려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하고 보여주는 목회자와 성도(교회)가 걸맞는 포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의 권위, 불교의 권위는 사제와 승들의 자기 희생적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목회자와 교회의 삶에 모습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품위있는 겉모습을 가져야 한다. 정직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며 자신의 꾸밈에 있어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편하다고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2. 통치자의 권위

  통치자들에게 대해서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복종하고 순종하며 선한 일을 하기에 준비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악을 지양하고 선을 격려하는 것이 기본일찐데 우리는 마땅히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고 복종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를 잃게 만드는 것은 공직자들(권세자들)의 부정과 부패다. 권위는 인정하되 그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책임을 묻고, 밝혀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방치된다면 국가의 권위라도 정당한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반드시 감시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교회든 국가든 권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잃어지지 않도록 목회자와 성도는 품행을 단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도다운 높은 수준의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공직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권력을 가지고 사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의 권위가 살고, 그들이 권위를 주장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제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절차가 옳아야 한다. 절차가 합법적이지 못하면 그 권위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적이다, 비민주적이다라는 것은 그런 절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통진당의 행태를 보면서 만약 당권파가 다시 당 권력을 장악한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권위가 실리겠는가 생각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다시 당을 장악한다고 하더라고 그 당은 금세 무너질것이고 지리멸멸해 질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의 권위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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