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저자들의 구약성경 해석_제2 성전기의 성경해석]


 * 신약성경 저자들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를 흔히 제2성전기라고 부른다.(주전 516- 주후 70): 신구약 중간기


 *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쓰여진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문법적-역사적 방법)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었는가에 대한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고대 문서를 이해하는데, 문법적_역사적 배경이 중요하듯이 고대의 해석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해석학사적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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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내적인 해석: 구약 성경에 의한 구약 성경의 해석

  1) 역대서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1) 역대서의 수많은 예들이 이미 사무엘-열왕기서와 같은 특정한 문서를 참고하여 쓰여졌다.

   (2) 대하 35:13 유월절 법에 대한 것으로 고기를 불에 굽고 삶는 것으로의 해석을 가미함.


  2) 다니엘 9장

   (1) 예레미야가 예언한(렘 25:11, 29:10) 바벨론 유수의 기간인 70년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이 나온다. 

   (2) 실제로 바벨론 포로기간은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주전 587년~ 538년, 50년)

   (3) 문제해결

- 바벨론 포로생활을 최초의 유배로부터 산정하면, 주전 605년. 70년에 근사한 수치를 얻을 수 있다. 

- 제2 성전이 완공된 해인 주전 516년을 진정한 포로 귀환의 해로 본다면, 70년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 [저자 강조]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라는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주는 지혜와 총명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70년 이라는 세월은 <일곱이레>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 센수스 플레니오(충만한 의미)


  3) 예수님의 해석,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하늘로부터 지혜를 주실 때 열리게 되는 해석(눅 24:13-35)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을 문자적으로 예언해 주는 것이 구약의 전부라고 봐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기독교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성경읽기.


2. 제 2성전기의 성경해석


  1) 고대근동 세계정세의 변화: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2) 이 시대에 쓰여진 이스라엘인들의 문헌들: 외경, 위경 중 일부, 사해문서, 필로와 요세푸스의 저작 등(상당한 분량)

  3) 이 중에서 제 2성전기의 문서 중 신약성경이 쓰여진 해석학적 배경에 대한 분명한 힌트를 줄 수 있는 두가지 예를 살펴보겠다. 


 [외경: 솔로몬의 지혜서]

  (1) 솔로몬의 지혜서는 성경의 지혜 문서와 유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솔로몬의 지혜서는 주전 1세기 후반에서 주후 1세기 초반 사이에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3) 솔로몬의 지혜서를 쓴사람이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적 결론을 받았는가를 살펴보자.  

     - 목적: 로마의 심한 박해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

     - 내용: 구약의 여러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해주고 있다. 

     - 이것을 통해서 유대인 전통 해석을 알수 있고, 그 당시의 성경 해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 그들은 이미 당시에 일반적으로 해석된(그러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예를 들면 동방박사의 이름이나 숫자가 나와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내용의 성경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4) 아담, 가인, 아브라함,롯, 야곱, 애굽 군사들을 토해 냄, 군사들을 약탈함, 아이들의 입으로부터...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전통적인 성경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해석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에 대한 선이해라고 볼 수 있다.(173-181쪽) 


 [사해문서: 1QpHab]

  (1) 1947년 유대의 한 동굴에서 처음 발견된 사해문서는 오늘날 성서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대 사본이다. 

  (2) 여기에서도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독특함이 나타난다.(합 1:5)


3. 제 2성전기 문서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 사해문서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그들이 옳다고 믿는 것에 성경 본문의 해석을 맞추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목적에 맞추기 위해 본문을 조작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이 그 당시 전형적인 성경해석 방법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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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오용한 것인가?]


1. 창 31:22 "삼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런 해석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은 옳은 것이다. 


2. 그런데 신약 저자들의 구약 성경 인용방식에 비슷한 경향들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구약 성경의 문맥과 저자의 의도를 존종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누가? 신약 저자들이...)


  예) 눅 20:27-40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두개인의 질문.

    예수님의 답변: 출 3:6을 인용하여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시는데, 어떻게 부활이 증거되는지 알수 없음

    지금 우리가 해석할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인용인듯 한데, 예수님 시대의 청중들은 납득이 되었던 것 같다.(서기관 중 어떤 사람은 선생이여 말씀이 옳습니다 라고 반응하고 있다. 눅 20:39-40)


  즉, 예수님의 구약 성경 해석 방법이 그 당시의 관습과 일치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3. 신약 성경 저자들의 구약인용 방식의 문제점을 다루는 접근 3가지(복음주의 진영에서 많이 받아들여지는 것)

  1)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그렇게 해석했다면, 사실 구약 성경 안에서도 그와 같은 맥락의 내용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신약 성경의 저자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임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을 원래의 문맥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3)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을 원래의 의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는 사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변형된 의미로 인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이 할 수는 없다. 


  * 저자는 이 세가지 접근 방법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4. 저자가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1)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의 본래의 문맥과 본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구약 성경을 해석한 것은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텍스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을 단순히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3) 신약 저자들이 보여준 해석학적 태도는 오늘날의 교회가 수용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약 저자들이 보여준 해석학적 태도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의 초림에 비추어서 구약성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눅 20장에 드러난 성경해석 방법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다른 해석가들도 그렇게 해석하였다.)


  *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살았던 해석학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 신약성경에만 접근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은 위의 3가지 견해밖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의 구약 성경 해석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선재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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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대서에 나타난 다양성]


1. 역대서가 난해한 책이 된 것은 그것이 사무엘-열왕기서에 소개된 역사와 좀 다르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2. 사무엘-열왕기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왜 우리가 포로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역대기는 포로 귀환 후의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독자들에게 쓴 것이다 따라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래고 있다. 역대기는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언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3. 사무엘-열왕기 역사 서술: 신명기적 사관

  1) 한 중앙 성소의 강조


  2) 유월절 규정도 가족별로 하는 것(출 12:2-4)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켜져야 했다.(신 16:5-6)


  3) 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었는가에 대한 답으로, 이스라엘과 그 왕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참 하나님 대신 거짓 신들을 섬겼다. 


  4) 역대서는 바벨론 귀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어떻게 유배 생활로 전락했는가가 아니라,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받아주실 것인가? 등에 대한 절실한 답이었다. 


   (1) 역대서는 다윗의 죄를 크게 줄여 묘사한다.  오히려 다윗을 메시야적 인물로 묘사한다. 

   (2) 역대서는 하나님 백성의 하나됨을 강조한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을 절대적 지지를 얻은 것으로 설명

   (3) 역대서는 성전과 성전건축에 대한 솔로몬의 역할을 강조한다. / 올바른 예배의 중요성과 왕의 역할 확립

   (4) 역대기는 당대의 인과응보를 좋아한다. 


4.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두 서술

  1) 이 둘은 모두 이스라엘 역사에 상당한 신학적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2) 이 둘은 모두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의 서술 목적이 다르므로 그 두 역사서술은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낸다. 

  3) 이런 긴장이 성경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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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구약성경과 신학적 다양성_지혜문학에 나타난 다양성]


1. 잠언서

 

  1) 잠언서를 인생 지침서로 오해하기 쉬우나 잠언의 다양성을 보면 단순한 인생 지침서는 아니다. 

   

     잠언 26:4 / 26 대조


  2) 잠언을 읽고 외운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읽을 수 있는 지혜, 즉 어떤 잠언이 어떤 상황에 적절한 것인가를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행할 길이라는 것은 매우 다양한 요소가 반영됨)


잠언 26:4,5 부자에 대한 말씀이 서로 다른 듯 하다. 


  3) 상황에 따라 둘 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옳고 그른가의 여부가 아니라, 언제 옳은가 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른 지혜) 

  4) 이런 잠언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잠언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면, 잠언서 자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2. 전도서.


  1) 전도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전도서 자체 내의 다양성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서의 가르침과 주류 구약신학 사이의 다양성이다. 

  2) 전도서 내적인 모순 구절(전도서 7:3 과 8:15)

  3) 전도서 외적인 갈등 구절(전도서 2:10 과 민 15:39)

  4) 최근 많은 주석가들은 내부적 갈등을 저자의 의도라고 주장한다. 모순들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에도 똑같은 모순들이 존재함을 보게 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5) 전도서의 저작 의도는 모순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전도자(코헬렛)는 지혜자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혜자는 아니다. 그는 잠언서의 지혜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의 실존적 문제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이기는 하나,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라고 전도자는 말한다. 이 또한 지혜인 것이다. 

  6) 이와 같이 다른 관점을 가진 전도서와 잠언서가 모두 구약성경 안에 나란히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잠언서와 전도서가 구약성경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의 다양성이 단순히 해소되어야 할 문제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양성은 구약성경 문학 안에 면면이 엮어진 핵심요소이다. 

  7) 이 다양성이 혼돈이나 오류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인간의 드라마가 다양하므로 성경이 그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성육신의 유비로 본다면)


3. 욥기


  1) 욥기는 신명기에 나온 인과응보의 원리와는 다른 논리의 가르침을 준다.

  2) 죄없는 자가 당하는 저주

  3) 욥기는 독자들에게 인과응보의 문제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4)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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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나타난 신학적 다양성의 문제]


 화두: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기독교인에게는 성경이 선포될 메시지다.(유대인 학자)


1. 유대인의 성경해석 역사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세기 전부터 시작됨.(근거: 외경,위경,사해문서 등)


2. 구약 성경 자체도 후대의 성경 저자들이 그 이전의 저자들을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 내적인 해석)


3. 현상: 히브리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의미가 불분명하다), 내부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모순의 존재


4. 그런데 이런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대인들의 해석방법은 문제를 깔끔하게 일소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성경과 대화하는 것> 그리고 그런 대화를 장려하는 공동체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구약성경 해석의 역사의 한 면이다.)


5. 반면, 기독교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의 역사를 보면, 성경 내의 갈등과 모호성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찾아 볼 수 있다. 성경 내에 어떤 갈등도 내포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이다.(모호성을 해결하기 위해 너무 기발안 생각을 해내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회피해 버린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된 메시지였다. 한 명의 저자에 의한 책이라면 갈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6. 유대교와 기독교는 성경의 다양성(통일성과 대조되는 개념의 다양성)에 대해서 입장 차이가 있다. 


  1) 비평적 성경학자들: 성경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은 구약성경을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서로 상충하는 인간의 의견으로 가득 찬 요상한 기록으로 보는 것.(기독교적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2) 이에 대한 복음주의적 응수: 

   (1)  그런 다양성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2) 그런 다양성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사소한 부분에 국한된다. 

   (3) 그런 다양성이 앞으로 조만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다양성이라는 혐의로부터 변호하려 함. 


  [문제] 이런 접근 방법은 오히려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고, 성경의 다양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해가는 듯한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저자의 접근]

성경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비평적 성경학자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인식한다. 성경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그 다양성은 오히려 성경의 역동성으로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그 예들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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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근동학적 발견이 우리의 복음주의적 성경관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오늘날의 복음주의적 성경관은 반드시 구약성경을 고대근동의 문서로서 설명해야 한다. 

   :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성경관을 조정하는 것까지 필요하다. 


2. 성육신적 차원에서 형성된 성경관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함의를 가져야 한다. 

   : 이스라엘의 삶의 규범을 단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도 적용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고대근동 세계의 관습을 우리는 더 이상 공유하지 않는다.(문자주의적 해석에 경계해야 함을 말하는 듯:개인적 생각)


3. 성경의 성육신적 요소는 오늘까지 지속된다. 물론 정경은 완성되었지만, 복음이 문화적 측면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이 문화적 시류에 따라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세대가 살고 있는 세계와 복음이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정경은 완성되었지만, 성경의 해석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개인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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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는가?]



1. 자유주의-보수주의 논쟁가 교착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은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혹은 반증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즉, 우리의 선이해(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그 증거자료를 가지고 다른 입장으로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저자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전제하는 두가지 

  1) 고고학 또는 문헌학의 성경 외적인 증거들이 우리의 성경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2) 성경의 본질을 진술하려는 모든 신학적 시도는 기꺼이 검증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경과 성령은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오셨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도하심으로 이끄신다고 본다. 

  * 박영선 목사님이 말한, 실천신학의 개념을 말하는 것 같다. 성경 해석은 현장에서 피드백 되는 것을 통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실천신학이듯, 완전한 해석을 위해서 지금도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인도하신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 같다. 


3. 창세기는 신화인가 아니면 역사인가?(그룹1에 대해서)


  1) 창세기 1-10장과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를 비교해보면, 구약성경에도 신화가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다. 

  2) 저자는 창세기가 신화인가 역사인가 양자택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근대에 와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근대기준으로 역사는 신화보다 더 가치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하지만, 신화는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3) 저자는 오히려 반문한다. 하나님이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신화라고 부르는 장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우리는 신화를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할수만 있다면 신화라는 용어 말고 다른 말을 사용하면 좋겠다.(그러나 할 수없다.)

  4) 신화는 인간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고대인들의 대답 방식이다. 가령,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고대인들이 이야기 형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야기에는 고대인의 세계관, 즉 근대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사고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다. 


   (1) 이스라엘의 문화는 고대근동 세계에서 늦둥이에 속한다. 

   (2) 이스라엘 족장들의 문화는 구전문화였다. (구전문학 형태로 만들어졌고 후대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족장시대였던 주전 2000-1000년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브리어의 전신격인 언어는 있었지만(셈어, 우가릿어)

   (4) 셈어의 알파벳은 주전 1700년경에 이르러서야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함.(이 알파벳은 히브리어의 기초뿐 아니라 다른 셈어, 아람어, 모압어, 에돔어, 암몬어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성경의 이야기는 애초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후대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봐야 한다. 

   (5) 히브리어가 존재했다는 성경 외적인 증거는 주전 1000년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서는 게제르 달력이다.(주전 10세기로 추정, 페니키아 어인지 히브리어인지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음. 19개의 단어가 전부)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은 사해문서로 그 중에서도 빠른 것은 주전 2세기 정도다. 

   (6)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만 가지고 설명한다면, 창세기는 처음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주전 1000년 이후 어떤 시점에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문자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전부터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수백년동안 창조신화도 없이 단지 히브리 노예들의 창조신화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4. 그렇다면 창세기가 왜 그토록 다른 고대근동의 문헌과 유사한가? 


  1) 창 11장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이고 그는 수메르 문화의 사람이었다.(여호수아 24:2) 아브라함이 들어갔던 가나안 땅도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들이 풍성한 곳이었다. 

  2)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으로서의 아브라함이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은 고대 근동의 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이방인의 신화를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당시에 이런 메시지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바벨론의 신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

  4) 정리하면, 하나님은 당시 고대 세계의 신화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고대인의 신화를 변화시키셔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참된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5. 고대근동 사람들의 세계인식


  1) 74쪽에 있는 그림(고대근동의 세계관)

  2) 그렇다고 창세기가 에쉬마 엘리쉬를 그대로 옮겨다고 볼 필요는 없다. 차이가 많다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으니까. 저자가 말하는 것은 자료 사이의 상관성이 아니라, 개념적 상관관계다. 즉,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이웃 민족들과 공유했던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3) 창세기의 세계 인식은 현대 과학의 방식이 아니라, 고대 신화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신관은 당시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급진적.

  5) 중요한 것은 창세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기원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에 있지 않다. 

      예) 천지 창조의 <날> 문제, 홍수가 전 세계적인가? 국지적인가? 

     창세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위한 답을 주기 위해 기록됨.


 [정리]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세계로 들어가신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의 의 미다. 또한 하나님은 낮아지셔서 인간의 문화를 수용하시고, 인간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의 의미다. 


6. 계시인 성경은 독특해야 하는가? (그룹2에 대해서)


  1) 그룹 2의 문서들을 통해서 볼 때도 성경에 언급되는 율법이나 관습 등이 그 당시 주변 나라들과 독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독특한 것은 성경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이 선적인 공동체로 만들어져 가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1,2 계명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인데, 그 이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상식적인 법들이라는 것이다. 

  3)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잠언이 있다는 것은 모든 법과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만드시기 위해 일련의 행위 기준을 이스라엘에게 부과했다는 것이다. 


7. 좋은 역사서술은 반드시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일 수 있는가?(그룹3에 대해서)


  1) 텔 단 비문(다윗의 집)과 실로암 터널 비문(히스기야 왕)은 역사서술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일 뿐이다. 

  2) 메사 비문은 다르다. 이 비문에 오므리 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도 있지만, 이 비문은 메사가 위대한 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역사서술 방식)

  3) 성경에서도 열왕기의 역사서술과 역대기의 역사서술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4) 역사적 사건 - 사건의 기록(문서전승 혹은 구두전승) - 사건을 기록하는 목적 / 상호연관성

  5) 역사서술은 해석작업이다. 역사 기록이 하나의 문학 작품처럼 보이는 이유는  역사가가 특수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6)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 역사 기록이 거짓이 도는 것은 아니다. 사무엘-열왕기서는 '우리는 무엇때문에 유배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서술이다. (우상숭배)

  7) 역대서에 대해서(히브리성경은 구약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사무엘-열왕기서의 보충 자료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독적인 목적을 가진 역사 서술로 봐야 한다. 역대기는 바베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조망한 역사서술이다. 

  8) 사무엘서와 역대기의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

   (1) 복음주의자: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고 가정. 자유주의자: 문서의 오류

   (2) 어느 것이 진짜 나단이 한 말이냐? 저자의 답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기록된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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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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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1. 19세기까지 근대 성서학의 주요 쟁점은 대개 성경의 본문과 관련된 것으로 주로 성경 본문의 일차적 형태인 원문을 복원하려는데 있었다. 


2. 그러다가 고대근동 문헌의 영향으로 성경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혹은 사회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원래의 본문은 어떤 모습이었는가"에서 "이 본문은 원래의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로 질문이 바뀌었다. 


3. 그러나 이런 고대 근동의 자료들이 성경의 유일성이라는 오랜 전통적인 개념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4. 19세기 몇 몇 학자들은 성경을 공격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였고, 이에 대해서 보수주의적 반응은 성경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입장에서 완고했다. 서로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 이후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이런 과정속에서 내려진 우려스러운 결론(자유주의자들의 결론)

  1) 자유주의자: 현대 성서학자들은 고대 근동의 문헌을 증거로 삼아 성경은 순수하게 인간의 책이라고 결론 내버림.


  2) 보수주의자: 근본적으로 성경이 특별해야 하고 독특행햐 한다는 전제(자유주의자들의 전제와 같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해 주는 자료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고,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자료에 대해서는 후퇴해 버리곤 했다. 


  3) 구 자유주의자들도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복음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고대 문맥 안에서 나온 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가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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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렸던 글에서 언급했던 '예전에 복클에서 썼던 글'입니다.
조금 다듬고 추가해서 다시 올려봅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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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진화 논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창조론의 영어 표현이 'Theory of Creation'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창조론'에 대응되는 영어 표현은 'Doctrine of Creation'입니다. (Doctrine : 교리) 즉, 창조론은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등 기독교의 여러 '교리이론'의 한 영역인 것입니다.

네이버 사전만 찾아봐도 바로잡을 수 있는 이런 사소한 오해 때문에 쓸 데 없이 논의가 꼬이고 감정이 상하고 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이 오해로 인해 발생되는 대표적인 문제들을 짚어 보자면...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오해와 갈등은 '창조과학'을 '창조론'과 동일시하여 표현하는 습관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고, 다시 말해서 '창조과학'을 '창조론'과 분리해서 이야기하면 아주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1.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런 논리를 내세우곤 합니다.
"창조론도 이론(Theory)이고 진화론도 이론이다. (진화'법칙'이 아니고 진화'론'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과학적으로 우세하다고 할 수 없다." (응용 : "과학교과서에서 동등한 비중을 두고 가르쳐야 한다.")
(1) 이건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창조론은 'Theory'(과학이론)가 아니고 'Doctrine'(교리이론)이거든요.
(2) 그리고 이건 과학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과학적 권위가 '법칙>이론>가설' 순서로 부여되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 단적인 예로, 뉴튼이 제창한 만유인력의 '법칙'(혹은 중력법칙)은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제창하고 이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면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일반상대성이론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만, 만유인력의법칙에 비해서는 훨씬 정확하고 정교하다는 것이죠.)
- 드 브로이가 제창한 '물질파 가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물리 과정에서도 잠깐 나옵니다.) 사실상 현대 양자역학의 전제조건이 되는 이론이고, 당연히 실험적으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 
- 일반상대성'이론'에는 (양자역학과의 접점을 찾는 과정에서) 앞으로도 보완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물질파 '가설'은 그런 거 없습니다.
- 이 사례들만 보면 오히려 '가설(물질파 가설)>이론(일반상대성이론)>법칙(만유인력의 법칙)' 순서로 진리에 가까운 것 같네요.(!!)
다시 말하지만, 과학에서 꼭 '법칙>이론>가설' 순서로 권위가 있고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건 아닙니다.

2. 개신교 측의 이런 어리석은 주장들 때문에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이런 반대 논리를 내세웁니다.
"창조론을 어떻게 이론(Theory)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과학이론으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요건도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창조'론'이라고 하면 안되고 창조'설'이라고 불러야 한다."
(1) 당연히 창조론을 Theory라고 할 수 없죠. 창조론은 Doctrine이니까요.
(2) 창조'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서 '설'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가설', 그리고 하나는 '설화'. 그런데 둘 다 이 논의에서 유의미한 접근이 못됩니다.
- '가설'의 경우 : 앞에서 말한 '법칙/이론/가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가설이라고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창조론은 '가설'이라고 부르기에도 적합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애초에 창조론은 Theory가 아니죠.)
- '설화'의 경우 : 차라리 이 쪽은 교리(Doctrine)로서의 창조론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창조론을 깎아 내려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감정적 만족 이외에 실제 논의에서의 실익은 없습니다. 애초에 창조론이 과학이론으로서 진화론과 대립하는 구조가 아니거든요. (어제 글에서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과 대립관계에 있는 창조론'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창조과학'이라는 것입니다.)

3. 원래 이렇게 민감한 토론에서는 용어의 정의가 모호하면 으레 논의가 겉돌고 유의미한 결론에 다다르기 어려운 것이 보통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은 간단한 사실관계만 바로잡아도(네이버 영어사전만 한 번 찾아봐도...ㅠㅠ)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너도나도 '창조과학'을 '창조론'과 동일시하여 표현하는 습관 때문에 기독인이든 비기독인이든 이 사실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이 문제로 박터지게 싸우느라 정작 핵심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4. 창조과학에 동의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창조과학이 창조론의 동의어(혹은 전부)인 마냥 여겨지고 있는 현실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갈등들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4-1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 '어떤 방식으로'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바로 '창조론'이라고 하는 영역일 것입니다. 성경관과 세계관에 따라 창조론의 접근법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떤 방식이든 간에'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여지가 없거나 심각하게 왜곡된 형태의 신앙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4-2. 바로 이것이 창조과학과 창조론을 동일시하는 것의 가장 큰 위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과학이 개신교 창조론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 창조과학과 진화론과의 대립구조에서 창조과학이 진화론에 비해 훨씬 열등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창조 신앙 자체에 대한 회의,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될 여지가 있습니다. 혹은 성경에 대한 신뢰가 창조과학에 대한 신뢰로 잘못 연결되어 다양한 오해와 갈등이 발생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실제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결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쉽게 '창조과학'과 '창조론'을 섞어서 부르는 기독인들의 습관은 고쳐져야 하며(예를 들어서, 어제 글에서 차성훈님께서 제안하신 것인데, 창조론 대신 창조신학이라고 바꿔서 부르는 것도 좋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창조론에 대한 바른 이해와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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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가?]


1. 이와 같은 고대근동 문헌들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문제를 제기한다.


  1) 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창세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고대근동 문헌을 짜집기 한 것인가?

  2)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면 성경의 독특성이 무엇인가? 

  3) 고대근동 문헌이 발굴되기 이전의 교회 역사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흘러온 것이 아닌가?


   :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2. 지금까지 발굴된 문헌들을 정리해 보면


  1) 창조와 홍수: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

  2) 관습, 율법, 잠언: 누지 문서, <함무라비 법전>, 히타이트 조약 문서, <아메네모페의 교훈>

  3) 이스라엘과 왕들: 텔 단 비문, 실로암 터널 비문, 메사 비문


3. 각 그룹별로 제기될 수 있는 질문들

 

  1) 그룹1_ 창조와 홍수: 창세기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1)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신화라고 생각한다. 

     (2) 그렇다면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와 유사한 성경 이야기도 신화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3) 저자의 제안

: 신화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편견없는 정의는 '신화는 인간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고대인들의 대답 방식'이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세계관, 즉 근대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사고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 인식을 반영하게 된다. 


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으로 설명하는 방식(특히 이야기 형식으로)


  2) 그룹2_관습, 율법, 그리고 잠언: 계시인 성경은 독특한가?


    (1) 누지 문서를 통해서 보면 구약의 족장 이야기는 주전 1500년까지 올라간다.(물론 기록은 주전 1000년 이후라고 본다.)

    (2)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했던 도덕적인 기준은 독자적인 명령이 아니라 주변 문화의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됨.(당시 사회적 규범이 고스란히 적용된 결과)

    (3) 당혹스러운 것은 적어도 전통적인 입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하나님이 직적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4) 이 문제는 <계시란 무엇인가>라는 더욱 핵심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5) 성경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문헌 사이에 유사성과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다. 


  3) 그룹3_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왕들: 좋은 역사서술은 받드시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일 수 있는가?


    (1) 텔 단 비문, 실로암 터널에 나타난 자료들은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2) 그러나 이것이 고대 족장의 역사적 신빙성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상대적으로국가적으로 평온했던 시기였기에 자료들을 남길 수 있었다.(어찌보면 근대 역사 기록과 유사한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3) 열왕기를 보면 왕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을 이루는 것을 볼 때, 그래도 미화시킨 역사라기 보다는 정확한 역사서술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 메사 비문에서 메사 왕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함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역사 기록은 사실 그대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메사 비문에 거짓말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적인 내용들이 들어가지만, 거기에는 왕이 위대함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들어가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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