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과 <큰 글자>, 즉 분명하게 기록한 것을 보라 함으로 앞의 내용을 통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하고 싶은 마음의 강도와 분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 뭔가 외부적이고 가시적인 어떤 표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율법 보다도 할례에 집중했던 것 같다. 바울이 말한 <순수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떤 가시적인 표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울의 복음>이 뭔가 허전한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본인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을 원했다. 그것이 <할례>였던 것 같다. 


 <가시적 표식>이 우리에게 주는 안도감은 무엇인가? 그것은 <확인증>과 같은 것이다. 그 가시적 흔적을 통해서 자신의 내용(구원, 의)을 확인할 수 있는 안도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새 그릇되게 된다. 내용에 본질을 두기 보다는 그 흔적과 표식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과 의라는 내용과 그 표식으로서의 할례와의 연관성에 오해가 생기고 그로인해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할례인 표식을 원한다. 그래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할례까지 해야 복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받게 된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지만,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궁핍한 변명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이 율법 전체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중에 <할례>를 강조한 것이 아님을 바울은 말한다. 유대인들도 율법 전체를 따르는 일에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할례>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사항 뿐이었다. 이들이 원한 것은 <율법> 전체라기 보다는 그 중에서 <육체적 자랑>을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것 뿐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형식과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적 헌신과 흔적을 보여주길 원했던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기도든 금식이든 선행이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마 6장)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순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자랑할 것>을 찾는다면 바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십자가 표식>을 자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부적인 표식으로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 즉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해주신 은혜로은 사역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과 세상을 대하여 내가 못박혔다는 것은 <순수 복음 안에서> 내가 세상을 향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나나 세상 모두 복음 안에서는 아무런 자랑을 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실천하신 것이다. 세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였다....)


 결론적으로 <순수 복음> 안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다. 새롭게 거듭나는 것, 실제적인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인 것이다. 겁데기의 흔적이 아니라, 내재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 <순수 복음>의 핵심이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다른 복음>은 <순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그 일에 헌신해온 바울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이야기같은데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해산의 수고로 낳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할례>를 통해 육체의 흔적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흔적이라면, 예수의 흔적(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거치고 간 흔적)으로 충분함을 고백한다. 


다른 복음으로 미혹할찌라도, 당황하지 말고 <순수 복음>만 붙잡으면 끝-



 첨언, <순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다른 부차적인 노력과 행위(할례와 절기 지킴 등)가 필수적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다루고 있는 <골로새서>의 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음 성경공부는 <골로새서>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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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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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해설]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로부터 처음 복음을 듣고 세워졌을 때, 이들은 순수한 복음 안에서 잘 자라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상한 가르침이 들어와 교회 전체에 위협을 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정도의 작은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아보였던 문제가 큰 문제로 금새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 전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대한 기대를 잃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확신하노라"(10절) 바울은 다른 복음으로 인해 풍지박산이 난 것 같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여전히 살아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시 소생하는 힘이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지금 연약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기대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갈라디아 교회에서 <다른 복음>에 사로잡혀 다른 복음을 주장하며 가르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순수한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하였기에 사람들이 듣기에는 더욱 그럴듯 하게 들리고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격이 되었다.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하자, 복음의 <대적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순수한 복음>에 천차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우려 했던 것(?)이 오히려 원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도 알았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전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불편해 했다는 것을. 만약 바울이 자신이 전한 <순수한 복음>에 <할례>라는 유대인들이 만족스러워하는 '가미료'를 살짝 넣었다면 바울은 이방인에게서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도 충분한 인정을 받으면서 사역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바울 자신이 전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극적 방해(장애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의 사역은 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할례>를 복음에 가미한다는 것은 <순수 복음>을 훼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할례>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순수 복음>에는 그와 같은 요구가 들어가서는 안됨을 재차 확인하여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런 주장을 통해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려 한다면,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 말이 의미는 그토록 <할례> 즉, 성기의 끝을 잘라내는 것에 집착하고 중요하게 본다면, 아예 거세를 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조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묵상]


1. 상당한 타격을 입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여전히 희망을 가졌다. 


교회는 때로 강해 보이지만, 때로는 매우 무력해 보인다. 강력한 외부적 박해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힘을 가질 만큼 교회는 강하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서 더욱 확대되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이단의 가르침도 그러했고,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순수 복음>이 훼손되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질 때 교회는 인간적인 것들이 유입되고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생명은 희박해 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라면, <순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있다며 그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가 사람의 수고와 노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것처럼, 교회가 사람의 훼손으로 무너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순수 복음>으로 시작된 교회라면 '소망'은 있다.


2. 그릇된 가르침에 여전히 매여 있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공동체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은 <누룩>처럼 공동체 전체를 순식간에 무력화 시킬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지적받고 바르게 되도록 요청하는 내용을 듣고도, 그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복음_다른 복음>으로 교회를 흔든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와 같은 강력한 경고가 전해져야 할 것이다.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는 자들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공동체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참된 교회란, <거짓된 복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돈케 하는 자를 경고하고 내쫓는 건강한 징계(치리)가 있는 교회다. 이것을 통해 교회의 순결함과 교회의 권위를 드러내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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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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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해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마음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자유란, 율법의 종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의 종된 삶이란 무엇인가?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법 아래 사는 삶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 법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이다.(물론 아브라함과 다윗... 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혈통 속에서는 희미하나마 그 빛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고 율법의 종된 삶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 말미암은 의로 우리를 이끄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그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는 것이 있다. 하나는 갈라디아서 교회에 들어와 혼란을 야기시켰던 <다른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더불어 율법적인 행위를 더 해야 온전한 의에 이른다는 가르침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들을 다시 율법의 종 아래로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을 왜곡되이 받아들인 자들로 <율법적 방종>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의 종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육체의 종이 되어 버린 자들인데 바울은 이들에게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권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후자의 견해는 개인적인 견해다.)


그 이후 바울의 논지를 정리하면,(2-4절)



1. 이와 같은 자유의 복음을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2. 네가 만일 할례를 다시 복음 안으로 가져와 의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할례만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 맞다. 즉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전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3. 만약 율법을 다시 가지고 와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할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너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오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의 법에서 떨어짐을 의미한다. 



 - 이와 같은 논리를 통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만약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끊어버리는 것이요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들의 결단이 복음과 관련하여 얼마나 위험한 수용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바울의 촉구로 보인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바울의 표현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의의 시작이 일어났으나, 아직 의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구원에도 시작과 완성이 있듯이 우리의 의도 그와 같은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적 차이를 통해서 중간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바울이 말한 소망이란 그저 헛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같은 구원의 완성의 소망을 산소망이라고 표현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소망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의를 더욱 진작시키기 위한 어떤 율법적 노력이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는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과는 동떨어진 논리다. 그 율법의 행위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다. 바울의 이 말은 성도란 윤리를 배반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준 것이라 본다. 


바울이 부정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순수 복음>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오히려 매우 윤리적인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하여 <할례>와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그와 같은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하다(갈 5: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유를 가지고 새로운 종된 삶으로 들어간다. 바로 사랑의 종이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묵상]


1.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향방없는, 자기 마음대로의 자유가 아니다. 율법의 종됨으로부터의 자유다. 즉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진노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어서 지켜야만 하는 종된 삶이다. 마치 애굽의 종되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으로서 일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했던 것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더이상 율법의 논리로 진노에 이르지 않게 되었다는 해방을 선포했다.(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진노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의로의 인도(의의 종)였음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구원이란 방향이 있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죄의 진노에서 구원하여(자유),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종).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순수 복음>의 내용이다. 바울의 <순수 복음>의 조건에 무엇인가를 가미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순수 복음>을 자신의 소욕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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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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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른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내 보여주신 것.


1.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교회에 쓴 편지(2절)


2. 바울의 문제제기(6-7)

  1)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준 갈라디아 교인들아, 어찌 그리 빨리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몇 몇 사람들이 복음을 교란한 것에 영향을 받음.


3. 바울의 정답(8-10)

  1) 다른 복음은 없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나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과 심성에 잘 부합하는 내용의 것인듯 하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매우 빠르고 쉽게 그 가르침에 넘어간듯 하다. 



----------[부연설명]

4. 바울이 사람(사도)의 영향을 받은 자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들은자다.(11)


  1) 내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이다.(12)

  2)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유대의 전통에 강력하게 미친자로서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까지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오히려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배운 것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서의 역할만 했다.13-14)


  3) 그런 나를,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불러주시고,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시려고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직통. 16절)

  4) 또 내가 예수를 만나고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왔다.(17절. 즉 사도의 영향을 받은 것도 없다)

  5) 그 후 3년 뒤에 게바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에 왔지만, 주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보지 못했고. 그것도 15일 밖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고 거짓말이 아니다.(18-20절)

  6) 그 뒤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그래서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다.(21-22절) 다만 바울은 소문으로만 전해졌는데, 그것도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24절)




[2장] 거짓 선지자의 요구 / 이방사역을 사도들로부터 인정받은 바울 / 오히려 사도인 게바가 그릇된 행동을 행함 / 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15-21절)


1. 14년이 지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계시를 따라 간 것인데, 그들에게 이방 사람에게 전한 복음을 설명하고 특별히 유명한 사람(사도들?)들에게도 따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1-3)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우리의 권위가 낮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그 동안의 이방인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디도에 대해서 <할례>에 대한 요구를 받지 않았다.


2. 그런데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이 디도의 할례를 강요하였다.(디도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고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몰래 끼어들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5절) _ 할례를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거짓 복음을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기 때문.


3. 이 때에 유명하다는 사람(사도들)들도 바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다. (7-8절) 교회의 기둥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역은 인정해 주었다.(9절) 다만 한가지 요구한 것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 자신도 열심히 해오고 있던 것이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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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복음(할례 없이도 의롭게 됨)을 유대인 사도들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이렇듯 바울의 복음은 유대 사도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것임을 지금까지 강조했다.



4. 바울이 오히려 게바를 나무란 사건(11-14)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아마도 유대인일듯)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위선을 만들었고 바울의 동력자였던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은 게바의 잘못을 모든 사람 앞에서 지적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처럼 되라고 강요합니까?"


  * 더 나아가 바울은 유대 사도 중에 기둥같은 게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복음을 왜곡시키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됨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한 사건을 언급한다. 즉 유대 사도들도 유대인의 인간적인 전통으로 인해서 복음을 훼손시키는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


5. 바울이 자신의 믿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 함(15-21)_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1)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죄인인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것도 의롭게 될 수 없다. 


  2) 이런 복음으로 우리가 과거의 것(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헐어버렸는데, 지금와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율법 앞에서는 죽었다.(율법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 그 방법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기 위함이다.)


  3)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의를 의지하는 나만이 살아있다.(율법을 의지했던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나만 살았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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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성도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 / 이 언약이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는 없다. /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_ 그리스도가 오기 전 임시적 역할 /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을 이유가 없다.


1.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질문과 책망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1)


  2)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2) 여러분은 왜 어리석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까?(3)


2.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훈계과 가르침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7)

  2)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아시고,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셨다.(8절)


  3)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 아래 있다.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5) 이렇게 하심은 아브라함에게서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으로 시작한 성도들이 율법으로 마치려 하자 이에 대한 책망과 바른 복음의 설명을 한다. 성도들은 믿음을 따라 의가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롬 4장) 이 일은 이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때 모든 민족을 말씀하심으로 이방인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율법으로 사람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이방 사람들에게도 미치게 되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이다.


3. 추가적인 설명: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430년 뒤에 나온 율법이 그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1) 보통 한 번 언약을 맺으면 아무것도 그것을 무효화할 수 없다.(15)

  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했는데, 그 자손은 '자손들'이 아니다. 단수로 '자손'과 언약을 맺은 것인데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다.(16) 

  3)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을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다.(율법을 통해 주신 것이 아니다. 18절)


  4)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인가?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 전까지 죄를 밝히려고 주신 것이다. (19)


   ----[부연설명] 율법의 역할

   (1)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로움이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것이다.(21-22)

   (2)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다.(22)

   (3)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에 갇혀 있었는데, 율법은 우리의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23-24)

   (4)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개인교사 밑에 있지 않는다.(25)


  * 율법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과 맺은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율법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먼저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가 오기전까지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있었다.(율법이 우리의 개인교사였으므로) 그러자 지금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도들의 신분]

   (5)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그것에 차이가 없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26-29)

   (6)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이다.


  * 따라서 더 이상 율법에 매여있고, 그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4장]

율법은 임시적인 역할만 한다 / 때가 되면 종이 아닌 자녀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체적 문제,할례, 절기.../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각오함 / 하갈과 사라처럼 종이 주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을 내쫓으라.


1.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1) 어릴적에는 주인의 아들이지만, 종과 다름없이 누군가의 다스림과 관리를 받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적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서 종노릇 했다.(율법 아래에 있었다. 1-3)


2.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놓이게 함.(4)

  -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5)

  -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시어 우리로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심(6)

  -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권면]


1.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 아닌 것에게 종노릇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는데 어찌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왜 다시 종노릇하려 합니까?(8-9)


  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습니까?(10절) 그것은 내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11)


  *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할례>의 문제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였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할례와 날과 달의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함]


  2)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바울의 육체가 병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따듯하게 영접하여 주었다. 전에는 이들이 자기의 눈을 빼서라도 바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진심어린 애정을 표현했다. (13-15)


  3)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자(즉 이들이 좋아해서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강조하자) 이들이 바울에게 원수같이 대했던 것이다.(16절)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바울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17) 

  4)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19)

  5)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 이런 문제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중 다수가 바울에게 대해서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전에는 눈이라도 빼서 줄 것처럼 바울에게 애정을 가졌던 교회 였는데, 바울이 이들의 잘못됨을 지적하자 바울에게 반감을 품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바울은 많이 당황스러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번 해야함을 각오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4:13-20)

 



2. 여전히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적 비유]

  1)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에게서 육신을 따라 났고 다른 하나는 본처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의 자녀들이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21-28)


  2)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하다.(29)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유업을 함께 받을 자가 아닙니다.(교회 안에서 다시 율법의 종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리고 말하는 것이다.30절)


  3) 여러분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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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배경/역사/내용 정리]


1. 바울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했으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빠르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쓴 글이다. (1:6)

2.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갈라디아 교회에서 생각처럼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유대 사도들에 비해서 열등한 사역자라는 피드백이 돌아온 것 같다.(4:13-20)

3.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바울은 적지 않게 당황한듯 하다.(4:20) 그러나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한다.(4:19)

4.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유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고, 그 이후에도 유대의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배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조차 나를 잘 모른다. 다만 교회를 피박하던 자가 변화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1:11-24)

5. 거짓 신도들(할례를 강조하는)로 인해 위협을 받았지만(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라) 바울은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명한 사도 야고보, 게바, 요한은 이것을 인정했고, 인정하는 의미의 악수도 했다. 그리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역(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임을 인정해 주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부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2:1-10)

6. 사실 바울은 게바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책망까지 한 적이 있다. 게바가 유대인을 의식해서 가식적인 행동을 했고 그것이 교회에 큰 영향(심지어 바나바까지 따라하게 됨)을 받게 되었다.(2:11-14)


[복음의 내용]

7.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함(2:15-21)

8. 율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임을 잊지 말라.(성령을 인치심, 구약의 할례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함) 

   - 유대인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할례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율법과 믿음 논쟁에서 그 결과를 성령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침이 유업(기업)의 보장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복을 미리 아시고 이제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그 유업을 얻게 된 것이다. 언약이 먼저이다. 나중 온 율법이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자녀(하갈)가 되지 말고, 자유자의 자녀(사라)가 되라.(3:15-29) 율법은 어린 아이를 위해(종과 같은 상태) 있지만, 커서는 아들이 된다. 


  * 왜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가? 왜 다시 종노릇하는가?(4:8-11)



[5장]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된 자유로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할례에 매이지 말라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는 사랑을 향해 살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 


1. [핵심 메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1)


  [논리] 

  1) 할례를 받아들이면,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2.3)

  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에게서는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떨어진다.(4)

  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5)

   - 사실, 할례를 받는 것, 안 받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2. [권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 달려왔지만, 여러분을 진리에서 왜곡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8)


  1) 거짓된 진리는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심판받는다.(9)

  2) 만약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했다면, 내가 왜 아직도 박혜를 받겠는가?(11)

    - 할례를 가지고 선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체에서 잘라버리라. 


  3)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성도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1)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13)

   (2)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다 들어있다. (14)

   (3) 그런데 네가 서로 물고 먹으면 둘다 망하는 것이다. (15)



 * 그런데 이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네 육체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자유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얻은 자유로 육체의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따르는 삶]

   (1)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16)

   (2)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18)

   (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행실은 분명하다. 음행, 더러움, 방탕,.. ..(19-21)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21)

   (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와 친절, 선함과 신실, 온유, 절제...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는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음

   (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25)



 * 복음 안에서 주신 자유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쫓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자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을 쫓는 자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6장] 겸손히 자기의 할 일을 하고 / 할 수 있으면 남의 짐을 져주라 / 사람은 심은대로 거둔다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기회있는대로 선을 행하라 / 할례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 /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권면] 

1. 어떤 교인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거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피라.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1절)


2.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내가 의로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으려함/비판)를 가진자가 타인의 짐을 져주라.


3. 각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을 성취한 것처럼 생각지 말라.(3-4)


4.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 (5)


5.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6)


6.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7)

   -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8)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넘어지지 말자. 때가 이루면 거둘 것이다. (9)


   -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10)



[전체 정리]


1.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말합니다.(11)


2. 육체의 겉 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그들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12)


3. 할례받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13)


4.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14절)


5.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15)


6. 이제부터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있다.(17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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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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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5장] 기적적으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민족들이 모두 이스라엘과 여호와를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칼을 만들어 전쟁을 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베는 <할례>를 명하셨다. 광야 2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테스트라 여겨진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결국 1세대들로 인해 부끄러움 당하실뻔 한 여호와 하나님을, 그 수치에서 건져 드린다.(6절.9절) 이전 세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부끄럽게 한 일을 우리가 깨닫는 다면, 우리가 그 수치를 씻어드리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것으로 인해 주변국에 미친 영향

  1) 요단 서쪽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임.


2. 요단을 건넌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칼을 갈아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심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고 지시하심

  2) 여호수아는 지시대로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3)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처음 애굽에서 나온 백서들은 할례를 받았으나 모두 죽었고, 광야 길에서 난 자 들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1)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여호와의 음성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들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4) 광야에서 낳은 자들은 광야 길에서 할례를 할 수 없었기에 할례 없는 자가 되었다. 

  5) 모든 백성에게 할례를 마치고, 각 처소에서 머물며 낫기를 기다렸다. 

   :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겠다.(애굽에서 나온 첫 세대가 실패한 것을 애굽의 수치라고 본 듯하다.) 그래서 이곳 이름을 길갈이라 하겠다고 명하심. 


3. 이스라엘 자손이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1)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달 14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2)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3)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다시는 만나를 먹지 못하였다.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4. 여호수아가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다.

  1)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선 한 사람을 본다.

  2) 그 사람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고 말한다. 

  3)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묻는다. 

  4)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했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을 다시 내방식으로 풀어쓰기]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요단을 건넌 후 요단 서편에 있던 민족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긴장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는 이스라엘은 곧바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쟁보다 이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셨다. 어떻게 보면 적 앞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광야 기간 중 할례받지 못한 자들을 대상으로 할례할 것으로 요구하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백성들에게 할례를 지시한다. 애굽에서 나온 광야 1세대는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는데, 여호수아와 함께한 광야 2세대는 결정적인 순간에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게 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곳을 길갈이라고 했고, 애굽의 수치(애굽 첫 세대를 통해서는 약속을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를 굴러가게 한 곳이 되었다는 기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된 이스라엘은 한 가지 더 놀라운 일을 행한다, 그것은 유월절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땅의 곡식을 먹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광야의 만나는 끊어지게 된다. 이것은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 성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뒤이어 여호와께서 보낸 군대 대장을 여호수아가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움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들, 메시지 등]


1. 요단을 건넌 후 할례를 지시한 것은 하나님의 테스트다.


요단을 건넌 후 가나안 왕들은 모두 겁에 질려있었고, 두려워했다. 이 때가 가장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칼을 만들어서 전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살을 베라고 말한다.(할례) 이것은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멸의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할례를 행하면 적 앞에서 몇 일을 꼼짝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명대로 수행했고, 백성들은 순종했다. 지난 40년간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1세대와 오랜 시간 동안 맘고생하며 지내왔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주도한 일이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이것을 여호수아서 기자는 <애굽의 수치>라고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광야 2세대는 1세대와는 달랐다. 무리한 요구 앞에서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지도자와 백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자랑스러움이 되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한다. 광야 1세대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한 세대라면, 광야 2세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부끄러움을 씻어준 세대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끄러움을 씻어주는 세대가 되자. 지난 시절 기독교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부끄럽게 했다면, 이제 우리는 새 시대의 새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수치를 씻어주는 백성이 되자. 


2. 만나를 사라지게 한 세대.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그 땅의 곡식을 먹게 되면서, 광야의 만나는 그 때로부터 끊어지게 된다.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내려주는(만나) 시대에서 인간 스스로 경작하여 먹고사는 시대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 끊어지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적이란 직접적이냐 간접적(2차를 거치는 과정)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제 유아적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과정으로 가는 단계를 밟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굽시대에서 광야시대 그리고 이제 가나안 시대는 각 시대마다 성숙해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만나의 시대에서 신앙의 모습과 가나안 농경사회 속에서의 신앙의 모습은 달라진다. 믿음을 구사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을 이어가는 과정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본질을 잊지 않고 잘 간직하면서도 숙명적인 변화를 잘 받아들인다면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잊고 형식(광야시대의 종교방식)만을 고집한다면 또 다른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그것이 어떻게 되어느냐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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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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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4장] 선지서를 읽을 때 우리가 당황하게 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것이지요. 죽일듯이 달려들면서도, 끊임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말씀하면서도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것 같을 때, 성경의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의 죄 앞에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밖에 없는 복잡한 심정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자식을 키워본 분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은 복잡한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1.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 여호와

  1)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2)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라.

  3)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소결론]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끌자가 없으리라.


2. 이스라엘을 명망하게 하는 자가 나아오리라.

  1)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2)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않음.

  3)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3. 백성에게 단지 멸망을 주기 위한 심판이 온다.

  1)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오는데, 키질하거나 정결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기 위함이다. 

  2)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18절)

  [소결론]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4. 선지자의 탄식

  1) 선지자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었기에 그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 한다. 

  2) 자기 백성이 확실하게 멸망하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계속 듣는 심정이 고통스럽다.

  3) 그런데 이 백성은 미련한 자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 


5.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될 것을 보이심. 따라서 현재의 화려함은 헛될 것이다. 

  1) 선지자는 전쟁의 폐허가 되어 완전히 초토화된 땅을 환상으로 본다. 

  2) 하나님이 이미 말하고 정하셨으니 작정하고 후회하지 아니하셨은즉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3) 그럼에도 소망을 주심은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심(27절)

  4) 지금의 화려함과 넉넉함은 착각이다. 

   (1)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 화장이 헛되리라.

   (2) 네가 초산하는 자의 고통 같은 소리를 내며,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_내 방식으로 정리]


예레미야 4장은 선지서들을 볼 때, 우리가 혼란스러운 전형적인 본문이다. 선지자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거듭 강조하면서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요청이 함께 이루어지는 메시지이기에 독자는 좀 혼란스럽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처음에는 여호와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강력한 요청을 한다. 그러나 곧 이어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불어 심판하게 될 것인데, 이 작업은 키질이나 정결케 하는 작업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연당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심판하는 과정임을 분명히 한다. 북방에서 큰 재난과 전쟁이 올 것이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돌이키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그 날은 왕과 지도자들이 낙심하게 되고, 제사장들도 놀래고 선지자들도 놀라게 된다. 경고인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멸망하게 되자. 놀라고 당황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 말한다. 선지자는 이모든 미래적 멸망에 대한 경고를 듣고 있으면서도 이들 돌이킬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들은 미련한 자고 이들은 악한 자라 악을 행하기에는 빠르나 선을 행하기에는 미련하다. 결국 이 땅은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기에 미래를 낙관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착각이다. 곧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죽음의 고통을 호소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요청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들 전부는 진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 진멸에서 살아남은 자를 위한 회복, 돌아옴을 요청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회복이 아니다. 그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주시는 기회며 깨달음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_ 내용의 흐름을 따른 설교의 대지 형식으로 작성함.


1. 이제 이스라엘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이 확정된 것이다. 

  1) 이는 너희들을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다.(11절)

  2)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12절)


2. 현재 자신을 꾸미고 단장할 수 있는 화려한 시대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곧 멸망은 온다.(30,31절)


3. 왜냐하면 너희들은 악하기 때문이다. 

  1)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심판과 멸망)을 부르게 했다.(18절)

  2) 너희들은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22절)

  3)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한다. (심판하는 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할 것이다.(28절)


4. 그러나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27절)

  1) 심판당해 멸망하고 황폐화 되겠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5. 이스라엘아 돌아오려거든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1절)

  1) 살아남은 자들 중에 너희들은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2)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라. 할례를 해도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 

  3) 살아남은 너희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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