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한 장]


1.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에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제 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1년 반만에 함락됨)


  * 바벨론의 공격에 1년 반을 견디던 예루살렘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패하게 되었을 때에 더욱 잔혹하게 멸망을 당하게 된다. 


2.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대가 도망함. 

  1) 왕과 군대가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도망감.

  2) 갈대아 군대가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잡아 립나에 있는 느부갓네살에게 올라감.

  3) 느부갓네살은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아들들을 죽였고, 유다의 모든 귀족들을 죽였다.

  4)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했다. 

  5)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왕궁과 백성들의 집은 불살랐다. 

  6)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에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다. 

  7)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다. 


  * 시드기야는 성이 무너지자, 샛문으로 도망치는 비겁함을 보였다. 시드기야가 왕으로서 얼마나 자격이 부족한 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국 시드기야는 잡히게 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 잡혀가서는 자식과 신하들이 죽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눈마져 빼았기고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만다. 시드기야 왕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있다.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결과임을 보여준다.


  * 왕궁과 백성들의 가옥은 불타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빈천한 자들만 남겨두어 포도원과 밭을 주었다. 


3.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게 대해서는 선대해 줄 것을 지시했다. 

  1)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예레미야를 옥에서 꺼내어 주고,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 어떻게 예레미야에 대해서 알았는지 바벨론 왕은 예레미야에게 선대해 줄 것을 지시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있으면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바벨론 입장에서는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소문에 바벨론에게까지 흘러가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레미야는 옥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 


4.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1)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말을 네 앞에서 이루리라고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라 하심.

  2)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라,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하리라. 네가 칼에 죽지 않고 네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 성경은 예레미야가 감옥에서 나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을 실현한 것으로 말씀한다. 세상에서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다행히 예레미야가 살아나게 되어 마치 바베론의 왕이 예레미야에게는 해방군으로 묘사될 수 있으나, 성경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임을 늘 상기시키며 심지어 바베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하나님의 뜻 가우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묵상 한모금]


1. 결국, 유다의 멸망이 왔다. 줄기차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던 유다의 멸망이 왔다. 참 선지자의 구분은 그의 말이 실현되었는가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데, 예레미야가 예언했던대로 역사가 이루어짐으로 인해 예레미야는 참 선지자임이 확인되었다. 


2. 그렇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을 앞당기려 한것은 없다. 바벨론의 첩자 노릇을 한 것도 아니고, 유다 안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내적 붕괴를 이루고자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이런 역사적 흐름 안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벨론과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 아니라, 항복하고 일정기간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때를 기다리자였다는 것이다. 


3. 이런 판단과 메시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통치를 영원히 받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매를 드신 것이기 때문에 유다의 죄에 대한 징계가 충분하다 싶으면 다시 회복시키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70년으로 정해져있음을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통해 알고 있었다. 


4. 결국 유다는 멸망했다. 우리의 낙관적 소망과 기대와는 상관없이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이와 같은 기대하지 않은 순간 찾아온 멸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나와 우리 그리고 이땅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듣고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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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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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왕의 고관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 보고 그 내용을 정리한다.


  1)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것이라고 했다. 

  2) 즉 이 성이 바베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3)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파악한 고관들은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재난을 구하오니 이 사람을 죽이라고 제안한다.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였다.

  4) 시드기야는 나는 힘이 없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건네준다.

  5)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6) 그 구덩이는 물은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에 빠졌다.



2.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졌음을 듣고, 왕 앞에 나아가서 예레미야를 변호한다. 


  1)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저렇게 행한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2) 성 중에 떡이 떨어졌는데, 웅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던져줄 떡이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거기서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3) 내시는 왕의 허락을 받고 예레미야를 웅덩이에서 구해 낸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다.


  * 시드기야 왕의 얼마나 무력한 왕인가를 보여준다. 우선은 고관들이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5절) 고관들은 자신들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이 이 사실을 알고 예레미야가 죽을 수 있음을 지적하자 시드기야는 그의 조언을 따라 예레미야를 웅덩이에서 건져내어 살려준다. 시드기야가 왕이었으나 그에게 강력한 왕의 힘이 없었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3.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성전으로 따로 불러서 비밀리에 만났다.


  1)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한 마디도 숨기지 말고 자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달라고 한다. 

  2) 예레미야가 내가 말을 해도 왕이 듣지 않고 나를 대적자들의 손에 넘기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3) 예레미야는 시종일관 바벨론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않으며 너와 네 가족이 살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갈대아인들의 손이 이 성을 넘길 것이고 이 성을 불사를 것이다. 

  4) 시드기야는 자신이 항복하면, 이미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한 유다인들이 자신을 조롱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5) 예레미야는 오히려 그렇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다. 오히려 항복하지 않을때 바벨론의 고관들에게 잡혀가는 여인들이 왕에게 속임을 당했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 시드기야는 고관 대신들에 의해서 자신의 역량을 펼수는 없는 왕이었으나, 예레미야의 말에게 많은 의지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시드기야는 유약한 왕이란 생각이 든다. 나라를 운영하는 일에 있어서도, 신앙에 있어서도...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과 수치다. 한 마디로 시드기야는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한듯 하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 인해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메시지를 바꾸지 않는다. 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메시지를 그대로 전한다. 예레미야는 약해 보이지만, 약하지 않다. 흔들리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 



4.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만나고 나서 주의 시킨 일

  

  1)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자신과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것을 요청한다. 

  2) 오히려 고관들이 와서 묻거든, 자신을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주소서 요청했다고 하라.

  3) 고관들이 찾아와 예레미야에게 무슨 말을 전했는지를 물었으나, 예레미야는 왕이 지시한 대로만 했다. 

  4) 이 일은 탄로나지 아니했고, 고관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5)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러있었다. 


  * 시드기야 왕이 고관 대신들의 눈치를 얼마나 보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시드기야가 불쌍하다는 생각마져 든다. 본인의 능력에 맞지 않는 역할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 혈통적, 시대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에서 마지막 왕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묵상 한 모금]


1. 옳은 소리를 듣지 않는 지도자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에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메시지와 같다. 오직 그에게서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보여지고 전해진다. 다른 많은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요 그들의 입에 진리가 없다. 오직 듣는 자들을 만족시켜주는 이야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위기를 넘어 부강을 말한다든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말한다든지, 민족주의를 말한다든지...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은 그 시대에 거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멸망을 예언하며,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요청하고 그렇게 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성은 불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거슬르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예레미야가 진창인 웅덩이 속에 내던져지듯, 이 시대는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내친다. 그 사람이 바름에 가깝다면,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라도 명분을 만들고 여론을 조작해서 내친다. 고관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예레미야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만약 이 나라의 고관들이 계속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쳐내기만 한다면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이고 결국 몰락할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 본다. 


2. 어제는 4대강과 관련된 영상을 보았다. 


더 이상 그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람은 전 국민의 세금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전 국토를 훼손시킨 사람이다. 더욱 악한 것은 그 적법한 절차들을(철저한 점검과 제동장치) 의도적으로 바꾸고 무시함으로 그리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을 이용해 법을 어긴 행위다. 대국민 사기라는 말이 맞다.


무책임과 사적 욕망으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큰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함부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며 법과 절차를 무시하지 못할테니까.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책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해야한다. 법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고 후세의 본보기를 삼아야 할 대상이라 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귀를 닫았기 때문이다. 쓴 소리 하는 사람들을 모두 쳐냈기 때문이다. 권력으로 두려움을 조장하고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을 과정 정부가 했고, 그래서 이런 거대한 사기극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정권도 그 길을 가고, 아니 이전에 쌓아놓은 토대위에 더 큰 집을 지으려 하니 참 이 나라의 운명이 안타깝다.


왜 들으려 하지 않는가? 왜 다 적으로 만들고 악으로 만드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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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그를 유다 왕으로 세운 것이다.

  2)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2. 시드기야는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요청함.


3. 그러자 애굽의 군대가 나왔고, 그로 인해 예루살렘을 둘러쌓고 있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떠났다.


  * 기도의 결과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암튼, 시드기야는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했고, 그로 인한 결과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키시며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1) 너희를 구하러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2) 그리고 갈대아 인들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다. 

  3) 너희가 갈대아인들을 쳐서 부상자만 남는다 해도, 그 부상자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다. 


  * 시드기야와 백성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잠시 애굽의 도움으로 바벨론이 떠나간듯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마음이 너희에게로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라. 곧 애굽의 군대는 떠나고 바벨론에 의해서 성이 불사름을 당할 것이다. 

  * 하나님은 유다가 하고 있는 헛된 기대마져도 없애신다. 끝났다는 말씀을 이런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완전하게 이들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확인하신다.(작은 미련에 대해서 매몰차게 거절함으로 끝난 관계를 확인시키심)


5. 바로의 군대로 인해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날 때

  

  1) 예레미야도 자신의 분깃을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땅으로 갔다. 

  2) 베냐민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예레미야를 붙잡아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러 가려고 한다는 누명을 씌운다.

  3) 예레미야는 부인했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잡아다가 고관들에게 넘기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때려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다. 그들은 이 집을 옥으로 삼았다. 


  *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사람들로부터도 친바벨론적 인물이라고 오해를 받은 듯하다. 그래서 애굽의 군대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떠날 때 예레미야도 함께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왕이 그의 메시지를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의 메시지는 싫어했으면서도,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내 삶이 어떤가에 따라서 권력자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예레미야처럼.


6.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 비밀리에 예레미야를 옥에서 꺼내 불러들였다. (뚜껑 씌운 웅덩이가 감옥이었다.)


  1) 시드기야는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는가를 물었다. 

  2) 예레미야는 '왕이 바베론의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을 한다. 

  3) 그리고 더불어,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자신을 옥에 가두었는지를 따진다. 

  4) 그리고 왜, 바벨론의 왕이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5) 예레미야는 자신을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한다.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한다. 

  6)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매일 떡 한개씩 그에게 주었다.  


  * 예레미야는 공적인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는 한치의 두려움도 없다. 유다의 멸망과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잡혀갈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 줄 것을 요청한다.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줄 것.... 그곳에서는 죽을까봐 두렵다는 입장을 표현한다. 

  * 공적 메시지가 변경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공적 메시지를 전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필요를 말하는 것까지 부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 둘사이에 깊이 연관되어 있긴 하겠지만, 사적 필요로 인해 공적 메시지를 변경하지 않을 확고한 마음이 있다면, 공적 일을 하면서도 사적인 상황들을 나누는 것과 그에 대한 도움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 같다.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은 냉정하다. 


마치 시드기야의 기도부탁을 들어 주어 바벨론이 떠나간것 같은 상황이 되자, 하나님의 뜻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예레미야에게 즉각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공식 표명하신다. 지금 이 상황으로 인해서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를 향한 심판의 마음을 바꾼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참 냉정하다. 좀 오해하게 두셔도 좋을텐데.

하나님은 희망 고문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중병이 든 환자의 상태를 직면시키는 의사처럼,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는다. 대수술이 될 것이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거의 죽음의 순간까지 가는 일임을 말한다. 환자에게 괜한 낭망적 기대를 주지 않는다. 


2. 예레미야는 공적으론 사역자지만, 사적으로는 사람일 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때, 그는 개인이 아니고 일반적인 사람도 아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고 회유가 있어도 신적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한치의 타협도 없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 명의 연약한 사람일 뿐이다. 생명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며 공포로 부터 벗어나고 싶은 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이 둘을 섞지 말아야 하겠다. 공적 영역에서의 사역과 사역 영역에서 한 인간을 구분해서 판단해주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따졌고, 두려움을 고했으며 개선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역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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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4장] 대선을 앞두고 심판론이 오고 갑니다. 한쪽에서는 이명박 정권 심판론, 다른 한쪽에서는 노무현 정권 심판론. 누가 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누가 이 심판으로부터 잠시 벗어날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혹 이번에 그 심판이 빗겨갔다고 해서 지은 죄(잘못)에 대한 대가까지 빗겨가리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극히 나쁜 무화과 광주리는 먹지 못할 것이라 결국 버림을 받게 되니까요.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역사적으로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2.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준 환상: 

  1)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

  2) 한 광주리의 무화과는 극히 좋은 무화과이고, 다른 한 광주리는 극히 나쁜 무화과.

  3) 하나님의 말씀(메시지)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갈대아인의 땅에 옮겨지는 유다 포로를 하나님은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다. 그들을 잘 돌보고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주어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라. 그래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 그러나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 땅에 남은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릴 것이다. 그들은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져서 환난을 당할 것이며,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하리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을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내 것으로 재구성하기]


본문은 역사적으로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환상이다. 예레미야는 성전에서 두 무화과 광주리를 본다. 하나는 극히 좋은 무화과 광주리고, 다른 하나는 극히 나빠 먹을 수 없는 무화과 광주리다. 


여고냐(여호야긴) 왕과 함께 잡혀간 여럿의 포로들로 인해 나라는 슬픔과 비통에 잠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바벨론 왕에 의해 세워진 시드기야 왕이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상황이다. 지금 잡혀간 그들이 비참하고 불쌍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다른 말씀을 주신다. 지금 잡혀간 왕과 신하와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잘 돌보고 세워 극히 좋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고 하신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 그리고 그 땅의 백성들이 극히 나쁜 무화과처럼 버려지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생각들, 묵상들]


1. 하나님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신다. 


여고냐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사람들은 슬퍼했을 것이고 이와 같은 큰 불행이 닥친 것에 대해 비참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남겨진 시드기야와 신하들, 백성들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여고냐가 극히 나쁜 무화과라고 생각하고, 시드기야가 극히 좋은 무화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독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리신다. 


하나님은 오히려 바베론의 포로로 잡혀간 여고냐와 그 백성들을 극히 좋은 무화과라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심어서 뽑히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꿈꾸시던 일을 이들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반면, 현재의 비참과 모멸을 피해 오히려 영광의 자리에 오른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 백성들에게 대해서는 극히 나쁜 무화과라고 평가하시면서 버려질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신다. 영원히 놓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다가도 영원히 벌하실 것처럼 돌이키신다. 그리고 파멸 시키실 것처럼 그들을 적국의 포로로 잡아가게 하신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돌아오게 하고 회복시켜 세운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격체인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2. 현재의 성공과 현재의 살아남이 진정으로 극히 좋은 무화과이기 때문일까?


모든 재난과 심판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극히 나쁜 무화과라 곧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비난과 판단과 죄에 대한 대가를 지금 당장 받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약간의 성공과 성취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옳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드기야와 그 정부도 살아남았다고 안도했으나 사실 그들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큰 재난을 피해서 약간의 성공을 이루고 큰 환난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용이 그릇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조롱과 수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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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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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1장]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얼굴의 하나님의 만나게 될지, 우리는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겸비하여야 한다. 겸비한다면 기회는 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1.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묻다.
  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도록 간구하도록 부탁함.  하나님의 기적을 바람.


  2) 예레미야가 그들을 통해서 시드기야 왕에게 전하는 내용
   (1) 여호와께서 바벨론과 싸울 때 사용하는 너희들의 무기를 다 모아들이겠다.
   (2)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너희를 칠 것이다.
   (3) 이 성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을 치리니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4)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죽게하고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3) 너희들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다.
   (1)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다.
   (2) 그러나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다.(그러나 전리품처럼 여겨질 것이다.)


  4) 여호와께서 이곳을 향하여 얼굴을 두심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

 

2. 유다를 향한 권면
  1)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2)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너희를 사르리라.
  3) 골짜기와 평원바위의 주민들아, 너희들은 누가 우리를 치고 우리 거처에 들어오겠는가 말하지만, 내가 너의 대적이다.
  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작성하기]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같은 도움을 구하려 한다. 그래서 시드기야는 바스훌과 제사장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낸다.


예레미야의 답변은 충분히 예상되는 답변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돕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사용할 무기들을 성 중앙으로 모으고,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유다를 칠 것을 오히려 말씀하신다. 유다는 바벨론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망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염병과 칼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을 말씀하신다. 비참한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여 뭔가 희망이 있는 것처럼 운을 떼신다. 그러나 생명의 길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생명의 길은 아니다. 포로가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의 생명의 길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지금 유다를 향해서 얼굴을 향한 것은 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하시기 위함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다윗의 집을 향해서 정의를 행하고, 탈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건지라고 요청하신다.  

 

[정리3.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교훈과 묵상]

 

1. 시드기야는 은혜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심판만 말씀하셨다.

 

시드기야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적을 바라고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 심판만을 답하셨다. 하나님은 분노와 진노, 그리고 대노하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유다가 처한 위기는 바벨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던 하나님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을 강조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누렸고 안타깝게도 은혜를 남용했다. 하나님은 은혜로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유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은혜를 요청했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답하지 않으셨다. 전에는 은혜를 주셨던 그 분이, 이제 진노를 작정하시고 몰아붙이신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백성이 방자히 행하여 하나님을 진노와 분노, 대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얼굴 방향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얼굴을 향하신다. 마치 자식을 낳은 어미의 심정으로 늘 그 자녀에게로 고개를 향하신다. 그러다가 자녀에게 등을 돌리실 때가 있다. 자녀의 잘못이 반복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신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잘못을 구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신다. 용서하시고 싶지만,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견디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다시 고개를 향하는 것이다.

 

진심과 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은혜와 자비, 용서의 마음으로 고개를 향하시고 그 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씻어주시고 위로와 격려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더 악한 길로 가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악한 태도를 견지할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진멸하시도록 심판하신다. 분노의 얼굴이며 심판의 얼굴이다.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얼굴의 하나님의 만나게 될지, 우리는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겸비하여야 한다. 겸비한다면 기회는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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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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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5장] 성경적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낙관의 시대에 교만을 지적하고,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 시대에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자는 다음 시대를 예비할 수 있는 복이 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자]

 

1. 예루살렘의 멸망: 히스기야 왕이 잡혀감
  1) 시드기야 9년 11째 달.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옴
  2) 시드기야 11년까지 포위함. 모든 병사들이 밤중에 도망함.
  3)갈대아 군대가 도망치던 왕을 쫓아가 여리고 평지에서 잡음. 모든 군대는 그를 떠나 흩어짐.
  4) 시드기야를 사로잡아 바벨론 왕에게 데려가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 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베론으로 끌고 갔다.

 

2. 예루살렘의 멸망: 남은 자를 데려가고, 성벽을 허물고 성전의 기물을 가져감 
  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19년 째에 왕의 신복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름.
  2)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태움, 성벽을 험.
  3)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모두 사로잡아감. 느부사라단이 비천한 자들은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셨다.
  4) 갈대아 사람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놋으로 된 물건들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두 놋 기둥과 받침, 놋 바다, 가마들과 부삽, 부집게, 숟가락, 모든 놋그릇, 불 옮기는 그릇, 주발 등 금이나 은으로 만든 모든 것을 가져감. 헤아릴 수 없는 양의 놋을 가져감)

 

3. 예루살렘의 멸망: 유다 백성들이 잡혀감
  1)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성중에서 여러 지도자들을 60여명을 잡아 가지고 바벨론 왕에게로 데려감
  2) 바벨론 왕은 하맛 땅 립나에서 이들을 다 쳐서 죽임당함.
  3)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4. 예루살렘의 멸망: 바벨론은 유다에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세움
  1) 바벨론이 남긴 사람만 유다 땅에 남아 있었다.
  2)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다.
  3) 유다의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고, 그달랴에게 찾아왔다.(이스마엘, 요하난, 스라야, 야아사니야...등 이들과 따르는 무리들)
  4) 그달리야가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요청함.
  5) 나중에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였다. 그리고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였다.
  6) 이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애굽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

 

5. 예루살렘의 회복(?): 여호야긴의 회복
  1)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37년 만에 옥에서 나왔다.
  2)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죄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다.
  3) 그가 쓸 것을 날마다 왕에게서 받아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했다.

 

[정리2. 정리된 내용을 내 말로 다시 풀어보자]

 

유대의 멸망을 다루게 되는 장이다.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3년간 예루살렘 성을 애워쌓으므로 결국 예루살렘 성에 있던 왕과 신하들은 견딜 수 없게 된다. 도망치려던 것이 발각되어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왕에게 끌려간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눈까지 뽑고 바벨론으로 데리고 간다. 그와 함께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훼파한다. 모든 귀인들의 집은 불태우고, 성벽은 헐었으며 성전에 있는 놋과 금과 은으로 된 것들은 모두 거두어 바벨론으로 가지고 갔다.


포로로 잡혔던 사람 중에는 60여명의 지도층 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바벨론 왕에게 잡혀 왔으나, 왕은 이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이것은 포로된 자의 운명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바벨론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남겨 놓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세워놓았으나, 유다의 군벌들이 그달리야의 친바벨론적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그 중 이스마엘에 자기 병사들과 함께 그달리야를 죽인다. 그리고 미스바에 있던 유다인들과 갈대아인까지 모두 죽인다. 그리고 갈대아 인들의 복수가 두려워서 애굽으로 도망치기에 이른다.


유다는 정치적 공백의 시간을 맞게 된다.

본 장의 마지막은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 왕이 잡혀간지 31년 만에 옥에서 나와 왕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회복하였음을 기록하는데, 이는 앞으로 유다의 상황도 이와 같이 회복될 것을 염두해 두고 표현한 거라 보여 진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유다의 멸망이 완전한 멸망임을 보여준다.

 

시드기야 왕이 도망하다가 잡혀, 자신의 아들들의 죽음을 봐야 했고 자기 자신은 눈이 뽑히는 고통 속에서 애굽으로 끄려가는 인생이 되었다. 모든 지도층들은 거의 포로로 잡혀가거나 잡혀 죽게 된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든 성전의 물건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된다.

 

바벨론의 왕이 남은 자들을 위해서 세워놓은 유다의 지도자인 그달리야조차 옛 유다 세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갈대아 인들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생활한다. 유다의 황폐함을 보여주며, 유대에 남아 있는 자들의 비천함과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셨던 성전도 훼파되었으며, 다윗의 언약도 파기된것처럼 이스라엘의 영원할 것 같은 왕조도 끊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뜻을 포기하신 것 같기도 하고, 성취하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유다의 멸망의 상황에서 보여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일이 그 당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유다는 완전히 망했다. 이 현상을 토대로 성전의 의미와 다윗 언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다른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이후 선지자들에게 새로운 해석을 하게 한 것이다. 해석은 이렇듯 현장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2. 여호야긴의 회복에 대한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완전한 멸망으로 마친것 같은 유대의 역사에 열왕기하 기자는 하나의 사건을 덧붙인다. 여호야긴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지 37년 만에 옥에서 풀려 존귀한 자리를 회복하며 평생을 왕의 진미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열왕기하 기자는 여호야긴 왕의 회복 사건(작은 사건이지만)을 통해 유다에 다시 한 번 회복의 기회가 시작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고 그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 열왕기하를 기록한 것이다.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았고, 그 희망이 작았지만 그 희망 속에서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절망의 늪에 있는 자들에게 지푸라기 하나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생명의 동아줄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가졌던 것이다. 절망의 시대에 절망을 보며 절망을 지적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절망 속에서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소망을 비추는 것으로 마감하는 역사의식을 가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역사 의식을 가진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역사의식인가? 낙관의 시대에 절망을 볼 수 있는 역사의식이다. 절망으로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절망의 시대에 소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절망 속에서 살아날 수 있고 견딜 수 있어서 희망의 때를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의식의 사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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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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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4장]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으로 한계를 느끼게 끔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한계를 느끼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참담한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선하심을 무시했는가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무시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봅시다]


1.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해서

  1) 여호야김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바벨론을 섬기게 되었다.(친 애굽적 왕) 

  2) 3년간 바벨론을 섬기다가 애굽에게로 돌아서고 바벨론을 배반한 셈이 되었다.

  3) 바벨론에 의한 큰 침공을 당하게 됨(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

   (1) 갈대아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의 부대를 통해 유다가 고통당하게 됨

   (2) 이런 일이 임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으로, 유다를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려 함.

   (3)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이를 사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4) 여호야김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됨.

  5) 이 때를 기점으로 애굽 왕이 다시는 유다로 오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성함 때문에.


2. 유다 왕 여호야긴에 대해서

  1) 여호야긴의 나이 18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림.

  2) 그의 어머니는 느후스다요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3) 여호야긴도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4) 바벨론의 침공

   (1) 바벨론 왕 여덟 째 해에 바벨론이 올라와서 유다의왕과 신하들이 끌려옴

   (2)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다. 

   (3)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버림.

   (4) 비천한 자만 그 땅에 남게 됨.

   (5)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권세자들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갔다. 용사 7000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1000명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갔다. 

  5)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의 숙부(요시야의 아들)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시드기야라 함.


3. 유다 왕 시드기야에 대해서

  1)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림. 

  2)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름.

  4) 시드기야가 나중에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내 표현으로 바꾸어 정리합니다.]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워진 여호아하스는 석달만에 애굽 왕 느고에 의해서 잡혀가고, 애굽은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으로 세운다. 여호야김은 친애굽적인 왕이었으나, 바벨론이 침공으로 어쩔 수 없이 바벨론을 섬기게 된다. 3년을 그렇게 섬기다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으로 돌아서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된다. 결국 유다는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이와 같은 사건을 성경기자는 하나님이 유다에게 내린 재앙이며 예언하신 바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평가했다. 특히, 므낫세의 죄가 너무 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사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국제 정세적으로는 이때부터 애굽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여호야김이 죽자 유다는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왕으로 세운다. 여호야긴은 석달 밖에는 다스리지 못한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유다의 왕인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지 그리고 신하들, 용사와 장인들을 모두 사로잡아 갔다. 그리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이름을 시드기야라고 바꾼다. 이로 인해 엘리트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유다 땅에는 비천한 자만이 남겨졌다.


시드기야는 11년간을 통치했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선을 행하지 못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신함으로 바벨론의 미움을 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도 한계를 느끼셨다.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4절)


우리 하나님도 한계(?)가 있으시다는 말이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인내가 무궁하시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용서에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히 언급되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내와 사랑의 크기는 우리의 모든 죄를 넘어서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없이 끝없이 그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방종으로 치닿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참으심을 무시하듯 행할 때, 하나님은 그 용납의 한계를 정하시고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신다. 유다의 상황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과 내일 살펴보게 될 왕하 25장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방종을 방관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용납하시지만 무시를 받거나 조롱을 받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지만, 쉬운 분은 아니신 것이다. 그분의 자비를 개선의 기회로 잡지 못하고 방종으로 행하고, 그 분의 선하심을 은혜와 감사로 알지 못하고 쉽게 여길 때 하나님은 모든 자비와 용납과 선하심을 거두시고 그들의 오만 방자함에 진노의 잔을 쏟으신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으로 한계를 느끼게 끔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한계를 느끼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참담한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선하심을 무시하셨는가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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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합의 운명은 여기까지군요. 자신의 죽음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더욱 비참하고 부끄러운 죽음을 맞게 되네요...

 

[정리1. 내용의 정리]

1. 아람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아합 왕.
  1) 유다 왕 여호사밧을 불러서 <길르앗 라못>을 아람으로부터 도로 찾자고 제안함
  2) 여호사밧이 흥쾌히 함께 할 것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제안 함.
  3)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 400여명이 모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장했다.
  4) 여호사밧은 이 외에 다른 선지자를 찾았고, 아합은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마지못해 데려 오도록 했다.
  5) 그 사이에 <시드기야>라는 선지자는 직접 철로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보이며 이것으로 아람 사람들을 찔러 멸하실 것이라는 쇼를 하기도 했다.
  6) <미가야>를 데리러 간 사신은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들처럼 왕에게 길한 것으로 보고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7) 미가야는 아합 왕 앞에 섰을 때, 미가야는 처음에 다른 선지자들처럼 아합 왕의 승리를 이야기 했다. 그러자 오히려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재촉하고 미가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 중에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사실을 말한다.
  8) 미가야는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누가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영이 거짓말을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게 해서 죽게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 왕에게 화를 명하셨다고 미가야는 대언한다.
  9) 이 말을 듣고 있던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면, 어찌 하나님의 영이 나를 떠나 너에게로 갔다고 하느냐 했고, 미가야는 네가 골방에서 숨는 날 그것을 볼 것이라고 했다.
  10) 아합이 자신이 평안이 돌아올 때까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어 고생을 좀 하게 하라고 하자, 미가야는 왕이 평안하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말한다.

2.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게 된 아합.
  1) 아합은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왕의 옷을 벗고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갔다.
  2) 아람의 지휘관은 특수요원 30명에게 지시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합 왕만 죽이라고.
  3) 처음에는 아람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이 아합인 줄 앍고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나, 여로보암은 자신은 아합이 아니라고 하자 아람은 그를 좇기를 멈추었다.
  4) 그러다가 어떤 병사간 쏜 화살이 우연히 아합의 갑옷 틈새를 통과하여 몸에 박혔다.
  5) 전쟁이 맹렬한 상황이라, 아합은 후송되지 못하여 결국은 피흘려 죽게 된다.
  6) 왕의 주검은 사마리아에 장사하고,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아합은 죽음을 맞이 했다.

3. 유다 왕 여호사밧에 대한 간략한 내용
  1) 35세에 왕이 되어 25년 간 다스렸다.
  2) 아버지 아사와 같이 모든 길로 행하여 돌이키지 않았고 여호와 앞에 정직했다. 그러나 아직 산당은 폐하지 못했고,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는 드려졌다.
  3) 여호사밧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과 더불어 화평했다.
  4) 아사 왕의 시대에는 남아 있던 남색하던 자들을 그 땅에서 모두 쫓아냈다.
  5)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다.(유다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4. 이스라엘에서는 아합이 죽고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1) 왕이 되어 2년간 다스림.
  2)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과거 조상들의 죄를 따라감.
  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함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노하게 함이 아비와 똑같았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의 구체적인 죄악 세 번째가 언급되는 장면이면서 결국은 아합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아합 시대는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우호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아합은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으로부터 길르앗라못을 빼앗기를 원했다. 여기에 여호사밧은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했고,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지자 4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합의 승리를 보장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다른 견해를 말하는 선지자)를 찾았고, 아합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미가야 선지자가 왔다. 미가야 선지자는 400여명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게 하시려고 거짓 영을 통해 보낸 내용이고, 하나님은 아합이 죽게 될 것을 그대로 대언한다.


이로 인해 미가야는 시드기야라는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아합에게는 옥에 갇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누가 참 하나님의 대언자인지는 그 이후에 밝혀지게 된다.


아합은 아무래도 미가야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왕의 옷을 벗고 일반 병사들의 옷을 입고는 전쟁에 출전한다. 그로 인해 아람의 지휘관들은 아합을 잡지 못해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합은 전혀 예기치 못한 활에 맞는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전쟁이 한창이라 그 자리를 피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결국 아합은 너무 어처구지 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아합의 시신은 사마리아 성으로 옮겨졌으나, 아합을 실은 병거는 사마리아의 한 못에서 씻게 되는데 그 씻을 때 닦인 피를 개들이 핥게 됨으로 아합의 최후가 비참하게 되고 만다. 그 씻은 못이 창년들이 목욕하는 것이라는 것을 언급한 것은 아합의 죽음이 더욱 비참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악을 행했고, 바알을 섬겼다. 그는 2년 정도 밖에는 통치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남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뒤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그래도 정직하게 잘 감당했다. 물론 산당까지는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정리3. 묵상 및 적용]

1. 그냥 <죽음>을 피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게된 아합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싫어했지만, 미가야 선지자의 말은 아합의 마음 속에 오래 남았다. 혹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왕의 갑옷을 벗고, 병사의 갑옷을 입었다. 그것이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아람의 지휘관들이 오히려 여호사밧을 쫓아갔으니까... 그리고 아합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차리질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왠걸. 아람의 한 병사가 쏜 화살이 우연히 아합을 맞췄다.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신속하게 조치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 중앙에 있었고 그 자리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출혈은 과다하게 되고 아마 과다출혈로 죽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작은 상처를 신속히 조치하지 못해 왕이 죽게 된 것이다. 그의 피를 씻은 물은 개가 핥았고, 그 못은 또한 창기들이 목욕하는 부정한 못이었다.

아합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 답게 죽고 만다. 왕의 권력만 있었지 왕다운 면모가 없었던 아합은 어찌 될 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해 부끄럽게도 병사의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정말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죽는가는 그 사람의 인생 마지막의 마침표가 되는 것이니 만큼 더욱 중요하다.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생명에 연연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 앞에서라도 지켜야 할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겠는가?

죽더라도... 아름답게 죽어야 하겠다. 품위있게. 주님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2. 다른 견해를 듣고자 했던 여호사밧

아합에 비해 여호사밧이 돋보이는 것은 400명의 선지자의 소리 외에 다른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아합은 미가야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늘 안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런 사람들의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나를 비판하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이가 많고, 권력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여호사밧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여호사밧의 강점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소리가 있을 때, 그것은 분쟁처럼 보일 수 있고 시간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다. 괜한 딴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해야 한다.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논리와 그 사람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자가 없는 회의는 어쩌면 거짓 영이 지배하는 400명의 선지자와 같은 상황일 수 있는 것이다.

반대자의 소리를 듣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사람을 품고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짜 리더가 될 자격을 가진 것이다. 그런 리더가 세워지길 간절히 고대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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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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