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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40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절.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절. 보내시면 엄히 경고하사

44절.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서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아오더라.


[성경내용 정리]

1.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깨끗하게 해 주시길 원했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주님은 '당신이 원하신다'고 말씀하시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니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그대로 이루어졌다. 

2.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해지자 '곧' 말씀하셨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엄중히 말씀하셨다. 1)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2) 다만 제사장에게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하게 된 것을 입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일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 일을 많이 전파했고 널리 퍼졌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은 사람많은 곳으로 다니지 않으시고 변두리 한 적한 곳에 계셨지만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 왔다. 


[질문하기]

1. 일반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구별해서 구체적으로 한 나병환자를 고치는 사건을 통해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1) 나병환자는 일반적인 병자와 구분해서 '부정한 병'이라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고 부정한 자라고 여김받았던 병이다. 그런데 그 병을 가진자가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물리치지 않고 받아주셨다.(부정한 자, 죄인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2)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고치실수 있다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내가 원한다'는 것으로 화답하심으로 정말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그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마음에 원하시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 내시는 분)

  3)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이후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것을 경고하시면서도 제사장에게는 보이라고 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제사장'으로부터 입증을 받고 온전한 회복을 이루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셨다.(모세의 법을 인정, 제사장 인정,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강요하셨을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순종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숨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숨겨지지도 감출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마을을 피해 한적한 곳에 머물렀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 예수님은 감추고 숨기려했으나 참출수도 숨길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은 원하시면 그 원하시는 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한계는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많은 것을 원하시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고통당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나병환자의 경우 그는 얼마나 많이 그 병이 낫기를 원했을까? 얼마나 오랜시간 간절히 기도했을까? 그러나 그런 원함과 소망만으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그 일은 실행된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혐오했다. 그들이 낫기를 원하기 보다 그들이 자기 주변으로 오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나병이냐 아니냐를 판단하기는 일에는 정확했을지 모르지만 그 병을 가진 사람의 아픔과 간절함에는 무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않았고 오히려 '나병환자가 낫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낫게 하셨다'. 어떤 사람이든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회복된다.(확실히 구원이 임한다)

2. 어둠은 빛을 감출수 없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고 드러내고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 분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고 스스로 확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출수가 없었다. 그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를 숨길 수가 없었다. 마을 변두리에 숨어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빛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 올 수 밖에 없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 빛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를 향해서 나아오게 된다. 

최근 한국 사회에 기독교의 영향력이 추락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감추어지는 것이고, 그릇된 전통이 추락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감출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비판은 예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빛인데 예수를 예배하고 섬긴다고 하는 너희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왜 어둡냐고 힐난 하는 것이다. 이럴수록 우리의 신앙은 '예수'에 집중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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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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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3>(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권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3.(권면)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1) 동역자: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2) 동역자: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은 1,2장의 권면, 3장의 권면을 마치면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그 정리하는 권면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 서라>이다. 이것은 한 개인을 향해 주는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투기와 분쟁이 있는)를 향해 주신 권면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만약 교회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못하고 서로 투기와 분쟁을 지속한다면 교회는 설 수 없게 될 것이란 의미다. 빌립보서의 내용을 근거로 정리하면 교회 내의 분쟁으로 인한 것이라면, 큰 그림을 보면서 서로 돌아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한다.(2장) 반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육체의 자랑, 의에 근거한 신앙)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쫓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장) 이 둘을 잘 구분해야 연합할 때 연합하고, 경계해야 할 때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구별이 모호한 영역이 있지만, 늘 이 두 영역이 혼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빌 4:4-7>(정리하기)

1. (권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2. (권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3. (권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6절)

 <정리>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뻐하라'가 아니다. '주 안에서'이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묵상] 그것은 빌 1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바울은 매임에 있었고, 경쟁자들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18절) 이유는 그의 시선이 자기 자신의 형편이나 상대방의 성공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복음의 전파', '그리스도의 확장'에 그 삶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뻐하라'는 명령은 '주 안에서'라는 의미가 명확해 질 때 가능한 것이지 당위로서의 기뻐하라는 또 하나의 무거움 짐이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두번째 권면은 '관용'이다. '관용'은 갈등이 있는 두 집단 이상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한 편이 되기 위해서 품는 마음이다. 이는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품어야 할 마음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관용'이라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종말론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관용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자가 오셔서 최종 판단을 내려 주실테니 서로의 주장을 강요하지 말고, 입장은 다르지만 최종 결정을 기다려보자. 곧 판결난다. 이 일로 서로 원수가 되지는 말자! 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서로에게. 아내와 내가 부부싸움이 현저하게 줄어든 결정적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종말론적 태도 때문이다. 


3. 이런 바울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입장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결정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입장이 다른 입장과 싸우거나 적을 만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입장이 진실하기에 그 입장에 서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다. 

  [묵상] 바울은 교회 안에 파당이나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그것을 정죄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을 경고하고 있지만 다른 입장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시기와 질투, 분쟁으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긴장이 있을 때, 

<주 안에서> 우리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한 집안 사람임을 잊지말라

<관용> 곧 주께서 오셔서 선명하게 판단해 주실테니 좀 참고 서로에게 관용하라.

<기도> 그러면서도 네 입장에서 네 마음이 소원을 하나님께 구해라. 하나님께 맡겨라.(그 분이 정답을 알려주실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하나님의 정답이는 너는 따르든지 감사하든지 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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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7-21>(정리하기)

1. (권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2. (권면)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17절)


 (설명) 

  1) 바울은 여러번 말했고, 이제 다시 눈물로 말한다. 

  2)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18절)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2)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다.(19절)


  3)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4)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20절)

  5)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1절)

   -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여기서 빌립보 교회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는가? 

  [답변1] 바로 앞에서 말하는 바울의 논조를 본다면,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하는 태도(3:13)을 말하는 것일게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게 되었냐를 따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신이 지금 바라고 지향하는 것(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가듯이 빌립보 교회도 괜한 논쟁(분쟁)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보다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답변2] 좀 더 앞으로 가면 바울이 자신이 매임을 당했을 때, 투기와 분쟁의 목적으로(그릇된 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로 인해 분해 하거나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거국적인 관점(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넉넉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 바울이 말하는 원수들의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의 바른 태도와 소망은 무엇인가? 

  [답변]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데, 그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대속,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을 훼손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의미(낮아짐과 죽기까지 순종하심의 정신)를 무시한다. 그들의 결국이 멸망이다. 그들은 육적인 것이고 땅의 일에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반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 거기서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영광의 주님은 우리의 낮은 몸을(낮아진 몸, 죽은 몸) 자기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우리도 하나님의 올리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 이런 표현을 통해서 보면 2장에서 약속한 내용의 반복을 보여준다.(2:9-11)


<1,2장, 3장과의 연계성>

3장은 1,2장과는 주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1,2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이 있는 대상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 파당이 다른 대상으로서 서로 투기와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3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교회를 위협하는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복음 외에 할례와 같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도 그들과 논쟁에 힘쓰기 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심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나가라고 요청한다. 

2장 마무리하면서 디모데 이야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제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3장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연결되는 면도 있는데 1,2장에 나오는 대상이나 3장에 나오는 대상 모두 십자가의 정신을 훼손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잊지 않고 바울처럼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는 연계성이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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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주일낯예배(2014.6.22)

제목: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십시오.

본문: 롬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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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7 목적을 잊은 백성들


찬송가:


여는 이야기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2년 여섯 째 달 초하루에 학개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의 유대 총독이었던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전한 내용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오랫동안 성전 공사가 멈춰지고, 자신의 일상생활에만 머물러있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이다.


절별 해설


1:1 <<다리오 왕 이 년>> 다리오 왕은 주전 521-486년 동안 다스렸던 <히스타스페스>를 가리킨다. 따라서 다리오 왕 이년은 주전 520년을 말하는데, 이는 고레스가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하여 포로인 유대인들을 귀한 시킨 년대를 주전 538년으로 보았을 때 무려 18년이 지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전 재건을 위해서 귀환한 백성들이 18년의 시간 동안 성전을 완공하지 못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인 여호수아>> 이들은 학개가 전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대상들이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에 속한 여호야긴의 자손으로 알려져있고,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아버지 여호사닥(요사닥)은 대제사장 스라야의 아들이다. 스라야는 바벨론 포로시에 끌려갔었다.(대상 6:14,15) 이를 통해 보면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의 혈통을,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아론 계열의 직계손임을 알수 있다.


1:2 <<아직 여호와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룹바벨이 고레스의 허락으로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방해로 인해서 성전 재건은 중단되었다.(4:23,24)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한다면 목적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성전을 재건할 수 없는 상황이 장기화되자 성전 재건이라는 목적을 잊어버린 채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하게 되었던 것 같다.


1:4 <<너희가 그렇게 멋진 집에서 사는 것이 옳으냐?>>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할 수 없게 되자 성전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들고,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에만 집중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자신의 집과 생활을 유지하고 꾸미는 일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지 못한 채로 익숙해진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1:6 <<너희가 심기는 많이 심었으나 거두기는 적게 거두었다>>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유다 백성들의 최근 상황이 이러했음을 보여준 것인데,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더 자신의 생활에 몰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생긴 것은 하나님을 잊고 자신의 필요만을 채우려고 했던 유다 백성들의 그릇된 삶 때문임을 하나님을 지적하신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주신 본질적인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잊고 우리의 일상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부르심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백성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재건하기 위함이었고, 그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의 회복을 시기하는 주변 세력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은 그 기초만 세운 채 더 이상의 진척을 하지 못한다.(3) 그리고 다시 성전 재건을 위한 조건이 형성되기 전까지 그들은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18년의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성전 재건은 요원한 일로,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이들은 자신의 생활에 더욱 집착하게 된 것이다. 우리도 지금 혹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로서 살아가고 싸워가야 할 목표를 잊은 채, 내 일상의 편안함에만 매몰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학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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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권면은 크게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첫째, '하지 마라'는 것은 '논쟁하고 변론하고 싸워이기려고 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런 것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디모데의 싸움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은 헛된 이야기를 퍼트리는 악성 종양과 같은자고 경겅하지 아니함으로 나아가는 자들이기에 그들을 논쟁과 변론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역자인 디모데에게는 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디모데는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자들 혹은 세력들과 대항해서 복음과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논쟁적 싸움을 오랫동안 해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논쟁에서 이기기도 한 적도 있을 것이고, 또한 밀리기도 했을 것이다. 변론에서 밀리면 더 많은 준비를 통해서 다시 논리적 반격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반복되는 논리적 싸움 속에서 나온 결과물들은 선한 것이 없었다. 반대편에 선자들은 더욱 그들이 입장을 고수하는데 논리를 세워갔고, 그 논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점점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수 있다. 논쟁을 주도했던 디모데조차도 지칠대로 지쳐갔을 것이다.

여기에 디모데의 낙심과 눈물의 배경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디모데는 젊고 똑똑한 젊은이였기에 지적싸움에서도 지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진리로 대응해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진리를 지켜내지 않으면 위태로워 질 수 있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디모데는 싸웠다. 그러나 이제 디모데는 지쳤다.

둘째, '하라'는 것은 너 자신을 경건하고 깨끗하게 준비하는 사역자가 되라고 한다. 논쟁적 대적자들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너는 너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꾼이 되는 것에만 집중하라고 한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하고, 불필요한 논쟁은 그만 하라는 것이다.

만약 거역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온유한 마음으로 훈계하는 정도로만 해라. 그래서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라. 네가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말아라.

 

목회란 무엇이고, 목회자의 자기 관리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묵상해 보는 것은 목회자의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 목회자의 자기 관리인 것이다. 이것 저것(멋있어 보이더라도, 논쟁에서 이길 때의 쾌감이 있고 시선의 집중에 대한 짜릿함이 있지만, 목회적 성공과 같은) 관심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본질적으로 해야 할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그 일을 다른 충성된 일꾼에게 맡기어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목회자의 본질이면서 자기 관리이다. 이것을 떠나 이것 저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기웃하는 것은 목회자 사명의 본질과 비본질을 혼돈하는 것이고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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