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03_룻1:15-18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1:15-18]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나오미의 설득과 오브리의 현실 인식으로 오브리는 그의 백성과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나오미는 오브리가 고향으로 돌아간것처럼 룻도 돌아가라고 다시 한번 권고한다. 그러나 룻은 결단코 나오미를 떠나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16-17절의 긴 고백은 룻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의 결심에 나오미도 결국은 포기하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다. 



[문장요약]

1. 나오미는 룻에게 다시 한번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도록 권유하고 있다. 나오미의 진심이 보이는 장면이다.(어린 며느리를 생각하는 마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를 떠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나오미에게 속해서 나오미와 한 운명이 되겠다는 결심을 보여준다. 

 1)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말소서

  -> 나오미와 함께 할 것을 표명함

 2) 어머니가 가시는 곳,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 어머니의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 /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줌

  3)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 벌을 받기 원한다.

  -> 마치 결혼 서약과 같은 서약을 하고 있다. 나오미와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겠다는 룻의 결의를 보게 된다. 


3. 이 이야기에서의 핵심은 나오미의 설득에도 룻이 나오미를 떠나지 않기로 결단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룻이 나오미와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겠다는 선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오르바와 룻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오르바는 떠났고, 룻은 나오미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 


3. 오브라와 룻은 둘다 이방인이었지만,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지 오르바와 룻의 선택을 통해서 달라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4.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원수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자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룻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기로 결단하고 그 분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로 결단하면 되는 것이다. 


5. 세상의 현실에 민감하고 현명했던 오르바는 결국 나오미를 떠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등지는 결단, 현실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결단 즉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결단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나오미를 떠난 오르바는 어떤 여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오르바는 어떤 측면에서 유사한가? 

  - 오르바를 욕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룻이 나오미와 함께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룻의 믿음(신앙)' 때문일까? 

  - 많은 사람들이 룻에게 여호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는데.. 과연 그런가? 

  - 룻의 신앙에 따른 결과일까? 아니면 나오미를 생각하는 인간적인 측은지심의 결과일까?

 - 룻에게 구원받을 신앙이 있었다고 봐야 할까?(룻은 이방인이고, 나오미 집안의 신앙도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 신앙은 어디서 왔을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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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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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02_룻1:6-14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1:6-14]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결국 자신의 고향인 유대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나오미는 돌아오면서 두 며느리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고, 본인들의 고향에 남아 재혼하여 살아갈 것을 권유하지만 두 며느리 모두 그러기를 원치 않아한다. 나오미는 다시 한번 두 며느리를 설득하는데, 현실적으로 자신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인식시키고 결국 오르바는 설득이 되어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쫓기로 한다.  



[문장요약]

1. 룻기의 저자는 지난 10년간에 일어났던 일을 5절(1:1-5)로 정리했다. 그러나 나오미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짧은 시간 며느리들과 나눈 대화의 내용은 자세히 길게 다루고 있다. 이는 이 대화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독자로 하여금 대화의 내용을 주목하여 보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2. 이와 같은 스토리 속에서 몇 가지 눈에 띄는 강조점들이 있다. 

 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가 고향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는 것(6절)

  -> 흉년으로 고통당하던 땅에 하나님의 돌보심이 회복되어 양식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대를 기대하게 된다. 

 2) 나오미를 쫓으려는 두 며느리의 마음이 진심으로 보인다는 것(어떤 가식적인 표현이 없이 진정어린 태도로 나오미를 대하고 있다는 것)(9-10절, 14절)

  -> 이방여인이지만 나오미에대해 진정성있는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통해 이방여인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다. 

 3)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불편하게 보시고 치셨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13절)

  -> 개인사를 고려할 때 나오미의 하나님 인식은 부정적이다. 고통을 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나오미의 처지를 본다면 그와 같은 나오미의 입장에 공감할 것이다. 


3. 두 며느리의 진정성있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오미를 쫓아온 사람과 떠난 사람으로 구분된다. 오르바는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쫓아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 


4. 이제 룻기의 중심 이야기 속에서 나오미와 룻이 중심인물로 남는다. 오르바는 자신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배제되게 되었다.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나오미는 하나님의 땅을 떠났다가 실패하고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오는 유대인의 모습으로서 신앙이 있지만 고난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야곱처럼 자신의 지혜를 따라 살다가 결국 빈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신앙인의 모습)


3. 룻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스토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운명의 여인이다. 오늘날로 보면 교회 밖 사람이고, 신앙이 없는 자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오미와의 관계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땅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이다.(비로 충분한 신앙이 아직은 없겠지만) 그러나 누구나 룻과 같은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르바는 동일한 상황에서 나오미를 따르지 않고 떠났기 때문이다. 룻은 나오미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유대 땅에 올 일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를 통해 유대 땅까지 오게된 이방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신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에는 '신앙'으로 시작하지 않는 통로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4. 나오미가 겪은 불행한 일이 결국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불행한 일이 불행한 결과만 낳지는 안는다. 아직은 반감이 더 많지만 결국 나오미는 고난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더 나아가 룻까지 그 은혜 안으로 인도하게 된다. 현재의 고난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5.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오늘 본문은 오르바와 룻의 선택이 결국 그의 운명을 갈라놓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인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이 땅에서 겪는 고통과 불행은 부정적이기만 한것인가? 어떤 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는가? 

  - 나오미에게는 어떤 기회가 되었는가? 


2. 나오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룻이라는 여인을 하나님의 역사 속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떤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인가? 

  - 나도 모르는 중에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나도 알지 못하는 중에 생각지 못하는 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결과는 알수 없지만, 매 순간 정직하고, 순수하려고 하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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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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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01_룻1:1-5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1:1-5]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5절 분량이니 성경을 찾아 읽으시면 될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룻기는 시기적으로는 사시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지역적으로는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베들레헴에 엘리멜렉 집안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엘리멜렉의 아내는 나오미고 그에게는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있었다. 엘리멜렉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 살다가 그 땅에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모압으로 이주한 후 얼마 지나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다. 두 아들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과 결혼했고 그 땅에 10여년쯤 거주했을 때 두 아들마져 죽자 나오미는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문장요약]

1. 룻기에 어떤 신학적인 메시지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미리 연구할 필요는 없다. 첫 독자가 룻기의 이야기를 접할 때의 느낌으로 접근하면 좋다. 이야기의 특징은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청자의 마음 속에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2. 룻기의 시작은 앞으로 진행될 스토리의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1) 사사시대라는 것, 베들레헴이라는 것, 그 땅에 흉년이 왔다는 것 등이 룻기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한다. 

  2) 엘리멜렉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야기로 시작했으나, 엘리멜렉이 죽고, 후에 두 아들도 죽고 남는 것은 이제 '나오미' 뿐이다. 그리고 두 아들의 아내인 오르바와 룻 뿐이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 세 여인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임을 알게 된다.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 모두 엑스트라다. 룻기에서는)


3. 첫 도입 이야기부터 반전이 시작된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혹은 더 잘 살만한 곳으로 찾기위해서) 모압으로 이주했는데 오히려 모압에 살면서 더 큰 어려움(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4. 첫 독자가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엘리멜렉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주했다는 것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땅을 떠나 이방땅에 거주한다는 것은 신앙적인 태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안에서 이주에 대한 어떤 긴장이나 갈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당시의 시대가 <사사시대>라는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을듯 하다.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룻기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성도)를 향한 이야기로 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3. 특히 사사시대(왕이 없어 자신이 왕 노릇하던 시대)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교회의 성도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오늘날의 교회와 유사한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4. 따라서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흉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신앙>대신 <세속적인 지식, 판단>으로 행동한 엘리멜렉의 가정은 오늘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성도의 가정의 모습으로 봐도 무방하다 하겠다.(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5. 어려움을 지혜롭게(?) 잘 피해 보려고 했던 가정이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나오미 가정) 우리도 어려움에 봉착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고, 과연 나오미 이야기의 결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교훈을 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사사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과 사사시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사사 시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시기를 읽어야 보는 것이 필요하다. 

  - 단순하게 말하면 왕이 없던 시대였고, 스스로가 왕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음을 말한다. 

  - 흉년을 대하는 엘리멜렉의 판단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2. 나오미의 입장에서 지난 10년간의 삶이 어떻게 평가될 수 있겠는가? 

  -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왔더니 오히려 모압에서는 더 큰 고난을 당하는구나.

  - 왜 여호와 하나님은 나에게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내가 뭔 잘못을 했는가? 

  - 모든 것을 잘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감이 들 수 있었을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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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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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강화체_빌레몬05_몬1:15-18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문장요약]

1.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게 된 것(도망친 것)은 오히려 빌레몬 곁에 오래도록 두기 위함이다.(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이해하는듯 하다)

2.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때 전처럼 종으로 대하지 말고, 종 이상의 관계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해 줄 것으로 요청한다.(이미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와 같은 관계로 대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3.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자 하는데, 그를 맞아들일때 빌레몬이 바울을 영접하듯 환대해 줄 것으로 요청하고 있다.  

4.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재산의 피해를 준 것이 있다면 본인이 대산 갚아 주겠다고도 말한다. 

[내용정리]

1.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환대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종-> 종 이상, 형제로. 바울을 영접하듯 환대해 주라. 바울이 대신 빚을 갚겠다.)

 1. 바울이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다.다만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청하는 내용 속에서 오네시모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숙한 성도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


2. 바울이 오네시모를 매우 존중히 여기고 있으면, 빌레몬으로 하여금 과거 잘못이 있는 사람이 변화되었을 때에 어떻게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적인 지침을 준다.  

  1) 바울이 종에 불과한 오네시모의 회복을 위해서 매우 신중하게 말하고 요청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다.

  2) 신분사회라는 구조 속에서도 종을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줄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용납이 아니라 환대할 것에 대해서, 바울이 대신 빚을 갚아주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예수의 삶을 볼 수 있고, 바울이 예수와 닮은 지경에 이른 것을 관찰하게 된다. 


4. 바울의 태도와 권면 속에서 복음적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바울이 빌레몬을 대하는 태도, 오네시모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어떤 것들이 느껴지는가? 

  - 바울은 빌레몬보다 권위자며, 나이도 많은 선생이나 명령하지 않고 간구함으로 접근했다. (14절을 보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 진행하는 것은 절차에 맞지 않는 것이고, 선한 일이라도 억지 아닌 자의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바울의 가치관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 속에서 보게 된다.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표현을 쓰는지 확인하게 되고 바울의 진심이 무엇인지 빌레몬에게 전해지도록 힘쓰는 모습을 본다. 

  - 성숙한 성도, 성숙한 리더가 가지는 태도와 가치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2.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 속에서 복음의 핵심적인 개념들이 드러난다. 

  - 16절. 종에서 사랑받는 형제로의 변화

  - 17절.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환대, 자격이 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

  -18절. 대속(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 바울은 복음을 받은 자로만 사는 자도 아니고, 복음을 개념으로만 안 사람도 아니다. 그는 복음을 받은 자로 그 복음을 삶 속에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이 오늘 본문 속에 잘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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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강화체_빌레몬04_몬1:11-14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문장요약]

1. 오네시모가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변화되었다)

2. 그러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했다.  

3. 오네시모는 바울의 심복(심장) 같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오네시모의 섬김을 통해서 지금 매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4.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영적으로 낳았고, 유익한 자로 변화시켰으며 지금은 바울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나 오네시모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고, 빌레몬의 자의적인  허락이 없이 오네시모의 섬김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용정리]

1.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지금 매우 유익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내게 유익하다고 임의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2. 바울은 자신의 유익과 편의에 따라 행동하고 결정하지 않는다. 원칙과 절차를 따라 행동했다. 자신이 빌레몬과의 관계에서 그 원칙과 절차를 따르지 않아도 될 것같은 관계였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 바울이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다.(~을 해라. ~을 하지 말라) 다만 바울이 빌레몬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숙한 지도자(성도)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


2. 권위와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관계있더라도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는 방식은 성숙하지 못하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여준 모습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3. 사람은 복음 안에서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로 변할 수 있다.(11절)


4. 좋은 일, 바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은 빌레몬이 억지로 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의로 하길 원한 것처럼, 우리도 어떤 권면을 할 때 강압적인 태도보다는 자의로 할 수 있도록하는 인격적 권면이 필요하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나는 내 편의와 유익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인가? 불편하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따라  행동하는 사람인가? 

  - 내가 바울의 입장(리더의 입장, 갑의 입장)에서 빌레몬의 처지에 있는 대상에게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자. 


2. 지도자로서 성숙한 권면은 '옳을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의'로 하도록 돕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 나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이 명하는 내용을 '당위'로서 요구하고 성도를 '평가'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설교는 '옳을 일'을 권면하면서도 그것이 '자의'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동기부여와 자각, 기다림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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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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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강화체_빌레몬03_몬1:8-10


전문적인 신학공부와 원어 공부를 하지 않으신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짧은 본문을 가지고 연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해석은 문자적(문법적, 문학적)해석을 중심으로 합니다. 온전한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해석이 함께 되어야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차원에서 하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문자적 해석을 하면서 역사적인 해석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에 어느 정도는 본문에 따라 반영될 것입니다. 신학적 해석은 그 이후의 일이구요. 


 * 물론 평신도를 위한 훈련이기에 한글성경(개역개정)을 중심으로 하고, 번역된 성경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큰 틀에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훈련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어렵지 않고, 복잡하지 않고,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훈련해 보는 것입니다.)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문장요약]

1. 바울은 이제 부탁하고하는 내용을 빌레몬에게 담대하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2.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구>한다. 

3. 바울은 빌레몬에 비해서 나이도 많고,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에 옥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옥중에 있으면서도 오네시모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바울의 영적 자녀가 되었다. 

4. 바울은 지금 그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정리]

1. 바울의 빌레몬에게 권고하고 명령할 수 있는 나이, 위치, 영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구>하고 있다. 

2.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낳은 영적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서 이와 같은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바울이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다.(~을 해라. ~을 하지 말라) 


2. 다만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빌레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바울은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다는 것은 바울의 인격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3. 바울의 이와같은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 지도자로서 가지는 자질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1) 인격적인 태도

  2) 영적 권위와 나이로 명령하지 않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바울

  3) 갑과 을에 대한 태도: 공적인 일에서 역할에 따라 상명하복의 구조일 수 있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도 인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갑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을을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적용] 

적용은 관찰(1차 독자의 입장) -> 해석(우리시대의 보편적 독자입장) -> 적용(오늘, 나에게)라는 과정의 마지막 절차입니다. 묵상과 관련된 것이고 개인의 입장에서 해석된 말씀이 어떤 의미냐 하는 것이기에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관적이라는 말은 임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느냐? 의 문제이지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1. 바울은 왜 마땅한 일, 옳은 일을 요구하면서도 매우 신중하고 인격적인 요청을 했을까? 바울은 성도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중요하게 여긴 가치관은 무엇일까? 

  - 바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자.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왜 그랬을까?


2. 내가 만약 빌레몬의 입장에서 바울의 편지(몬 1:8-10)를 읽고 있다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우리가 기대하는 영적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 바울의 문장 하나하나 속에 담겨진 배려의 태도에 감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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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강화체_빌레몬02_몬1:4-7


전문적인 신학공부와 원어 공부를 하지 않으신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짧은 본문을 가지고 연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해석은 문자적(문법적, 문학적)해석을 중심으로 합니다. 온전한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해석이 함께 되어야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차원에서 하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문자적 해석을 하면서 역사적인 해석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에 어느 정도는 본문에 따라 반영될 것입니다. 신학적 해석은 그 이후의 일이구요. 


 * 물론 평신도를 위한 훈련이기에 한글성경(개역개정)을 중심으로 하고, 번역된 성경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큰 틀에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으로 하는 훈련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리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문장요약]

1. 바울은 빌레몬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를 향한 기도가 늘 있어다.(마음 깊이 생각함) 


2. 특별히 빌레몬의 신앙과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감사했는데, 빌레몬은 사랑과 믿음을 인정받는 신앙 생활을 했던 성숙한 지도자였다. (바울이 세운 리더라면 더욱 감사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3. 빌레몬의 신앙을 통해서 '선'을 드러나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전도)했다. 즉 빌레몬은 삶으로 전도하는 지도자였다. 


4. 성도들은 빌레몬으로 인해 평안함을 얻었고, 빌레몬을 세운 바울도 옥중에서 소식을 듣고 기쁨과 위로를 받아왔다. 

 1.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개인적인 감사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특별히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내용은 없어 보인다. 


2. 그러나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평가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가 어떤 태도가 칭찬받는 모습인지를 볼 수는 있다. 


3. 빌레몬의 특징을 정리하면

  1)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5절)

  2)믿음의 교제가 선을 알게 하고 전도의 역사를 이루게 한다.(6절)

  3) 성도들은 빌레몬으로 인해 평안함을 얻었다.(7절)

  4) 바울은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7절)


[적용] 

적용은 관찰(1차 독자의 입장) -> 해석(우리시대의 보편적 독자입장) -> 적용(오늘, 나에게)라는 과정의 마지막 절차입니다. 묵상과 관련된 것이고 개인의 입장에서 해석된 말씀이 어떤 의미냐 하는 것이기에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관적이라는 말은 임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느냐? 의 문제이지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1. 나는 믿음의 지체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빌레몬처럼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믿음에 있어서 인정받고 있는가? 

  - 빌레몬의 신앙과 나 자신의 신앙을 비교하여 묵상해 볼 수는 있다. 


2.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서 평안함을 얻고 있는가? 아니면 불편함을 겪고 있는가? 

  - 내가 함께 하는 모임 속에서 나는 피스 메이커인가? 사람들은 나로 인해 위로를 얻고 선을 보게 되는가?

  -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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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신학대학원 M.Div 졸업논문(2003년. 김수억)


평신도성경해석의문제점과대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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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 인격자의 발언이기 때문에(지,정,의)


1.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고 표현하시는 분이시다.(흑백이 아닌 칼라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함)

  이 부분을 지성과 의지의 차원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되고 만다.


2.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죄가 없는 욥이나 요셉같은 인물이 고난을 거치도록 하신다. 그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인간은 그 속이 변하지 않는 이상은 외적으로는 무슨 방법과 조건을 제시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적 변화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요 중생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중생을 결과시키는 작업으로 오시지 더 이상 설득하고 설명하고 잡아끄는 것으로는 오시지 않는다고 본다.


3. 영적인 계시의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 중 하나 <비유>

  1) 비유(parable)와 알레고리(allegory)의 차이: 

   (1) 비유는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아는 일상생활에서의 한 장면을 도입하는 것.

예1) 빠른 사람을 <제트기>라고 표현함. 그러나 알레고리는 <제트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함(비싸다)

비유는 1차 개념만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모든 의미를 등장시키는 것이다.(삿 9장의 알레고리)


예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비유를 들어주시는 목적인 무엇인가?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한 것(따라서 언급된 세부적인 내용들은 무대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둘것이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파악)

  :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자! 라고 결론 맺으면 올바른 해석이 못된다. 


예3) 씨 뿌리는 비유: 우리도 옥토가 됩시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 땅에서 방해를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것이 큰 결실을 얻게 될 것.

 천국이 방해 받을 수 있는 형태의 모습으로 왔으나, 천국은 확장되어 완성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4. 조직 신학을 통한 성경해석

  1) 역사적 흐름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마치 자동차 광고를 위해서 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전면과 측면)을 중심으로 표여주듯이 하는 신학이다. 어떤 주제를 부각하여 드러내는 신학.


사람들은 처음부터 조직신학적 접근을 했다.(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이 때는 성경구절을 주로 신학에 대한 증거구절로 사용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오면서(성경을 증거구절식으로 가지고 옴) 사람들 사이에 그 구절의 원래의 의미를 추적해 보니까 그것이 그런 뜻이 아니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경의 문맥을 중시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성경신학은 문맥을 중시해서 원래의 의미를 추적하는 신학이다. 


사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이 교조주의적으로 성경을 얼토당토 않게 인용해서 쓴 것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문서가 아니라 편집자에 의해서 (여러문서가)짜집기 된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한 문서설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신학이다. 성경이 여러문서를 짜집기 해서 된 것이 아니라, 문맥을 통해서 보면 이런 의도고 이런 뜻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한 신학이다.(단어가 갖는 뜻이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해석에서는 결국 단어가 갖는 뜻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도록 안되어있다.)


문서설과 비평적인 여러 사조 때문에 성경 신학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대두되어, 20세기에는 매우 인기있는 사조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마가복음 16:15과 같은 곳을 해석하는데는 성경신학도 한계를 가진다.(뱀을 집고 독을 마시는 것) 그래서 최근에는 성경신학적 접근이 선행된 위에 조직신학이 서야 한다는 것이 최근 성경신학의 답이다. 막 16:15은 단순히 문맥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조직신학적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시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예) 요 3:16 만인구원설? / 성경의 다른 본문 내 양은 나를 안다.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


5.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두가지 올무

  1) 성경을 많은 정보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올무


  2) 가난한 성경신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올무

예) 북한군에게 국군 2명을 숨겨준 목사 / 거짓말 하지 않음.(문자적으로만 생각 / 거짓말_하나님 편들지 않은 것) / 풍성한 성경신학적 방법의 예_초대 교회 시대에 십자가를 밟고 온 교부(주님의 십자가 말고 강도의 십자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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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정리]
1. 신학의 원리는 계시만이어야 한다. 

2. 그런데 신학에 이성이 개입되는 이유는, 계시는 이성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계시가 이성에 감광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내용이 우리의 이성에 포착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필요.

4.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포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우를 범한다.

5.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미 그 초월된 내용을 이성에 인식시키기 위해 어떤 지혜와 능력을 포함하고 나타나는 것이기에 이성이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번주 내용]

1. 이성의 특징인 합리화

  1) 초월된 내용이 초월의 방식으로 오면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인식 가능한 가시화(합리화)가 필요하다.

    예)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이해하려면, 추상 명사는 가시적이기 보다는 개념적이기 때문에 어렵다.

     - 우리는 사랑을 말로 배웠습니까? 동영상으로 배웠습니까? 

- 사랑은 추울 때 부모가 자식에게 옷을 벗어주는 장면(사랑=옷을 벗어 주는 것 혹은 남을 위한 것?)


        설리반이 헬렌 켈러를 가르칠 때 가장 애를 먹는 부분이 추상명사. 왜 개념의 가시화된 형태 조차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2. 이성의 합리성이 불러 일으키는 오해들

  1) 배(이성)가 옥수수(초월적인 내용을 인식가능한 형태로 구체화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됨

  2) 세상 사람들 중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 기독교는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보기 때문에

   (1) 그러나 실상 기독교는 착함이나 선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다.

   (2) 하나님을 본받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인데,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니까 그것을 좇아서 우리도 선을 추구한다. 

   (3) 그럼, 하나님을 닯자(본받자)라고만 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까, 선하다 의롭다 이렇게 규정을 하게 되고 그것을 좇도록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선과 의를 절대 가치로 선과 의를 좇는다.(옷을 벗어주는게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된 이해인 것과 마찬가지로)

   (4) 그렇게 하고는 자신들이 신학에서 선하다와 의롭다는 가치를 발견했다고(자기가 생산했다고) 생각한다. 


3. 신신학의 문제점

  이성은 운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의 내용이 수송되기 위해 어떤 형태를 취한 것을 '이런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되는데, " 아, 이거구나"라고 자연계에서 우리가 경험한 어떤 비슷한 것으로 내용물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 바로 신신학이다. 그래서 신신학은 결정적으로 신학의 원리를 계시가 아니라 이성으로 본다. 

 

  예1) 왜 기독교가 가장 우수한 종교인가? 고상한 인류의 가치를 가장 그를 듯하게 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 인간에게 선을 행하라, 의를 해하라, 긍휼을 베풀어라, 이웃을 사랑해라... 를 가르치는데 탁월하다. 

     (2) 보통 인간은 중요한 가치를 늦게서야 깨닫게 되는데, 기독교는 중요한 가치를 일찌감치 습득할 수 있도록 했다. 

     (3) 기독교의 상벌 개념은 유치하지 않고 실재같이 해놨다는 것.. 그만큼 정교화된 종교라는 것이다. 


  예2)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1) 주께서 실재로 살아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난 것과 방불한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2) 제자들이 변화되어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주님의 살아나심과 같은 것이 아닌가!라고 이해함.


4. 하나님의 초월적인 내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 된다.(그래서 해석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것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옷을 벗어 입혀준 형태(인식 가능한 모습)와 그 형태 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해석해 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형식으로도 나타나지만, 매를 들어 때리는 것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서 계시는 해석되어야 한다.  


5. 정리해서 말하면

  1) 계시적 사고(계시의존 사색, 개방 체계)

계시된 내용을 일단 내용으로 감수를 해서, 이성의 방법으로 합리성을 추구하며 인식을 하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해 가는데 상호 모순 되거나 충돌해 보여도 내용을 가감하지 않으며 성경이 가라는 떼까지 가고 가지 말라고 하는데까지 안 가는 것을 말한다. 

  2) 이성적 사고(폐쇄성 체계)

이성적 사고는 이성이 갖는 합리성을 위해서라면 내용을 가감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계시된 내용을 딴 것으로 대치할 수 있고, 계시된 내용을 변질시킬 수 있다. 이성이 제단할 권한이 있다.(왜 이성이 생산해 낸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6.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성에게 주도권을 주려고 한다. 

  예 1) 하나님이 계실 것이냐? 아니면 안 계실 것이냐? -> 있을지도 모른다.(중간이 아니라 없다쪽에 있는 것)

  예 2) 우주 기원의 대표적 이론>  진화론과 창조론 (창조론이라는 경험은 아예 없고, 진화론적 경험 밖에 없다.)

  예 3) 고대 서구 사상,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헬레니즘은 모든 사실은 논증이 가능하다.(과학주의적 정신)

  예 4)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예 5) 중세시대 기독교인의 헤브라이즘을 헬레니즘에 접목 시킨, 스콜라 철학> 진리와 절대를 객관적으로 증명함.

        : 신앙인들에게는 그렇게 해도 결론이 하나님과 절대진리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전혀 다른 길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신이 없다는 것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세 시대가 와해되고 근대와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신신학이 대두되는 것이다.(약도는 자기 중심으로 그리면, 찾아 오는 사람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수 있다.)


7. 서구 신학의 문제(미국 신학의 흐름)

  1) 미국은 신앙을 위해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신학을 위해서 대학을 만들었다. 

  2) 그런데 신학을 시키려고 보니까 기초 학문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교양학부를 만들게 되었다. 

  3) 먼저 학문을 시키고, 신학으로 신앙의 깊이를 풍성하게 하려고 신학교를 만들었는데 학문의 방법이 과학이었다. 

  4) 그런데 학문의 방법인 과학이 신학의 계시된 내용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5) 그래서 계시된 내용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같은 개념의 세상적인 내용으로 메꾸기(재해석) 시작한다. 

    예) 하바드 -> 예일 -> 프린스톤 -> 웨스트민스터


8. 이성에 역할과 한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너무 근본주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자유주의자처럼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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