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주일 낮예배 2부예배(2016. 6. 5)


제목: 감사에서 미안함으로

본문: 마 18:21-35


 * 담임목사님께서 미국 출타 중이라 대신 주일 낮예배 1,2,3부 설교로 섬겼습니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의 비유를 통해서 최근에 묵상하며 깨달은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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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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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7.26)

본문: 몬 1:16-22

제목: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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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부 설교_요한복음 8장_최종.pptx


* 유년부 전도사님 대신 해서 한 주 대타로 설교.


유년부 설교(본문 요 8:7 /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설교: 김수억 목사



I.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법정이라는 곳이 있어요. 법정은 죄가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이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결하는 곳이기도 하고, 죄가 있다고 판결난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결정해 주는 것이에요. 가벼운 죄는 가벼운 형벌을 주지만, 무거운 죄는 매우 무거운 형벌을 내려요. 가장 무거운 형벌은 ‘사형’이에요. 사람의 죄와 형벌을 판단하는 ‘판사’라는 분은 법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요. 매우 멋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책임감이 큰 일이기도 해요. 


 성경에보면 이와 같이 근사한 법정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갑자기 예수님이 판사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거에요. 과연 예수님이 어떤 판결을 했는지, 잘했는지 못했는지 오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II. 본론


 1. 이야기

어느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소란스러워지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 왠 여자 한 명도 같이 왔는데, 그 여인의 행색은 뭔가 이상했어요. 단정하지도 않았고 머리를 헝크러져있었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그 여인을 데려오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 여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입니다.(간음죄란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에 매우 큰 죄였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잡히면 바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일만큼 나쁜 행도이었어요.)

이런 여자는 죽이라고 모세의 법전에 쓰여져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정말 알고 싶어서 물으러 온 것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어요. 그래서 이 여자를 미끼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에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전대로 그 여인을 죽이세요 하면 예수님은 로마의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거에요. 로마의 군인들이 절대로 좋아할리 없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죽이지 마세요 하면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면서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는거에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세의 법이 절대적이라 믿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서 죽여라! 해도 문제가 되고, 죽이지 마라! 해도 문제가 되는거에요. 그걸 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이 여인을 데리고 온 거에요. 


왜 우리가 어릴적에 어른들이 종종 물어보는 질문이 있잖아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러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답을 했어요? (엄마? 아빠? ....) 답을 하지 않는게 좋아요. 왜냐하면 엄마라고 하면 아빠가 서운해 하고, 아빠라고 하면 엄마가 서운해 하기 때문이에요. 지혜로운 친구들은 둘 다요~ 하거나 아니면 대답하지 않는거에요. 지혜로운 답변이지요. 


예수님도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땅에 앉으셔서 손가락으로 끄적끄적 글씨만 쓰고 계셨어요. 그랬더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재촉했어요. 빨리 답을 주세요. 당신은 어떻게 판결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계속 모른척 했을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더 지혜로운 말을 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여자를 죽이라는 말도 아니고 그 여자를 죽이지 말라고 한 말씀도 아니었어요. 너희 중에 정말 이 여인을 죽여도 좋을만큼 떳떳하게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도 좋다는 말씀이었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돌로 치라고 했으니 돌을 던진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니요. 성경을 보니까 아무도 없었다고 그래요. 이 여인을 죽이고, 예수님도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돌을 그 자리에 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래요. 돌을 들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죽이려했던 사람들도 사실은 모두 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아있게 되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도 돌을 던질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는냐 없으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예수님은 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네 맞아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비난하고 조롱할 자격이 없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어떻게 했을까요? 비난하고 조롱하고 판단했을까요? 아니에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누가 봐도 죄인인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았어요. 불쌍히 여겨주셨던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여인을 향해서 불결한 여인, 나쁜 여인, 살 가치가 없는 여인이라고 업신여길 때, 오직 예수님만이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주셨고 이 여인의 편에 서 주셨던 것입니다. 



III. 결론


요즘 어른들을 보면 편을 나누고 편을 가르는데 빠른거 같아요. 너는 누구편이니? 내편이니 제편이니? 내편이 아니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의 적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고 심한 편견을 가지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될까요? 안될까요? 


우리 친구들은 어때요? 사실 우리 안에는 ‘판사’가 한 명씩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마음 속으로는 우리는 늘 ‘재판’해요. 만약 우리 안에 판사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무 엄격하게 판단할거에요. 자기는 잘 하지도 못하는 것을 요구할지도 몰라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판단하시도록 해야 해요. 용서하고 사랑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판단해야 해요. 예수님의 우리 안에 판사가 되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실 수 있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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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의 원리  (0) 201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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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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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 설교(2014.1.26)


본문: 마 18:21-35

제목: 일만 달란트 비유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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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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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해주는 삶, 용서 받는 삶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겸손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이 <겸손>하게 행동해서 <성숙>함을 보이라는 권면으로 들려질 수도 있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때도 사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겸손은 하나의 덕목이 된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겸손해야 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성숙함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한 척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겸손과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겸손한 척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말이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용서>라는 덕목으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횟수를 용서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잘 못을 용서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숙함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잘못에 대해서 화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쿨하게 웃어 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과시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런 의도로 질문을 한 듯하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냐고? 일곱 번이면 되냐고 말이다. 그 말은 자신이 일곱 번 비슷하게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 아니냐고 예수님께 확인 받고 싶어서 인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쉽게 칭찬해 주시지 않는다. 아니 칭찬해주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이 전면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주님의 논지는 간단하다. 일곱 번의 용서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해야 만족스럽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내가 얼마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고 기다려주지 않음으로서 그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그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성숙함을 드러내 주는 성적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숙함에 대한 진짜 성적표는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얼마나 많은 횟수에 걸쳐서 받았는가!를 깨닫는 것으로 확인된다. ‘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일게다. 다른 종교에서의 성숙함이란, 몇 번을 참되게 용서해 줄 수 있고 얼마나 겸손한가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인 종교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 의>를 이루는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내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를 받은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깨달음으로서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들을 향해, 겸손과 용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것이 전혀 자기 자랑이 되지 못함을 강조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다고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바울의 이와 같은 권면은 모두 위에서 설명한 것들에 기초한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참, 건강하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데, 불편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랑받음에 대한 경험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훈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충분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따듯함으로 수용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과 용서의 의무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용서하기도 하고 겸손한 듯한데,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건강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벼는 익었기 때문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내적 충실함이 겸손으로 나타는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좀 더디더라도 건강한 사랑을 한다. 충분한 용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용납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급한 행동을 요청하기 보다는 사랑과 용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더디더라도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건강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많은 인생이다. 부모로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이다. 이걸 좀 알아야 복음적인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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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41편] 하나님의 의인의 편이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의인의 자리에 삶을 살아온 백성은 고난과 재앙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3절) 그런데 막상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면, 그 분에게 그 동안 지은 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멈칫하게 됩니다.(4절) 어떻게 보면 내가 가해했던(범죄했던) 그 분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무슨 염치가 있어 도움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죽고 말지... 그런데 그 분이 내 처지를 보고 먼저 손을 내밉니다. 용서를 베푼 것이지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서 자신을 돌이킨(회개)자는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를 우습게 알고, 여전히 전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자는 참되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를 받고 나서의 반응을 통해 그 사람이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정리]


1. 가난한 자를 돌아본 자가 받을 복: 구원, 지키심, 고치심


1절.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절.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절.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 이 땅에서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살아온 자를 하나님은 재앙의 날에 건지시고 지키신다. 그를 그 원수들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그가 병중에 있을 때 붙드시고 누워있을 때 병을 고쳐주신다. 이는 포괄적으로 의인을 악인으로부터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시편 기자의 확신이며 기도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인생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생은 죄가 걸린다. 도움을 요청해야 할 그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하면 절로 내가 그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범죄한 사실이 있는가가 떠오른다. 그래서 멈칫하게 된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게 된다. 


3. 원수는 내가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음/ 패배하기를 원함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8절.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절.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9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배신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를 연상케 된다. 함께 떡을 먹던 자가 나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시 제자들은 그 말씀이 가까운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했지,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말씀은 아니었을 것이다 .


4. 그러나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함: 주께서 나를 기뻐하심. 승리케 하심. 


11절.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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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도덕 중 <순결>보다 더 인기 없는 것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용서가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 그러나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에 화를 내게 된다. 


2.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용서다.

  1)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명백한 사실이다.)

  2) 용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먼저 생각하면 좋다.

   (1)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먼저 쉬운 대상과 일로부터 시작하라. 

 

   (2)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은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싫어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제 자신의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저 자신은 사랑해 온 것이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이 그와 같은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를 미워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행해야 한다. 

  2)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이다. 

  3) 기독교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 본다.(루이스 입장)

    (1) 살인하지 말라는 <죽이다>와 구별되는 의미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관계가 모두 간음이 아니듯, 구분되어야 한다. 

    (2) 평화주의자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견해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반(세미)평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4. 그렇다면,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벌을 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2)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어야지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해서는 안된다. 

   (2)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누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 들때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 

  3)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의미다. 

  4)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것이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와 상관없이) 대하듯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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