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바냐 1:1-9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찬송가:

 

여는 이야기

스바냐는 아몬 왕의 시대를 거쳐 요시야가 유다 왕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스바냐에게 주신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완전히 멸망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오히려 희생 제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과 왕과 왕자들을 비롯한 왕궁을 채운 자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그 심판의 원인이 그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절별 해설

1:1 <<아몬의 아들 요시야>> 요시야 왕은 8세에 왕이 되어 31년 간을 통치한 왕이다. 성전을 보수하던 중 발견된 율법책을 기초로 하여 종교 개혁을 했던 왕으로 유다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신앙적 개혁을 시도했던 왕이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도 그의 조부였던 므낫세 왕의 55년간의 악한 통치의 영향력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스바냐는 구시의 아들이고...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다른 선지서와 달리 스바냐의 경우는 4대 선조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히스기야와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히스기야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유다의 선한 왕 중의 하나인 <히스기야>로 본다.

1:3 <<악한 사람을 멸망시키고 모든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짐승과 새와 바다의 물고기까지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조차도 모두 없애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은 <노아>시대의 상태를 연상시키는데, 그 만큼 지금 이 땅이 얼마나 악한가를 반영하시는 말씀이다.

 

1:4 <<그마림>> 이 말은 히브리어 <케마림>을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케마림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명예로운 칭호였다. 하나님은 이 땅에 <그마림>이라고 칭호를 받는 자들을 이 땅에서 없애겠다고 말씀하신다.

 

1:5 <<말감>> 말감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왕>이란 뜻이지만,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감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악에 빠지게 했던 우상 중에 하나이다.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여라>> 두렵고 떨리는 심판 앞에서 그 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 재판관의 최후 판단을 기다리고 있듯이 유다를 향한 심판이 다가 왔으므로 잠잠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은 직접 지으신 모든 것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노아 홍수를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더하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스바냐서의 배경이 되는 요시야 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므낫세 왕을 알아야 한다. 요시야의 부친인 아몬은 실제적으로 2년 밖에는 통치하지 않았고, 요시야의 조부인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함으로 유다에게 가장 긴 통치를 했던 왕이다. 그러나 그 기간의 대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시간이었다. 북이스라엘에 아합 왕이 있다면, 남유다에는 므낫세가 있을 정도로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 유다는 영적으로 나락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요시야 왕이 종교적 개혁을 해보지만 잠시 회복되는 듯 했으나, 유다의 멸망을 막지 못한다. 따라서 요시야가 통치하던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므낫세의 왕이 행했던 죄로 인해 전국에 만연된 우상 숭배와 죄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있던 시대임을 염두하고 스바냐를 읽어야 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한 장]


1.  유다왕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 아몬의 아버지는 므낫세다. 그는 55년간 유다를 통치하면서 유다를 죄악으로 이끌었던 왕이다. 그로 인해 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시대를 지나고 그와 유사했던 아몬 왕을 지나 이제 요시야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2.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다.


  * 스바냐가 알려져있는 출신의 가문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


3.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1)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라.(동물과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2)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멸절하리라.

   (1) 바알과 그마림이란 이름과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리라. 

   (2)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멸절하리라.

   (3) 여호와를 배반하고 찾지도 않는 자들, 구하지도 않는 자들을 멸절하리라. 


  : 여호와 앞에 잠잠하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한 자들을 구별하셨다.


  * 이들의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죄악을 고발하심.


 3) 내가 방백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다.

 4)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벌하리라. 


  * 이들의 사회적인 죄악을 고발하심.


 5) 그 날에 예루살렘에 통곡이 가득하다.(재물이 노략되며, 집이 황폐할 것, 열매를 얻지 못함)

 6) 여호와께서 복도 내리지 않과 화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자들을 등불로 찾아 벌할 것이다. 


  *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이며, 특히 거짓 선지자 노릇을 했던 사람들(그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 그들을 벌하신다.


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빠르도다. 


  1) 그 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다. 

  2) 하나님이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게 함(갈팡질팡하는 모습)

  3) 그 이유는 그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4) 금과 은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18절)


  * 그들은 금과 은은 추구했다. 므낫세 시대에 이방신들을 들여오고 이방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부유함과 부강함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권력자들은 금과 은을 누리게 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자리와 평안을 지켜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빼앗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금도 은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묵상 한 모금]


1. 요시야가 왕 위에 오를 때는 아직도 조부인 므낫세로부터 이어져온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했던 때였다. 므낫세나 아몬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의 문제를 느끼는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다. 그제서야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도 눈치가 빤 하시다. 들을 귀 있는자에게 말씀하신다. 므낫세와 아몬에게는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들을만한 귀를 가진, 마음을 가진 요시야가 왕이 될 때 선지자를 통해 예루살렘의 문제와 이대로 갈 때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어떤 측면에서 요시야는 억울할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을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이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지적할 때, 그것은 마치 왕인 요시야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메시지를 들었고, 남겼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기 전에(회피할 수 있는 명분이 분명했지만) 자신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봤던 것이다. 그래서 요시야의 개혁도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2. 그 당시의 시대적 가치관은 '금와 은이 나를 구해줄 것'이리라고 기대했던 가치관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황금만능주의로 가득한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거품과 같아서 잠시 있는것처럼 보였지만, 더욱 허망한 환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난 시절 온 나라가 부자가 되겠다고, 공의도 정의도 버리고 금과 은으로 구원해 줄 대통령을 뽑았다. 돌아온 것은 그가 국민들의 돈으로 얼마나 허망하게 낭비하고, 소외된 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가 뿐이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 그리고 욕망의 환영이었음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제 배워야 한다. 교훈삼아야 한다. 금과 은은 허망하며, 아무도 책임질 수 없고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의 소득이 처음보다 2,3배로 뛰었다고 한들 우리는 더 행복했을까? 아니다. 더 피폐한 심령으로 인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죄인들의 멸망은 스스로 자초하는 결과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지 않기에(사실 이또한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다.) 돌이켜지지 않을 뿐. 자업자득이요.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며 행한대로 갚음을 당하는 것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열왕기하 23장] 판을 새로 짜려면 요시야 왕처럼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너무 늦지 않게 전면적인 새판을 짜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유다 왕 요시야가 행한 개혁1: 우상과 산당을 제거함

  1) 요시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왔다. 

  2) 왕이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그들을 모아 언약책을 읽어주었다. 

  3) 왕은 여호와 앞에서 다시 여호와와의 언약을 지킬 것을 요청하자 모두 따르기로 함.

  4) 대제사장 힐기야와 부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성전과 유다,이스라엘의 우상과 산당을 없앰.

   (1)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을 성전에서 꺼내 불사름

   (2)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운 우상과 산당 숭배자들을 모두 폐하였다. 

   (3)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성전 가운데 있던 남창의 집을 헐었다. 

   (4)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들을 불러 모으고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더럽히고 험.

   (5) 왕이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몰록에게 자녀를 드리지 못하도록 함.

   (6) 유다 여러 왕들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림. 태양 수레를 불사름.

   (7)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요시야 왕이 다 헐고 빻아 가루를 만들어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림.

   (8)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산당(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 훼손시킴.

   (9)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산당을 불사르고 아세라 목상을 불사름.

   (10) 주변 무덤에서 해골을 꺼내 벧엘 산당을 훼손하려고 할 때, 옛날 여로보암의 벧엘 산당을 지적하기 위해 왔던 하나님의 사람(왕상 13장)의 묘는 그대로 두었다. 

   (11) 이스라엘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 여호와를 격노케 한 산당을 요시야가 제거함.


2. 유다 왕 요시야가 행한 개혁2: 유월절을 지킴

  1) 왕은 언약의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함.

  2) 요시야 왕 18번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킴. 

  3) 사사시대 이후로 이와 같이 유월절을 지킨 왕은 없었다고 기록함.


3. 유다왕 요시야의 개혁의 정리

  1) 유다 땅와 예루살렘에서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함.

  2) 이는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고 함이었다. 


4. 유다 왕 요시야의 개혁에도 유다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었다. 

  1)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2)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었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리라. 내가 택한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다.


5. 요시야의 죽음

  1) 요시야 왕이 당시에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올라오는 것을 막고자 나서다가 므깃도에서 죽게 됨

  2)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장사를 치르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 


6. 유다 왕 여호아하스에 대해서

  1) 23세의 나이로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석달간 통치함.

  2)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3) 바로 느고가 그를 왕 위에서 폐위시키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움.

  4)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가서 그는 거기서 죽게 된다. 

  5) 여호야 김은 애굽의 명대로 돈을 주기 위해 백성으로 은과 금을 정하여 징수하였다. 

  6)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었고, 11년간 통치하였다. 

  7) 여호야김은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한 것을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서술]


유다 왕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요시야 왕은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 모아 성전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 찾은 율법책을 읽어주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맺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자 모든 지도자들을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나서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와 부제사장들을 불러 모아서는 유다 지역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도록 시킨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아세라 신상도 끄집어 내여 불태웠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전역에 있던 제사장들을 통해서 산당들을 제거하도록 시킨다. 심지어 이스라엘 지역인 벧엘 산당까지 가서 벧엘 산당을 제거하고 훼손시킨다. 요시야는 유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있던 산당(여호와를 격노케 한)을 완전히 제거한다. 


그리고 나서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요시야는 철저하게 유월절을 지켰는데, 이와 같이 유월절을 지킨 것은 사사시대 이후 요시야와 같은 왕은 없었다고 한다. 


요시야의 개혁은 한 마디로 모든 이방 종교와 우상, 잡다한 점쟁이, 신접한 자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개혁이었으며, 이와 같은 개혁은 성전에서 찾은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완전한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므낫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와 결정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므낫세 때에 하나님을 격노케 한 죄가 너무 컸기에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이스라엘처럼 물리치시겠다고 하신다. 택한 성 예루살렘도, 내 이름을 두리라고 말한 성전도 버리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후 요시야는 애굽의 바로 느고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가던 길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로 인해 신하들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우나 여호아하스는 3개월 만에 애굽에 의해 폐위되어 애굽으로 잡혀가 죽고 만다. 애굽은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다. 여호야김은 11년간을 통치하는데 애굽의 정한 액수의 돈을 주어야 했다. 여호야김 또한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을 행한 왕이었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요시야의 개혁은 집중력있게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요시야의 개혁의 특징은 이전의 왕들이 하지 못했던 것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든 우상과 잡다한 이교의식까지 제거했다. 그리고 이전의 왕들은 감히 하지 못한 전역에 있는 산당에까지 손을 댄 것이다. 요시야 개혁의 집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요시야의 개혁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광범위한 개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지만, 요시야는 이스라엘 지역에 있던 벧엘(물론 유다와 인접해 있던 지역이지만) 산당까지 정리했다. 여로보암 이후로 어떤 왕도 정리하지 못했던 벧엘 산당을 남유다의 요시야 왕이 제거한 것이다. 요시야의 개혁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악과 더러움의 제거는 일부만 해서는 안된다. 청소할 때 완전하게 청소를 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남아있는 작은 죄와 더러움에서 곰팡이가 생기고, 세균이 자라 결국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전의 왕들은 개혁을 하긴 했더어 요시야와 같이 완전하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 우리 자신을 바꾸고, 내 가정을 바꾸고 주변을 바꾸려면 전면적인 조정을 감행해야 한다. 약간의 보수, 약간의 수정으로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때론 완벽한 탈바꿈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것에까지 엄격할 필요가 있고, 작은 것이라고 넘겨서는 안된다. 개혁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 


나도 개혁을 단행해야 할 때가 왔다. 년 말이고 이전의 모습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취약함이 집중력.. 완벽성... 작은 것에서까지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집중력과 완벽성. 이것이 이젠 필요하다. 


주여 나로 요시야와 같이 거듭나게 하소서.


2. 요시야의 완벽한 개혁도 므낫세의 완벽한 악을 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혁이 거의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다시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전에 므낫세의 죄악이 너무 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격노하심이 너무 커서 요시야의 개혁이 대단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신다.(26,27절) 하나님은 유다를 이스라엘 처럼 물리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택한 성 예루살렘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리라 한 성전도 버리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개혁에도 때가 있는듯 하다. 개혁은 언제나 일어나야 하며 일어날 수 있는 것이겠으나,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그 때가 있는 것이라 보인다. 요시야는 개혁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 때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교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언제나 무지와 연약의 자리에서 개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때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리더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 다. 그 때에 따라서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전반기와 후반기가 달랐다. 그는 그 때를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가? 때를 놓치지 않았는가? 아직도 때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조금이라도 희망이 남이 있는 지금 완벽한 개혁을 시작해야한다. 작은 모양으로 흩어져 있는 산당에까지 손을 대어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 때를 놓치면 요시야가 나와서 소용이 없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열왕기하 22장. 요시야의 개혁] 삶과 신앙의 회복음 성전을 보수하는 것, 신앙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과 홀로 공동체적 변혁을 이루지 못하더라고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라도 의인을 향한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본문입니다.(묵상은 링크 참고)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유다 왕 요시야에 대해서

  1) 그는 8세에 왕이 되고, 31년간을 다스렸다.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였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2. 요시야가 성전 공사 중에 발견한 율법책

  1) 요시야 왕 18년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26살 때)

  2) 요시야가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백성이 성전에 드린 은을 계수하여 성전을 맡은 감독자에게 주고, 그는 그것을 작업자들에게 주어 수리를 명함.

  3)대제사자아 힐기야는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그 일을 맡기고, 그들은 성실하게 행함. 

  4) 성전을 공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힐기야가 사반에게 주고 사반은 그것을 가지고 왕에게로 나아가 보고하는 사반.

   (1)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에게 맡겼다. 

   (2)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5) 사반이 읽어 준 율법책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의 반응, 훌다의 예언

   (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옷을 찢었다. 

   (2) 왕은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린 진노가 크다는 것을 알고, 이 율법책에 대해서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한다.

   (3)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 가서 물었다. 

   (4) 훌다는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곳과 주민들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라. 그 이유는 이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분향했고,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5) 그러나 유다 왕(요시야)에게는 그렇게 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심.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 곳이 저주가 되고 빈터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겸비하고 통곡하였기에.

   (6) 요시야 왕은 평안하게 주상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나, 내리는 재앙을 보지는 못하리라. 


[정리2. 정리한 내용을 내 말로 풀어내기]


열왕기하 22장은 유다의 마지막 보루 요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다. 요시야 왕은 8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통치한다.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성전을 보수하는 것이고 그러는 중에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보고 종교적 개혁을 단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요시야는 통치한지 18년째 되던 해에 서기관 사반을 시켜 백성들이 성전에 드리는 은을 가지고 성전을 보수하도록 지시한다. 그 책임은 대제사장 힐기야가 맡았고, 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맡은 감독관에게 그 일을 지시하고 성전에서 나온 은을 그 일을 위한 재정으로 쓰도록 했다. 그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진행했기에 재정을 회계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성전을 보수하던 중 인부들은 한 책(율법이 적힌 두루마리)를 발견했고, 제사장 힐기야가 그것을 서기관 사반에게 건네 주었다. 서기관은 왕에게 성전 보수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던 중 율법책이 발견되었음을 알리면서 그 내용을 읽어드렸다. 


요시야는 그 율법책의 내용을 듣는 도중, 지금 유다가 직면하게 되는 국가적 위기와 어려움이 선조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았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하지 않으므로 인해 발생한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요시야는 신하들로 하여금 이 율법책의 내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절차를 밟는데, 그 신하들은 여선지자 훌다를 찾아간다. 훌다는 그 율법책의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면서 이 나라와 백성들이 재앙을 당하게 될 것임이 맞으나 요시야 왕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시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심판과 저주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겸비하며 통곡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다가 재앙과 진노를 피할 수는 없지만, 요시야의 시대에는 괜찮을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개혁과 회복은 하나님을 성전을 보수하는 것으로부터


요시야는 그의 나이 26세가 되던 해(통치 18년) 비로소 성전을 보수해야 겠다는 그의 결심을 실행한다. 요시야가 왕이 되기 전 아몬과 므낫세가 다스리던 57년의 시간동안 여호와의 성전을 돌봄을 받지 못했다. 요시야는 왕이 되어서도 바로 그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려서 왕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극적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제 때가 되어 요시야는 신앙적 회복을 시작한다. 


요시야는 성전을 보수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했다. 그 일을 맡아 할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고, 재정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도 지침을 주었다. 감사하게도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은 성실하게 성전 보수의 일을 감당했고 정직했다. 부정이라고는 없었다. 왕부터 시작해서 목수와 미장이와 건축자에 이르기까지 성전 보수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인생의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때, 지금 이대로의 삶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때 가장 먼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신앙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교회와 예배의 현장이 어떠한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나의 교회, 나의 신앙이 어떤 형편에 있는가를 점검해야 하고, 그곳을 보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부터 시작된 우리 교회의 특별새벽기도회는 의미있는 시작이다. 그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소홀히 하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소홀히 했던 성도들에게 특별새벽기도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보수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삶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와 민족도 갱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열흘간의 특별새벽기도가 닫혀있던 은혜의 샘을 터트리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2. 저주와 재앙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겸비했던 요시야.


요시야는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 자기 민족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선지자를 찾아가 확인해 보도록 했다. 선지자 훌다였지 같은 메시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즉, 유다는 이제 재앙과 저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훌다는 말한다. 요시야 왕은 그 재앙과 저주의 예언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했다는 것이다. 옷을 찢고 통곡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그것을 기뻐하셨다. 그 재앙과 진노를 거두지는 않으셨지만, 요시야에게까지 임하게 될 재앙과 진노를 요시야 개인은 피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 것이다. 


죄가 관영하고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요시야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그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 앞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를 알고 마음을 겸비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시대 전체를 바꿀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 자신이 그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고, 홀로 의인의 자리에 서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진노중에서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듯이 진노의 성 안에서라도 의인을 구별하여 살려 내시기 때문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을 읽다 보면 참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야기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여 그가 벧엘에서 여로보암을 만났다.
  1) 벧엘에서 분향하던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하였다.
   (1) 훗날 다윗의 집에서 요시야라는 아들이 이 제단 위에 제사장을 제물로 바칠 것이다.
   (2) 그날에 대한 징표로 오늘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2) 여로보암 왕은 그 선지자를 잡으려고 손을 폈으나 그 손이 말라 거둘수 없게 됨
  3)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처럼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제단에 쏟아짐
  4)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의 손을 다시 온전하게 해달라고 구함/온전해 짐.
  5)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물도 주고, 물과 떡조 주려 했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함.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함으로 죽게 됨.
  1)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과 여로보암의 일을 알게 됨
  2) 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서, 자신을 선지자라고 소개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냄을 받아 온 것으로 거짓말을 한 다음,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는 물과 떡을 먹게 함. 그 하나님의 사람을 속아서 물과 떡을 마심.
  3) 그 늙은 선지자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냐고 질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었으니 죽게 되고 그 시체가 조상의 묘실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심>
  4)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서 사자를 만나 죽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체 곁에서 사자도 떠나지 않고, 나귀도 도망하지 않았다.
  5) 이 사실을 들은 늙은 선지자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묘실로 옮기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자신이 죽게 되면 이 묘실에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두라고 함.
  [정리]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에게 진노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의 제단과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3. 여로보암은 이 일 후에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1)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다.
  2)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여러보암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만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 그의 죄에 대한 질책을 하고, 앞으로 돌이킴이 없다면 훗날 이 제단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제단으로 갔고, 마침 그곳에 여로보암이 와 있었다. 그 사람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했다. 여로보암은 그의 말을 우습게 알고 그를 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명령하려던 손이 말라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여로보암은 마음을 겸손케 하여 그 사람에게 손을 온전케 해달라고 부탁함으로 회복되었다. 여로보암은 그 사람에게 예물도 주고 잘 대접하려고 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거절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식을 들은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였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늙은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람을 쫓아갔고, 그에게 거짓말(하나님의 천사가 시켰다는 거짓말을 의도적으로)을 해서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를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도 전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다. 이런 억울한 일을 계획한 늙은 선지자는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한다. 그리고 자기의 묘실에 안장한다.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벧엘과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 위에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과 여로보암은 이 사건을 통해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멸망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성경에서 미래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은,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하는 예언(주로 심판에 대한)은 단순히 기계적인 예언(변할 수 없는)은 아닌듯 하다. 좀 더 정확하게 하게 표현한다면 심판이 임하고 징계가 임할 것이라는 예언은, 지금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마지막 경고이면서 동시에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요나서에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일 것이다. 심판을 예언하셨지만, 그들이 그 경고를 듣고 회개하자 그들은 심판으로 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하신 <심판에 대한 예언>도 그와 같은 차원의 예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회개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려 했고(4절) 그 경고를 받고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일반 백성 중에 제사장을 삼는 일을 자행했다.(33절) 그렇다면 여로보암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는 잃게 된 것이다. 결국 여로보암의 왕위는 끊어지게 될 것이 분명해 진다.

누군가를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리려 할 때, 우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해야 한다. 성공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수단이요 그것말고는 다른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 방법을 쓸 수 있는 시기란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살려고 하는 동안) <죽음과 심판>을 말해야 한다.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은 희망이 없으며, 정말 죽음과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듣는다면 그는 살아날 것이다. 그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 심판의 예언이 틀린 것은 아니다. 원래 그 예언이라는 것은 그를 살리려고 한 예언이며, 정말 돌이키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예언이기에 그렇다.

 

2. 거짓말에 속은 <하나님의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그는 용기를 가지고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만일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면 그는 늙은 선지자의 말에 순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까지 잘못으로 여기지는 말자. 늙은 선지자도 왜 그와 같은 일을 했는지 의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스스로에게 무슨 유익이 있다고 그 사람을 찾아가 거짓말까지 한 것인가? 단순한 시기심인가? 그렇지 않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죽고 난 후 그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의 묘실에까지 넣고 애도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 메시지를 주기 위한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이 심판을 모면할 수 없었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은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하나님의 사람과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역할이 좀 이상해 보이는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정황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모두 계시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다. 여로보암도 그렇고 <하나님의 사람>도 그렇고 <벧엘의 늙은 선지자>도 그렇다. 누구를 위한 계시인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계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죄에서 돌이키라!!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