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해설]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로부터 처음 복음을 듣고 세워졌을 때, 이들은 순수한 복음 안에서 잘 자라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상한 가르침이 들어와 교회 전체에 위협을 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정도의 작은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아보였던 문제가 큰 문제로 금새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 전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대한 기대를 잃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확신하노라"(10절) 바울은 다른 복음으로 인해 풍지박산이 난 것 같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여전히 살아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시 소생하는 힘이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지금 연약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기대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갈라디아 교회에서 <다른 복음>에 사로잡혀 다른 복음을 주장하며 가르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순수한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하였기에 사람들이 듣기에는 더욱 그럴듯 하게 들리고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격이 되었다.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하자, 복음의 <대적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순수한 복음>에 천차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우려 했던 것(?)이 오히려 원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도 알았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전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불편해 했다는 것을. 만약 바울이 자신이 전한 <순수한 복음>에 <할례>라는 유대인들이 만족스러워하는 '가미료'를 살짝 넣었다면 바울은 이방인에게서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도 충분한 인정을 받으면서 사역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바울 자신이 전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극적 방해(장애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의 사역은 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할례>를 복음에 가미한다는 것은 <순수 복음>을 훼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할례>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순수 복음>에는 그와 같은 요구가 들어가서는 안됨을 재차 확인하여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런 주장을 통해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려 한다면,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 말이 의미는 그토록 <할례> 즉, 성기의 끝을 잘라내는 것에 집착하고 중요하게 본다면, 아예 거세를 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조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묵상]


1. 상당한 타격을 입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여전히 희망을 가졌다. 


교회는 때로 강해 보이지만, 때로는 매우 무력해 보인다. 강력한 외부적 박해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힘을 가질 만큼 교회는 강하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서 더욱 확대되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이단의 가르침도 그러했고,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순수 복음>이 훼손되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질 때 교회는 인간적인 것들이 유입되고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생명은 희박해 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라면, <순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있다며 그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가 사람의 수고와 노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것처럼, 교회가 사람의 훼손으로 무너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순수 복음>으로 시작된 교회라면 '소망'은 있다.


2. 그릇된 가르침에 여전히 매여 있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공동체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은 <누룩>처럼 공동체 전체를 순식간에 무력화 시킬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지적받고 바르게 되도록 요청하는 내용을 듣고도, 그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복음_다른 복음>으로 교회를 흔든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와 같은 강력한 경고가 전해져야 할 것이다.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는 자들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공동체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참된 교회란, <거짓된 복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돈케 하는 자를 경고하고 내쫓는 건강한 징계(치리)가 있는 교회다. 이것을 통해 교회의 순결함과 교회의 권위를 드러내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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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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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 2:10-17 성전 재건, 백성 재건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에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고 나고 약 2달 후인 아홉째 달 이십사 일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에게 주어졌다. 이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이 백성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의 손으로 드린 것도 더럽게 되었고, 그들이 내게 바치는 행위도 더럽게 된 것이다. 지난날 조상들이 행했던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은 상기시키신다.

 

절별 해설

2:10 <<아홉째 달 이십사 일에>>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게 된지 정확히 석달 째 되는 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이때의 말씀은 성전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백성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여주신다. 이는 겉으로 세워지는 성전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백성들이 거룩하게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2:12,13 <<그 옷자락에 닿은 것도 거룩해지느냐?... 그것도 역시 더러워지느냐?>> 유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물어 본 것이다. 거룩한 것과 닿았다고 거룩하여 지는가? 아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과 닿으면 부정해지는가? 그렇다. 율법의 한 경우를 가지고 질문함으로서 유다 백성들의 본질적인 문제를 밝히시고자 하는 물음이다. 

 

2:14 <<그들이 더러우며 그들이 그 손으로 하는 일도 다 더럽다>> 이 나라 백성의 더러워졌음으로 해서 이 백성들이 행한 모든 것, 심지어 제사와 같은 거룩한 행위조차도 모두 더러운 것이 되도 말았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성전도 중요하지만,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야 하는 이 백성이 거룩함을 잃어버린다면, 이전과 같은 실패만 있을 뿐이다. 

 

2:15 <<돌 위에 돌을 쌓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세워져 있던 성전이 훼파되었을 때, 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더러워졌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의 기초만 세우고 자기의 집을 위해서만 사는 18년 동안 이들은 수고하고 노력해도 제대로된 결실을 얻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2:17 <<그런데도 너희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그들이 노력하고 수고한 것의 열매가 충분하지 못하도록 망쳐놓았음에도 이들은 이 문제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

주님,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을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지금까지 학개서의 내용을 보면, 크게 3단계로 진행된다. 첫단계는 성전 기초만 놓고 자기 집을 살피기만 했던 유다 백성들을 일깨워 다시 성전을 재건하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스룹바벨의 성전이 이전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해 보이는 것으로 인해 낙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채우시겠다는 약속을 하심으로 이들을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건물로서의 하나님의 성전도 중요하지만, 그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단계다. 이전 솔로몬의 성전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범함으로 훼파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로워지지 않는 채 하나님의 성전만 재건하는 것은 이전 역사의 반복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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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보면 난해 구절로 알려진 본문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냥 읽기에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다.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 죽은 자들에게도 주님께서 내려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인가? 그럼 그 말씀을 듣고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회심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벧전 3:19 한 절만 봐도 좀 이상한데, 벧전 4:6에서 다시한번 좀더 구체적으로 이미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에서 말하는 최후 심판을 위해서 대기하는 '연옥'이라는 곳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이 교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등등...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전통적인 교리와 충돌이 일어나는 이런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난해 구절로 구분하고, 그 충돌을 피해보려는 나름대로의 변명(해석)을 학자들이 쓰는데 종종은 억지스러운 것조차 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난해 구절을 담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런 난해 구절은 단순히 문자적인 측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문맥상에서 어떤 흐름 속에 나오 이야기인지를 파악해서 그 흐름에 맞게 역으로 그 문자적 의미를 규정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이런 난해 구절은 의외로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론이 길었지만 암튼 시작하자.

 

[정리1. 본문을 내용으로 정리하기]

1. 그리스도께도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1)

  1) 이는 육체의 고난은 죄를 그치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2) 고난을 통해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다.(2)

  3) 음란과 방탕한 삶은 지난 날로 족하다.

  4) 세상은 같이 극심한 방탕으로 가지 않는 너희들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

  5)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실대로 고하게 될 것이다.

2. 나그네처럼 사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종말의식이다.(7-11)

  1)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2)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라.

  3)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4)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5) 말을 하려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봉사를 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처럼 하라.

3. 성도들을 향해 오는 시험을 어떠한 태도로 맞이해야 하는가?

  1) 너희를 연단하기 위해서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오히려 즐거워하라.

  2)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다.(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는 것이다)

  3) 너희가 악행이나 불필요한 일을 행해서 당하는 고난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4) 우리가 그릇행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 어찌하리요?

  5)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중에 그 영혼을 미쁘신 하나님께 의탁한다.

[정리2. 본문을 다시 정리하기.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1. 우리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을 자들인데, 이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고난은 죄를 그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남은 생애를 정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고하게 될 것이다.

2. 나그네처럼 살지만, 성도들이 행하면서 살아야 할 원칙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랑하고 원망하지 않으며 선한 청지기로 자기의 은사대로 봉사하는 살아야 한다.(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3. 성도들이 경험하게 되는 고난을 이상한 것처럼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복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중에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나그네인 성도가 살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억울한 고난까지 포함해서)

   고난 자체는 힘든 것이지만,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에게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고난이 주고 있는 유익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로 부터 멀어지고 정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평온한 중에 죄를 짓는다. 악이 들어오고 유혹이 커진다. 오히려 적절한 고난과 환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고 불필요한 일과 생각으로부터 지켜준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죄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질때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죄다. 고난은 우리의 몸과 생각을 어느 정도는 구속함으로 오히려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유익을 누리게 된다.

  고난과 정결함의 문제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래서 고난을 통해 그의 백성의 생각을 깊이하게 하시면도 동시에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시기도 하신다. 잘 생각해 보라. 내가 언제 죄를 많이 짓게 되는지... 한가할 때인지, 정신없을 때인지...

 

2. 우리가 나그네이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이 삶의 방식은 매우 높아야 한다.

나그네와 종들은 소극적인 삶, 가능하면 주류 중심의 가치와 법으로 형성된 사회시스템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하기 쉽다. 최소한의 시민의식 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다. 따라서 이 땅의 규칙과 룰에 적극적일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최소한의 것만 따르면 그만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땅의 나그네인 우리를 향해서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라고 권면한다. 자기가 해야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넉넉하게 그리하라고 말한다.

종교인들의 세금 문제가 최근에 대두되었던 것이 생각난다. 종교인들은 면세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권리와 특권으로 생각해서 고집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이 땅의 시민들이 하는 것과 같이 종교인들도 법이 정한 규정 안에서 세금을 내는 것이 베드로의 가르침을 고려해 볼 때 옳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3. 난해 구절(4:6)에 대한 평이한 해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여기서 말하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도 회심을 할 기회를 다시 주어진다는 의미처럼 보여지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죽은 자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결국은 죽음 이후 복된 소식이 전파되는데, 그 복된 소식이란 예수를 믿고 회심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말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던 그들이 결국은 옳다 인정을 받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복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육체적인 삶에 있어서는 심판을 받은 것처럼 보이나, 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려는 의도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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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_느헤미야_에스더를 마치고 다시 원래 나가던 진도에 맞춰 벧전으로 이동하여 옵니다. 설화체에서 강화체로 옮겨와서 모드 변경에 잠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곧 좋아지리라 봅니다.

[정리1. 본문을 정리: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되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를 따라 정리하도록 합니다. 서신서 중에는 논리적 이야기가 종종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고, 어떤 것은 논리적 연관성을 우리가 잘 이해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런 것이 정리되도록 합니다. 가장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시간인듯 합니다. 강화체에서는 말이죠^^]

1. 너희들은 흩어진 나그네이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3-12)

  1)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2)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셨다.(이것을 너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셨다)

  3)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

    (1) 그래서 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시험을 받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2) 왜? 너희의 믿음의 확실함이 순금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주님오실 때 존귀와영광을 받게 함)

    (3) 너희들은 주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 기뻐하니.. 구원의 증거다.

    (4) 이 구원은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펴서, 누구와 때를 알도록 했다.

    (5) 이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 전도자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도 살펴 보기를 원할 만큼 귀한 것이다.

 

3. 위와 같은 은헤와 복을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13-25)

  1)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13)

  2) 철이 들면, 철이 없던 시절의 행위를 버리고 행실을 바르게 함같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

  3)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니,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4) 그래서 우리 영혼이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1) 우리의 구속이 금이나 은처럼 없어질 헛된 행위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그래서...

    (2) 우리의 거듭남이 썩어질 것이 아닌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됨.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너희들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 말씀이다.

 

[정리2. 위에서 정리한 것은 핵심 뼈대만 정리합니다. 그래서 뭘 이야기 하려고 하시는데요. 요점만 간단히 핵심만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1.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일깨움

  1) 흩어진 나그네

  2) 삼위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

2.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

  1) 주님의 부활이 산소망을 줌

 2) 영원한 유업을 하늘에 간직

 3) 말세에 나타날 구원을 얻기 위해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

  4) 그러니 지금 잠시 받는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 너희들은 믿음에 확실한자다.

3.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환경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구원의 확실성을 가지고)

  1) 소망을 갖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

  2)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

  3)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4)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베드로 전서의 독자가 환난가운데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쓴 서신이다.

  삶의 현실에서 무력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택함받은 자라는 영적 측면을 확인시켜주고, 또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영적이며 미래적 보상에 대한 약속을 강조하고 재확신 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적 진리의 토대위에 권면하고 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나그네라고 막살지 말고 마음가짐을 똑바로 하고 근신하라고 한다. 또한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긴장하며 살라고 하신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든 행실에 거룩하기를 힘쓰도록 요청한다. 형제들과 뜨겁게 사랑하도록 요청한다.

  이와 같은 요청은 나그네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요청이 아니다. 나그네라는 정체성 자체가 이 땅에 기반을 두지 않고, 둘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원한 거주민보다도 더 거주민답게 살라고 요청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성도는 이 땅의 시민권이 아닌,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이 땅에 영구적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처럼(집착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성실과 정직과 도덕적 깨끗함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신다. 이 땅의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신다. 참 아이러니한 정체성이지만,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다.  

2. 이와 같은 권면의 근저에 있는 전제는 <확실한 구원>이다.

  이 땅에서 나그네면서도 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이 의미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소망이 확실한 자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이 편지를 받는 흩어진 나그네들은 구원의 확실함을 인정받은 것 같다. 이들은 구원 만큼은 검증된 사람들이다. 그 소망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더 피곤하고 과도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로서의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행하라고 하는 몇 가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불가능하다.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한다. 분명한 성도의 의식이 있어야 하고,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서 성도로서 근신과 성실과 거룩, 그리고 사랑의 삶에 대한 촉구가 가능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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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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