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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5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막 4:1)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왔다.

2. 그러는 중에 큰 광풍이 불었고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해주시길 바랐다. 

3.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 졌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질문하기]

1.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경외함을 가지게 되는가? 

  1) 큰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2)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것

 -> 예수님은 자연현상(사람이 임의로 할 수 없는)에 대해서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연 세계 조차도 그 말씀 앞에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그 분을 경외하게 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실 때 여기서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 

  1) 상황 상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예수)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풍랑과 바다 앞에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이 해석을 확대하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함께 하실텐데 세상의 풍랑과 바다(고난, 환난 등)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묵상하기]

어부들인 제자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어났고, 배에는 물이 넘치고 흔들렸을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너무 피곤하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과 대처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 자는 척 누워계셨을지도 모르겠다. 큰 풍랑으로 불안과 공포의 상황이겠지만 내가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 그래도 날 믿고 의지하지 않을까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의 믿음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었을 것이고, 믿음은 더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면서도 마치 없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하신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옆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주무시고만 계시니.. 더 답답하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기대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자는척 하시지만, 실눈 뜨고 지켜 보시는 것처럼) 우리는 제자들처럼 보통 두려움으로 주님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느야고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한 번은 마치 아무일 없는것처럼 태평하게 기다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일어나서 우리에게 닥치 위험을 먼저 막으시도록.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이 놈의 '믿음'은 위험한데? 주님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 주님이 움직이시도록 믿음을 발휘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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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0절.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절.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절.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절.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다른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길 때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그 나무 그늘에 깃들일 만큼 그 작은 씨가 성장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그런 특징을 가진다. 

2.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많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가능하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해가 부족할 경우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 주셨다. 


[질문하기]

1.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매우 작은 씨처럼 이 땅에 심겨지듯이 왔다. 

  2) 그러나 겨자씨가 자라면 꽤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듯 하나님의 나라도 이 땅에 매우 작은 모습으로 왔지만 훗날 큰 나무가 되고 그 그늘에서 안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강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작고 약한 모습이라고 해서 없어지고 무력해지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고 강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2.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유라는 의미인가? 

  1)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 중 이 땅에 없는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를 많이 사용하시기는 하셨지만 모든 말씀이 다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다양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소통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하기 위함이지 모호하고 난해하게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니다.(아무리 잘 하시려고 해도 상대가 들을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경우를 안타까워 하셨을 뿐) 

  2) 위의 구절은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다 정도로 이해하든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비유로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다(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이 땅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정도로 이해해야지 정확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다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매우 작다' 정도로 이해해야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씨보다 절대적으로 작다고 이해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더 작은 씨도 있을테니)


[묵상하기]

1. 하나님 나라는 매우 작고 무력하게 이 땅에 심겨진다. 예수님도 이 땅에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탄생과정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숨어다니셔야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왔으나 너무 초라하고 불안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고 세상의 나라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땅 속에서 죽은듯 지내다, 작은 싹을 틔우고, 점차 이삭이 되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특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씨만 봐서는 곧 세상의 나라가 더 신뢰할만 하게 보인다. 그래서 훗날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비유를 많이 하셨지만, 비유의 목적은 숨기고 감추려는 것에 있지 않다. 알수 없는 개념, 낯선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는것이 비유이기 때문이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는 다른 영역이기에 비유가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유의 목적은 분명하다. 드러내시는 것이고 밝히시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것도 마지막 때에 가장 명확한 방법(성육신과 십자가)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성경에 너희는 알수없는 다른 의미가 있고, 그것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다. 믿지 마라. 쫓지 말고 배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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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26절.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의 두번째 비유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인데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는 것이다. 

2. 땅에 씨를 뿌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씨가 나서 자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모른다는 의미보다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그 씨가 자라는 것에 어떤 원인을 제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마치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같은데(그 사람이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없다) 처음에는 싹이 나고, 이후에는 이삭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난다. 그리고 곧 열매가 익는다. 

4.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면, 씨가 신기하게도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2) 씨를 뿌린 것은 사람이지만, 땅이 그 씨를 받고 나면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게 된다.(싹->이삭->곡식->열매)

  3) 그 씨가 완전한 열매를 맺고 나면, 곧 낫을 대는데 이는 추수때 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심판까지 이어진다.

2.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는가?

  1) 일단 땅에 뿌려진 씨는 멈출수 없이 그 이후 과정을 진행한다.(복음의 시작으로 이 땅에 심겨진 예수와 그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성장한다.)

  2)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마침내 완성(열매)에 이른다. 

  3) 하나님 나라가 완성에 이르면, 그 때는 동시에 심판(추수)의 때가 된다. 


[묵상하기]

이 비유를 통해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심기운 하나님 나라의 씨라고 볼 수 있다. 그 씨를 뿌린 하나님의 손에서 떠난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이 땅의 능력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라 보인다. 이 땅의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에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다. 무능하지만 무릎꿇을 수 없고, 절망스럽지만 희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거름이 되고 그들의 눈물이 물이된 이 땅을 양분삼아 뿌려진 씨는 자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씨는 단순히 척박한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으로 생명력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온전히 살아서 열매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심판이 시작된다. 열매를 거두어 곳간에 들이고 그 열매 맺기를 방해한 모든 세력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님 나라의 씨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심기우셨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그것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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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21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절.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절.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성경내용 정리]

1. 첫 비유를 말씀하신 이후 이어서 말씀하신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밝히고 드러나게 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경을 가져와서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 둔 것은 타나기 마련이다.(새번역)

-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하신다. 드러내시고 밝히시려는 의도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숨겨 둔 것과 감추어 둔것은 결국 밝혀지기 마련임을 강조한다.

2. 또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기준으로(판단하는 것) 너희가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이상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는 자는) 그대로 (관용을) 받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자는) 그 사람이 받을 기본 관용조차도 받지 못하고 빼앗기게 될 것이다. 

- 24절의 내용을 통해서 유추해보면 25절은 ‘관용, 용서, 자비, 은혜’를 넣어서 이해하는게 적절할듯 하다. 


[질문하기]

1. 비유 중간 중간에 비유의 내용이 아닌 비유의 목적과 관련된 내용이 삽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 막 4:1-9에 비유가 있고, 막 4:10-13절에 ‘비유의 목적’에 대해서 언급한다. 막 4:14-20에 비유 내용에 대한 해설을 해주시고 막 4:21-25에 ‘비유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다룬다. 이는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해서 자주 다루시고 비유가 드러내려는 것인지, 오히려 감추려고 하시는 것인지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의 목적’을 정확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인듯 하다. 비유는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2. 25절에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은 맥락 속에서 보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까? 

  - 24절에서 ‘헤아림’(판단, 정죄)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을 주셨으니 그 와 대조되는 개념(용서, 이해, 은혜, 관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해서 관용과 은혜가 없이 다른 사람을 헤아리기만 한 사람은 역으로 자기 자신도 관용과 은혜가 없는 헤아림, 자신에게는 더 엄격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이라 보인다. 

3. 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비유로 알려주시면서 갑자기 주제를 ‘헤아림’(<-> 관용)으로 전환했을까? 

  - 천국의 가치관은 정확한 판단이나 헤아림이 아니라 은혜와 관용이라는 메시지는 마 18:21-35, 마 20:1-16에서도 나타난다.(천국 비유) 따라서 관용은 천국의 비유와 관련해서 무관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묵상하기]

1. 감추고 숨기는 것은 천국의 방식은 아니다. 현재 이해하는 사람들의 한계 때문에 감추어 지고 숨겨진 것처럼 보이는 영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고 기회만 있으면 그것을 드러내고 밝히시려고 애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보이는 말씀으로 오셨고,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그것을 분면히 한다. 예수님은 비유를 포함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힘쓰셨다. 

감추고 숨기는 사람들, 그 비밀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말 아래에 두고, 평상 아래에 두려고만 하는 사람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관 중에 하나는 ‘관용’이다. 엄격한 헤아림을 통한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엄격함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엄격한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자녀들과 백성들에게는 ‘관용’과 ‘자비’의 방식으로 대하시는 분임을 하나님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백성들이 스스로도 할 수 없는 엄격성을 들어 한 백성, 한 가족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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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0절.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절.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절.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절.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절.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절.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심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 함께 한 무리와 열두 제자들이 '씨 뿌리는 자' 비유의 의미를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비유에 대해 묻는다. 

  1)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함께 한 무리와 열두 제자)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외인들에게는 비유로 하셔서(직설법을 사용하지 않으심으로)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2) 또한 이 비유를 알지 못하면 모든 비유를 어떻게 알겠는가? 반문하심으로 이 비유가 모든 하나님 비밀의 기초가 되는 내용임을 암시하는듯 하다. 

2. 예수님은 비유에서 상징하는 각 대상에 대해 설명하신다.

  1)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따라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의 말씀)이다. 

  2)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으로 말씀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대상을 가리킨다.(이들은 외인들과 유사하다. 이들은 보기는 보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죄사함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다. 막 4:12)

  3)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자'를 말한다. 

  4)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다. 

  5)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 육십 배나 백 백의 결실을 하는 자다. 

 =>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말씀(예수님)은 그 말씀이 뿌려지는 대상의 상태에 따라서 결과가 전혀 없을수도, 어정쩡할수도, 큰 열매를 거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질문하기]

1.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이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서 제한을 받는다는 것인가?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서 인격적인 반응을 하신다는 것인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의 한계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리라 본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무리 하시고자 해도 사람들이 거절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리라 본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뿌려진 씨'처럼 여러 상태의 사람들에게 다 뿌려지고 전달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서 열매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2. 네 가지 땅의 상태는 어떤 대상들을 말하는 것인가? 

  1) 길 가에 해당되는 땅: 씨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고 만다. 길 가에도 말씀이 떨어지지만 이들은 그 말씀을 받지 않으므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한다. 이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외인이다. 

  2) 좋은 밭: 말씀을 받아 신속히 열매맺는 사람들이다. 심령의 가난함을 가진자며 그 말씀을 간절히 기다리고 바라던 자들이다. 환난이나 박해를 잘 견딘 사람이며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휘둘리지 않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열매가 생긴다. 

  3) 돌 밭: 말씀을 듣고 표면적인 기쁨을 얻었으나, 내면 깊숙히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함으로 작은 환난과 박해가 있으면 쉽게 돌아서고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4) 기시떨기 밭: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을 막는다' 그래서 열매는 없다. 

3. 왜 씨 뿌리는 자 비유가 모든 비유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비유일까?(13절)

 앞으로 이어지는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일단 예수님의 말씀(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듣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서 전혀 영향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미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적절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음(열매를 30,60,100배 결실하므로)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묵상하기]

이 비유는 대상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거절하는 자들에게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는 너희들의 마음 밭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너희들이 그런 태도로 말씀을 거절한다면 그들의 완악함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외인'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 기쁨을 받고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말씀으로 인해 환난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가운데 흔들림이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흔들린다. 그들은 열매가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말씀을 밀어낸다. 이들 또한 열매가 없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들이고 환난과 박해, 염려와 유혹과 욕심을 견디고 이긴 사람들은 '좋은 밭'으로서 반드시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참되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난과 박해, 염려와 유혹과 욕심의 시험을 잘 통과하고 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그리고 세속적인 욕심이 성도로서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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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절.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절.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절. 뿌릴새 (1)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절. (2)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절.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절. (3)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절. (4)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절.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였다. 예수님은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고 큰 무리는 해변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2.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는데 그 중에 한 가지 이야기다. 

3.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밭의 상태에 따라서 4가지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흙이 깊지 못하니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는 타서 뿌리가 없어 말랐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니 결실하지 못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자라 무성하하여 결실하게 되는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는 만큼 큰 결실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4. 이 의미를 깨닫을 수 있는 자는 깨달아 알기를 바라셨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씨'가 중요한 것인가? '땅의 상태'가 중요한 것인가? 

  비유에서 씨는 차등이 없다. 달라지는 것은 씨가 떨어지는 땅의 상태다. 길 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밭과 좋은 밭이라는 땅의 상태에 따라서 씨가 맺게 되는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결과에 차등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1)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진리이고 생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가지는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있어서의 한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문을 두드리시되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가지는 않으시는 방식이다. 원함이 있으시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는 방식의 한계로 봐야 할 것이다. 

  2)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전혀 반응이 없고 대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안에서 온전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여전히 큰 무리가 예수님을 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묵상하기]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 성도에게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밭의 상태란 돌밭과 가시떨기 밭일 뿐이다. 길 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므로 성도일 수 없고, 좋은 밭에서 아무 문제없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성도의 상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밭이 고난을 의미하고, 가시떨기 밭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의미한다고 할 때, 면균실에서 잠깐을 사는 성도가 아닌이상 고난과 염려와 유혹이 없는 성도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봐야 할 사람은 현재 돌밭같은 상태의 사람과 가시떨기 밭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고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언제나 이와 같은 상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를 통한 메시지는 '좋은 밭이 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좋은 밭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는가? 다만 고난과 염려와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성도이기에 마음 아픈것 아닌가?)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것인지, 어떻게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겨감으로 열매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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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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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1절.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절.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절.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집에 계셨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3:20) 예수의 친족들도 그 곳을 찾았고(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예수를 찾았다.(3:31)

2. 사람이 많아 집에 들어올 수 없었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대신해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전한다.

3.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다. 지금 밖에서 당신을 찾고있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동생들이 아니라 여기에 둘러 앉은 자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무리 앞에서 부정하신 것인가?(무시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어머니를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의탁하신 것이나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소중히 여기셨던 태도를 생각할 때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정하거나 무시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런 상황(기회)을 통해서 혈육을 중심으로 한 가족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족의 관계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봐야한다. 

2.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는 무엇인가?(혈연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가족은 혈연의 육체적 관계를 넘어서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게 될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족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된다. 


[묵상하기]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남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이 근저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여자 성도, 당신은 남자 성도를 말하는 것이 자매와 형제가 아니라 당신은 나의 형제, 나의 자매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로 한 새로운 백성이며 새로운 가족이다. 

복음의 시작으로서 예수는 이 땅에 새로운 나라와 질서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가족이다. 혈연의 가족을 넘어 믿음의 가족, 영적 가족 관계를 만든다.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 있으면서 두 영역의 가족과 연관되게 된다. 육체적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는 혈연 가족의 폐쇄적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 반면 영적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은 실제적인 가족처럼 마음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다'라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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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20절.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절.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절.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절.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절.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절.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절.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본문내용 정리]

1.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셨고 사람들은 그 집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적인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의 친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예수를 붙들러 왔고,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리한다'고 했다. 

2. 예수님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결과를 보고도 그와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말씀하셨다. 나라가 분쟁하면 나라가 설수 없고, 집이 분쟁하면 그 집이 설수 없고, 사탄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거슬러 분쟁하면 설수 없고 망하는 것인데... 너희들이 나를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집을 강탈하기 위해 상대의 강한 자를 결박하는 행위로 봐야 마땅한 나의 행동을 어찌 한 패라고 말하느냐?

3. 예수님은 이들의 태도가 매우 악함을 지적하고 경고하신다. 모든 죄와 모독하는 일은 사함을 얻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 지금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의 논리와 비난이 그와 같은 행위이다.(엄중한 경고)


[질문하기]

1.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뉘게 되는가? 

  무리는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 인근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식사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는 예수의 친족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어릴적부터 봐 왔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자기 태도와 인식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고,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갈릴리 변두리에서 자라고 사역하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으니 오히려 예수가 가진 능력을 '하늘'로 부터 온 것이 아닌, '귀신'에게서 온 것으로 폄하하려고 했다. 

2. 본문의 상황으로 볼 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매우 심각한 죄로 언급된다. 사하심을 받을 수 없는 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어떤 죄일까? 적어도 오늘 본문의 상황 속에서 해석을 하자면, 그 죄는 1) 악의적인 의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매임에서 자유하게 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 논리(귀신의 왕을 힘입어 그 일을 한다)로 예수를 폄하하려 했고 그것은 악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들의 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시작하시려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 했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때까지 유대인으로 옳다고 생각했던 확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면서도 부인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서기관들은 억지 논리를 내세워 악의적인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있었고, 권세와 능력이 드러났으며 귀신들도 예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제자들도 생겼고, 많은 무리가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로 모여들었다. 몇 차례의 논란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태클을 가볍게 이기셨다. 그 소문은 더욱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알리기에는 충분히 임팩트 있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고 조직을 갖추자 본격적으로 악의를 드러낸 사람들이 나타난다. 가까이에서는 예수의 친족이었으며(이들의 문제는 무지와 편견) 멀리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었다.(이들의 문제는 악의와 완악함) 

시작은 화력하고 임팩트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가는 과정이 녹록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사탄 조차도 자기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사탄도 분쟁하면 그의 나라를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집'을 세우고 '나라'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 구성원이 서로를 향해서 '악의적으로 폄하하는 행위'는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탄 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구성원은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구성원 간의 분쟁은 그 집을 허물고 그 나라를 허무는 일이 되고만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똑같은 가치관과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없다. 서로 다름이 분쟁을 통한 멸망이 아니라, 다양성을 통한 세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합리적인 절차를 따라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통해 공동체는 분쟁이 아닌 세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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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1)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2)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3)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절. 또 안드레(4)와 빌립(5)과 바돌로매(6)와 마태(7)와 도마(8)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9)와 및 다대오(10)와 가나나인 시몬(11)이며

19절. 또 가룟 유다(12)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와 능력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으셨을 때(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제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13절)

2. 열 둘을 세웠는데 이들을 세운 이유를 살펴보면(14-15절)

  1)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2) 보내사 전도도 하며

  3)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었다.

3. 열 두 명의 제자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시몬(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시몬(가나나인), 가룟 유다.

4. 이들 중 특징적인 제자는

  1) 원래의 이름 외에 새로운 이름을 더한 제자는 시몬(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2) 예수를 판 제자: 가룟 유다


[질문하기]

1.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 전략(?)을 찾아 볼 수 있을까? 

  - 예수님께서 복음의 시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공적 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셨다. 다양한 문제 제기에 대해 답하시면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사람을 위하시고, 안식일의 주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명확하게 하셨다. 그 결과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주목했고, 심지어 유다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주변 이방 지역에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확장하는 일을 홀로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 중에서 따로 사람을 세워 일하시기를 원하셨다. 열 두 명을 따로 세우셨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게 했으며,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행하게 하심으로서 예수님 홀로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이루어 가시길 기대하셨다. 사역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된 것이다. 

2. 열 두 명의 제자 중 다른 이름을 부여한 세 명의 제자에 대한 언급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란 새 이름을 주었다. 본문에서는 새 이름을 주신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이란 뜻이므로 베드로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셨다고 볼 수 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기질과 성향을 특징적으로 드러낸 말이 아닌가 싶다.(이후 성경을 읽는 중에 그 의미가 좀 더 밝혀질 수 도 있으리라)

3. 왜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 중에 예수를 팔 사람을 포함하셨으며, 성경은 굳이 가룟 유다를 언급하며 숨기지 않았을까? 

  - 예수님의 제자가 열 둘이라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 둘 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열 두명을 제자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열 둘의 숫 자 안에는 배신자(예수를 파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 어쩌면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는 이 땅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열 두 명 중 한 명은 배반하게 될 것을 모르지 않으셨음에도 그 배반자를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동행하셨고 마지마까지 함께 하셨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요소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팔리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 같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그림 안에 있으며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묵상하기]

1. 완벽한 완성을 위해 치명적인 문제를 심는다. 예수님께서 열 두명의 제자를 선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다.  열 두명의 제자 중에 예수를 판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완벽한 성취와 결과를 위해 무흠한 사람을 찾고 방해가 될 모든 변수를 제거하는 것에 힘쓴다. 그렇게 준비하고도 기대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에 불안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가장 불완전한 요소를 심어 놓으신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요소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 극복하시고 그것을 넘어 완전에 이르신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이 땅을 살면서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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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hris Gallimore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절.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절.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께서 제자들과 다시 갈릴리로 가셨고 그곳에서 큰 무리가 따랐다. 그 무리는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뿐 아니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까지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다.(7,8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작은 배를 타고 나가셔야 할 정도였다.(9절) 

 - 갈릴리에 가실 때마다 많은 무리가 따랐다(막 2:13)

2. 물론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다.(10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렸고,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부르짖으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되심을 언급했다.(11절)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12절)


[질문하기]

1. 갈릴리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전의 기록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1) 이전에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음이 강조된다.(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를 대기함, 몰려왔다 등) 

  2) 많은 무리 중에는 유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아왔다는 것이다. 

- 점점 더 늘어나는 무리와 다양한 사람들(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에게 나아오게 된 것

2.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께 보이는 반응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이전에 귀신들린 자는 '예수여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3,24) 문구의 차이는 있지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줄 알고 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밝힌다. 

->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귀신들도 인정하고 엎드러졌다. 

3. 왜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는가? 

  오늘 본문 뿐 아니라 막 1:34에서도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는 마을로 다니시면 전파하시길 원하셨지만(막 1:38) 귀신들의 고백에 의해서 예수님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원하지 않으셨다. 왜일까?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이후에 그에게도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막 1:44) 예수님 당신은 마을에서 마을로 전도하시며 직접 다니셨지만, 사람의 말에 의해서, 귀신들린자의 입을 통해서는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셨다. 이 정도만 정리하자. 


[묵상하기]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거침없이 확대되었다. 무리는 점점 더 많이 예수를 쫓았고, 예수에 대한 소식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넘어 주변 이방 민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들이 주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열광하게 된 것은 '병을 고친다'는 것이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다. 예수님도 사역의 시작은 이 땅의 고통(사람들의 절실한 필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시작하셨다. 우리의 사역이 사역 대상자들의 필요와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 필요가 표면적이고 임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병을 가진자에게 병고침을 받는 문제가 실로 중요한것처럼 인생의 현실적 필요를 등안시 해서는 안된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본질적인고 영원한 것으로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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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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