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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절.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고침받기를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다. 

2. 예수님은 오히려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신듯 하다. 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고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질문하시고 그들 스스로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답하도록 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무엇이 옳은 일인가?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무엇이 옳은 것이냐?” 무리는 잠잠했지만 그것은 모르거나 알 수 없다는 반응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었다. 

3. 문제의 핵심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에 있는 것이었다. 안식일 규정도 문제가 없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잊고 껍데기를 율법주의적으로 붙잡고 강요하고 있는 이들의 ‘완악함’이 문제인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탄식하시고 노하셨다. 

4.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고 그가 내밀매 손이 회복되게 하셨다. 

5. 이런 현장을 직접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왜 굳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스스로를 생명의 위협에 빠지도록 자처하셨는가? 

  -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으시고 손 마른 사람은 긴급한 환자는 아니기 때문에 다음날 오라고 해서 고치셔도 문제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괜한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고, 실속도 있는 행동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공개적으로 고치심을 통해 ‘안식일이 무엇을 위한 날’인지, ‘하나님이 왜 안식일 규정을 주셨는지’ 명확하게 알리기 원하셨다. 그렇게 하려면 안식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것 만큼 좋은 효과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그 손 마른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효과적)

2. 과연 안식일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인가? 

  - 안식일은 구별된 날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날이다.(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처럼)

  - 그러나 안식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 날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나 선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날이다. 예수님이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것처럼.

3.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분노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완악함이다. 가르쳐주어도 듣지 않고, 깨닫게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귀를 닫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 주님은 탄식하시고 분노하신다. 

[묵상하기]

1. 안식일은 자신의 생명, 자신의 확장,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여주는 날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사회적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 땅에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일꾼으로서의 충성을 보여주는 날이어야 하는 것이다.    

2. 사람들이 죄 때문에 망하는게 아니다. 죄를 짓고도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죄를 숨기고 부정하고 죄를 드러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완악함이 결국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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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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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23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절.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절.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아니니

28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랐다. 이 일을 알게 된 바리새인들이 ‘안식이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해서 지적했다. 어떻게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 있는가?

2. 예수님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답변하신다. 다윗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본인이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 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이 일에 대해서 다윗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3.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4. 예수님이 안식일에 주인이심을 밝히셨다. 


[질문하기]

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기한 문제는 무엇인가? 

왜 안식일 규정이 있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그 규정을 지키지 않는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행위는 ‘추수’ 행위에 해당하므로 이것은 ‘일’을 한 것이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엄중한 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제자들의 잘못에 대서 문책하거나 지적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2.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행위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다만 특수성까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원래의 율법의 취지를 훼손 시키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신다. 다윗은 제사장 외에는 먹으면 안되는 진설병을 먹었다. 이 때는 사울에게서 살기 위해 도망치던 때였고, 위급한 상황에서 진설병을 먹은 것이다. 성경은 그 일은 기록하면서 다윗이 잘못했다고 언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율법이라는 규정보다 더 위중한 상황(생명의 위협 등)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융통성을 발휘했던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행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의 허기짐이 긴급할 정도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을 통해서 안식일 규정보다는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리시는 계기를 삼으셨다. 

3.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1)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세울 수 있는 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표면적인 안식일 규정이 있지만 그 해석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안식일 규정을 판단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2) 안식일 규정이 중요한 것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해석할 수도 있겠다. 예수의 본질은 참된 안식의 회복이지 어떤 규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묵상하기]

1. 율법주의의 위기는 율법의 본질을 잊고 문자와 형식에 매이기 시작하면서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문자주의, 형식주의에 굳어져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을 부정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살려내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율법이 형식과 판단만 남아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오히려 율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논란의 중심이 계시면서도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필요한 경우 의도적으로 기존의 전통을 깨심으로서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도록 하셨다. 

2. 이미 구약시대에도 긴급한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인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후에도 다윗의 이 문제를 지적하거나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다. 율법과 전통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매이기 시작하면 율법주의가 되고 보수주의가 되고 만다. 율법주의보다 더 핵심적인 율법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율법을 앞선다. 전쟁 중에서도 의사의 의술은 이념의 차이와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듯, 생명을 살리는 것은 율법과 전통에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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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8절. 요한의 제자들바리새인들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2.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을 빗대어 답을 주셨다. 혼인 집 손님이 결혼 잔치에서 금식하는 것은 바른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해서는 안된다.(예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금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 때는 당연히 금식하게 될 것이다.(슬픈날이니)

3. 생베 조각(새 것)을 낡은 옷(낡은 것)에 붙이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지게 됨이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사람들은 없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가 낡은 부대를 터뜨리게 되고  새포도주와 부대를 함께 버리게 된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질문하기]

1.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금식'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을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과 금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리새인들도 철저하게 금식을 지키며 강조하는 율법주의자였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율법에 철저하지 못하게 보인 것이고, 요한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곧 심판과 멸망의 날이 다가오는데 왜 세상의 것과 구분됨이 없는가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주님의 답변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지금이 아직 심판의 때가 아니고 축제(은혜와 자비가 베풀어지는)의 때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적하신다.(19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곧 올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심판'과 '금식'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옛 것(율법을 통한 의)이 아닌 새 것(은혜를 통한 의)의 시대임을 언급하셨다. 새 포도주인 주님을 낡은 부대에 담으려고 하기 때문에 담지 못하고 결국 터져 버리게 되는 것임을 지적하신다.(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를 이해하지 못함)


[묵상하기]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하나님의 역사(권능)를 드러내는 사역이었다. 그러나 눅 2장부터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의혹과 의문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죄사하는 권세'에 대한 의혹이 있고,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금식' 논쟁이 이어진다. 이런 논쟁은 단순히 논쟁에서 누가 이겼는가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을 통해서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이 요한의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최종적 심판을 위한 오심이 아니라 여전히 최종 심판 전 '구원과 회복과 축제'의 순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은 아직 현재가 축제와 구원의 순간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옛 것, 옛 방식이 반복이 아니다. 예수님은 새 것이고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옛 사고와 옛 방식으로는 예수님을 담을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다. 곧 터져버린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 해서는 안되고, 새 포도주에 맞는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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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3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바닷가로 나가셨고 많은 무리가 나오자 그들에게 가르치셨다.(평범한 사람들의 현장 속을 다니셨고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는 중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다. 어부들 중에서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은 이제 세리(당시 죄인이라고 여겨진)를 제자로 부르셨고 레위는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13-14절)

2.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드실 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있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죄인들은 편하게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이다.(15절)

3.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물었고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당신이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다.(16-17절)

-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 서기관 중에 어떤 사람이 속으로 '하나님 한 분 위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라고 생각했을 때 주님은 그 속 마음을 알아채시고 답변을 주셨다.(막 2:7,8절)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노골적으로 제자들에게 의의를 제기했고 그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예수님이 하셨다. 


[질문하기]

1. 왜 예수님은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을 따로 기록하고 있을까? 

- 어부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자를 대표한다면, 레위는 세리로서 죄인들을 대표한다 하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회적으로 낮은자, 죄인으로 소외된 자를 먼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부르셨다.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은 자들이 중심되는 나라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예수님의 이루게 될 나라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선택인지 모르겠다.


2.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얻은 부수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레위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 레위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예수와 함께 있고, 그 분을 따르게 되었다.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처럼 한 가정이 돌아오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연결점이 된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아담이 아담 혼자일 수 없고, 예수가 예수 혼자 일 수 없다. 


3. 이 사건을 통해서 마가가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1) 세리조차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세리조차 하나님 나라의 중추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쓸데 없는 곳이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죄인으로 인식되고 인정된 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곳이 된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다. 


[묵상하기]

1. 한 사람은 사람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리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될 때, 많은 수의 세리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레위의 뒤를 이어 예수를 따르게 된듯 하다. 바울을 만나 자주장사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그의 집이 주님께 돌아왔고,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 한사람의 회심으로 그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게 된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되듯, 한 사람은 숫자 하나가 아니다. 그와 연결된 수 많은 가능성의 시작인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된것처럼, 예수 한 분을 통해서 모든 구원받은 백성의 나라가 된다. 한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가능성이 있다. 

2. 건강한 사람들만 모여 산다면 그들에게 의사는 무용한 사람이고 잉여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병든 사람에게 의사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요 인생의 구원자다. 주님은 인류의 구원자로 치료자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인정한 사람들은 주님을 찾고 만나 구원을 받지만, 자산의 병을 모른채 자신이 건강한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복음의 적용은 자신이 병든 상태, 스스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 그 병의 끝은 사명이요 멸망이요 비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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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하시니


6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절.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절. 그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본문내용 정리하기]

1.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금새 소문이 났고 그 집에는 발디딜틈도 없을만큼 사람이 많았다. 주님은 그 모인 사람들에게 '도'를 전하셨다.(1,2절)

2. 그러는 중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풍병자의 친구 4명이 중풍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게 하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게되자 지붕을 뜯고 중풍병든 친구를 상에 달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친구들)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3-5절)

3.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서기관은 마음에 의혹을 품었다. 예수님의 행동은 신성모독에 해당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사하는 권세가 있단 말인가? 주님은 그 서기관의 마음을 아셨고 당신이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6-10절)

4.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가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갔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11-12절)


[질문하기]

1. 중풍병든 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질병을 고쳐주신 다른 기록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1)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데리고 나왔다는데 차별성이 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4명이 데리고 왔다는 것, 사람이 많아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고 환자를 위에서 내려오도록 했다는 것 등 친구들의 마음, 태도, 열심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함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믿음(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스스로가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을 때, 그 친구들이 주님께 데리고 가서 고침받게 하겠다는 그 마음도 귀히 여기심을 알게 된다. 

  2) 중풍병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논란이 발생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언급한 것에 대한 논쟁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사하는 권세를 가졌는가? 한 서기관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심으로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했고, 그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과 같은 권세가 있음(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권세(가르침, 병고침, 귀신쫓음)와는 차원이 다른 권세(죄를 사하는 권세)를 보여주신 사건이라 하겠다. 

2. 친구들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중풍병자를 들고온 친구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것처럼)

  교리적인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은 본인의 진실한 믿음과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주변 사람(친구, 가족 등)의 도움으로 스스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사람이 예수를 만나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열어놓고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적극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친구를 위해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데리고 오기 위한 노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 또한 그들의 믿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신념 때문일수도 있고 과거 교회와 교인에 대한 상처때문일수도 있고 무관심 때문일수도 있다. 이 때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의 지혜가 필요하고 그들의 협조가 필요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반드시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열심과 헌신이 필요하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말씀은 그와 같은 메시지로 성도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었을 것이다. 


[묵상하기]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을 알리셨다. 그 분의 가르침과 그 분의 행하심으로 이 땅의 권세와 질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에 반응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등장한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회적인 제약을 넘어 믿음으로 주님께 나왔고, 중풍병자는 스스로 나올수 없는 한계를 친구들의 도움으로 주님께 나왔다. 본인에게 사회적인, 신체적인 어떤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의 도움과 환대,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직접 진행하시고 성취하시지만, 그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것이 포함되고 있다. 본인의 간절함, 친구들의 도움과 간절함 등이 그것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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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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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40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절.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절. 보내시면 엄히 경고하사

44절.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서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아오더라.


[성경내용 정리]

1.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깨끗하게 해 주시길 원했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주님은 '당신이 원하신다'고 말씀하시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니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그대로 이루어졌다. 

2.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해지자 '곧' 말씀하셨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엄중히 말씀하셨다. 1)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2) 다만 제사장에게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하게 된 것을 입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일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 일을 많이 전파했고 널리 퍼졌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은 사람많은 곳으로 다니지 않으시고 변두리 한 적한 곳에 계셨지만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 왔다. 


[질문하기]

1. 일반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구별해서 구체적으로 한 나병환자를 고치는 사건을 통해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1) 나병환자는 일반적인 병자와 구분해서 '부정한 병'이라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고 부정한 자라고 여김받았던 병이다. 그런데 그 병을 가진자가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물리치지 않고 받아주셨다.(부정한 자, 죄인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2)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고치실수 있다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내가 원한다'는 것으로 화답하심으로 정말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그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마음에 원하시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 내시는 분)

  3)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이후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것을 경고하시면서도 제사장에게는 보이라고 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제사장'으로부터 입증을 받고 온전한 회복을 이루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셨다.(모세의 법을 인정, 제사장 인정,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강요하셨을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순종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숨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숨겨지지도 감출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마을을 피해 한적한 곳에 머물렀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 예수님은 감추고 숨기려했으나 참출수도 숨길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은 원하시면 그 원하시는 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한계는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많은 것을 원하시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고통당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나병환자의 경우 그는 얼마나 많이 그 병이 낫기를 원했을까? 얼마나 오랜시간 간절히 기도했을까? 그러나 그런 원함과 소망만으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그 일은 실행된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혐오했다. 그들이 낫기를 원하기 보다 그들이 자기 주변으로 오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나병이냐 아니냐를 판단하기는 일에는 정확했을지 모르지만 그 병을 가진 사람의 아픔과 간절함에는 무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않았고 오히려 '나병환자가 낫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낫게 하셨다'. 어떤 사람이든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회복된다.(확실히 구원이 임한다)

2. 어둠은 빛을 감출수 없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고 드러내고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 분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고 스스로 확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출수가 없었다. 그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를 숨길 수가 없었다. 마을 변두리에 숨어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빛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 올 수 밖에 없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 빛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를 향해서 나아오게 된다. 

최근 한국 사회에 기독교의 영향력이 추락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감추어지는 것이고, 그릇된 전통이 추락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감출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비판은 예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빛인데 예수를 예배하고 섬긴다고 하는 너희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왜 어둡냐고 힐난 하는 것이다. 이럴수록 우리의 신앙은 '예수'에 집중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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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절.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한적한 시간에(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려고 했던 것과 그에 반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음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필요로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심지어 새벽 이른 아침 시간조차 홀로 기도하실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2.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다. 거기서 전도하셔야 함을 피력했고 그 일을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바쁘게 온 갈릴리에 다니셨고, 여러 회당에서 전도 하셨다. 그리고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질문하기]

1. 본문은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하나님과 지속적인 소통(기도)이 필요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쁜 일상속에서도 한적한 시간과 한적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은 강조될만 하다. 

그러나 35절의 이야기가 37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 홀로 있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간 예수님이 따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을만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간절한 필요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2. 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절)라는 말씀을 듣고 그들에게 가지 아니하시고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 것일까?(38절)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인기를 높이려고 생각하셨다면, 찾아오는 무리에게 가셔서 다시 한 번 능력을 보여주시든지 그들의 필요에 응해 주었다면 더욱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세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다. 다만 빨리 인근 모든 지역에 '전도'하기를 원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은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음을 알리시고, 기다리던 새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음을 '말씀'과 '실력'(귀신을 쫓아내심)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고(귀신들이 쫓겨감) 새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묵상하기]

1.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간적접으로 말씀하시는 요청이란 생각을 한다.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은 한적한 시간과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인정(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사역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한적한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너무 일이 많아서일수도 있다. 물론 게을러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셔야 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자리를 견고하게 붙잡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가 있음에도 명성을 얻거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찾아오는 사람을 향해 가지 않으시고 다른 마을로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시작된 복음(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급하게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인간의 나라에서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땅의 나라 외에 다른 나라가 예비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목회자와 달리 선교사란 바로 이런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선교사이시다. 그러나 지금의 선교사와 다른 것은 지금의 선교사는 '복음의 내용'을 증거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전도'와 더불어 그 실제의 확증(병고침과 귀신을 내쫓음)을 함께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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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29절.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절.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절.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절.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회장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2. 시몬의 집에 있던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음을 급하게 알렸고, 예수님은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열병은 떠나고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다. 

3. 해가 저물때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사람들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4. 예수님은 각 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을 고쳤고, 많은 귀신을 내쫓았다. 

5.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질문하기]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이고, 병자들을 고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될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은 준비했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은 이 땅의 권세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또한 이 땅의 능력으로는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쳤다' 귀신에게 명한즉 귀신도 순종했다.(34절. 귀신이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의 영역과 힘이 이 세상의 권세와 힘과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부터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묵상하기]

예수님의 사역에 병을 고치시는 사역과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땅의 권세과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문제-질병-를 간단하게 해결해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를 드러내고 있고 인생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서의 고통-귀신들림-에 대해서도 말씀으로 통제하시는 분임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귀신도 말씀을 쫓아내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보여주시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일상다반사로 그 일을 행하실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질병을 없애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고, 귀신들을 다 잡아들이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능력으로 어떤 권세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 때 행하셨으니까 지금도 할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 때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분에 오해를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은 지금도 병고치고 귀신 쫓느라 정신없이 바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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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하기]

21절.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절.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절.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절.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절.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성경내용 정리하기]

1. 마가복음은 여전히 사건 전개가 급하게 진행되는 형식으로 전한다. ‘곧’ 안식일이 되었고(21절)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28절) 

2. 안식일 회당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다.(22절) 예수의 가르침은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형식적이거나 뻔한 내용의 반복이 아니었다. 그 가르침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으로 생명력이 느껴지는 가르침이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가르침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권세있는 말씀(귀신에게 명한즉 귀신도 순종하게 되는)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깊은 통찰이나 깨우침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권위’(말을 하면 그 말대로 되는. 심지어 귀신조차도)있는 새 교훈인 것이다.(27절)

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가르침과 귀신을 내쫓는 말씀은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어둠은 빛을 감출수 없듯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가르침과 권위는 순식간에 온 갈릴리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질문하기]

1.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시작된 일을 정리해 보자.

제일 처음 하신 것은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다.(부름받은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그 이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권위있는 말씀(귀신을 쫓아내심)을 행하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동점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에 대한 반응(순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람(백성. 12명의 제자)이 부르심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심지어 귀신조차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이 말씀으로 귀신에게 명한즉 귀신이 나가게 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귀신을 내쫓는 사건은 단순한 치유사역과 구별된다. 귀신을 내쫓았다고 말하지 않고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귀신 조차도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모든 사람이 순종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대적자, 인간의 대적자인 귀신까지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14절) 그리고 첫 사역은 향후 12사도가 될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고, 가르침(율법과 대비되는)을 주셨고, 권위있는 일(귀신에게 명하고 귀신이 순종하는)을 하셨다. 이 일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말씀하시면 바로 순종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 일은 신속하게 확장되었다.(말씀에 권세가 있다는 것과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은 소문으로 갈릴리 사방에 퍼져나갔다.)

공생애를 시작하자 거침없이, 신속하게 예수님의 영역이 확장되고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가복음은 1장은 진행된다. 사람들의 불순종과 무지 그리고 귀신들의 방해로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해왔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함께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귀신들의 방해에서 귀신들을 내쫓음으로 전환되었음을 마가복음 1장은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2. 한 나라의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많은 노력이 열매를 거둘 수 없지만, 정권이 바뀌고 나면 그 동안 쌓여왔던 적폐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전의 권세를 대체하고 새로운 왕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동안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 시작을 보여주시는 장면이라 하겠다. 아직 모든 영역에 그 질서를 실현한 것은 아니지만,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을 보여준다. 

3. 우리는 지금 그 시작을 과거에 두고 있고, 그 완성을 미래에 두고 있다. 그 시작을 믿는 자는 완성을 확신해야 하며 그 완성을 믿기에 오늘을 흔들림없이(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를 믿지 못하는 자가 미래를 논할 수 없다. 과거의 시작을 믿지 못하는 미래의 완성을 확신할 수 없고 당연히 오늘의 믿음이라는 것도 시련과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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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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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ing Jun Tan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하기]

12절.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절.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절.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절.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성경 내용 정리하기]

1. 성령님은 예수를 급히 광야로 몰아가셨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시험을 받았다. 들짐승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문화 공간이 아닌 자연 세계에 있었음을 말하는듯 하다. 그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험을 잘 통과하셨음을 보여주는듯 하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 시험도 필요한 과정이지만(성령이 인도하셨다는 측면에서도) 예수님은 잘 통과하셨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서술해가고 있다. (12-13절)

2. 복음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복음의 시작을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하는 세력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통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고, 우리가 해야 할 일'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촉구를 하는 것으로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셨다. (14-15절)

3. 그리고 예수님은 해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고기잡는 어부를 선택하셨고 그들은 그물과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곧 좇았다. 첫 대상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였고, 그 다음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었다. 이들은 곧 예수를 따라갔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자신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를 따라간)' 첫 제자들이었다.(16-20절)


[질문하기]

1. 마가는 왜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서 자세한 기술을 하지 않았을까? 드라마틱한 스토리인데.

  1) 마가는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해나가고 있는듯 하다. '곧'이란 표현이 오늘 본문에서만 3번 언급되고 있다. 신속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굳이 알만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수 있다.

  2)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물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인 것과 능력 많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스스로 나아와 세례를 받았고 그것을 하나님은 충분히 인정해 주고 있음이 분명함이 이미 언급되었다. 굳이 추가해서 광야 시험의 자세한 내용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온 것인가 아직 안온 것인가?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직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실 분이 과업을 완성할 것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는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관한 일이다. 수업 시작 시간이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다음 수업을 진행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고 곧 시작 종이 울릴 것이므로 '떠드는 학생들은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자'라는 선생님의 말은 헛된 말이 아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 선생님의 수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수업 시간이 안되었다고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떠들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그 때 매점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수업시간은 임박했고 선생님은 이미 교실에 들어와 계신 것이다. 


[묵상하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혹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대로 이 땅의 나라에 속해서 살아간다면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먼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나라를 준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래서 멸망당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놓여진 과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기존의 삶이 방식과 태도에서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방법과 태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세상이 우상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심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세상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 같은 현실이지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구원을 위한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회개: 현재의 삶에 대한 돌이킴

* 복음을 믿으라: 곧 완성될 미래에 대한 확신

현 세대에 대한 환멸만 있는 사람은 회개가 아닌 혁명(인간이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그림은 현 세대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자기 욕구의 발현이거나 관념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현 세계와 하나님 나라의 대조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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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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