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4:1)

바울은 3장을 시작하면서 '잔소리'를 하겠다고 미리 언급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차 강조해서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잔소리'와 같은 인상을 줍니다.

바울이 가르칠 내용이 부족했거나, 다룰 주제가 부족했기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립보 교인들의 안전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 안전이란 신앙에 있어서 안전이지요.

바울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다가 다시 돌아서고, 말을 마치는가 싶다가 다시 말하는 방식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방식이지만, 가볍게 지나갈 수 없어서 재차 강조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중요한 정보에 밑줄을 긋고 현광펜으로 덧칠하고 별을 그려넣듯... 꼭 잊지말고 기억하라고 바울은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느 예화에서 한 목사님이 같은 설교를 똑같이 매주 반복해서 하니까 성도들이 왜 같은 설교를 매주 하느냐고 물었다지요. 목사님 왈, 왜 매주 반복해서 하는 설교를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겁니까?

그러나 다시 같은 내용의 권면(1,2장에 했던)이 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4장에 가서 다시 언급됩니다. 3장에서는 두 가지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하나는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 우리가 얻은 의는 육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육체의 자랑을 모두 버렸다. 나는 계속해서 이 길로 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육체를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땅의 있는 육체의 자랑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것을 바라보라. 우리는 결국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냐? 우리의 불완전한 육체는 그 날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뀔 것이 아니냐?

이 땅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연합하지 못하고, 원망과 시비가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땅에서 내가 가진 조건(육체)에 대한 자랑 때문이 아닐까? 그것으로 인해 서로 비교하고,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러는 와중에 편법과 조작이 난무하고... 이 땅의 자랑에 집착할 때 우리는 영원히 일치할수 없다. 세속 세상에서 win-win 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육체의 자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었을 때
땅의 시민권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시민권에 초점을 맞추어 살 때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하나되며,  원망과 시비에서 자유로워짐으로 세상의 원수들에게조차 흠잡힐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세상의 빛된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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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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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1장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은(1:27-28)


1. 한 마음과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
2. 무든 일이든 대적자들에게 흠잡힐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

먼저 1장을 다시 한 번 살펴본 것은 2장의 내용흐름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 드리려고 했던 것인데요..

빌리보서 2장은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1-18절까지, 그리고 19-30절까지. 뒤의 이야기는 바울과 빌립보교회간의 사적인 이야기로 보여진다. 왜 디모데를 지금 보내지 않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보여진다. 핵심적인 내용은 2장 앞부분에 있다고 보고 전반부만 다룬다.

내용은 두 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되라는 것이 첫번째다. 이것은 1장에서 요청한 복음의 합당한 삶 1번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겸손한 마음>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볼 수 있는 시야 확보>다.

오늘날 이 시대는 겸손을 미련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 그들의  속도에 나의 템포를 늦추는 것에 대해서 쓸데없는 연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하나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리된 하나만인 존재하는 개인주의적 사회다. 연합이란 본질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줄때까지만의 임시적 작업이다.
교회란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 , 겸손한 마음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을 핵심적인 가치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경쟁하고 자기 성공을 우선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적이지 못하다.

둘째는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기위해서는(15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한다. 흠이 없다는 것은 정결하다기 보다는 일을 할 때 원망과 시비가 없이 원만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망과 시비가 없다는 것은 교회 일에 원망해도 안되고, 시비를 걸어서도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원망의 말이 시비가 될만한 빌미를 주지 않도록 일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더욱 그리해야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고 원수로부터도 흠잡힐게 없게 되는 것이다.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합의된 규정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일을 집행하는 일에도 공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규정이라는 것이 너무 구체화될수는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일과 단체를 지도부는 원칙 중심의 지혜(융통성)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리더십은 이와 같은 영역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맥락으로보면 빌리보서 1장과 2장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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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빌립보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과 빌립보서 간의 사적 감정이 도드라지는 편지인데요(1:7,8) 제가 간사 사역 시작할 때 처음설교했던 본문이라 더 반갑습니다.

1. 바울은 왜 감옥에서도 기뻐한다고 했을까?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면서 복음 사역에 장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것 같다.  바울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위축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난다. 오히려 그들은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감당한 것이다. (14절)
때로 아버지의 빈자리 속에서 아들이 강해지는 것처럼, 바울의 제자들은 오히려 위기감 속에서 복음적 야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생각지 못한 소식이 또 하나 있다. 바울을 시기하고 투기하던 무리들도 있었다.(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 진것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사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전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15절)

이들의 동기는 좋지 못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더욱 전파되니 이로 인해 바울이 감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만약 바울이 그들을 경쟁자로 생각했다면 감사가 아니라 불안해하고 시기했을 것이다.

여기에 또하나의 변수가 있다. 바울은 복음 전파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의 가치가 변해있었다.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겨지고 복음이 더 잘 전파되고 있다면 자신이 매여있는 것이나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기꺼이 감사했다.

바울은 자기 중심의 가치는 죽고 그리스도 중심, 복음 중심의 가치로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우리 신앙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나 자신인가 그리스도인가? 나라면 환경이 바뀌면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면 어떤 환경에도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바울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1:6)

2.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27)

 둘째는 대적자들에게 흠잡힐 것이 없이 사는 것이다. (28)

 세째는 위의 두가지를 고난가운데 행하라고 말한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것에 성도의 하나됨이 한 요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툼과 분쟁은 복음적 삶이란 거리가 멀다. 또한 흠잡히지 않도록 자기 자신에게 철저해야 한다. 엄격해야 한다.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에서 말이다.

고난이 위의 두가지를 이루어 가는데 방해가 될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꼭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버리라. 내가 볼 때 유익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우리는 때 힘들때 더 연합하고, 자기자신에게 더 엄격해 지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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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전에 없던 새로운 공동체였기에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교회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져 함께 예배드리며 먹고 마시며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데, 이는 기존의 개념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에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새로운 인류(유대인과 이방인이 결혼하여)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그 후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세상이라는 무리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 그런데 연속적인 측면이 있다. 관심분야로 모이는 동아리 모임은 그렇다고 쳐도 성도라고 해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들이 있다. 그것은 부부 관계며, 부모와 자식 관계며, 직장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다. 이런관계는 이 땅을 사는 한, 쉽게 끊을 수 없는 관계들이다. 그럼 이와 같은 관계들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관으로 행동해야 할 것인가?

1. 바울은 기존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부부간의 관계도, 부모 자식의 관계도, 주인이나 종으로 역할에 대한 관계도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앙을 위해 이와 같은 관계들을 끊어야 할 직접적인 이유는 없는 것다.

   주목할 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기회가 있다면 자유인이 되라고 말씀한 것을 봐서는 신분에 종속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주인과 종으로 이루어진 그 당시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는 노예 제도에 대한 인정이라기 보다, 제도적인 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는 것에 있어서는 전혀 차별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8절) 주인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것도 없고 종이라고 불리한 것도 없다. 성경은 사실 제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종은 자신의 일에 불성실하고 눈가림으로만 함으로 죄를 범할 수 있고, 주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남용하여 함부러 종을 위협함으로 죄를 범할 수 있다. 이것을 서로 조심해야 한다.

2.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야하나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하나만 봐야 한다.
    자녀는 자녀를 향해 주시는 명령만 보고 순종해야지, 부모를 향해서 왜 자녀를 노엽게 하냐고 따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내 대사가 아니다. 부모도 마찬가지로 자녀를 향해 왜순종하고 공경하지 않느냐고 성경 책을 코 앞에 들이대고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역할만 내가 잘하고 있는 가보고,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너나 잘 하세요'는 이영애의 대사이지 우리가 서로에게 할 말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나는 잘하고 있는가?'라는 자기 문답이 있을 뿐이다.

 

3. 마지막 마귀를 대적하라는 바울의 요청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된 교회를 깨뜨리려는 것이 마귀의 계략이며 그 일은 아담때부터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것일게다(4:3)

육체적인 노력만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 없다. 철저한 영적 전신갑주를 입고 준비해야지만 그나마 너머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13절)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10-17절)
그리고 이를 위해 깨어있기를 위한 기도(18절)
여러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18절)

이상으로 에베소서를 마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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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라는 몸통의 한 지체로 부름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과 신비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왔다. 하나님의 풍성한 계획은 성도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거룩한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고, 그 일원들이 세상의 방식과 다른 방식의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점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은 이것을 잘 이해 하지 못하고 구원을 개인의 구원, 개인의 거룩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런 것이 아니다. 성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이전에 속했던 세상(이라는 세속 공동체)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동체와 나라가 변경되었으니 삶의 가치도 질서도 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 속한 몸이 되었으니, 세상(더러움)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장에서 바울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특히, 5:3-5의 말씀) 이런 세속적 가치를 가지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우리가 세상에 속한 몸이라는 것을 밝혀 주려고 쓴 글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인데 어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처럼 살아가려 하는가? 그렇게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지 않은가?(5절) 그런데 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뒤따라 간단 말인가?

7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11절. 너희는 열매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비추이시리라

세상의 공동체를 떠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민가는 것이 성도로의 부르심이다. 당연히 법도 질서도 다라진다. 그런데 이전에 있던 것을 여전히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직 어둠 속에 잠자는 것과 같은 것이고, 지혜가 부족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차리고 깨어나고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적용의 영역이 바로 부부간의 관계다.

부부라는 관계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형성되는 관계로 가서는 안된다. 사랑과 복종이란 질서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결혼이란 제도는 교회에도 있고, 세상에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는 두 공동체 모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제도를 이루어가는 가치는 차이가 있다. 교회 에서의 결혼은 사랑과 복종이다. 이것이 선한 열매를 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며,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게까지 자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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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이방인이 결혼하여 새롭게 한 몸을 이룬 것이 교회라면, 이제는 그 한 몸됨을 어떻게 유지해 가야할 것인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하나인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3-6)

몸도 하나, 성령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주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

성도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에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주신 것은 그 한 몸을 온전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성장하도록 모든 지체는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 유기체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11-16절) 

옛 사람의 모습은 벗어버려야 한다. 그 때는 이런 영적 내용을 모르는 무지와 무감각과 무생명의 상태였다.(18절)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비밀을 들러내셨으므로 우리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홀로 라고 생각하여 방임하고 방탕하게 살아왔던 개인화된 의식에서 나와야 한다.(자기의 죄는 자신의 죄뿐 아니라 몸 전체를 부정케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 속에서 교회의 성도인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25-32절)

 (1) 이웃에게 대하여 거짓증거는 안된다.(율법9항)
     한 몸이 서로에게 대해 다른 증언을 한다는 것은 정신 분열 현상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한 몸이라면, 서로에게 거짓 증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2) 싸우더라도 원수는 되지마라.(26,27)
     분을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분을 씨앗으로 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분을 오래도록 가게 해서는 안된다. 해가 지기전에 분을 다스려야 한다.(가인은 이것을 다스리지 못해 죄를 지었다.) 분을 쌓아두는 것은 마귀가 역사하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싸울수는 있으나 원수가 되도록은 하지 말라. 

  (3) 재정적 피해 주지마라.(28)
     다른 사람에게 재정적인 피해를 주지 말라. 다른 사람의 것을 어떻게든지 나를 위해 쓰도록 무리수를 두지 말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 것을 가난한 자를 위해 줄 수는 없을까 생각하고 행하라.

  (4) 말을 조심하고, 덕과 은혜가 되게 하라.
      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한다. 더러운 말을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배려하고 말하고 겸손하게 말해도 실수가 있는 법이다. 말을 아끼고 덕과 은혜가 되도록 표현하기에 힘써야 한다.

 (5) 신앙생활을 잘 해라.
     하나님의 성령이 근심하지 않도록 신앙 생활을 잘하라. 주변 성도들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내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너무 오랫동안 방황하지 말고,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지 말고... 그래서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6) 모든 악의에 근거한 것들을 버리고 서로 용서해라.(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한것 처럼)
     악의적인 생각과 행동은 버리고, 서로에게 용서해야 한다. 용서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몇 번까지, 얼마나 큰 죄까지 용서해 줄 수 있는가에 감탄하는 베드로와 같은 자가 되지 말고,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자인가를 기억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이 요청하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요구의 내용은 개인적인 경건이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체,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이루시며, 그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실 교회의 한 지체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하는 관계적인 권면이라는 초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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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에베소서에서는 바울이 묘한 표현을 많이 쓴다. 예를 들면

은혜의 경륜(2), 계시(3), 그리스도의 비밀(4),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만 알리시고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알리지 아니하심(5)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9)...

신비주의 전략은 아닐텐데.
암튼 하나님 속에는 있었지만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감추어졌던 것이다.(9,5절) 우리는 뭔가 신비한 정보를 바울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내용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6절의 말씀처럼 이방인들도 예수 안에서 복음(믿음)으로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도행전을 봐도, 갈라디아서를 봐도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과정없이(할례) 교회의 성도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놀라고 당황해하고 반대하는지 알 수 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을 종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남편이나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란 유대인과 이방인이 결혼하여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하고(엡2장)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지체요, 상속자요 약속에 참여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의 사명이란, 바울이 받은 사명(이 놀라운 신비를 전하는 사명. 당신도 이제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며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을 증거함으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9,10절)

14-21절까지 나오는 바울의 기도는 그와 같은 지혜와 그것을 이루시는 사랑의 풍성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뭔가 남아 있을 신비와 비밀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그 내용이 유대인들에게는(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신비와 비밀에 속했다고 여겨질 만큼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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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남남이던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중매로 가까워졌다?)
15절. ..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는 말씀?)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에는 남남이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이루게 한 곳이 바로 교회다. 이들은 둘 다 차별없는 하나님의 권속이다. 이것이 영적 비밀이고 신비다.

남녀의 결혼이 단순한 두 사람의 결속이 아닌 한 몸인 것이 신비로운 영적 사실인것처럼 우리는 서로 별개의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연합체) 사실 서로가 결혼한 사람처럼 연합되어 새로운 한 사람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존재(분리될 수 없는)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는 지역 교회가 아닌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에 성도가 새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단순히 회원이 한 명 는다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피곤해 진다는 의미도 된다.(그래서 아무나 받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우리는 자기 희생적 각오와 결단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희생없는 결혼생활로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기존 신자들의 자기 희생없는 새신자의 유입은 오히려 많은 갈등과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회원이 한 명 는다는 것이 나와 큰 관계없는 사람이 한 명 더 들어옴으로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 더 커지고 그로 인해 힘을 가지며 그 혜택을 내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관점으로 교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성도들 간의 관계를 결혼을 통한 새 사람됨의 관점으로 본다면 교회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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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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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은 대략 4 덩어리로 보렵니다. 인사말(1-2), 바울의 감탄(3-14), 바울의 기도(15-19), 바울의 교회에 대한 설명(20-23). 이정도로.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해 가면서 교회의 의미를 깨닫고는 매우 놀란듯 합니다.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는 것이 이런 것이란 말이가! 그리고 그가 감탄하며 쏟아낸 단어들은 완전함과 풍성함을 의미하는 단어들이다.

하늘에 속한(3) 신령한 복(3), 창세 전(4),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4),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7),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8), 때가 찬 경륜(9),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10),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13)

교회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리하면 23절의 표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회로 존재하는 우리는 왜 날마다 교회의 빈곤함을 보고 듣는가? 이유를 두가지로 추려보면

첫째, 성도인 우리가 이미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이면서도 아직 완성된 성도가 아닌 것처럼, 교회는 그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아직 완성된 상태에 있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잘 못해서만 완성된 의인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때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현 교회의 불완전성은 교회 스스로의 부족함도 있지만, 때가 차기까지 그 불완전함 속에서 겪어야 할 성도들의 고난(갈등?)이 남아 있는 것이며, 그 과정은 교회가 거쳐가야 할 과정이다. 따라서 부정하고 훼피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성도들이 성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는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원리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가 우리가 보이는대로 흘러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요셉의 역사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흘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르게 흘렀다.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에서의 원리가 있었고, 그 원리는 한참 지난 뒤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와 같은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교회의 보이는 것(어리석음과 불완전함)이 참 교회의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다. 성도들의 마음 눈을 밝혀서 교회의 풍요와 능력을, 그리고 그런 계획을 그의 뜻대로 진행하실 하나님을 알도록 말이다.(17-19)

성도인 우리의 꿈과 비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성공을 기도하면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건강을 기도하면 우리는 우리 몸으로 죄를 더 지을 수도 있다.
명예를 기도하면 우리는 교만에 빠질 수도 있다.
안정을 기도하면 우리는 안일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완전함, 충만함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이루어질 기도이며 변질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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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에 가서 느끼는 것은 바울이 당한 고난은 육체적인 것을 넘어 치열하게 반대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던 흔적들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싸움과 논쟁 속에서 바울이 확실히 믿었던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바울이 목숨을 걸로라도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집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에게 감사합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은 당신들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거나 흥미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감사합니다. 당신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이 선명하게 무엇인지 우리의 것으로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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