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바울, 율법과 복음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다.

갈 4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인정하면서도, 율법의 임시적인 한계성을 지적한다. 우리가 자유자의 자녀 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될때까지 후견인의 지도를 받는 것처럼 율법도 우리에게 임시적으로 필요한(그래서 율법 아래에 어느 정도 있게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우리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약속받은 자녀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인(3:29) 우리를 다시 율법의 종되는 자리로 이끌려하니(4:9)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_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뭔가 있는 것같다는 생각에 이전의 복음(바울이 전한)보다 더 입맛에 맞는다 생각하여 많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내용으로 넘어가니 바울은 답답할 뿐이다.

이제 바울은 지금의 이 상황이 사라와 하갈의 잘 알려진 구약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알레고리 해석을 감행한다.

1. 하갈는 종이고, 하갈이 아브라함을 통해 난 이스마엘은 종의 자녀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따르는 것은 종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2. 종의 자녀였던 이스마엘이 나중에 자유자의 아들(사라의 아들, 이삭)을 놀린 것(박해한 것)처럼 율법은 약속의 자녀인 우리들을 놀리고 박해한다.(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종의 자녀인 이스마을을 내보내 아브라함의 유업(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다시 성도들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헛될 것이고, 만약 그들을 가르침을 따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업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바울은 논리적인 측면에서도, 그 논리가 우리의 개념 속에 쉽게 안착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참 부럽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바울의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 바울은 사도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간섭으로 오류없이 성경의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기에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도 하나님의 명확한 통제 아래 있다고 보기에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임의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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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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