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가 역시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단락별로 정리는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가면서 하는 것은 쉽지 않네요. 그래서 다른 성경에 비해서 제 개인적인 해설(주관적일수 있는)이 많이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해설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처음부터 정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일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약 60점 이상만 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야 나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큰 테두리(정통교리)에서 어긋나지 않는 정도 선에서 해설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하는 것]

1. 요한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1)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가 아니라, 죄를 행하고도 죄로 알지 못하는 상황(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행하는 상황. 1:6)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왜냐하면 1,2절에서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과 대언자이신 예수님이 있음을 강조함.
  3) 그와 같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무감각하게) 율법을 어길 수 있는가? 그 분이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려고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죄를 짓지 않는 경향성으로 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2.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 새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다.
  2)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3)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너희에게 이런 빛이 있으니 깨달으라)
  4) 너희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12절)/ 하나님을 알고, 악한 자를 이기었다.
  5) 세상의 가치관(어두움에 빠뜨리는)을 사랑하지 말고, 따르지 말라.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3.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니 그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 
  1) 그들은 우리 안에서 나간 자이나,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그들은 처음부터 한 몸이 아니었기에 결국은 나간 것이다.)
  2) 이들은...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다.
   (2)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부인하기에 하나님의 아버지 됨도 부인하는 자들이다.
  3) 너희는...
   (1) 처음부터 들은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
   (2) 처음에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 또 다른 (영지주의적?)가르침이 필요 없다.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의 중심 흐름과 관전 포이트 중심으로 재정리하는 것]

우선 요한의 글이 적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중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18-29절) 이들은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이고, 그 안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배운(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또 다른 지식을 가지고 공동체를 떠났다. 이것은 요한의 공동체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요한의 공동체는 공동체를 떠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가된)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열등한 공동체로 비춰지는 것이다.(떠난 자들은 그렇게 주변에 소문을 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매이고, 도덕에 매이는 것은 무지한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영지주의자 중에는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기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영혼만 잘 간직하면 된다고 보는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를 행하고 저지른다.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별 구속력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했다.(하나님이 악한 육체 속에 올 수 없다고 보기에) 이런 세속적인 가르침이 이들 가운데 들어가 결국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그와 같은 논리로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이들과 이들의 거짓된 미혹에 현혹된 자들을 경계하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성도란, 죄인된 자신의 죄를 위해서 대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새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다.(비록 온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런 의식조차 없는 자는 참된 성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지적 교만은 복음에서부터 이탈하게 만든다.

  교회 안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은 처음에 복음을 새로운 지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인과응보적 가치관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아들 예수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가르칠 때, 그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지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추구를 버리지 못했고 도를 넘었다. 예수의 복음에서 세속적인 영지주의 가치관으로 결합한 또 다른 가르침으로 발전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했다.

  만행이란 책을 썼던 현각 스님은 미국의 하버드를 졸업했고, 카톨릭 집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불교에 접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런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불교가 기독교적인 진리를 넘어서 더 본질적이고, 더 근원적이며 더 진리에 가깝다는 인식을 준다. 서양에서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에 심취하고 있는 흐름을 볼 때 또한 그와 같은 인식을 준다.

 

2.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진리를 전해주는 중심의 문제다. 그 진리가 근거하고 있는 중심의 문제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할 것인지 아니면 인격적 절대자(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에 근거할 것인지의 문제다.

  적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내용을 세상의 것으로 대치하거나, 그것에 세상적인 어떤 것을 첨가해서 더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복음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에 복음은 부끄럽지 않다.(복음으로 충분하다). 롬 1:16-17.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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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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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 선교회는 중세 시대 '종교개혁의 샛별'로 인정된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위클리프는 당시 라틴어 성경(벌게이트)만 공인되던 시대에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320년대 잉글랜드 북부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과 자연과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탁월한 학생이자 연사였던 그는 교사가 되었다가 나중에 설교자가 되었고, 결국에는 애국자요 개혁가로서 정치에 관여하기에 이르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권력과 풍요로움에 의해 타락하게 된 경위를 생각할 수록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팸플릿과 책자를 쓰기 시작했다.

위클리프는 중세 교회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롤라드(Lollard)라고 불리우는 순회 설교자들을 파송했다. 이들은 길고 검은 예복을 입고 맨발로 둘씩 짝지어 다니면서 복음과 경건한 삶과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전하곤 했다. 교회는 롤라드를 이단으로 천명하고 화형을 가하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보기를 원했고, 라틴어 신양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했다.(이미 당시 프랑스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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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는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1384년 12월 31일에 죽었다. 1415년에 열린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목이 곧은 이단'으로 선포하면서 그의 책을 불태우라고 포고를 내렸고, 그로부터 13년 후에는 교황 마르틴 5세의 명령에 따라 위클리프의 뼈를 파내 불에 태우고 그 재를 잉글랜드의 스위프트 강에 뿌리는 일이 있었다.

1408년에는 켄터베리에서 대주교 아룬델의 이름으로 이런 포고문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텍스트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존 위클리프의 시대나 그 후에 만든 그런 책이나 팸플릿이나 책자를 읽어서도 안된다 ... 그럴 경우에는 전술한 번역판이 감독의 승인을 받기까지는 더 큰 출교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영어는 야만적인 언어라서 문법적인 구조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아 성경의 심오하고 미묘한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1408년에는 위클리프 번역판을 읽으면 출교를 당한다는 포고문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널리 유포되었고 '위클리프 성경책들'의 사본이나 일부가 지금도 수백 권이나 남아 있다. 이 책들은 규모와 모양과 체제가 각양각색이다.

....

위클리프 성경에 속한 책들이 모두 정교한 것은 아니다. 한 칼럼에다 텍스트를 기록한 경우도 많은데, 이는 위클리프파에 속한 순회 설교자들이 휴대하기 쉽게 만든 것들이다. 가령, 미국 성서공회의 도서관에 있는 한 사본은 12.5cm x 18.4cm 정도이다. 포켓용으로 만든 이런 책에는 요한복음,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서신, 유다서, 계시록의 1-4장과 1/2장밖에 들어 있지 않다. ...

14세기의 한 역사가는 성경을 통속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을 경멸하면서 위클리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성직자와 학자들에게 주신 복음서를 번역하여... 이로 말미암아 성경이 저속하게 되었고, 유식하고 지성적인 성직자보다 오히려 글을 읽을 줄 아는 평신도 남녀가 더 접근하기 쉽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주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돼지의 발밑에 짓밟히고 말았다."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스톤 저, 포이에마, p109~111,122)

[생각]

1. 성경은 그 형태(번역)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 언어의 체계가 정교함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최대한 번역하여 누구나가 성경의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 번역 사역의 중요성은 선교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2. 당시 영어는 라틴어에 비해서는 미개한 언어였다.

미개하다는 것은 그 표현에 있어서 정교하고 정확하지 못하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번역되어야 하며, 그런 제한성을 가지고 번역된 성경을 통해서라도 복음은 분명하게 증거된다. 복음은 명확하고 단순하여 믿는 모든 자에게 생명을 준다.

작은 오류를 두려워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루터도 독일어로 번역할 때 발생할 문제를 알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정확하게 들을 사람이 더 많다고 확신했기에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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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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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를 지나 이제 요한일서로 들어와봅니다. 요한일서를 하지 말고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 볼까 하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가 좀 정리하기가 난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흠없이 잘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거칠겠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시작한 일이니... 좀 부족하더라도 용기내어 해보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큰 흐름 속에서 건지는 것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ㅋ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문단을 나누어 잘 정돈하며 정리해 봅니다. ]

1.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해서, 그리고 너희에게 전하는 이유(1-4절)
  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다.
  3) 우리가 이렇게 전하는 것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사귐이 있게 함이다.(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2.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5-10절)
  1) 하나님은 곧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는 행하지 않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1)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2)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이것은 어둠에 행하는 것이다)
   (1)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빛이 없는 것을 말한다.)
  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1)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4)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토대로 하나의 매끄러운 흐름으로 연결해 가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신이 받은 것과 전하는 것이 매우 확실한 것임을 확신하며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받는 자와의 사귐(연합)을 확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생명의 말씀인 예수를 전한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행위이니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됨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오랫동안 묵었던 하나의 오해를 풀며.

 

위의 논리라면 우리가 요한일서에서 가지는 오해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이 내용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자연스럽게 <구원을 받았는데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으로 해석했고 그것은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5절)으로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을 하고도 삶에 있어서 여전히 죄된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불안케 하는 구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부터 성도들은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죄를 고백하면 오히려 죄사함을 받는다는 명백한 복음적 메시지가 나오고), 오히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지니(10절) 이로 볼 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이라는 구절은 <예수를 믿고도 죄를 범한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어둠에 행한다면>을 <죄를 범한다면>이 아니라,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다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런 상호관계(이것인 하나님과의 사귐의 근거이면서 핵심이다)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죄가 없다>(8절)고 말하는 <어둠에 행하는 행위_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어둠>(6절)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성도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이란, 성도가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예수의 피로 말미암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죄사함을 믿고, 성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은 그 죄인을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통해 다시 품으시는 긴밀한 사귐이 존재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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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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