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별 성경묵상을 했던 것 중 요한 일서 3장을 참고 하세요.

또한 교리적이냐 교육적이냐에 따라서 본문에 대한 접근도 달라져야 합니다.

hunmill.tistory.com/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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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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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 지난 주에 이어 요한일서 3장을 정리해 봅니다. 양극단적 표현으로 가득한 요한일서 3장을 대하면 늘 불편했는데(어떻게 해석하고, 우리의 형편에 해석을 끼워 맞추는 것 같아서...) 그런 불편함이 아직 없지는 않지만, 당시의 배경과 상황 그리고 요한일서를 읽는 독자들이 누구일까하는 질문과 함께 읽어간다면 좀 더 이해가 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한마디로 요한일서는 교리를 위한 책이기 보다는 목회적 차원에서 교육과 권면을 위한 책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관점이 맞다면, 요한일서의 내용을 가지고 단순하게 문자적인 문구로 교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과정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시도해 봅니다.

[정리1. 내용정리]


1. 우리가 아버지께 어떠한 사랑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는가? 우리가 알지 않는가?
  1)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미완성된 모습으로서의 자녀) 그러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다.
  2) 주를 향하여 이런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절)
  3)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다. 그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도 안다.
  4) 그 안에 거하는 자라면, 그분의 의도와 그분과 같이 범죄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6절)

2.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1)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 그러니 어느 죄까지 지어도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랑 하지도 말라.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은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죄를 지을 구상에 전렴하거나, 그것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 짓는 자신의 모습에 자책하고 마음아파 한다)
  3) 형제를 사랑하라. 이는 처음부터(구약의 율법부터) 들었던 말씀이고 지금도 유효한 계명이다.
   :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12절)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아우를 죽이지 않았는가?

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14절)
  1)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속에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2)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듯이,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미워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4. 자녀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1) 재물을 가지고 있는 자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겠는가?
  2) 우리가 사랑함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기에 (위로를 얻고)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이 기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5.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 정리해 보면
  1)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2)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다.
  3)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한다.(24절)
  4)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정리2. 재정리. 큰 흐름과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 가면서 작성해 봄]

요한의 표현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지금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둘 수 있는 가장 넓은 경계선 상에 있는 자를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못 지키는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 오히려 폐기된 것을 옳다고 여기는 자들로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리까지 나간 자들이며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가르침으로 성도를 미혹하는 자들이다. 위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교회에 많은 성도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이들을 품고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가르고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렇게 때문에 더 이분화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중간하게 경계선 상에서 오락가락 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고 안쪽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좀 더 표현이 극단적이고 엄격하다고 보여진다.(이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교육적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인 성도들의 약함과 불완전에 대한 권면으로 생각하여 오해하기 쉽다. 그 대상과 입장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이와 같은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극단적인 표현을 한 것이며,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미워해도 될만한 정당성을 가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우리는 성경만 가르친다(문자주의)는 말에 속지 말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경전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 신적 말씀으로 모두를 받아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지만, 그 문자라는 것은 어떤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서 표현되었는지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요한일서 3장은 극단적인 표현이 많다. 문자대로만 해석해야 한다면, 우리가 참 구원받은 성도라면, 죄를 지어서는 안되고 형제를 미워해서도 안된다. 만약 우리가 죄를 하나라도 행하거나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앞으로라도 행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요한은 독자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2:1)고 말한다.(역으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범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요한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오히려 범죄하지 아니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문제가 있다고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9-10)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표현적인 차이를 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해석은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자칫 매우 성경적인것처럼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실제적 내용은 무시하는 해석을 하게 된다. (많은 이단들이 이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 목사님은 성경만 가르친다. 성경을 성경으로만 푼다는 식의 자랑은 한 번 생각해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2. 교육적인 의도인가 교리적인 의도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또 잘 살펴야 할 것은 이 글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글인지 아니면 교육적(또는 목회적)인 목적으로 쓴 글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위해서 또는 목양적 차원을 위해서 때로는 강조하기도 하고, 다른 부분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는 교육이라는 측면, 목양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가능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교리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된다.

  난 요한일서의 내용이 교리적 표현 이라기 보다는 교육적(목양을 위해) 표현이라고 본다. 그래서 극단적인 이분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교리로 풀어가려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성경의 해석 원리 중 하나는 불명확한 것은 명확한 것으로 해석하라는 원리가 있다. 로마서를 비롯한 성경의 다양한 교리를 다루는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교리와 요한일서에 말하고 있는 표현이 다를 경우에는 무엇을 근거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요한일서의 내용을 근거로 다른 모든 내용들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을 기초로 해서 요한 일서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경우 요한 일서는 교리가 아닌, 교육적 차원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것이다. 목회적인 목적을 위해서 극단적 표현을 쓴 강조라고 보는 것이다. 그릇된 가르침을 가지고 교인을 미혹하는 이단적 집단을 향해 경고하고, 더 이상 그들과의 교류를 금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선'을 명확하게 그어주는 목회적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해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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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이르러서야 학자들은 어느 텍스트가 '최상'인지에 관해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즉, 편집인이 생각하기에 어느 텍스트가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를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1831년 독일 학자인 칼 라흐만은 일부 사본은 수용하고 일분 사본은 부정하는 가운데 최초로 신약성경의 '비평 텍스트'를 출판했다. 몇 년 뒤에는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발견한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도 똑같은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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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약성경 텍스트가 최상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1901년에 프레데릭 케이언이 한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서로 경쟁을 벌이는 텍스트 유형 간의 차이점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교리의 문제는 어느 텍스트가 정확한지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는 스테파누스의 텍스트에 표현된 만큼이나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텍스트에도 표현되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에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현재 과거에 킹 제임스 성경 번역가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킹 제임스 버전이 대체로 믿을만하다는 점을 의문시하는 것은 아니다. ... 이런 차이점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복음서 기사나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역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저, 포이에마, p141.

참고로, 현존하는 신약성경의 사본은 5,500개가 넘는다.

신약 말고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본문은 마조레트(각 단어와 글자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던 유대인 학자)들이 보존했고, 교황 다마수스는 기존의 옛 라틴어 텍스트들이 서로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롬에게 정확한 라틴어 성경 번역판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히브리어 구약과 라틴어 성경은 정확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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