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에는 성경의 사본을 아름답게 꾸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서체와 그림을 통해 사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보존되어 있는 사본 중 가장 아름다운 서체라고 평가 받고 있는 것은 <켈즈 사본>이라고 합니다.

 

신앙심이 예술의 경지에 까지 이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켈즈 사본은 가장 아름다운 중세의 예술품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의 한 부분이고, 그 예술은 복음서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의 그림에 나온 페이지는 마태복음 24장 19-24절이다. 각 절의 첫 글자를 문양모양으로 그린 것이다.(잘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켈즈 사본은 라틴어로 된 네 복음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주후 800년경에 스코트랜드의 서해안에 위치한 아이오나 섬에 있는, 성 콜럼바가 세운 한 수도원에서 만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바이킹의 침략을 받아 수도사들이 켈즈에 있는 아일랜드 사원으로 도망가서 그 책을 완성했다. 1006년에 두달 동안 도둑을 맞은 적이 있어고, 그 때 표지와 몇 페이지를 잃게 되었으며, 1661년에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 기증되어 지금까지 진열되어 있다.

켈즈 사본의 필체는 최상급에 속하고 그 장식 또한 훌륭하기 그지없다.

"거의 각 페이지마다 다른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가 등장한다... 훌륭한 장인기술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지 모르겠다. 그것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라. 그리하면 예술의 전당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당신은 그토록 복작하고 섬세하고 미묘한 디자인, 수많은 장식 매듭과 고리, 너무도 생생하고 참신한 색채를 파악하게 되어 그것을 인간이 아닌 천사의 작품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2세기 웨일즈의 성직자요 역사가였던 제럴드가 했던 표현인데, 아마 켈즈 사본을 묘사한 대목으로 보인다.

이 사본의 장신은 너무도 복잡다단해서 확대경을 써야 잘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는 물론 확대경이 없던 시대였지만 말이다. 각 복음서의 첫 마디는 너무도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동방과는 달리 서방에서는 미적인 면이 실용적인 면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저, 포이에마, p106-108.

 

[개인적인 생각들]

1. 종교심을 동기로한 것들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이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력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장인으로서의 기술과 더불어 종교적 열정과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창조물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종교심을 읽어버린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과연 역사에 남을 예술과 문화를 생산해 낼지 의심이 간다.

2. 극도의 종교심과 재능은 텍스트를 훼손시킨다. 켈즈 사본은 최고의 서체로 인정받는다. 너무 정성을 들이고 꾸민 글씨는 본래의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도록 만들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열정과 능력이 본래의 텍스트를 감출수 있다는 것을.

  중세는 기독교 사회고, 그것은 과도하게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으로 흐른 사회였다. 성경의 내용을 과도하게 지키려고 하다보니, 평민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흘렀다. 그래서 교회 안으로 성경 이야기를 담은 성화가 텍스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과도한 열심이 텍스트를 감춰버린 것이다.

3. 과도한 종교적 열심과 재능은 예술로 승화되고, 반면 과도한 종교적 열심과 재능은 텍스트를 훼손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예술을 배격하여 텍스트에만 집착하면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하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스톤 저, 포이에마, p83-84.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성경 번역판은 바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역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5세기 초에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게이트('백성의 언어' 혹은 '대중적인 판' 이란 뜻)라고 불리는 번역판이다. 이는 로마 교회가 1500년도 넘게 사용했던 공식 번역판으로서 중세는 물론이고 그후에도 한동안 예술과 문화와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546년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는 오직 '벌게이트'만을 진정한 라틴어 성경 텍스트로 선언했다. 당시는 이미 라틴어가 더 이상 일상어로 사용되지 않던 시기이긴 했지만 말이다.

 

AD 4세기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에 속한 27권이 그리스어와 라틴어 등 여러 언어의 형태로 교회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었다. 라틴어 사본만 해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번역의 문체와 질이 각양각색이었으며, 필사될 때에 텍스트가 변형되기도 했다. 그래서 382년에 이르러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네 복음서의 옛 라틴어 번역판들을 개정하도록 요청했다.

제롬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다마수스가 384년에 죽은 뒤에는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성경 전체를 그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제롬은 70인역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에서 구약 39권을 번역하는 일을 모두 완수했다.

그는 서문에서 외경은 유익한 책이긴 하지만 정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성경 번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외경이 훗날에 만든 벌게이트 번역판들에는 포함되었지만, 이것들은 제롬의 작품이 아니었다.

 

itistory-photo-1

제롬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지 400년이 지난 AD 846년, 그는 대머리 왕 찰스에게 바친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성경 첫 페이지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맨 위의 패널은 제롬이 로마에서 베들레헴으로 항해하여 작품에 대한 대가를 받는 장면이다. 중간 패널은 그가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추종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과 그들이 성경의 사본을 만드는 장면이다. 맨 아래 패널은 제롬이 라틴어 성경을 수도사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이 그것을 교회로 가져가는 장면이다. 찰스 왕에게 바친 비비안 성경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위의 책, p72,73. 책에 있는 그림을 핸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여름 사역이 한창 진행하는 상황이고, 아이들은 방학인 상황이라 공휴일이라는 생각도 크게 없는 날이네요. 오늘은 아무도 없는 교회 교역자실로 느즈막히 출근해서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장을 정리해 봅니다. 베드로서의 서신은 바울의 서신과는 다른 맛이 있네요.^^ 우리는 너무 바울의 서신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야고보서도 베드로서도... 우리의 신앙에서 바울이 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제공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조용한 공간, 조용한 시간 또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알아가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흐름과 연관성입니다.]

1.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를 써서라도 이들에게 알리고 생각나게 하기를 원했던 것

  1)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구주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다.

    (1) 먼저,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한다:

     : 주의 재림하신 다는 약속이 어디 성취가 되냐? 봐라. 늘 창조 때와 같은 상황 아니냐?

    (2) 아니다. 이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을 간과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 당시(노아) 세상은 물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것 같이, 동일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은 불 사르기 위하여 지금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심판 보류중)

  2)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분이시다.

    (1) 하나님의 심판이 더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빠르게 임할 것이다.(도둑처럼)

    (2) 다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에 보류하신다.

    (3) 그러나 하나님의 날은 도둑같이 오게 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이 풀어지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a.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

 

2.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니... 이렇게 살아라.

  1)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2)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급하게 심판하지 않고 더디하심을)

     : 베드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도 그와 같은 내용을 너희들에게 썼다. 그의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진 자들이 있다.

  3) 이제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4)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큰 흐름으로 내 논리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내 논리로 정리한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지 내용을 주관적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신약의 사도들의 명한 것 속에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종말에 대해서 거짓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자들은 앞으로는 심판이 없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니 삶은 느슨해지고, 도덕은 약해지며 점점 방탕한 자리로 나아가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성도들에게 솔깃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금 심판을 보류하고 있는 것이지, 앞으로의 세상은 전에 물로 심판에 이른 것처럼 불로 심판을 받기 위해서 보존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어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판은 도둑처럼 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미혹하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알아가는 자리에서 자라가야 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세상에 심판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심판이 없는 것처럼 느꼈다. 악인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더욱 인정받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오랜 관찰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은 판단한다. 심판은 없다. 심판이 있다면 이럴수가 없다. 그렇다면 의를 행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런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이면서, 동시에 교회 안에서 몇 몇 성경구절을 그릇된 입장에서 사사로이 해석하여 마치 성경에도 주님의 심판이 없다거나 혹은 이미 주의 재림이 지나갔다는 식의 해석을 가함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아마 바울이 쓴 서신을 근거로 그런 논리를 펴지 않았는가 싶다.) 그것이 교회에 큰 문제가 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베드로는 편지를 쓰지 않았나 싶다.

  베드로는 말한다. 더딘 것이라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딘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더딘 것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디면 그리고 장시간 그 사인조차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없는 것으로 해야 삶이 편해지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혹 심판이 있는가하여 긴장하였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방종으로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심판의 더딤은 참과 거짓을 가르는 하나님의 방편인지 모르겠다. 더딤을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마음껏 살고자 하는 자와 더디지만 심판이 있음을 믿고 단정히 행하는 자를 가르기 위한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다.

 

2. 심판이 남아있다고 믿는 다면 우리는 거룩한 행실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법한 삶으로 미혹되어서는 안된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이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와 자비로 시작되는 것이므로 법(행한대로 갚는다는 논리)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구원의 자리로 들어온 다음에 바로 의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풀어지고 밝혀지는 순간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삶에 대한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경건이다. 그런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불경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시작은 은혜와 자비(무법)에 의해서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생명은 행한대로 판단하신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법)임을 알고 경건한 태도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문제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3. 바울 신학에만 익숙해진 우리가 야고보나 베드로 사도의 신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균형있는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고, 교회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겠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