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한 장]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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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박국의 호소와 토로


  1)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겠습니까?

: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십니까?


  2)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고,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 지금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3) 여호와께서 악에 대해서 심판하지 아니하시니까.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진것 아닙니까!


  * 세상에 하나님에게 이와 같이 따져 묻다니. 간략하게 하면, 하나님이 할일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지금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박국의 도발적인 표현까지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안에 포함시키셨다.


3. 하나님의 답변


  1) 너희의 생전에 한 가지 놀라고 믿지 못한 일을 내가 하겠다. 

  2) 사납고 성급한 백성이 넓은 땅을 다니며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약탈할텐데 그들은 갈대아인(신바벨론)들이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강하다. 

  3)그들은 파죽지세로 이 땅을 점령해 갈 것이다. 

  4)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급하고 빠르게 죄를 행할 것이다. 


  * 하박국의 역사적 배경은 신바벨론이 앗수르를 멸망시킨 주전 612년으로 보는데, 이는 갈대아인들이 강력하게 약탈할 것에 대한 언급(6절)에 기초한 생각이다. 


4. 하박국이 다시 호소하다. 


  1)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두신 것이 아닙니까?

  2)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고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3) 그런데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4)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바다의 고기처럼, 벌레처럼 이방이들에게 잡히도록 방치하셨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잡고 기뻐하도록 왜 놔 두셨습니까? 

  5) 그들은 투망한 그물 앞에서 분향하고, 자신의 능력을 신격화하며 떨고 있는 또 다른 고기들을 잡아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려 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 바벨론의 어부가 고기잡듯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잡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너무나 무력한 나라들을 보고 너무 악하지만 강력하여 막을 수 없는 바벨론에 대해서, 도대체 저런 괴물을 왜 통제하지 않고 막지 않으시는지 하나님께 따지고 있다. 하나님의 옳으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하박국


하박국 1장을 읽어보면, 하박국 선지자의 토로가 쏟아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도대체 하나님은 뭘하고 계시냐는 힐난이다. 바벨론이라는 괴물이 주변의 약한 나라를 쑥대밭을 만들고 심지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스라엘까지 능욕하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시냐며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해서 질책(?)하고 있는 하박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읽고 있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록 하박국이 좀 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용은 옳다 치더라도 표현에 문제가 있어보인다. 불경죄로 고소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싶다. 


2. 하박국의 고소까지 성경 안에 집어 넣으시는 하나님.


불경하기까지 한 하박국의 하나님에 대한 힐난이 고스란히 성경에 들어가 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정책이 문제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인데, 게다가 어떻게 보면 국정을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있는 건방진 질문인데, 그 내용이 고스란히 성경 안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대대로 읽도록, 아니 영원히 읽혀지도록 정경 안에 집어 넣으셨다. 


도대체 하나님이란 통치자는 어떤 분이란 말인가!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글이라도, 단순한 비아냥거림이 아니라면 기꺼이 수용하고 듣고 답해주고 있는 전 우주의 창조자는 그 크기가 얼마인가! 하박국의 입을 틀어 막거나, 고소하지 않고 혹은 그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대로 떠들도록 허락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난 저절로 존경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3. 하나님도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 뿐이겠는가? 한 집안을 꾸려가야하는 가장도 모든 일을 아이들에게 다 나눌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것은 설명할 수 없지만, 해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나 왕은 말못할 사정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보면 오해를 사기도 하고, 억지같은 말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입을 틀어 막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인 피드백일지언정, 때로는 조롱에 가득한 말일지언정 말이다. 대통령도 사람인지라 불편한 심정을 신중하게 토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법과 제도로, 검찰을 동원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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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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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치기 위해서 올라왔다. 

 

  1) 힘을 다해서 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라.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 니느웨의 멸망을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니느웨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니느웨의 심판은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 치열한 전쟁의 모습(병사들의 싸우는 모습, 병거들의 움직임들)을 묘사하면서, 결국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왕후는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감으로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장면을 묘사한다. 



2. 하나님이 니느웨를 대적함으로 말미암은 니느웨의 형편. 


  1)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곳 같은 곳인데, 이제는 모두 도망하니 서라고 해도 돌아보는 자가 없다. 

  2) 그 무궁히도 많았던 은과 금은 노략당했다. 

  3) 니느웨가 완전히 공허하고 황폐하게 되었더니 주변 사람들이 이 모습에 놀라고 떠는 모습을 묘사한다. 

        -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다.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4) 전에는 니느웨과 숫사자와 암사자처럼 자신의 굴에 먹을 것을 많이 채워넣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전혀 그렇지 못함을 말한다. 니느웨가 더 이상 사자이지 못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5)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대적이 되시어 병거를 불사르고,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니느웨가 이와 같이 멸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대적하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묵상 한 모금]


1. 거대하고 강한 나라 앗수르(니느웨)라도 영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나라가 홀연히 망하게 되어 완전한 약탈을 당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 땅에 영원한 나라는 없다. 영원히 강대한 나라도 없다. 세계 역사는 제국이라 하더라도 흥망성쇠가 있음을 보여준다. 앗수르는 젊은 사자처럼 강했고, 아무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그런데 그 나라도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 영원한 왕조, 영원한 왕조는 없다. 마지막을 생각해야 한다. 멸망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멸망을 받아들이고 대비해야 한다. 멸망하지 않겠다고 무리하게 잔혹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자는 다음 권력에 의해서 더욱 비참한 종말을 기하게 될 것이다. 끝을 생각하지 않은 정권처럼, 무모한 정권도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2. 제국은 망함은 단순히 자연적 멸망은 아니다. 시대적 흐름만도 아니다. 역사적 숙명만으로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앗수르의 멸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대적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이며,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영적인 면에서, 신학적인 면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만 생각해서도 안된다. 한 나라, 한 제국, 한 시대를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사라져버린게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영토를 넘어 온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나고 밝혀지게 된 것이다. 크신 하나님.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일상의 작은 일들에 대해서는 기도가 응답되든 그렇지 않든 좀 더 초연해 질 수 있다. 여전히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존경과 경외를 드리면서 말이다. 


이 나라의 지금 모습을 보면, 사방이 막힌듯 답답하다. 출구가 없다. 비상구도 없는 것 같다. 때론 숨죽이고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최선이라는 생각도 든다.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말이다. 미리 용쓰다가 나자빠지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하나님은 크시다. 하나님은 섭리하시고 운행하신다. 믿음은 소망가운데 기다림을 낳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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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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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28편] "주께서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자와 같습니다."라는 표현 속에서 기도하는 성도의 절박함을 봅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핵심은 절박함이 아닙니다.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혹은 악인들과 의인들을 함께 심판하신다면(분별력없는 심판),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의인의 길을 가려고 했던 성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의 의미일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판단을 하신다는 것과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1]


1. 의인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의 심정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을 내려자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절)


2. 악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소서. 우리와 구별하소서.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3절)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4절)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5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절)


3. 여호와는 의인들의 힘과 방패시며 요새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7절)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8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9절)


[정리1]


1. 여호와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덤을 내려가는 자 같습니다.


2. 악인들과 우리를 같이 취급해서는 안됩니다.(그들은 심판하시되 우리는 구원해 주소서!)


3. 악인들은 정말 악한 사람들입니다. 

   :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지만, 마음에는 악독이 있고 그들의 행위가 악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은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4.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여호와는 힘과 방패와 요새이십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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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편]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며,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지금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면, 성경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세요.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기]


1. 기자의 고민: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대적자의 말: 너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2. 기자의 고백과 확신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2)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3)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4)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 기자의 격정

  1)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2)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정리2.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보기]


시편 기자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가 많음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집요한 말은, 너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로서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으며, 너는 회복될 수 없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가 직면한 문제는 영적인 문제로까지 확대하여 생각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


그런 상황에서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와 영광이요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와 같은 확신에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성산에서 응답해 주신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고, 확고하게 붙잡고 계심을 알게 된다. 그러자 지금보다 더 많은 대적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물리적인 힘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더 큰 확신과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편 기자는 구원을 소망하지만,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시간적 모순을 통해서 구원의 확실성을 더욱 강조한다. (구원하소서.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따라서 시편 기자가 소망하는 기도는 불확실한 소망이 아니라, 너무나 확실하지만 다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이다.  



[정리3. 본문에서 주고 있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우리의 근본적인 대적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죄를 짓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과 고독에 직면하게 될 때 그곳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근원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결핍이요 생명의 결핍이다. 곧 구원에 대한 결핍인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대적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할 것을 말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결핍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돈을 주지만, 그 돈으로는 충분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을 주지만 그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끊임없이 <더> 추구하게 된다. 더 없다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결국은 돈이든, 사람이든 그것의 종이 되도록 하고 만다. 

사람은 구원에 배고픈 상태다. 세상과 마귀는 다른 이름이지만, 구원이 없다고 말함으로 우리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를 조정할 목적으로 그 미끼를 던진다. 우리는 늘 구원에 있어서 불안하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실존이다. 


2. 의지할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은 천지차이다.


그와 같은 인생에게 믿고 구원을 의탁할 대상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너무 큰 삶의 차이를 가져온다. 시편 기자는 그 의지할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고 그를 의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며, 나의 머리를 들수 있도록 하시는(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든가? 아니면 스스로 그 두려움과 싸우든가 아니면 그 두려움을 제거해 주는 담보로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파는 것인데, 그것은 더 큰 두려움으로 가는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할 바위시다. 믿고 의지할 만하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인생이란, 결국 두려움의 종으로 사는 인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땅에서 온갖 충만을 가진다고 한들 그것이 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것들이라면, 거기에 무슨 풍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두려움의 껍데기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행복은 없는 것이다. 


3.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미래적이지만, 현재적이다. 그래서 오늘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확신이 클 때, 가장 확실한 어떤 대상을 걸고 맹세를 하곤 한다. 너무 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자는 너무 큰 확신이 있을 때, 그 확신이 내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제적인 것일 때 마치 이미 이루어진것처럼 과거형으로 말해 버린다.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이 클 경우에 말이다. 


구원은 받은 것이나, 이루어 질 것이라는 로마서 5장의 말씀도 그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안에서 시제의 문법을 벗어나는 삶을 산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살때가 있고,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살때도 있는 것이다. 지금 구원이 없는 것 같은데, 구원이 있는 자처럼 여유를 가지고 산다. 지금 이 땅의 모든 풍요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없어지는 것임을 알아 없는자처럼 검소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해 지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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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하나님의 시간적 초월성에 대한 내용이다. 루이스는 어려우면 그냥 넘어가도 좋다고 한다. 이해하면 유익한 것이 있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앙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동시에 많은 사람의 기도를 어떻게 들으시는가?(한 사람씩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 시간만큼의 역사적 공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의 앞 일을 예견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 이 장은 건너 뛰어도 좋다. 


1.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어떻게 동시에 들으시는가?

  1) 한 사람씩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아무리 많아도), 동시에 수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시는가?


  2) 루이스의 설명

   (1)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삶이 한 순간씩 다가온다. 한 수간이 지나야 다음 순간이 온다. 모든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방식으로 존재한다. 

   (2) 그러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4) 하나님은 10시 30분에 100만명의 기도를 들으실 여유가 영원무궁하다.

       예) 작가가 '메리는 책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작가가 실제로 이 글을 쓸 때는 두 순간 사이에 상당히 긴 시간이 존재했을 수 있다. 

       예) 맥 컴퓨터에서 익스포즈 효과(동시에 하던 작업이 펼쳐지는 효과)

   (5)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충분히 돌보실 여유가 무한이 있으신 분이다.(순간적 위험속에서도)

   (6)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양, 각 사람과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 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양 그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 지냈던 시간은 하나님의 긴 시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인가? 


  1) 시간의 흐름이 선이라면

  2) 하나님은 선을 긋는 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흘러 가지만, 종이 위에 그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완전한 실재로, 역사가 없으시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재의 일부가 없어졌거나, 아직 얻지 못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3. 하나님이 우리의 앞 일을 알고 계시다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1)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이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이, 오늘처럼 보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날이 지금이다. 

  3) 하나님은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이 아직 안왔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미 왔기 때문이다. 

  4)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 하나님은 내가 내일 무엇을 하실지 이미 다 알 고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내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루이스에게는 이 개념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고, 이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잊어버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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