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_좋은 전염]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논리적으로는 선후를 가지지만(그래서 성부와 성자라는 표현이 생긴다.) 실재적으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기원이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루이스식 설명. 




1. 책 상 위에 두 권의 책이 있다. 위에 있는 책은 B, 아래 있는 책은 A라고 하자.

2. 이 두 책은 원래부터 있었다고 생각하고, A의 위치는 B의 위치에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비의 위치는 언제나 에이의 위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나 비가 이런 위치가 되기 위해서 에이가 먼저 이런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4.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정육면체가 하나의 입체인 동시에 6개의 정사각형이란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위가 서로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치 선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5. 첫째 위를 성부, 둘째 위를 성자라고 부른다. 첫째 위가 둘 째 위를 낳는다.(만드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하는 이유는 첫째 위가 생산하는 것이 그 자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라는 말로 성경은 쓰고 있는 것이다. 

6. 그러나 이 말은 성자보다 성부가 먼저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쉽게 한다.(자식보다 부모가 먼저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선후 관계가 없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 원인이나 기원이 될 수 있는가?(성부가 있기 때문에 성자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자를 낳기 전 성부가 계셨던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7. 처음 두 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했다. 상상하는 행위는 원이이고, 머리 속 그림은 결과이다. 그렇다고 상상하는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림이 나중에 그려진 것이 아니다. 상상하는 순간 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상상과 그림은 같이 시작해서 같이 끝나게 마련이다.)

  추가적인 설명) 등불에서 빛이 남, 난로에서 열이남, 전신에서 생각이 흘러나옴, 성부의 자기표현이 성자인데, 성부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_ 이 비유도 한계가 있다.(두 존재를 연상시킨다.)

8.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인데, 이는 처음부터 함께하는 인격체를 전제하지 않아면 안된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 기뻐하고 공경한다. 이 인격적인 관계는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9. 셋째 위인 성령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부가 여러분 앞 '저기'에 계시는 분이고, 성자가 여러분 옆에서 기도를 도우시며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여러분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다. 성령은 가족이나 클럽, 노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공동 인격>과 같은 것이다.(좀 더 선명한 이해가 필요함)


10. 이와 같은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삼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어떻게 시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연합하며, 어떻게 삼위 하나님의 생명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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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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