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에 가서 느끼는 것은 바울이 당한 고난은 육체적인 것을 넘어 치열하게 반대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던 흔적들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싸움과 논쟁 속에서 바울이 확실히 믿었던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바울이 목숨을 걸로라도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집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에게 감사합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은 당신들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거나 흥미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감사합니다. 당신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이 선명하게 무엇인지 우리의 것으로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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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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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이 매우 정성들여서 강조하여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그 만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의 강조점을 마지막으로 짚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
[변명] 6:1-10에 대해 일반적인 차원에서 <서로 짐을 지라>는 교훈으로 정리하기에는 전체 맥락 속에서 제가 잘 이해되지 않아, 개인적인 사적 견해로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간의 관계로 좀더 구체화하여 해설해 보았습니다.

1. 바울에 대해서 여전히 경계하는 성도들에게(1-5절)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것으로 밝혀졌더라도, 너희들은 나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주려고 했어야 했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릇되지 않았는가? 하는 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바른 태도다. 그런 태도로 나를 대해줌으로서 짐을 서로 져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떠했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현혹되어 복음에서 멀어진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심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나에게 대해서조차 비난과 헛소문 그리고 악성 댓글이 난무하니 이것이 성도 안에서 말이나 될법한 일이냐? (갈라디아 교회의 그릇된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여집니다.)

2. 바울에 대해서 여전히 따르는 성도들에게(6-10절)_이들은 여론적으로는 소수였는데.

너희들은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라. 우리가 할례의 조건을 거절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으로(너희들은 믿고 따르는 것으로) 힘들겠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그것을 붙잡고 기회있는대로 전하면 때가 이르거 거두리라.(결국 믿음의 복음이 이기지 않았는가?)
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너희는 결국 나와 함께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힘써 이 복음을 전하라.

3.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11-14)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불이익(핍박)을 면하려고 자꾸 할례를 요구하는 자들이다. 사실 이들은 할례 외에 다른 율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지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에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 뿐이다.
이들의 어리석은 가르침에 넘어가지 말아라.

4. 바울의 확신(15,17절)

1)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은 받았다는 것만이 중요하다.(15절)
2) 나는 내 몸에 부인할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17절)
3) 더 이상 댓글달지 말라.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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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사수하여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얻은 그 자유로 육체의 (소욕)을 쫓는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를 서로 사랑하는데 종된 것처럼 쓰라고 한다.

1.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인권)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종교임에는 틀림없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못하다.
   :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도 언급했듯이 자녀가 어릴적에는 율법을 후견인으로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지는 말자.(갈 4:1-7) 이것마져 부정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며, 정당한 권위마져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 반면에 자신은 어른이고 타인은 모두 어린이라는 관점을 가진 어른들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이 영적인 어른인듯 성도들의 신앙을 유치한 어린이의 신앙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삼가해야 할 태도이다.
   : 청년들은 어른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 어른들에게 철없는 자녀로 보이겠지만 이들은 어른으로 대접 받아야 한다.

2. 그러나 바울이 강력하게 <자유>를 외친 후 곧 이어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유는 분명하지만, 그 자유가 방종을 허락하는 자유가 아님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 우리는 육체의 소욕(본능)대로 살도록 허락받은 것이 아니다. 그 자유라는 것은 또 다른 종된 삶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종(13절)된 삶이다.
   :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비로운 삶이 아니다. 사랑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 사랑의 종>에서 불러내어 <이웃 사랑의 종>으로 이르게 한 것이다. 결국 여전이 우리는 종이다. 누구의 종이 되느냐에 따라 <짐승>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인간: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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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바울, 율법과 복음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다.

갈 4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인정하면서도, 율법의 임시적인 한계성을 지적한다. 우리가 자유자의 자녀 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될때까지 후견인의 지도를 받는 것처럼 율법도 우리에게 임시적으로 필요한(그래서 율법 아래에 어느 정도 있게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우리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약속받은 자녀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인(3:29) 우리를 다시 율법의 종되는 자리로 이끌려하니(4:9)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_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뭔가 있는 것같다는 생각에 이전의 복음(바울이 전한)보다 더 입맛에 맞는다 생각하여 많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내용으로 넘어가니 바울은 답답할 뿐이다.

이제 바울은 지금의 이 상황이 사라와 하갈의 잘 알려진 구약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알레고리 해석을 감행한다.

1. 하갈는 종이고, 하갈이 아브라함을 통해 난 이스마엘은 종의 자녀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따르는 것은 종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2. 종의 자녀였던 이스마엘이 나중에 자유자의 아들(사라의 아들, 이삭)을 놀린 것(박해한 것)처럼 율법은 약속의 자녀인 우리들을 놀리고 박해한다.(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종의 자녀인 이스마을을 내보내 아브라함의 유업(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다시 성도들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헛될 것이고, 만약 그들을 가르침을 따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업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바울은 논리적인 측면에서도, 그 논리가 우리의 개념 속에 쉽게 안착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참 부럽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바울의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 바울은 사도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간섭으로 오류없이 성경의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기에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도 하나님의 명확한 통제 아래 있다고 보기에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임의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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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은 로마서에서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복음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약속되로 복된 유업을 얻게 된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말씀이다.

바울의 이런 설명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영향받은 <유사 복음>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성도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믿음과 더불어 율법을 추가하였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갈라디아인들은 이 논리가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행위가 빠진 구원이란 사실 좀 인간적으로 허전한 감이 있다. 뭔가라도 해야 보상을 받는 것이 덜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없으니 허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인간적인 논리로볼 때 늘 뭔가 채워져야 할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뭔가>를 채워주는 내용의 <다른 복음>을 전하니 입맛에 딱 맞을 수 밖에...

이와 같은 측면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핵심을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강조해 주어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2.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이다.
   : 따라서 작은 율법적 행위를 의존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갈리디아 교회에서의 문제된 복음은 바로 이 부분의 메시지를 훼손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참고로, 성경에서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믿음'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믿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율법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니 잘 구분해서 읽으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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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다는 표현이 불경건해 보이기는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단어는 요즘 유행하는 바로 그 단어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절)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다니며 함께 사역하는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늘 부담스러운 여론을 형성했을 것이다. 바울의 마음 속에서 디로를 할례시키면 그 부담이 줄고 훨씬 사역이 자유롭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정말 사역자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사실은 내부의 적(믿는 유대인들의 훼방과 복음의 변질)이라는 것을 알기에 <디도>라는 짐을 덜기 위해서 디도를 할례시키는 것은 사실 반대여론을 잠시 잠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하면 안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작은 짐 하나 덜겠다고, 복음의 변질을 원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디도를 할례시키지 않았는가?) 바울은 사람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기로(쫄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음은 율법적 차별을 폐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살게 된는 것(갈 2:20)이라는 믿음을 확신했기에 믿음대로 행동했다. 바울이 심지어 그 확신에 근거해 베드로의 그릇된 행동(그로 인해 바울의 측근이 바나바까지 흔들렸기에... 13절)에 질책을 했다. 바울은 차별이 없는 은혜의 복음 앞에서 쫄지 않을 뿐 아니라 과감하고 용감했다.

[본문 읽기 가이드]

차별이 없는 복음(단순히 '복음'이라고만 하면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의미가 두리뭉실해진다. 그러면 구체화되지 못하고 예리하기 어렵다..) 앞에서 바울이 현실적, 사역적 부담을 더는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공인으로서의 베드로가 차별하는 태도로 이방인을 대한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도 유심히 봐야 한다. 숨기고 감싸 안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고, 바울 측근의 바나바조차 그릇된 영향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는 다른 복음으로 신속하게 오염되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목회적 과단성이 돋보이는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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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다른(짝퉁) 복음에 쉽게 넘어가버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참 복음>과 <유사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넙죽 받아 버린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할 결심을 하고 편지를 써내려 가고 있다. 바울이 더욱 흥분한 것은 <너무 신속히> 넘어갔다는 것이다.

1. 바울이 분개하고 있는 <다른 복음>의 내용이 아직 어떤 것인지 알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참 복음>과 구별하기 힘들만큼 유사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참 복음>보다 성도들의 구미에 더 잘 맞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랬기에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에 쉽게, 빠르게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2. 바울은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받은 내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계시>를 가지고 있음도 강조하여 전한다. (11-24)

[성경읽기 가이드]

1. 한번에 너무 많은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지 말자.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으로 인해 혼란이 생겼고, 그것은 생각보다 빠른 확산을 가져왔기에 바울은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우선 파악하자.

2. <다른 복음>에 대해서 무엇이 달랐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채 갈라디아서를 읽어가자.(보통 문제 안에 답에 대한 힌트가 있는 법이니) 성급하게 다른 참고도서까지 동원하지는 말자. 그냥, 참된 복음과 유사하지만 다른 복음이 들어와 현혹했다는 것 정도만 생각하자.

3. 다른 복음 이야기로 흥분하던 바울이 왜 갑자기 자신의 사도성 변호와 자신이 받은(전한) 내용들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심지어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2절)라고 했을까 생각해 봅시다.

* 내가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이 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성경을 잘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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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에서 그 분의 이야기, 히스토리를 조금씩 나눠보려구요.
많은 응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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