쫀다는 표현이 불경건해 보이기는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단어는 요즘 유행하는 바로 그 단어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절)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다니며 함께 사역하는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늘 부담스러운 여론을 형성했을 것이다. 바울의 마음 속에서 디로를 할례시키면 그 부담이 줄고 훨씬 사역이 자유롭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정말 사역자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사실은 내부의 적(믿는 유대인들의 훼방과 복음의 변질)이라는 것을 알기에 <디도>라는 짐을 덜기 위해서 디도를 할례시키는 것은 사실 반대여론을 잠시 잠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하면 안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작은 짐 하나 덜겠다고, 복음의 변질을 원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디도를 할례시키지 않았는가?) 바울은 사람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기로(쫄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음은 율법적 차별을 폐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살게 된는 것(갈 2:20)이라는 믿음을 확신했기에 믿음대로 행동했다. 바울이 심지어 그 확신에 근거해 베드로의 그릇된 행동(그로 인해 바울의 측근이 바나바까지 흔들렸기에... 13절)에 질책을 했다. 바울은 차별이 없는 은혜의 복음 앞에서 쫄지 않을 뿐 아니라 과감하고 용감했다.

[본문 읽기 가이드]

차별이 없는 복음(단순히 '복음'이라고만 하면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의미가 두리뭉실해진다. 그러면 구체화되지 못하고 예리하기 어렵다..) 앞에서 바울이 현실적, 사역적 부담을 더는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공인으로서의 베드로가 차별하는 태도로 이방인을 대한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도 유심히 봐야 한다. 숨기고 감싸 안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고, 바울 측근의 바나바조차 그릇된 영향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는 다른 복음으로 신속하게 오염되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목회적 과단성이 돋보이는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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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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