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고, 이성적인 설명으로 납득되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 진행되는 어떤 원리를 영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교회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를 가졌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다.(고전 12:12)는 사실은 실제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신령한 것. 고전 12:1)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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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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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기초로 해서 복음 이야기1_하나님의 복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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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바울에 의해 쓰여졌지만, 바울이 로마의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할 때까지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기를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의 서신을 보면 잘 나와있다.(롬 1:13, 15:22-24) 게다가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에서 연보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 주기 위해서 가던 때로, 그 상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0장에 잘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20장 후반부를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임을 바울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행 20:22-25)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서를 작성한 것이다.(행 20:3) 


그렇게 본다면 사실 바울은 로마서를 작성할 때, 자신이 이전부터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로마교회를 살아서는 갈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인식 속에서 편지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실제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음의 위협이 있었지만...죽지 않고 당분간 사역을 지속하지만 로마서를 작성할 때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썼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써내려가려고 했던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볼 때, 우리는 바울이 선택한 단어 하나 하나에 좀 더 세심함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건강하게 세우기를 원했다.(1:11) 그렇게 시작한 로마서의 첫 구절에서 바울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그것을 수식하는 말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하나님의 복음" 굉장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수식어 같지만, 복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것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보통 복음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나 이미지는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피, 은혜, 대속과 같은 것들이다. 어찌보면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단어와 이미지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표현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복음>  이것이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작정하고 복음에 대해서 쓰고자 한 편지의 첫 구절의 표현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복음에 대한 우리의 편향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우리가 보통 복음을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되고 예수의 십자가는 그 분의 피와 그 피로 이루어지는 대속을 강조하게 되고, 대속은 쉽게 우리가 익숙한 중생과 칭의로 언급된다. 실제적으로 복음 안에 대속, 칭의, 중생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복음 안에는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정과 계시, 화목, 화해, 승리, 연합, 양자, 성화, 견인, 영화와 같은 모든 것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 안에 주어지고 있는 개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속과 칭의와 중생과 같은  한 시점에 일어나는 극적 변화만에 복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대속과 칭의와 중생이 되어서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것만을 복음이라고 단순화 시켜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라는 넓고 길고 풍성한 여정은 간과한채, 그 과정중에 있는 순간적이고 충격적인 한 두가지의 경험만이 복음의 전부인양 생각하게 만들어갔다. 그렇게 이해하게 된 데에는 우리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만 집중하여 연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경험되어질 때 우리가 받은 충격과 영향력이 너무 커서 복음의 다른 모든 풍성한 주제들을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마치 이석기 의원 사건이 국정원 개혁의 모든 여론을 빨아들인 것처럼)


십자가 대속과 보혈의 피를 복음 전체의 이미지로 강조하게 될 때, 우리는 자주 복음의 빈곤함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망망대해에 파선당해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 생명을 구해준 배가 자신을 육지에 내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생명을 살려준 것을 담보로 평생 그 배에서 고기잡는 일만 하면서 살아가도록 요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죽지는 않을찌언정 그 삶은 매우 가난한고 궁핍한 생명이 될 것이다. 죽음에서 살았다는 것자체는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사건이지만, 살아가는 생애 전체를 생각해 보면 불행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 너무 가난한 것이 된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즉, 복음의 전체적인 개념을 충분히 알지 못한채, 구원을 얻었을 때의 경험과 그 감정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것 만큼 가난한 복음도 없는 것이다. 마치 결혼한 부부가 수 십년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결혼식과 신혼여행 때의 짜릿했던 경험만을 결혼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가난한 결혼생활을 없는 것이다. 풍성한 결혼 생활이란, 지금의 결혼 관계가 행복하기 때문에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아련한 기억만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지 않는가! 복음은 그와 같은 것이라 믿는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이후에 누리는 것들이 더욱 풍성하고 많아, 날로 날로 더욱 충만해져가는 삶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바울이 복음에 대한 수식어로 <예수>를 언급하는 것보다는 <하나님>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교회 안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엡 1:3-14) 예수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만, 결국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주도아래 함께 협력하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이 이제 말하고자 하는 복음이 어떤 의미의 복음인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이 협소하다거나, 그릇된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해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충격적 경험이 모든 논리와 설명을 다 빨아들이듯 우리는 종종, 아니 너무 자주 복음을 대속과 칭의와 중생과 같은 사건과만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이 가난해 지고, 구원의 여정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매우 표피적이고 협소하여 원래 하나님이 베풀고자 하신 그 풍성함과 넓음과 깊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복음과 관련된 첫번째 수식어는 <하나님>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선언했고, 그 이후 그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풍성하고 충만한가를 설명해 가고 있다.


다음에는 롬 1:16,17에 언급되고 있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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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참 따듯하고 좋은 사람인데도, 표현에 미숙한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따듯함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니 말이다.

정서적 어른이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가감없이 잘 표현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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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면서,특히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되면서 나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한다. 동시에 나의 부모님은 그 시절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막상 생각을 더듬어 가보면 일관된 양육방식이나 교육철학이랄 것을 건져 올리지 못한다. 선명한 방식보다는 흐릿한 느낌만이 한 두가지 남을 뿐이다. 


그 중 하나는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거의 하신적이 없는 것 같다. 거의 없다고 했으나 사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니, 거의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못하고 컸음을 의미한다. 내가 공부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내 동생에게도 <공부해라>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 삼형제들의 공부를 봐주신적도 거의 없다. 그도 그럴것이 두 분 모두 장사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고 또한 두 분다 초등학교만 졸업하셨기에 사춘기 자녀들의 공부를 봐 주실 능력도 없으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우리 형제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거의 없으셨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가 저녁늦게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점심과 저녁은 챙겨 먹어야 했고, 청소와 설겆이를 해야 한다는 것 정도다. 종종 가게 일이 바쁘면 도와 드리러 가야했고, 방학이면 가게 일을 봐야 한다는 것이 좀 그렇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생각은, 그렇게 바쁘고 여유없게 사시면서도 우리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충분히 못해주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시는 모습이었다. 못배우신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못배우심 때문에 자식의 공부를 좀 더 살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셨고,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입히거나 먹이지 못하신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셨다. 그래서 그러셨겠지만,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당신의 욕구를 챙기시기보다는 언제나 자식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자 하셨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더 충분히 채워주지 못해 주시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시는 눈치였다. 이것이 지금 내가 나의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며 머리 속에 남는 인상이다. 다른 것들은 세월의 풍화 속에서 기억 너머로 사라졌지만, 이 기억만큼은 머리에 각인된듯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 이후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종종 부모님댁을 찾아 갔다가 돌아올 때가 되면, 언제 준비해 놓으셨는지 이것 저것 한 아름 챙겨주신다. 그러고도 더 못 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지금도 본다. 자식에 대해서 늘 충분히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짠하다. 


지금 나의 가정은 어떤가? 나와 나의 아내는 나쁘지 않은 4년제 대학을 나왔다. 부족하지 않게 공부했다는 말이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집에서 두 자녀와 화목하게 살고 있다. 아내가 맞벌이를 해야 해서 가정을 잘 챙겨보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일주일에 세번 오후에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실로 영어를 가르친다. 당연히 집에서 두 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좀 어려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작은 아이의 수학 정도는 봐줄 수 있는 상황도 되고 실력도 된다. 아내는 교육학을 전공했고, 나는 캠퍼스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사역했고, 교회에서는 목회자로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적지 않은 편이다. 나의 부모님에 비하면 나와 나의 아내는 매우 충분한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내에게 부모로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미안해 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에게는 너무나 많았던 그 마음이 지금 우리 가정에는 얼마나 빈약한지 모른다.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은 <못해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마음이다. 

 

나와 아내는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공부해라>고 하는지 모른다. 너무 많이 공부한다고 항변하는 자녀에게,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너무 공부량이 적다고 일축한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고(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가정은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평온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자녀들의 지적인 부족을 채워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부모로서 부족하지 않는데, 너는 왜 이리 부족한가?라고 우리는 늘 몰아붙인다.  


"내가 너희에게 못해 준게 뭐니? 너희들은 공부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니?"


생각해 보면, 부모들의 미안해 하는 마음(필요를 충분히 채워줄 수 없었기에)을 먹고 자란 우리가, 부모들의 당당함을 먹고 자라는 우리의 자녀들보다 행복했다. 적어도 스트레스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서로에게 <미안해 하는 삶>을 복음적인 삶이라고 규정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마음이 복음적인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할 것을 다 했다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화평은 깨지기 시작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식이 해야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속에서의 인내와 용납은 사라지고 만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나와 결혼해준 배우자를 생각할 때, 가정은 화평하다. 지금도 여전히 기대하는 만큼의 충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곳에 지속적인 평화가 임하게 된다. 가정 안에서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회사 안에서 노사간의 관계도 같은 원리요, 국가와 국민간의 원리도 같다고 본다. 




요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나의 해야할 책임을 충분히 다했으니, 내가 누려야 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취해야 마땅하게 된 것이다. 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만 남았고 세상은 온통 당당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은 사라지고 치열한 권리주장만 남았다. 여기에 무슨 화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족함과 결핍을 찬양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서로에게 대한 <미안해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찬양하고 싶다.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못가준 것에 대한 미안함,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 옷까지 주지 못하는 미안함,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미안함, 더 충성스럽게 섬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이런 미안함이 이 사회를 따듯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 화평을 이루어 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였다."(창 2:25)


에덴은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곳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울 만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던 곳이다. 서로가 벌거벗었기에, 서로가 부족했기에 상대의 수치를 수치로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고백하는 것에서,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복음적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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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7일 이만열 교수님의 페북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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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부메랑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 [이 글은 새 정부 출범에 앞서 인사청문회 논란을 보면서 좀 길지만 페이스북 친구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늘 부담이 되는 것은 내 의견을 개진한 후 친구들의 질문과 의견에 답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필자] 
총리 후보로 지명된 분(김용준)이 낙마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인수위 윤 대변인은 6일 기자회견에서 국무총리 지명과 관련,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했다. 지명받은 후 다시는 낙마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전 검증 자체를 그만큼 꼼꼼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대통령 취임식과 새 정부 출범이 이달 25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빡빡한 일정에 불안한 마음마저 든다. 
우리 나라의 인사청문회 제도는 2000년 김대중 정권 때에 도입되었다. 그 때에는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그리고 대법관이 대상이었다. 사법부와 행정부의 비선출직 최고위층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은 선거과정을 통해 그 신상이 어느 정도 밝히 드러나지만, 비선출직은 선거라는 국민적 검증을 거치지 않고 국가의 고위직에 취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는 국민을 대신하여 그들의 인품과 능력에 대한 됨됨이를 평가하여, 그들이 그런 고위직에 앉아도 될 것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 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거듭 인사청문 대상의 확대를 요구하여, 2003년에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까지 확대했다. 이어서 한나라당은 2005년에는 행정부의 장관까지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했다. 바로 그 때 이 제도의 확대를 주장했던 한나라당의 대표는 박근혜 당선인이었다. 당시 인사청문회 제도의 확대 시행을 요구했던 한나라당은 그 청문회를 통해 공세도 취하여 어느 정도 정치적 성과도 거두었다. 
최근 새누리당에서는 까다로와진 청문회 제도를 두고 ‘신상 털기’라고 비판하고 나섰지만, 그 청문회를 까다로운 ‘신상털기’식으로 운용한 것은 바로 한나라당이었다. 그 때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몇 사람을 낙마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에는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를 낙마시킨(2003) 데 이어, 2006년에는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김병준 교육부총리 후보자에게는‘자기표절’을 근거로 낙마시켰다. 되돌아보면, 지난 MB정권 때에도 낙마한 경우가 없진 않지만, 그러나 ‘국민의정부’ 때나 ‘참여정부’때에 적용했던 그 엄격한 기준으로 한나라당이 자기검열에 충실했더라면 몇 사람이나 그 관문을 통과했을 지 의문이다. 그 정도로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야당 때에 가졌던 청문회 검열 잣대를 느슨하게 풀어버렸다. 
새 정부의 출범에 앞서 당선인과 집권당은 청문회 제도를 불편해 하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그렇게 곤경을 겪는 것은 따지고 보면 현재 집권당인 새누리당이 자기들이 야당 시절 확대했고 그 시행을 엄격히 요구했던 그 ‘신상털기식’ 선례(先例)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집권여당(현 야당)에 대해서 감행했던 ‘만용’이 지금 에누리없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줄이야,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없는 단견(短見)에 머문 우리의 정치풍토 때문일 것이다. 정치에서 필수불가결인 관용(寬容)은 남의 약점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나야 하며, 반대로 상대방의 장점을 대할 때에는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자세가 경쟁 위주의 살벌한 정치판에서도 상생의 공동체를 세우는 길일 터이다. 이런 때에 자주 쓰이는 말은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이런 과거를 갖고 있는 당선인과 새누리당이 최근 새정부 출범을 앞두고 청문회 무력화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여당의 국회 총무 이한구는 헌법재판소장 후보 이동흡에 대한 청문회를 두고‘인격살인 도살장’같다고 비난하면서, 과거 한나라당이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반성은 없이 청문회의 폐해를 부각시키기에 앞장 섰다. 그런 용기있는 총무의 자가당착적 만용에 힘입어 청문회 무력화를 열창하는 새누리당 의원과 당료는 한 두사람이 아니다. 한자리 노리는 아첨꾼이 아닐까. 거기에다 총리 후보가 낙마한 후, 당선인의 발언에는 청문회를 통해 검증된 인물이 발탁되기를 기대했던 유권자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내용들이 묻어있다. 그는 “죄인처럼 혼내는 인사청문회 때문에 나라의 인재를 데려다 쓰기가 어렵다”고 언급하는가 하면, 청문회를 ‘신상털기’로 ‘피해를 주는’과정이라고 말하면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결국 그가 생각하는 청문회는 그의 ‘밀봉인사’를 무탈하게 통과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그가 야당 시절에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상반된 것이며 이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인지, 여당 의원들을 향해서 새정부 출범에 협조해 달라고 당부하면서도 그가 정작 내 놓아야 할 후보 명단은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설마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꺼번에 총리와 장관 후보들을 여러 명 내 놓고 그걸 어느 시점까지 통과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그 다급한 기간을 내세워 주마간산격으로 청문회를 치러주기를 은근히 요구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고위공직자를 발탁하여 쓰되 국민 대표기관의 엄격한 청문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이제 10여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신상털기’식 혹은 ‘인격살인’으로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미 중요한 정치적 제도로 자리잡은 현 청문제도를 집권 여당의 의도대로 대체입법과정을 통해 당장 무력화시키고 편의위주로 운용하겠다면 그것은 더구나 온당치 않고 유권자의 저항마저 불러일으킬 것이다. 지금의 청문제도는 새 정부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여러 시스템의 하나다. 불편하니까 이것만 갈아끼우고 가자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유권자를 설득시키지도 못한다. 지난 번 대선 때 투표율을 올리기 위한 투표시간 연장이 상당한 호응을 얻어 대두되었지만, 선거시스템이 이미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룰을 변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당선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흐지부지 되었던 적이 있다. 이 경우에도 청문회 제도를 손보겠다면 그 시기는 새 정부 출범 이후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새누리당이 청문회제도를 손보자면서, 가장 방점을 두는 것은 국민들의 공분과 여론 악화에 가장 민감하게 작동하는 대목이다. 즉 재산과 병역, 세금 등 도덕성 검증을 비공개로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낙마한 대부분의 경우가 바로 이런 도덕성 검증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새누리당이 이 점에서 좀처럼 자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셈인데, 그렇다면 더구나 도덕성 검증의 비공개화를 통해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그들 자신이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과거 재산과 병역, 세금 등에서 부정이 있으면 그걸 도덕적 하자로 보지 않고 처세에 능한, 그래서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정의와 도덕을 내세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불의와 부정을 어쩔 수 없이 용납해 왔던 사회적 관행 때문이다. 이런 관행을 극소수의 고위공직자 선발에서 바로 잡아보자는 것이 청문회 제도라고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고위공직자부터 정의와 도덕의 잣대로 능력을 검증하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적용대상은 얼마 되진 않지만 앞으로 고위공직자를 선망하는 이들에게는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젊은 시절부터 자기 관리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사회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과거 불의 불법한 토대 위에서는 재산과 병역, 세금 등을 적당히 피하는 요령이 있으면, 그것이 마치 능력이 발휘되고 입증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와 도덕의 사회에서는 발휘될 수 없는 능력이었다. 따라서 인사청문제도 하에서는 고위공직자로 그 능력이 입증되자면, 개인의 능력과 사회의 정의․도덕이 불일치되어서는 곤란하고 일치되는 데서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이것이 정의사회를 이룩해 가는 과정이고 정치가 추구하는 중요한 목적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사청문제도에서 추구하고 있는, 고위공직자의 능력이 엄격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동양적 가치관을 정치 시스템화하는 장치라고 할 수는 없을까. 도덕적으로 자기 자신과 집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만 공직을 맡을 수도 있고 공직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청문회 제도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의 엄격한 이 인사청문제도를 앞으로 10년 정도만이라도 성실하게 시행, 안착시킬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도덕․정의 관념과 개인적 능력을 일치시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MB 정권 하에서 운용된 청문제도에서나, 보수를 자처하면서도 도덕적 행위를 청문의 공개대상으로 하자는 것을 꺼리는 이런 풍토하의 청문제도로서는 더 많은 시간을 요할는지 모른다. 
도덕적 행위를 인사청문의 공개대상에서 제외시키려면 그만한 여과 장치를 엄격히 마련해야 한다. 공개적인 청문회에 나오기 전에 거쳐야 하는 사전검증 단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 후보자들은 먼저 그들이 적어내는 200개 이상의 항목의 질문서에 성실히 답해야 한다. 가족 범위도 본인 외 배우자·자녀뿐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부모, 배우자의 부모, 형제, 후견인까지 포함”되며 특히 최근 7년간 후보자의 거주지를 확인해줄 수 있는 이웃 지인(知人)까지 써내게 한단다. 200여개의 문항에는 “불법적인 마약소지나 사용 경험 등 전과 기록과 세금 체납이나 소득세 신고를 하지 않은 경험 등 납세 정보도 중요 항목”이다. 이런 사전 검증의 정보들을 바탕으로 백악관 인사처, 연방수사국(FBI), 국세청(IRS),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검증에 나선다고 한다. 이렇게 철저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상원의 인준이 거부되는 경우가, “1960년부터 2000년 사이에 6명밖에”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우리와는 대조되는 대목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청문제도의 개선 논의는 새 정부의 출범을 위한 임시 방탄막이로 활용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것이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사청문제도의 약화를 주장하는 것이어서는 더더구나 옳지 않다. 새누리당의 구상대로 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MB정권 하에서 연속 추락해서 이제는 세계투명성기구의 2012년 ‘한국 반부패지수 45위(100점 만점에 56점, OECD 34개국 중 27위)를 더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까 두렵다. 공개 검증이 가져오는 한계를 인식한다면 지금의 여야의 대치관계를 떠나 무엇보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청문회대상이 되었을 때를 상정하면서 중용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자칫 순간적인 이해관계를 극복하지 못해 편파적으로 개정을 논의하다 보면 그것이 언제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올는지 알 수 없다. 최근 시민단체와 일부 야당 의원들도 진지하게 논의에 접근하고 있는 만큼 정치권은 여야를 초월하여 현재의 청문제도를 개정하되, 시스템화된 지속적이고 더 광범위한 사전검증을 통하여 공개검증이 갖는 약점을 합리적으로 지양․보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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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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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28. 주일.(김동호 목사님의 개인 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

1. 사내 아이 셋을 키웠습니다. 그것도 터울이 길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2.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 중에 하나는 '억울함'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아이들이 '억울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3. 그래서 아이들을 대할 때 첫째, 둘째, 셋째 혹은 큰 애, 작은 애로 대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어떤 일로든지 너는 첫째니까, 둘째니까, 셋째니까 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4. 언제나 판단기준은 옳고 그름이었습니다. '너는 첫째니까 네가 참았어야 해', '너는 동생이니까 형에게 그러면 안 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5. 하나님의 은혜로 그 면에서 크게 실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 셋이 자기가 몇 째이기 때문에 억울했다는 느낌없이 잘 컸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 셋 사이가 너무 좋습니다. 아이들과 우리 부모 사이가 정말 좋습니다.

6. 저희 아버지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신념이고 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쉽지 않았지만 정말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7. 어렸을 때 저는 그게 너무 근사했습니다. 그게 우리 아버지의 매력이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아버지를 참 좋아했습니다.

8. 그러나 나중에 레위기를 읽다가 그게 근사해 보이기는 하여도 옳지는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 레위기 19장 15절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10. <너희는 재판 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11. 레위기 19장에 유명한 말씀은 8절과 9절입니다.

12.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지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13.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과 배려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14. 늘 가난한 자를 생각하지만 가난한 자의 편에는 서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부자편도 들어서는 안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5. 그러므로 무조건 부자 편을 들어서도 안 되고, 무조건 가난한 사람 편을 들어서도 안 됩니다. 재판은 약자와 강자의 편이 아닌 옳은 사람 곧 정의의 편만 들어야 합니다.

16.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 편을 들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게 사회의 가장 큰 병입니다.

17. 그래서 용기있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가난한 자의 편에 섭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다 지나칩니다.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에 서다가 부자를 억울하게 합니다.

18. 어떤 경우는 강한 사람이 옳은 경우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잘못되었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무조건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면 부자도 억울합니다.

19. <나는 가난하니까>, <너는 부자니까> 이런 생각과 표현은 사람을 많이 억울하게 하고 세상을 너무 편치 않은 갈등의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20. 저는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라 말씀하시면서도 그렇다고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는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좋습니다. 그 균형감각이 좋습니다.

21. 내일 한 번 더 이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2. 오늘도 굿모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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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 이승구 교수님(2013. 1. 27 한가족예배)

중동교회에서 한 이단에 대한 강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

1. 한국 교회 많은 성도가 이단에 빠지는 것도 심각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충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급속도로 늘어가는 것이다.

2. 이단까지는 아니지만 이단에서 말하는 용어나 가르침에 익숙해 질만한 용어나 가르침은 삼가해야 한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이단이 된다. 그런 것이 익숙해지면 이단에 가서도 전통교회와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생각] 이단 강의였지만 외부에 대한 경고보다, 내부의 온전함에 더 초점 맞춰진 강의였다. 이단의 심각한 문제는 외부의 유혹보다 내부의 부실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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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타임라인을 정리하고 나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나는 인생이 참 평온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순간도 있었겠지만, 그 강도가 다른 분들에 비해 약하거나 아니면 약하게 느껴왔다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의 스토리 속에서 어떤 큰 상처랄만한 것을 인식하고 있지않다는 것이다.

난 이런 배경이 한편으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보통 영향력있는 사역을 하시는 분들의 스토리 속에서는 그런 역경에 대한 극복을 가진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난 너무 평이하고 너무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본다. 이런 평온한 사역적 환경이 오히려 밝고 건강한 심성을 만든것은 아닌가 싶다.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왜곡된 상을 덜 만들게 되어 세상에 대해서도, 대인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약점도 많다. 예리함이라든지, 강렬함이라든지, 목표지향이나 성취지향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나 스스로 그런 영역에 콤플렉스가 있다.

그러나 요즘 다시 생각한다. 역동적 성취를 이루는 지도자도 필요하지만 정서적으로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는 지도자도 필요하다고. 어쩌면 그런 정서적 안정감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 섬기는 사람들과 나누라는 사명으로 이런 환경적 배경을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내면의 아픔, 상처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상처도 오래가지 않도록 더 깊어지지 않도록 하는 내재된 장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내 환경 속에, 내 마음 속에 그런 은사를 주신듯 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참, 감사하다.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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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그 과학적 결과를 성급하게 부정해서는 안된다. 갈등이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날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더 견고한 과학적 증거의 설명을 찾게 된다. 그런데 성급하게 특정결과를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은 자연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충분한 경의를 펴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는 그 결과로부터 새로운 진리를 배울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다.

---오리진, IVP, p85

[단상]
기독교는 과학적인 결과에 대해서 너무 성급한 판단 혹은 정죄를 행함으로 과학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사람의 연약함과 무지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을 말하면서도 불완전한 과학에 대해서는 너무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학에 대해서도, 심지어 성경적 진리와 다른 결과를 말하는 것 같은 과학적 결과에 대해서도 잠시 판단을 보류하고 기다려줄수는 없을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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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교회에서 노회가 있어서 월요일 아침부터 교회로 출근했다.(보통은 제기동 죠이본부로 출근하는데..)

1. 난 경기서노회 온 이래로 지금까지 무임목사(임지가 없는 목사)로 구분되어 있고, 오늘은 투표권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 받았다.

2. 난 우리교회에서 6년간 협동목사로 사역했는데도... 행정착오라고 생각한다.

3. 근데 6년 동안 그 구분이 바뀌지를 않더라. 구지 바꿔달라고 서기 목사님께 말씀드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협동목사고 난 주로 죠이에서 일하니까... 생각하고.

4. 내가 말하면 금새 고칠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조금만 적극적이면 바꿀 수 있겠지만... 6년째 고대로 있는것을 보려니 오늘은 아쉽고 약간 서운하더라.

5. 니가 말하면 되지.. 라는 말도 맞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 6년을 지났다면 나는 이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6. 꼭 여기에 나와야 할까?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을 필요가 있는가? 난 투표를 할 수 있는 권한도 없는데??

7. 난 사실 무임목사는 아니다.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현재 두 부서를 섬기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운함보다는 아쉬움만 남는 정도다.

8. 그런데 정말 임지가 없는 목사라면 노회에 오고 싶을까? 노회에서 한 몸이라는 의식을 갖고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을까? 투표권조차 없어서 좀 무안한 목사의 입장이라면 노회는 고통의 장소 일수 있으면 소외의 장소일수 있다.

9. 난 오늘 그 입장에 있어봤다. 다르게 보이더라. 내가 약자의 입장, 소외의 입장, 무력과 무능의 입장에 있어보니 기본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정당한 권리가 폭력과 무례함이 될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10. 덕분에 수년동안 이름만 알고 얼굴은 뵙지 못했던 두분의 무임목사님과 인사하게 되었고,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11. 내 눈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해석되고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배운 노회다. 그런의미에서 오늘은 복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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