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1. 신학적인 교리에 대한 필요성
        1) 교리는 마치 지도 속 대서양과 같은 느낌(실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2)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을 경험하면서 만든 것(개인의 경험을 충분히 넘어서는 것)
        3) 해변을 걷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지도가 불필요해 보이지만, 해변을 건너 가려면 지도가 필요하다.
  1. 신학에 무지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잘못된 개념(여러가지가 뒤섞인)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오늘날 유행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옛날에 폐기된 이야기들에 불과하다.(이단이나 왜곡된 사상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2.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3.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다.
  4.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것은 또한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

  1. 개념 정리: 낳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 다는 것이고, 그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창조한다는 것은 다른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는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조각한 상이나 초상화에 가깝다.)
  4.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닮은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과 같지는 않다. 그 중에서 가장 하나님과 닮은 존재가 있다면 바로 사람이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는데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영적인 생명이다.

        1) 자연적인 생명은 바이오스(Bios)
        2)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자연 세계를 만들어 낸 생명은 조에(Zoe)
        3) 따라서 사람이 바이오스를 가졌다가, 조에를 갖게 된다는 것은 석상이 진짜 사람으로 변하는 것 만큼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4) 기독교는 이 세상이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이다. 그런데 이 작업실에서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4-2 삼위이신 하나님]

  1.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

  1. 1차원에서는 선 만을 그릴 수 있고, 2차원에서는 도형을 그릴 수 있다. 3차원에서는 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차원이 높을 수록 실제와 더 가까워진다.
  2. 1차원에서는 선 밖에는 그릴 수 없지만, 2차원이 되면 선과 더불어 면도 그릴 수 있게 된다. 높은 차원으로 간다고 해서 이전 것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3. 정육면체는 6개의 정사각형이 모여서 이루어 진다.
  4.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도 이와 같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한 인격은 한 존재이다. 두 인격은 두 존재이다. 그러나 신적인 차원에서도 인격체들이 있다. 이 인격체들은 그 차원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정육면체가 하나의 정육면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것처럼 말이다.
  5. 세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존재인 하나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적용] 하나님은 기도할 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그는 기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기도를 돕는 자이며 기도의 주체, 즉 원동력이기도 하시다.

  1. 신학이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신학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실제로 경험 된 것을 정리하여 정의한 것이다.
  2.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위를 연구하고, 동물을 연구하고, 사람을 연구하는 것과 또 다른 차원이다.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계시)
  3. 만약 기독교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을 다룬다.

[4-3 시간과 시간 너머]


* 이 장은 건너 뛰어도 좋다.

1.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어떻게 동시에 들으시는가?
 1) 한 사람씩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아무리 많아도), 동시에 수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시는가?

 2) 루이스의 설명
  (1)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삶이 한 순간씩 다가온다. 한 순간이 지나야 다음 순간이 온다. 모든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방식으로 존재한다.
  (2) 그러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4) 하나님은 10시 30분에 100만 명의 기도를 들으실 여유가 영원무궁하다.
      예) 작가가 '메리는 책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작가가 실제로 이 글을 쓸 때는 두 순간 사이에 상당히 긴 시간이 존재했을 수 있다.
      예) 맥 컴퓨터에서 익스포즈 효과(동시에 하던 작업이 펼쳐지는 효과)
  (5)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충분히 돌보실 여유가 무한이 있으신 분이다.(순간적 위험 속에서도)
  (6)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양, 각 사람과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 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 양 그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앞 일을 알고 계시다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1)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이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이, 오늘처럼 보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날이 지금이다.
 3) 하나님은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이 아직 안 왔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미 왔기 때문이다.
 4)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 하나님은 내가 내일 무엇을 하실지 이미 다 알고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내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루이스에게는 이 개념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고, 이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잊어버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4-4 좋은 전염]


1. 책 상 위에 두 권의 책이 있다. 위에 있는 책은 B, 아래 있는 책은 A라고 하자.
2. 이 두 책은 원래부터 있었다고 생각하고, A의 위치는 B의 위치에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B의 위치는 언제나 A의 위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나 B가 이런 위치가 되기 위해서 A가 먼저 이런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4.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정육면체가 하나의 입체인 동시에 6개의 정사각형이란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위가 서로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치 선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5. 첫째 위를 성부, 둘째 위를 성자라고 부른다. 첫째 위가 둘째 위를 낳는다.(만드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하는 이유는 첫째 위가 생산하는 것이 그 자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라는 말로 성경은 쓰고 있는 것이다.
6. 그러나 이 말은 성자보다 성부가 먼저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쉽게 한다.(자식보다 부모가 먼저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선후 관계가 없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 원인이나 기원이 될 수 있는가?(성부가 있기 때문에 성자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자를 낳기 전 성부가 계셨던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7. 처음 두 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했다. 상상하는 행위는 원인이고, 머리 속 그림은 결과이다. 그렇다고 상상하는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림이 나중에 그려진 것이 아니다. 상상하는 순간 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상상과 그림은 같이 시작해서 같이 끝나게 마련이다.)
 추가적인 설명) 등불에서 빛이 남, 난로에서 열이 남, 정신에서 생각이 흘러나옴, 성부의 자기표현이 성자인데, 성부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_ 이 비유도 한계가 있다.(두 존재를 연상시킨다.)
8.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인데, 이는 처음부터 함께하는 인격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 기뻐하고 공경한다. 이 인격적인 관계는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9. 셋째 위인 성령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부가 여러분 앞 '저기'에 계시는 분이고, 성자가 여러분 옆에서 기도를 도우시며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여러분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다. 성령은 가족이나 클럽, 노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공동 인격>과 같은 것이다.(좀 더 선명한 이해가 필요함)

10. 이와 같은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삼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어떻게 시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연합하며, 어떻게 삼위 하나님의 생명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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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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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_좋은 전염]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논리적으로는 선후를 가지지만(그래서 성부와 성자라는 표현이 생긴다.) 실재적으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기원이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루이스식 설명. 




1. 책 상 위에 두 권의 책이 있다. 위에 있는 책은 B, 아래 있는 책은 A라고 하자.

2. 이 두 책은 원래부터 있었다고 생각하고, A의 위치는 B의 위치에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비의 위치는 언제나 에이의 위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나 비가 이런 위치가 되기 위해서 에이가 먼저 이런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4.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정육면체가 하나의 입체인 동시에 6개의 정사각형이란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삼위가 서로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치 선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5. 첫째 위를 성부, 둘째 위를 성자라고 부른다. 첫째 위가 둘 째 위를 낳는다.(만드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하는 이유는 첫째 위가 생산하는 것이 그 자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라는 말로 성경은 쓰고 있는 것이다. 

6. 그러나 이 말은 성자보다 성부가 먼저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쉽게 한다.(자식보다 부모가 먼저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선후 관계가 없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 원인이나 기원이 될 수 있는가?(성부가 있기 때문에 성자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자를 낳기 전 성부가 계셨던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7. 처음 두 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했다. 상상하는 행위는 원이이고, 머리 속 그림은 결과이다. 그렇다고 상상하는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림이 나중에 그려진 것이 아니다. 상상하는 순간 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상상과 그림은 같이 시작해서 같이 끝나게 마련이다.)

  추가적인 설명) 등불에서 빛이 남, 난로에서 열이남, 전신에서 생각이 흘러나옴, 성부의 자기표현이 성자인데, 성부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_ 이 비유도 한계가 있다.(두 존재를 연상시킨다.)

8.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인데, 이는 처음부터 함께하는 인격체를 전제하지 않아면 안된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 기뻐하고 공경한다. 이 인격적인 관계는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9. 셋째 위인 성령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부가 여러분 앞 '저기'에 계시는 분이고, 성자가 여러분 옆에서 기도를 도우시며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여러분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다. 성령은 가족이나 클럽, 노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공동 인격>과 같은 것이다.(좀 더 선명한 이해가 필요함)


10. 이와 같은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삼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어떻게 시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연합하며, 어떻게 삼위 하나님의 생명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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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하나님의 시간적 초월성에 대한 내용이다. 루이스는 어려우면 그냥 넘어가도 좋다고 한다. 이해하면 유익한 것이 있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앙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동시에 많은 사람의 기도를 어떻게 들으시는가?(한 사람씩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 시간만큼의 역사적 공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의 앞 일을 예견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 이 장은 건너 뛰어도 좋다. 


1.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어떻게 동시에 들으시는가?

  1) 한 사람씩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아무리 많아도), 동시에 수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시는가?


  2) 루이스의 설명

   (1)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삶이 한 순간씩 다가온다. 한 수간이 지나야 다음 순간이 온다. 모든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방식으로 존재한다. 

   (2) 그러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4) 하나님은 10시 30분에 100만명의 기도를 들으실 여유가 영원무궁하다.

       예) 작가가 '메리는 책을 내려 놓았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작가가 실제로 이 글을 쓸 때는 두 순간 사이에 상당히 긴 시간이 존재했을 수 있다. 

       예) 맥 컴퓨터에서 익스포즈 효과(동시에 하던 작업이 펼쳐지는 효과)

   (5)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충분히 돌보실 여유가 무한이 있으신 분이다.(순간적 위험속에서도)

   (6)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양, 각 사람과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 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양 그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 지냈던 시간은 하나님의 긴 시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인가? 


  1) 시간의 흐름이 선이라면

  2) 하나님은 선을 긋는 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흘러 가지만, 종이 위에 그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완전한 실재로, 역사가 없으시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재의 일부가 없어졌거나, 아직 얻지 못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3. 하나님이 우리의 앞 일을 알고 계시다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1)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이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이, 오늘처럼 보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날이 지금이다. 

  3) 하나님은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이 아직 안왔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미 왔기 때문이다. 

  4)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 하나님은 내가 내일 무엇을 하실지 이미 다 알 고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내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루이스에게는 이 개념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고, 이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잊어버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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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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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삼위이신 하나님


  1. 지난 장에서 살핀 것 
  1.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낳으시지만, 사람은 만드신다.
  2. 성부 하나님이 낳으신 존재는 그와 똑같은 종류의 존재, 즉 하나님이다.


  1.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
  1.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 모든 것의 배후에 신비스러운 존재는 인격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 기독교만이 이런 존재를 설명함. 

  1. 어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이 이생을 거친 후 하나님께 흡수된다고 생각한다. 

  : 물 한 방울이 바다로 흡수되듯이, 인간의 운명도 그렇게 된다고 생각함. 


  1.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
  1. 1차원에서는 선만을 그릴 수 있고, 2차원에서는 도형을 그릴 수 있다. 3차원에서는 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차원이 높을 수록 실제와 더 가까워진다. 
  2. 1차원에서는 선 밖에는 그릴 수 없지만, 2차원이 되면 선과 더불어 면도 그릴 수 있게된다. 높은 차원으로 간다고 해서 이전것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3. 정육면체는 6개의 정사각형이 모여서 이루어 진다. 
  4.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도 이와 같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한 인격은 한 존재이다. 두 인격은 두 존재이다. 그러나 신적인 차원에서도 인격체들이 있다. 이 인격체들은 그 차원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정육면체가 하나의 정육면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것처럼 말이다. 
  5. 세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존재인 하나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6.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기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기도를 돕는 자이며 기도의 주체, 즉 원동력이기도 하시다. 
  7.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침실 안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조에) 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다. 하나님 안에 이끌려 들어가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다. 
  8. 신학이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신학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실제로 경험된 것을 정리하여 정의한 것이다.
  9.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위를 연구하고, 동물을 연구하고, 사람을 연구하는 것과 또 다른 차원이다.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 
  10. 만약 기독교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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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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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1. 만드는 것과 낳는 것


  1. 이제부터 신학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경험한 사람에게 교리라는 것은 한낱 시시하고 현학적인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2. 마치 대서양을 경험한 사람에게 교리는 지도에 그려진 대서양의 그림 같겠지만, 기억할 것은 대서양의 지도는 대서양을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그려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해변을 걷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지도가 불필요해 보이지만, 해변을 건너 가려면 지도가 필요하다. 
  4. 교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다만 지도에 불과하다. 더 멀리 가려면 반드시 지도를 봐야 한다. 
  5. 신학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잘못된 개념(여러가지가 뒤섞인)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오늘날 유행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옛날에 폐기된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기독교를 하나의 고귀한 권고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1.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2.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3.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다. 
  4.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것은 또한 무슨의미인가? 


  1.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
  1. 개념 정리: 낳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 다는 것이고, 그것은 같은 종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창조한다는 것은 다른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는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3.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조각한 상이나 초상화에 가깝다.)
  4.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닮은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과 같지는 않다. 그 중에서 가장 하나님과 닮은 존재가 있다면 바로 사람이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는데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영적인 생명이다. 
  1. 자연적인 생명은 바이오스(Bios)
  2. 영원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자연 세계를 만들어 낸 생명은 조에(Zoe)
  3. 따라서 사람이 바이오스를 가졌다가, 조에를 갖게 된다는 것은 석상이 진짜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4. 기독교는 이 세상이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이다. 그런데 이 작업실에서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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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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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1) 


1.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믿음의 두가지 의미

  1) 단순한 신념(Belief): 기독교 교리를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루이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충격을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충분하면 믿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충분한 증거에도 믿지 못한다면 명석하지 못다하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한데도 믿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음과 이성은 하나가 되어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상상이 반대편이 되어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하는 이쁜 아가씨에게 속지 말아야지.... 사람은 물에 뜨니까 수영 선생님의 손을 놔도 괜찬지...


기독교가 충분히 믿음만한 증거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거나, 이런 저런 공격을 받고 기독교를 믿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충분한 증거에 의해 생긴 믿음이 흔들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입니다. 기분은 이성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이다. 따라서 믿음의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한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의 대부분이 분명한 논증을 거쳐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해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1) 선을 행하기 위해 한 주간이 아니라 6주간 정도를 살아보도록 하자.(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에게 실망할테니...)

   (2)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 누워서는 바람의 세기를 알수 없다. 바람을 거슬러 본사람만이 바람의 세기를 안다. 따라서 정작 악한 사람들은 악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왜? 늘 악게 굴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악과 진짜 싸워보기 전에는 악의 힘을 알 수 없다. 

   (3) 이 상황이 되었을 때(하나님은 이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 순간 팔다리를 움직이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 사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 아빠, 아빠 선물사게 6펜스만 주세요.


믿음(2) 


두번째 믿음은,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지킬려고 힘껏 노력해 본 다음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까지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는 믿음이 두번째 믿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고 해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에 대한 조건을 제기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다 틀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덕적인 노력을 기울여 봐야 항복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한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선행을 강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의 역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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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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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1.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도피주의나 몽상의 한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다. 


2.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만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4. 천국에 대한 생각들

  1) 어리석은 사람이 택하는 방식: 지금 현재의 부족함을 모두 환경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조건을 바꾸어가면서 뭔가 신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보낸다. 이번에는 진짜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매번 실망하게 된다. 


  2) 환멸에 빠진 '지각 있는 사람'이 택하는 방식: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환상이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려 버린다. 어린적에 누구나 가지는 꿈 정도,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난친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환상을 좇는데 쓰이는 기능을 억제하려고 한다. 앞의 경우보다 낫다고 볼 수 있지만.. 

 

  3) 그리스도인의 방식: 피조물이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는 채워 줄 것 또한 있는 것이 당연하다. 배고픔을 느끼니까 음식이 있고, 성욕을 느끼니까 성관계라는 것이 있고,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채워질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정리]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서 이 소망은 나중에야 이루어지겠지만, 그 욕구가 다른 욕구에 밀려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천국을 하프나 타면서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어린이처럼 읽은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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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만의 덕목 3가지: 믿음, 소망, 사랑.


1. 사랑을 다루려고 한다. 사랑은 앞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부분적으로 다루었다. 


2. 사랑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선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랑이 자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 

  1) 자선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2) 기독교적인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의지의 상태로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3. 사랑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한다고 해서 꼭 호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좋아 한다는 것은 호감이 있다는 것인데, 좋아한다는 것은 선과 악의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4. 물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데 도움이 된다. 


5. 비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는 몇 몇 사람에게만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쓴다. 그러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6. 선과 악은 복리로 증가한다. 


7. 루이스는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라고 제안한다. 가만히 앉아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라. 


8. 사랑한다는 것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의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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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도덕과 가장 날카로운 차이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나누려 한다.  이 악은 누구에게나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와 같은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누구에게라도 그와 같은 악이 나타나면 한치의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 악이란 바로 교만(Pride)과 자만(Self-Conceit)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적인 덕목은 <겸손>이다.


1. 겸손은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의 중심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은 교만이라는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된 것이다. 교만은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다.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교만한 행동들

  1) 두 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 교만이란 그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남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아 간다. 

  2) 어떤 물건이 충분하지 못할 때: 탐욕이 경쟁으로 몰아갈수도 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을 때에도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3) 돈에 대한 탐욕과 교만은 차이가 난다. 탐욕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가, 더 좋은 먹을 거리를 위해 돈을 갖고 싶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어느 정도 이상되면 더 많이 쓰기 위해서 더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는 다른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이것의 극대화가 권력욕이다. 권력은 교만한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는 것만큼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없다. 

  4) 예쁜 여자가 가는곳마다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성적 충동 때문은 아니다. 교만이다. 

  5) 교만은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경쟁자로 여기고 적으로 여긴다. 이것이 교만의 특성이다. 


3. 교만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깨뜨리고 상호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4. 교만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1) 이들은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2)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 해 볼 수 있다.

    :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특히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5. 인간의 다른 죄는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래서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종종 교만이 선한 일에 효과적인것 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자신의 체면과 수준 혹은 품격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요청할 때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상을 치료하는 정도일 뿐, 실은 더 큰 병, 암을 유발하는 원재료가 되는 것이다. 


6. 이야기를 마치기 전 있을 법한 오해를 풀어주는게 좋을 듯 하다. 

  1)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칭찬해 주는 그 사람이 즐거워하고 좋아 하니까 기쁜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그런 칭찬을 받고 상태를 즐겁게 해주다니 나는 대단해! 로 가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으로 빠지면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2) 허영심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만에 비한 그래도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허영심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다른 사람을 얕본 나머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3)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교만인가요? 루이스는 만약 그 의미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에 경탄을 느낀다'는 의미라면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야 그것이 유명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완전한 영적 파멸로부터는 좀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교만을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교만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교만의 상대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5)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는 것에서 부터 겸손이 시작된다. 


[결론]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우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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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도덕 중 <순결>보다 더 인기 없는 것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용서가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 그러나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에 화를 내게 된다. 


2.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용서다.

  1)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명백한 사실이다.)

  2) 용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먼저 생각하면 좋다.

   (1)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먼저 쉬운 대상과 일로부터 시작하라. 

 

   (2)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은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싫어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제 자신의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저 자신은 사랑해 온 것이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이 그와 같은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를 미워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행해야 한다. 

  2)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이다. 

  3) 기독교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 본다.(루이스 입장)

    (1) 살인하지 말라는 <죽이다>와 구별되는 의미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관계가 모두 간음이 아니듯, 구분되어야 한다. 

    (2) 평화주의자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견해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반(세미)평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4. 그렇다면,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벌을 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2)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어야지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해서는 안된다. 

   (2)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누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 들때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 

  3)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의미다. 

  4)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것이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와 상관없이) 대하듯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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