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것 같은 열왕기상도 꾸준히 하다보니 금세 마치게 됩니다. 오늘은 열왕기하 1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아합이 죽고 이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아합 왕이 죽고 나서 국력이 약화되었다.(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했다.)


2. 아하시야가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1)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다.(병이 쉽게 낫지 않고 오래갔다.)
  2) 아하시야는 신하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는가를 물어보게 하였다.
  3)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서 왕의 사자를 만나게 했다.
  4) 엘리야는 왕의 신하를 만나서 이스라엘에 땅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다그친다. 그러면서 아하시야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한다.
  5) 왕의 신하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아하시야는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것을 알게 됨


3.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부르기 위해 오십부장을 세 번 보냄
  1) 왕은 엘리야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냄
    : 엘리야가 불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함
  2) 왕은 두 번째 오십부장을 다시 보내 엘리야를 불러오게 함
   : 두 번째 오십부장도 엘리야가 불을 내려 모두 죽게 함.
  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을 다시 보내 엘리야를 부르게 함.
   (1) 세 번째 오십부장은 무릅을 꿇어 엎드려 엘리야에게 간구했다.
   (2)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3) 그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두려워말고 내려가라.
 4)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에게로 내려가서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말하였고 왕은 죽었다.
   (1)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었기에 여호람(아합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반복되는 문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 (3, 6, 16절)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이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아합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합의 죽음은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속국이었던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게다가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만나고, 쉽게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던 아하시야는 에그론에 있는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해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처사였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데, 자기 백성이 다른 신을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묻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호와는 사자를 보내 엘리야에게 이 일을 알리고 엘리야는 왕의 사신을 만나, 아하시야의 잘못을 책망하고 결코 낫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을 대언한다. 이 소식은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엘리야를 불러야 겠다고 생각했다.(내 생각에는 아하시야가 정신을 차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너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엘리야를 부르기 위해 보낸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가 모두 불에 태워져 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이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엘리야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중에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는 이세벨에 대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자신과 오십명의 생명을 귀히 여겨달라고 하는 요청을 했고, 그 요청은 엘리야의 마음을 움직였다.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 내려갔고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하고 결국은 아하시야는 아들도 없이 죽게 된다. 그래서 그의 형제 여호람이 왕이 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하시야의 죄는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데, 다른 신을 찾아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질투는 괜한 질투가 아니다. 자기 백성, 자기와 언약을 맺은 백성 사이의 질투인 것이다. 자기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찾아갔다면 질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질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혼한 관계가 아니거나, 건강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시야가 다른 신을 찾으러 가자, 하나님은 질투하시어 엘리야를 보내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쿨하지 않다. 그의 자녀들의 관계에 있어서 혹 그의 영적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쿨하지 않으시다. 관계없는 남이라면 모를까 어찌 자기이 자식에게 있어서, 아내에게 있어서 쿨하실 수 있는가? 그럴수 없는 분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기에 작은 잘못에도 발끈하시는 것이며, 헛된 눈길에 하나님은 민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량이 넓은 분이시지만, 쿨하시지는 않으시다. 그의 자녀, 그의 아내에게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은 책임있는 가장이시요 남편이기 때문이다.

 

2. 두려움(이세벨 트라우마)은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몇 장면 중에 한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무고한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인들을 두번이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무고했다는 것과 엘리야가 잔인하게 이들을 죽게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두번이나 반복해서 행했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일을 행한 자가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던 엘리야라니...

그러나 엘리야도 사람이다. 엘리야는 큰 권능(불 내리는 권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도 역시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큰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이세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왕상 19장)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게 한 후 이세벨이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두려워 숨었고 오히려 죽기를 바랬다. 조금전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했고, 그로 인해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불렀지만, 그 배후에는 이세벨이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또다시 이세벨 트라우마가 생각났고, 두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자신의 힘을 남용하는데까지 가지 않았나 싶다. 두번의 대형 사고 이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있은 후 엘리야는 세번째 찾아온 오십부장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내려간다. 

강력한 힘을 불완전한 존재가 갖게 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악인이 강력한 힘을 가질 때, 세계의 평화가 위협받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엘리야는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큰 상처로 말미암은 두려움이 함께 공존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힘이 잘못 쓰여진 사건이 오늘 본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흥분한 엘리야를 찾아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 엘리야는 불완전 했지만, 통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통제를 따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았다. 불완전할 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너무 큰 잘못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힘을 가진 자여,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다스려라. 주 안에서.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결국 아합의 운명은 여기까지군요. 자신의 죽음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더욱 비참하고 부끄러운 죽음을 맞게 되네요...

 

[정리1. 내용의 정리]

1. 아람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아합 왕.
  1) 유다 왕 여호사밧을 불러서 <길르앗 라못>을 아람으로부터 도로 찾자고 제안함
  2) 여호사밧이 흥쾌히 함께 할 것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제안 함.
  3)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 400여명이 모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장했다.
  4) 여호사밧은 이 외에 다른 선지자를 찾았고, 아합은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마지못해 데려 오도록 했다.
  5) 그 사이에 <시드기야>라는 선지자는 직접 철로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보이며 이것으로 아람 사람들을 찔러 멸하실 것이라는 쇼를 하기도 했다.
  6) <미가야>를 데리러 간 사신은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들처럼 왕에게 길한 것으로 보고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7) 미가야는 아합 왕 앞에 섰을 때, 미가야는 처음에 다른 선지자들처럼 아합 왕의 승리를 이야기 했다. 그러자 오히려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재촉하고 미가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 중에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사실을 말한다.
  8) 미가야는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누가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영이 거짓말을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게 해서 죽게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 왕에게 화를 명하셨다고 미가야는 대언한다.
  9) 이 말을 듣고 있던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면, 어찌 하나님의 영이 나를 떠나 너에게로 갔다고 하느냐 했고, 미가야는 네가 골방에서 숨는 날 그것을 볼 것이라고 했다.
  10) 아합이 자신이 평안이 돌아올 때까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어 고생을 좀 하게 하라고 하자, 미가야는 왕이 평안하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말한다.

2.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게 된 아합.
  1) 아합은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왕의 옷을 벗고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갔다.
  2) 아람의 지휘관은 특수요원 30명에게 지시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합 왕만 죽이라고.
  3) 처음에는 아람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이 아합인 줄 앍고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나, 여로보암은 자신은 아합이 아니라고 하자 아람은 그를 좇기를 멈추었다.
  4) 그러다가 어떤 병사간 쏜 화살이 우연히 아합의 갑옷 틈새를 통과하여 몸에 박혔다.
  5) 전쟁이 맹렬한 상황이라, 아합은 후송되지 못하여 결국은 피흘려 죽게 된다.
  6) 왕의 주검은 사마리아에 장사하고,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아합은 죽음을 맞이 했다.

3. 유다 왕 여호사밧에 대한 간략한 내용
  1) 35세에 왕이 되어 25년 간 다스렸다.
  2) 아버지 아사와 같이 모든 길로 행하여 돌이키지 않았고 여호와 앞에 정직했다. 그러나 아직 산당은 폐하지 못했고,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는 드려졌다.
  3) 여호사밧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과 더불어 화평했다.
  4) 아사 왕의 시대에는 남아 있던 남색하던 자들을 그 땅에서 모두 쫓아냈다.
  5)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다.(유다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4. 이스라엘에서는 아합이 죽고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1) 왕이 되어 2년간 다스림.
  2)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과거 조상들의 죄를 따라감.
  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함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노하게 함이 아비와 똑같았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의 구체적인 죄악 세 번째가 언급되는 장면이면서 결국은 아합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아합 시대는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우호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아합은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으로부터 길르앗라못을 빼앗기를 원했다. 여기에 여호사밧은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했고,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지자 4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합의 승리를 보장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다른 견해를 말하는 선지자)를 찾았고, 아합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미가야 선지자가 왔다. 미가야 선지자는 400여명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게 하시려고 거짓 영을 통해 보낸 내용이고, 하나님은 아합이 죽게 될 것을 그대로 대언한다.


이로 인해 미가야는 시드기야라는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아합에게는 옥에 갇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누가 참 하나님의 대언자인지는 그 이후에 밝혀지게 된다.


아합은 아무래도 미가야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왕의 옷을 벗고 일반 병사들의 옷을 입고는 전쟁에 출전한다. 그로 인해 아람의 지휘관들은 아합을 잡지 못해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합은 전혀 예기치 못한 활에 맞는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전쟁이 한창이라 그 자리를 피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결국 아합은 너무 어처구지 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아합의 시신은 사마리아 성으로 옮겨졌으나, 아합을 실은 병거는 사마리아의 한 못에서 씻게 되는데 그 씻을 때 닦인 피를 개들이 핥게 됨으로 아합의 최후가 비참하게 되고 만다. 그 씻은 못이 창년들이 목욕하는 것이라는 것을 언급한 것은 아합의 죽음이 더욱 비참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악을 행했고, 바알을 섬겼다. 그는 2년 정도 밖에는 통치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남유다에서는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뒤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그래도 정직하게 잘 감당했다. 물론 산당까지는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정리3. 묵상 및 적용]

1. 그냥 <죽음>을 피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게된 아합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싫어했지만, 미가야 선지자의 말은 아합의 마음 속에 오래 남았다. 혹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왕의 갑옷을 벗고, 병사의 갑옷을 입었다. 그것이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아람의 지휘관들이 오히려 여호사밧을 쫓아갔으니까... 그리고 아합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차리질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왠걸. 아람의 한 병사가 쏜 화살이 우연히 아합을 맞췄다.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신속하게 조치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 중앙에 있었고 그 자리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출혈은 과다하게 되고 아마 과다출혈로 죽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작은 상처를 신속히 조치하지 못해 왕이 죽게 된 것이다. 그의 피를 씻은 물은 개가 핥았고, 그 못은 또한 창기들이 목욕하는 부정한 못이었다.

아합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 답게 죽고 만다. 왕의 권력만 있었지 왕다운 면모가 없었던 아합은 어찌 될 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해 부끄럽게도 병사의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정말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죽는가는 그 사람의 인생 마지막의 마침표가 되는 것이니 만큼 더욱 중요하다.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생명에 연연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 앞에서라도 지켜야 할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겠는가?

죽더라도... 아름답게 죽어야 하겠다. 품위있게. 주님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2. 다른 견해를 듣고자 했던 여호사밧

아합에 비해 여호사밧이 돋보이는 것은 400명의 선지자의 소리 외에 다른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아합은 미가야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늘 안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런 사람들의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나를 비판하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이가 많고, 권력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여호사밧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여호사밧의 강점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소리가 있을 때, 그것은 분쟁처럼 보일 수 있고 시간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다. 괜한 딴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해야 한다.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논리와 그 사람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자가 없는 회의는 어쩌면 거짓 영이 지배하는 400명의 선지자와 같은 상황일 수 있는 것이다.

반대자의 소리를 듣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사람을 품고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짜 리더가 될 자격을 가진 것이다. 그런 리더가 세워지길 간절히 고대한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페이지 43면.

교회와 교단을 비롯한 모든 복음주의 기관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통 신앙을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복음주의자의 자세다. 이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전통과 신조에 변함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더라도, '전통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새롭게 보고 나서 그런 결론을 내린다. 복음주의자는 개혁자로서 늘 개혁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재점검하지 않는 전통주의에서 나타난다.

------------

이와 같은 신앙인을 <구도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파악해 가는 과정에 선 사람들. 구원의 시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가는 <구도자>적인 태도가 우리 신앙에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전 선조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하면서도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금 이 시대에 적실한 답을 찾아 가는 <구도자>적인 삶이 전통주의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매일 매일을 성경으로 살피는 삶이라 여겨진다.

그렇다고 저자가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를 무시하거나 전통을 버리는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고 시간을 낭비할 공산이 크다"고 말한다.(45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믿으면서도 믿는 바를 의심하자".(45면)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