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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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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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07_룻2:14-16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2:14-16]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두 번째 장면이 나온다. 식사 때가 되어 식사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모습이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을 특별히 초청한다. 1) 떡을 먹으며 2)초에 찍으라 권한다. 3) 볶은 곡식을 주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였다. 

식사가 마치자 룻은 자리를 일어서려고 했다. 그 때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명하여 룻에게 특별한 혜택을 준다. 

1) 곡식 단 사이에서 줍도록 하라 2) 그를 위해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으로 줍게 하라 

보아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룻에게 매우 큰 은혜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장요약]

1.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장면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1) 보아스의 곁으로 초대했다.

  2) 떡을 먹으라고 주었다. 

  3) 초에 찍어서 먹도록 했다. 

  -> 볶은 곡식을 배불리 먹고 남았다. 

2. 룻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 또 다시 룻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1)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라.

 2) 룻을 위해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리도록 하고 그래서 룻이 줍도록 하라. 

 3.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축복을 했고(2:12) 룻은 그 보호하심을 보아스에게 받기를 원했고(2:13) 보아스는 실제로 자신이 베풀수 있는 은혜와 혜택을 룻에게 지금 베풀었다.(2:14-16)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룻이 볼 때 보아스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여겨졌을 것이다. 보아스는 상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대리하는 존재로 룻기에 등장하는듯 하다. 

  1) 룻과 같은 약자들의 편에 서는자

  2)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오는자를 거절하지 않고 품어주시는 분

  -> 보아스는 말로만 하는 축복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지금 그 복을 베풀고 있는 존재로서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그와 같은 분임을 보여준다. 


3. 보아스의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1) 초대, 떡을 먹으라 -> 초에 찍어서

  2) 곡신 단 사이에서 주으라,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 줍게 하라.

  -> 은혜를 배푸시면서도 받는 자로 하여금 받을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신다. (추수한 곡식을 그냥 줄 수도 있을 텐데.. 줍도록 곡식을 버리게 하여 줍는 자의 권리를 통해 얻도록 하신다. 주울 수 있는 능력이 핵심이 아니라, 주울 것이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핵심이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혜택을 생각해 보자

   -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먹을 것을 주되 먹는 것만 줄수 있지만 보아스는 먹을 것을 주는 것에 끝나지 않고, 자신의 곁으로 불러서 먹도록 했고 초에 찍어 먹으라고도 했다. 

  => 선을 행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은 좀 다르다. 선을 행하되 최소한으로 할 수 있다. 먹을 것을 주는 것으로. 그러나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진심어린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이다. 동정은 먹을 것을 던져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식탁으로 초대했고 더 맛있게 먹도록 '초'를 건네주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환대다. 

2. 보아스의 은혜를 보면,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인간의 행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보아스는 곡식단에서 의도적으로 빼어 룻이 줍도록 했다. 

  - 룻은 곡식 단에서 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둑질이다. 룻은 떨어진 것 만을 주웠다. 보아스는 곡식 단에서 일부를 떨어뜨려 룻으로 하여금 줍도록 했다. 은혜는 무엇인가? 보아스가 곡식 단에서 일부를 룻 앞에 떨어뜨린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무엇인가? 과도하게 떨어진 곡식 단의 일부를 줍는 것이다. 룻이 곡식을 줍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보아스가 곡식단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얻을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은혜와 행위는 이와 같은 유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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