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구약성경과 신학적 다양성_지혜문학에 나타난 다양성]


1. 잠언서

 

  1) 잠언서를 인생 지침서로 오해하기 쉬우나 잠언의 다양성을 보면 단순한 인생 지침서는 아니다. 

   

     잠언 26:4 / 26 대조


  2) 잠언을 읽고 외운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읽을 수 있는 지혜, 즉 어떤 잠언이 어떤 상황에 적절한 것인가를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행할 길이라는 것은 매우 다양한 요소가 반영됨)


잠언 26:4,5 부자에 대한 말씀이 서로 다른 듯 하다. 


  3) 상황에 따라 둘 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옳고 그른가의 여부가 아니라, 언제 옳은가 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른 지혜) 

  4) 이런 잠언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잠언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면, 잠언서 자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2. 전도서.


  1) 전도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전도서 자체 내의 다양성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서의 가르침과 주류 구약신학 사이의 다양성이다. 

  2) 전도서 내적인 모순 구절(전도서 7:3 과 8:15)

  3) 전도서 외적인 갈등 구절(전도서 2:10 과 민 15:39)

  4) 최근 많은 주석가들은 내부적 갈등을 저자의 의도라고 주장한다. 모순들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에도 똑같은 모순들이 존재함을 보게 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5) 전도서의 저작 의도는 모순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전도자(코헬렛)는 지혜자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혜자는 아니다. 그는 잠언서의 지혜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의 실존적 문제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이기는 하나,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라고 전도자는 말한다. 이 또한 지혜인 것이다. 

  6) 이와 같이 다른 관점을 가진 전도서와 잠언서가 모두 구약성경 안에 나란히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잠언서와 전도서가 구약성경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의 다양성이 단순히 해소되어야 할 문제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양성은 구약성경 문학 안에 면면이 엮어진 핵심요소이다. 

  7) 이 다양성이 혼돈이나 오류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인간의 드라마가 다양하므로 성경이 그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성육신의 유비로 본다면)


3. 욥기


  1) 욥기는 신명기에 나온 인과응보의 원리와는 다른 논리의 가르침을 준다.

  2) 죄없는 자가 당하는 저주

  3) 욥기는 독자들에게 인과응보의 문제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4)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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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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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고대근동 문헌들]


1. 신명기와 히타이트 종주조약


  1) 성경에는 있었지만, 고고학적으로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던 문명이 히타이트 문명이었다. 

  2) 20세기 동안 수차례의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빛을 보게 되었다.(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문명)

  3) 발굴품 중에 종주국과 종속국 사이에 맺은 조약문서가 있는데 이 조약문서가 신명기 전체 구조와 비교가 되며, 또한 십계명의 구조와도 비교가 된다. 

  4) 그 유사성에 대해서는 책 45쪽 참조

    (1) 조약문서는 먼저 종주국 왕의 이름을 밝히고, 그가 종속국을 위해 베푼 업적을 나열하는 것으로 서언이 시작된다.

    (2) 히타이트 조약문서는 역사적 서언에 이어 몇 가지 법조항들을 제시한다. 종속국들이 지켜야 할 규정들...

    (3) 더불어 종속국이 그 충성을 파기했을 때 신들에 의해 응징받을 것을 명시함.

    (4) 그 다음으로 축복과 저주가 나열된다.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불순종하는 자에게 저주를 .

    (5) 두 개의 돌판에 새겨졌다. 십계명도 두개의 돌판에 있었던 것과 유사함.

    (6) 신명기의 구조는 히타이트의 구조와 유사하다.(46쪽 참고)


[저자 정리]

신명기나 십계명이 히타이트 조약문서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서로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십계명이나 신명기가 당시 고대근동의 문서양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 


                                                                   히타이트 상형문자



2. 다윗과 텔 단 비문


  1) 아람어로 쓰여진 텔 단 비문의 발견(주전 9세기 혹은 8세기의 것으로 추정)

  2) 이 비문에 <다윗의 집>이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의 다윗이 주전 10세기 경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왕 다윗 왕을 가리치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 일었다. 많은 학자들은 다윗과 그 자손들이 그 당시에도 유명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되었다. 


3. 히스기야와 실로암 터널 비문


  1) 1880년 예루살렘에 있는 한 터널에서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터널은 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통과하게 되었다. 

  2) 터널은 양쪽에서 인부들이 뚫어 가다가 중간에 만나서 뚫은 터널이다. 비문은 그들이 마추친 순간을 기록한다.(참고. 48쪽)

  3) 이 터널에 히스기야나 산헤립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왕하 20:20절에 기록된 터널공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4) 특히 이 비문에 눈에 잘 띄는 곳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터날 안쪽에 들어가 잘 안보이는 곳에 있는데 이는 이 비문이 왕의 업적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그 당시 일했던 사람들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오므리와 메사 비문


  1) 메사는 고대 모압의 왕으로서 주전 830년 인물이다.(역사적) 그는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2) 메사는 구약 성경에도 언급된 왕이다.(왕하 3:4-5)

  3) 메사 비문이 중요한 것은 비문이 모압 왕 메사의 역사성을 증거해 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참조. 50쪽)

  4) 이 비문을 통해서 오므리 왕이 얼마나 메사를 괴롭혔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확인시켜주고 보충해 주는 중요한 성경 외적인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5. 잠언과 아메네모페의 교훈


  1) 구약성경의 잠언에는 <아메네모페의 교훈>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지혜서와 매우 유사한 부분이 나온다. (참고. 51쪽)

  2)  잠언 22:17-24:22까지와 <아메네모페의 교훈>은 분명히 서로 연관돼 있고, 그들의 유사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3) 아메네모페의 교훈은 잠언에 비해 더 오래된 것(주전 1200년)인데, 이것은 잠언의 기록자가 아메네모페의 교훈을 미리 알았고, 참고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집트 문자_파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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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3장의 말씀을 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불신자나 타종교인들이 봐도)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면서 자신의 삶으로 그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도 부담을 갖지 않을 만큼 보편적인 지혜와 통찰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혀)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과 지혜와 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물론 이전까지의 기독교적인 독특한 가르침의 배경 속에서 연속적인 지침을 주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공감이 될만한 내용이기에 거부감이 없으리라 본다.

야고보서 2장에서 보여주었던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논리도, 기독교의 구원론적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부딪힘이 있는 것 같지만, 일반 상직적인 논리로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는 것에서도 야고보서가 일반인들에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와 공감이 되는 본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적 이신칭의의 교리와의 긴장감 때문에, 강단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불신자들 혹은 타교인들을 염두한 설교라면 매우 적절한 본문이 아닌가 싶다.)

그 내용을 보면  

[말의 중요성과 위험성]

오늘 본문은 말을 소재로 하는 권면이다. 특히 선생 된 자로서 말은 매우 중요한데, 말을 그 크기에 비해서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도록 해주는 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사물의 모든 것이 통제가 되어 길들일 수 있지만, 혀 만큼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혀를 통해 말을 해야 하는 일로서 선생의 일을 사모해야 할 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맡겨지기 때문에> 해야 하며 더불어 맡겨져서 그 일을 하더라도 혀를 잘 제어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혀는 온 몸을 더럽힐 수 있으며,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자랑이나 명예와 같은 생각 속에서 남 앞에서 선생이 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히려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 잘한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이유로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목회자는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청빙>에 의해서, 하나님의 부르심 혹은 교회의 부르심을 통해서,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설교하는 자리에 서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매우 소극적인 측면(내가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해야 할 말이 채워지고, 그것이 들려지기를 요청되는 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측면에서)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혜, 땅의 지혜 하늘의 지혜]

더불어 시기와 질투를 기초로 하여 자기 자랑이나 타인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그런 지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땅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서 온 지혜는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들이다.

시기와 질투를 기초론 한 자기 자랑과 거짓말은 세속적이고 악마적인 것임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내 안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자는 다른 사람 앞에 서지 말아야 하며, 어떤 말을 하는 것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지혜롭다. 말을 삼가해야 한다.

내 안에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가득할 때, 이 때는 우리 안에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같은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상태로서 그런 때에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지혜롭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건, 어떤 상황 속에서 이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 묵묵부답이 정답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가득해 지면 조심히 입을 열어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과묵한것이 실수를 덜 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너무 많으면 제 살을 깎아먹게 된다. 아니 말할 수 없 수 없을 때 조금만 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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