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해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인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두 아들 중 여종(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이삭이다. 바울은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언급한다. 이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난 아들이 아님을 말한다. 반면에 사라를 통해 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음을 설명한다. 

하갈을 통해서는 육체를 통해서, 사라(자유 있는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유'를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본다.)는 약속을 통해서, 즉 육체와 약속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고 있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온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해 냈다. 즉,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 본 것이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장소로, 애굽 여인 하갈을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여인으로 본 것은 하갈이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요, 그의 자손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니 종의 자녀 즉 율법의 종의 자녀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바울은 더 나아가 하갈을 시내 산(율법)이라고 규정하고, 지금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말함으로써(25절) 현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의 종 아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율법을 받고(시내 산) 율법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예루살렘도 여전히 율법의 자손(종의 자손)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을 율법의 종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다. 왜냐하면 하갈의 자식은 '육체를 통해서' 난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난 것과 대조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속'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라에 대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말한다. 즉 사라를 통해서 난 자손,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사라의 자녀이며 이들은 자유자의 자녀인 것이다. 이들은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율법의 종된 곳)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자유의 자녀, 약속의 자녀)요 참된 예루살렘임을 밝힘으로서 율법이 아닌, 약속을 통해서 난 자들이 참된 예루살렘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잉태하지 못한 자(사라)로 불행해 했지만, 훗날에는 큰 복의 여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유자의 자녀(율법의 종에서 벗어난)에게 큰 복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지금은 성도가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처럼 자유하는 여인이었으면서도 여종에게 위축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자녀인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은 마치, 율법의 종인 이스마엘(하갈의 아들)이 자유 자의 아들은 이삭(사라의 아들)을 놀렸던 일(창 21:9)과 같은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이 또한 바울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현재는 율법의 자녀가 자유자의 자녀를 놀리고 박해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는 '유업'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요 여종의 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갈이 사라의 요청으로 하갈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기게 된 것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그들로 인해 흔들리고 혼란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상황을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알레고리적으로 잘 풀어서 설명했다. 알레고리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를 떠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현재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입장이 무엇이고,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 혹은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까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잘 풀어서 가르쳤다. 


[묵상]


1.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까(?)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까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의 그릇된 복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들어설 수 없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끼워 넣으려 했고, 그것을 끼워 넣어야만 '복음'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디스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그와 같은 그릇된 복음을 믿고 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종의 자녀다.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임을 바울은 서슴없이 말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선을 명확하게 해주어야 했다. 


2. 복음에 율법을 끼워넣으면 사라의 자손이지만, 하갈의 자손이 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적으로만 그렇지 영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시내 산 율법의 자녀, 즉 하갈의 자녀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옛 날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불가능하게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위에 보내셨다. 즉 새로운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전 시대를 끝내고 싶으셨고,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전 시대로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 가서도 안된다. 예수 이후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죽으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하신 사역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예수 이후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의란 없다.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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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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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사기 19장] 음행을 행한 첩을 다시 데리고 오는 레위인의 모습, 다른 이방 성읍보다는 자기 민족의 성읍을 의지했는데, 오히려 자기 민족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게 되는 레위인의 상황. 그리고 그 처참한 사건의 배경 속에 너무나 중요한 존재인, 에브라임과 유다와 레위인이 주배경이라는 것이 혼란스럽게 만드는 본문이다. 혼란을 위한 장이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상황 설정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2)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 하였다. 

  3)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의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넉 달을 머물렀다.


2. 레위 사람이 자기의 첩을 데리러 유다 베들레헴으로 가다.

  1) 레위 사람은 자기의 첩을 잘 설득하여 데리고 오려고 유다 베들레헴 장인의 집으로 갔다.

  2) 첩의 아버지는 레위 사람을 반기면서 3일간을 머물게 했다. 넷째 날 떠나고자 했으나 하루 더 머물것을 제안해서 하루더 머물렀다. 넷째 날 떠나고자 했으나 장인의 간곡한 제안으로 하루더 머물렀다. 다섯 째 날 떠나고자 하자 저녁까지 머물게 했고, 또 자고 갈 것을 제안했으나 레위인은 그 집에서 더 머물기를 원치 않아 늦은 시간에 나오게 되었다. 

  3) 늦은 시간에 나온 터라 얼마가지 못해서 숙박을 해야 할 곳이 필요했다. 가까운 곳에 여부스(예루살렘)가 있었지만, 레위인은 그래도 자기 민족이 다스리는 기브아로 갈 것을 결정한다.    4)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들어갔으나 아무도 자기 집에서 유숙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녁 늦게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노인의 초대로 그 집에 유숙할 수 있게 되었다. 


3.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

  1) 노인의 배려로 하룻 밤을 평안이 머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기브아에 있는 불량자들이 노인의 집으로 찾아와 집에 들어온 손님을 끌어내라고 협박한다. 

  2) 노인이 자신의 딸과 이 사람의 첩을 내어 줄테니 손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만, 이들은 진정되지 않았다.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그들은 그 첩을 밤새도록 괴롭히고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아주었다. 그 첩은 그 집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3) 아침에 레위인이 집에 가고자 하였으나, 그 여인은 문 앞에서 죽은 채로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 여인을 데리고 집으로 온다.

  4) 그 레위인은 자기 첩의 시신을 12 덩어리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냈다. 

  5)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로 이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기]


오늘 본문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한 레위인과 에브라임 그리고 유다 베들레헴이라는 핵심적인 소재로 구성되어 있다.


한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첩이 있었다. 그 첩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여자였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레위인은 선한 마음으로 그 행음한 첩을 데리고 오고자 유다 베들레헴 장인의 집으로 갔다. 자신의 딸을 데리러 온 장인은 3일간 레위인 사위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돌아가고자 한 레위인을 붙잡고 붙잡아 이틀을 더 머물게 했다. 장인은 계속 붙잡았지만, 레위인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은 늦은 시간이지만 장인의 집을 나와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해가 떨어지고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해야 했다. 


가까운 곳은 여부스, 지금의 예루살렘이지만 그곳은 그 때까지만 해도 이방의 성읍이었다. 그래서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이 아닌 자기 백성의 성읍에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무도 레위인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노인의 배려로 간신이 머물 곳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곳에 있는 불량배들의 행패로 인해 곤란한 상황이 되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첩은 밤새 능욕을 당하고 죽게 된다. 이 사실에 분개한 레위인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그 첩의 시신을 12 덩어리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게 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함께 분개하게 된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또 다시 에브라임, 유다, 레위인 이라는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사기의 이야기 속에서 에브라임이 자치하는 비중과 유다가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유독 레위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브라임은 대부분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유다는 자꾸 에브라임과 연관되는 관계로 등장한다. 레위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구분된 지파의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매우 세속적이며 영적으로 무감각한 존재로 등장한다. 


훗날 북이스라엘의 중심과 남유다의 중심 그리고 성전의 중심이 될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임을 사사기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많은 다수의 사사들이 그 외의 지파에서 나와서 활동하고 있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2. 믿었던 자기 백성에게 오히려 배신을 당하게 되다.


레위인은 길에서 밤을 맞게 되었기 때문에 머물 곳이 필요했다. 가장 가까운 성읍은 여부스(예루살렘)였지만, 그래도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머물기 보다는 자기 백성이 다스리는 성읍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하고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은 레위의 일행을 맞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한 노인의 초대로 머물수 있는 곳을 얻긴 했지만, 불량배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레위인은 자신의 첩이 능욕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 백성에게 더 큰 피해를 입었고, 더 큰 고통을 얻게 된 것이다. 


왕이 없언 시대, 법이 없고 믿음과 신뢰가 모두 깨어진 시대가 우리가 보고 있는 사사 시대였다. 믿었던 자기 민족이 오히려 더욱 큰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시대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누가 딱히 선이고 누가 악이라고 구분하기도 어려운,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시대가 이 시대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를 보고 있는 것인지, 과거 사사 시대를 보고 있는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다. 이 모든 혼란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왕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왕을 세우자가 아니라, 과연 나는 지금 누구를 나의 왕으로 섬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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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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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15장] 갈렙은 헤브론을 정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헤브론을 정복하는 그 옆에 있는 드빌까지 정복했다. 갈렙의 열정과 에너지가 묻어나는 장면이다. 최소치로 살것인가? 아니면 최대치에 도전할 것인가? 실패하더라도 시작은 최대치로 시작해 보자! 갈렙처럼!!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유다 자손의 땅(지도를 참고해야 할 듯,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

  1) 유다 땅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설명함

  2) 유다 지파 갈렙이 헤브론(기럇 아르바)과 드빌(기럇 세벨)을 정복하다. 

   (1) 갈렙은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다. 

   (2) 헤브론을 정복하고 거기서 올라가 드빌(기럇 세벨) 주민을 쳤다. 기럇 세벨을 정복할 때에는 정복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기로 해는데 갈렙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악사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3) 악사는 출가하면서 아비에게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 샘물도 달라고 하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 

  3) 유다 자손의 기업(유다 영토 내에 있는 성읍의 이름과 그 성읍의 숫자를 알려줌)

  4) 예루살렘 주민은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63절)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쓰기]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에 대한 경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고 있다.(지도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더 손쉬울 듯 하여 정리를 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 중에서 유다 지파인 갈렙은 헤브론의 아낙 자손들을 죽이고 그 성읍을 정복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갈렙은 드빌까지 정복하기를 원했고, 정복한 자에게 자신의 딸인 악사를 아내로 주는 제안도 했다. 적극적인 의지에 발맞추어 옷니엘은 드빌을 정복하고 악사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악사는 옷니엘에게 큰 유익을 주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샘물을 요구함으로 윗샘과 아랫샘을 얻음)유다 전역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 사람들은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유다의 기업(영토)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정복해야 할 본토로 들어와서 정복사업을 마치고 제일먼저 땅에 대한 기업을 언급한 지파는 유다지파다. 이것은 유다지파가 앞으로 이루게 될 이스라엘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유다 지파 안에는 예루살렘이 있고, 베들레헴이 있다. 헤브론로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후에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적이 되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유다가 차지한 영통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고, 궁극적으로는 유다 지파를 통헤서 다윗과 메시야로 이어지는 혈통이 형성되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다. 유다 지파는 신약 뿐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부터 그 중심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성경 본문을 통해서 적용할 내용을 찾아야만 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정리된 정보를 가지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이 나중에 다른 본문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으로 가는 과정으로 얻어두어야 할 아이템일 수 있으니, 득템한 셈인 것이다. 


2. 갈렙의 헤브론 정복을 언급하고 있다.


14장에서 언급했던 갈렙의 자신감있던 고백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도 충분히 넉넉히 성취되었음을 말한다. 갈렙은 아낙의 세 아들을 멸하고 헤브론을 차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드빌(기럇 세벨)까지 점령하려 했고, 그것을 점령하기 좋은 방법(자신의 딸을 상급을 줌)을 동원하여 조카인 옷니엘은 그 성읍을 정복한다. 실제로  옷니엘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준다. 악사는 지혜로운 여인이었고, 남편에게 큰 유익을 주는 여인이었다. 출가하기 전 아버지에게 샘물에 대한 요구를 하고 결국은 윗 샘과 아랫 샘을 얻어왔다. 결국 옷니엘은 큰 복을 얻게 된 것이다. 


갈렙의 헤브론 정복은 간신이 이긴 전쟁이 아니다. 갈렙이 남은 힘을 다 쏟아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갈렙의 에너지와 열정은 그 이상이었다. 헤브론을 정복한 갈렙은 더 나아가 드빌까지 욕심을 냈다. 자신이 하기 어려운 것은 포상제도를 통해서 다른 장수를 통해 성취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는 과정 중에서 옷니엘이라는 장수가 발견되었다.(옷니엘은 사사 시대에 사사로서 다시 언급된다.)


최소치로 살것인가 최대치를 향해서 도전할 것인가에 대한 자극을 주는 인물은 갈렙이다.


3.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될 땅, 예루살렘은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여부스 족속이 강력했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이 철옹성과 같이 견고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겠다. 암튼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은 정복하지 못한 상태로 후대의 누군가를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정복해야 할 성임을 알게 된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큰 승리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완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중간 중간 보여준다. 이는 훗날 사사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남겨진 과업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 시대에 완전하게 마칠 수는 없다. 모세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후대에까지 이어져서야 완성되는 경우가 있고, 중요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에는 부족함이 없고 미진한 부분이 없다. 완벽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래서 복음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복음 외에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좀 느긋해지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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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장] 죄악이 훨씬 큰 북이스라엘보다 유다가 더 큰 책망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묵상에서 좀 다루어보았습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문맥 파악해서 정리해 보기]


1. 유다의 음란과 행악

  1) 그들은 말한다. 음란한 아내를 다시 받아 준다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는가!라고.

  2)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바로 음란을 행하는 여인과 같다. 행음하지 않는 곳이 없다.

  3) 그래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그쳤는데도 창녀와 같아서 수치를 알지 못한다.

  4) 너희가 갑자기 버린 나를 다시 찾으며, 청년 때의 보호자라 말하며 노여움을 풀라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너희들은 악을 행하고 너희 욕심을 이룬다. 한 마디로 가증스럽다.


2. 이스라엘의 케이스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유다

  1) 요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온통 행음으로 가득했다. 돌아오라고 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2) 이스라엘의 자매 유다는 이 모든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도 가서 행음하였다. 

  3) 여기서의 행음이란 우상 숭배를 지칭하는 것인데, 그 행음으로 이 땅을 더럽혔다. 

  4) 유다는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짓으로 돌아오는 척 할 뿐이다. 


3. 반전: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말씀하심

  1) 배역한 이스라엘이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으니 북으로 가서 선포하라.

  2)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니 노를 한없이 품지 않을 것이다. 

  3) 너는 오직 너희 죄를 자복하라,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라.

  4) 내가 너희를 택하여 시온으로 데리고 오리라. 내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워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그래서 이제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시 필요없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이는 자들이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그들이 행하지 않을 것이다. 

  5)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 조상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6)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너희를 자녀들 중에 두고, 너희는 나를 나의 아버지라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라.

  7) 그런데 너희들은 아내가 남편을 속임같이 확실히 하나님을 속였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4. 진실한 회개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데, 우리가 청년 때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 즉 수치 중에 눕겠고,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며 청년 때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정리2. 정리한 내용으로 내 표현으로 바꾸기]


유다는 말한다. 음란한 아내를 남편이 용서하고 받아 준다면 이 땅이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더러워지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영적으로 그 음란한 여인과 같기에 너희를 다시 받아 줄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있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창녀와 같이 수치를 모른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진심함이 그 안에는 없다. 


유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이스라엘의 자매다. 그런데도 유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도 가서 음행을 행했다. 우상을 섬겼으며 그로 인해 유다 땅을 더럽혔다. 그들은 진심이 없고 언제나 돌아오는 척만 했다. 따라서 유다에 임한 진노와 심판은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하나님은 긍휼이 있는 분이고 노를 영원히 품지는 않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요청하신다. 죄를 자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들의 남편이시기 때문이다.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은 신실하게 감당하실 것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이제 이들을 다시 시온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우고, 그들을 지식과 명철로 가르쳐서 더 이상 완악함으로 행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보좌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할 것이고, 하나니은 너희를 자녀들 중에 둘 것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유다가 이스라엘 보다 더 나쁜 이유


유다는 이스라엘과 한 민족이다. 그러나 두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 음행을 행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이른다. 이스라엘의 죄는 유다보다 급속해서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분위기에서 책망하신다.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는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돌이키기나 새롭게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한 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래서는 유다 땅 전역을 더럽혔던 것이다. 이런 유다를 하나님은 더욱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반면교사가 없었다. 그러나 유다는 바로 곁에서 반면교사로서의 이스라엘을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전혀 깨닫거나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자멸의 길로 가게 된다. 


죄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서 죄의 심각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듯 하다. 하나님은 알려주는대도, 경고하는대도, 가르쳐주는대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자들을 가장 악하게 보신다. 따라서 교훈과 책망을 듣지 않고 자기 욕망의 고집대로 사는 것만큼 큰 죄가 없으며, 돌아오기 어려운 죄도 없는 것이다. 


2. 여호와의 언약궤가 없고,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가 되리라.


하나님은 쫓겨난 자기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고, 쫓겨간 인생들은 그 분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시온으로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워서 이들을 지식과 명철로 양육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가 세워져 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것이기에 더이상 언약궤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인 백성들은 다시는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다. 부드럽게 행동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혜로운 목자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이 완전히 변화되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이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식과 명철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말씀 뿐 아니라 그분의 사역에 있어서도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지식과 명철로 가르치셨고, 지금도 가르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지금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사역을 하고 있으시다. 이는 모두 학생의 훌륭함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훌륭함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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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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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에 와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 밖의 성읍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조건과 명단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2. 그 남은 백성 중에서 제비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3.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었다.
4.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했다
5. 예루살렘 거주자의 명단(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
1) 베레스 자손 아다냐와 마아세야
2) 갑배와 살래
3) 요엘이 감독이 되었고,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다.
4) 제사장 중에
5)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제사장)
6) 레위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기도할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7) 성 문지기..

8) 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다.

9) 유다의 아들 세라의 자손 곧 므세사벨의 아들 브다히야는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다.
10) 유다에 있던 레위 사람의 일부는 베냐민과 합하였다

[묵상과 적용]
1.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먼저 있어야 할 대상을 배치하고, 그외의 사람들은 제비뽑아 결정함.

모든 사람을 제비뽑지 않았다. 성전을 중심으로 섬겨야 할 대상을 먼저 세우고 그 나머지 인원을 제비뽑았다. 민주적 절차가 우선인 지역이 아니라 사역과 사명이 우선인 지역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권이라기 보다는 사명이었다.

사명과 직책에 의한 혜택과 특혜는 구별되어야 한다.

2. 예루살렘 외의 유다 땅에도 흩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예루살렘이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유다에만 살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주변 도시가 발달하고 견고해야 예루살렘도 든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모두 중요하고 중심적인 일만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조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보조적인 역할을 해주는 지체가 있을때 중심적인 일도 감당하며,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보조적 역할의 도움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인근 주변에 살아야 하고, 누군가는 2차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누구나 부인하지 않지만 문제는 1차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2차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잉영의 존재로 인식하고 무시하는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역으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열등감에서 오는 불편함일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못하지만 원했던 사람들에게 복을 빌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중심이 되지 못한자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회가 위의 갈등을 해소해 주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서로를 잉여의 존재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고 서로의 상황에 복이 임하기를 원하는 관계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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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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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느헤미야로 들어왔습니다. 에스라에 이어지는 성경인데, 역사적인 시점으로 볼 때, 스룹바벨로부터는 93년 시간 차, 에스라의 귀환으로부터는 13년의 시간 차이를 가지는 이야기 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한 재 배열]

 

1. 느헤미야가 들은 유다 땅 예루살렘의 형편(1-3절)

1)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있을 때의 일이다.(B.C. 445년)

* 에스라의 귀환은 아닥사스다 왕 7년 다섯째 달에 있었던 일이다.(B.C 458년, 13년 전)

* 고레스의 명령으로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한 때가 주전 538년.(93년 전)

2)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들 중 동생 하나니로 부터 그 형편을 듣게 됨.

(1) 그 지방 거기에서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2)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을 불탔다.

2. 예루살렘의 소식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4-11절)

1) 그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함.

2) 느헤미야의 기도

(1) 하늘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2)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3)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모세의 명령한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지금 당하고 있는 자신들의 형편이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인하고 고백함.

(4) 그러나 하나님이 흩으신 곳에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서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기억하소서.

(5) 이 백성들은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님의 종들이요 백성입니다.

(6) 주여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3. 그 때 느헤미야는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11절)

 

[정리2. 본문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 재 배열]

 

느헤미야의 이야기다.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보다 13년 후의 일을 다룬다. 스룹바벨의 귀환과는 93년, 성전 재건과는 73년 이후의 일이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100여년 전에 1차 귀환한 백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나아진게 없다. 여전히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동포들은 환난과 능욕 가운데 살았고, 성은 허물어진 상태며 성문들도 불타 재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수할 여력이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을 했을 때(93년 전), 방해 속에서도 성전을 재건했을 때(73년 전), 에스라가 2차 귀환하여 개혁을 시행했을 때(13년 전) 경건한 유다인들은 뭔가 기대했을 것이고, 특히 멀리 타국에 있은 신실한 유다인들 중에는 자기 고향 예루살렘에서 뭔가 새로운 일과 옛 영광의 회복이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첫 귀환 후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성전의 재건도 에스라의 개혁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 땅의 자기 백성은 비탄 속에 방치되어 있는 듯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의뢰하며 고민하던 유다인이 있었으니 그가 당시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헤미야였던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시작된 돌아온 백성 공동체는 처음 기대하고 꿈꿨던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건축한 후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도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적인 어려움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막혔던 길도 열여졌다. 그러나 내부적인 것은 그렇지 않았다. 모세의 말씀을 따르겠다던 백성들은 금새 타락한 것이다. 성전은 다시 엉망이 되었고, 구별된 백성을 통해 세운 귀환 공동체는 다시 이방 여인과의 결혼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1,2차 귀환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설것 같았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 이후 사사시대에 혼잡했던 모습처럼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단순한 땅의 귀환, 성전의 재건, 직분의 회복, 제사의 다시 드려짐 만으로는 예루살렘 언약의 성취가 필요충분의 조건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귀환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외부로부터의 하나님의 역사는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없이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를 주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신약 시대에 와서 강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그런 측면에서 신약시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더불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느헤미야가 다시 붙잡았던 것은 다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죄를 지어 온 땅에 흩어졌을지라도,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9절)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느헤미야는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회복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도 수차례의 회개과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고도 형편이 나아진 것이 없었다. 절망하게 되고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결과를 미리 볼 수는 없었지만,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그 약속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며 기도했다.

  다시 시작하는 믿음, 다시 도전하는 믿음, 다시 희생하는 믿음.

  느헤미야는 수많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안정된 자신의 상태를 버리고 다시 그 실패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약속을 끝까지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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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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