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Ming Jun Tan

Photo by Ming Jun Tan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하기]

12절.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절.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절.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절.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성경 내용 정리하기]

1. 성령님은 예수를 급히 광야로 몰아가셨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시험을 받았다. 들짐승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문화 공간이 아닌 자연 세계에 있었음을 말하는듯 하다. 그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험을 잘 통과하셨음을 보여주는듯 하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 시험도 필요한 과정이지만(성령이 인도하셨다는 측면에서도) 예수님은 잘 통과하셨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서술해가고 있다. (12-13절)

2. 복음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복음의 시작을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하는 세력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통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고, 우리가 해야 할 일'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촉구를 하는 것으로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셨다. (14-15절)

3. 그리고 예수님은 해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고기잡는 어부를 선택하셨고 그들은 그물과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곧 좇았다. 첫 대상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였고, 그 다음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었다. 이들은 곧 예수를 따라갔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자신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를 따라간)' 첫 제자들이었다.(16-20절)


[질문하기]

1. 마가는 왜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서 자세한 기술을 하지 않았을까? 드라마틱한 스토리인데.

  1) 마가는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해나가고 있는듯 하다. '곧'이란 표현이 오늘 본문에서만 3번 언급되고 있다. 신속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굳이 알만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수 있다.

  2)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물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인 것과 능력 많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스스로 나아와 세례를 받았고 그것을 하나님은 충분히 인정해 주고 있음이 분명함이 이미 언급되었다. 굳이 추가해서 광야 시험의 자세한 내용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온 것인가 아직 안온 것인가?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직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실 분이 과업을 완성할 것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는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관한 일이다. 수업 시작 시간이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다음 수업을 진행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고 곧 시작 종이 울릴 것이므로 '떠드는 학생들은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자'라는 선생님의 말은 헛된 말이 아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 선생님의 수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수업 시간이 안되었다고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떠들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그 때 매점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수업시간은 임박했고 선생님은 이미 교실에 들어와 계신 것이다. 


[묵상하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혹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대로 이 땅의 나라에 속해서 살아간다면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먼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나라를 준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래서 멸망당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놓여진 과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기존의 삶이 방식과 태도에서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방법과 태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세상이 우상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심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세상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 같은 현실이지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구원을 위한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회개: 현재의 삶에 대한 돌이킴

* 복음을 믿으라: 곧 완성될 미래에 대한 확신

현 세대에 대한 환멸만 있는 사람은 회개가 아닌 혁명(인간이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그림은 현 세대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자기 욕구의 발현이거나 관념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현 세계와 하나님 나라의 대조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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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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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해설]


18절. 그 후 3년 만에


다메섹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와 아라비아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바울은 게바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때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간 때이며, 이 때 처음 유대 사도들을 만난 것이다. 이 때의 배경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 26-30에 나와 있다.


 (행 9:26-30)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18절.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게바와 함께 있었던 15일 동안 복음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두 사도가 15일을 함께 보내면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은 복음을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게바(베드로)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전수받는 차원에서의 만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15일 동안 함께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복음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라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할 것이다.(그 기간 중 바울과 베드로는 이미 자신의 복음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나눔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 기간 중 야고보(예수님의 동생)  정도만 보았지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도 않았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형성하는데 그 기원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있지 않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교회들은 사실 바울을 제대로 본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만 잠시 보았을 뿐 유대인들과의 공개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음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에 비해 열등하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묵상]


갈 1:11절 이후로 1장의 마지막까지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논지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온 것임을 회심 후 자신의 활동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과 자신과의 연관성에 섯을 긋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바울이 직면한 문제(오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비해서 열등한 복음(충분하지 못한 복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더 핵심적인 문제는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추가적인 어떤 내용들을 가미하여 갈라디아 교회를 그릇된 길로 인도 했다는 것에 있다. 지금의 상황이 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대등한 위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게바다 야고보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불충분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갈라디아서를 단순히 복음과 율법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또한 바울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바울의 표현이 좀 더 엄밀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게바(베드로)와 야고보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바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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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이다. 2장은 1장보다는 주제가 간단하다. 빈부의 격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과 참된 신앙은 말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특히 빈부의 문제로

사람들은 빈부에 따라 대접을 달리한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같다. 그런데 두 가지 이유에서 야고보는 충고한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믿음의 풍요와 약속한 나라의 상속을 받게 하셨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업신여긴 꼴이 된 것이다.

2. 우리가 호의를 가지고 대우했던 부자는 오히려 우리를 법정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그들은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서만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 수 있으니까...)

3. 그런행동은 율법의 정신(이웃을 사랑하라)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인격과 성품의 문제가 아닌, 빈부의 문제로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떤 자리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일은 제도적으로 있어서 안되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속되어서도 안된다.

교회에서는 그 사람의 재물이 아닌,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 그리고 진정성이 있는 희생을 통해서 인정받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특정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유독 광고해주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것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 국회의원이 우리 교회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일은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이런 모든 일이 부한 자를 대접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2. 행함이 없는 믿음(말과 지식)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선 야고보가 말하는 본문에서 행함없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행함이 구체적으로 선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보다는 말과 지식만 있지 실제적인 행위가 결여된 신앙(신앙외의 일반적인 것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하겠다.)은 생명력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말과 지식이 있다고 신앙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마귀도 그 정도는 있기에.

2. 핵심은 우리 신앙에 행함(deed, action)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각론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행함이 따라와야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총론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자연스럽다 본다.

 

지금까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 <선행이나 경건의 삶>을 잘 이루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내 신앙이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과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에 어떤 대립되는 각이 있다는 측면에서 본문을 살펴본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야고보서 2장의 흐름을 통해 본다면 야고보는 성도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의 칭의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 보여진다. 다만, 말과 지식(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는 좀 다르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이다. 헐벗고 가난한 형제를 향해서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야고보는 말한다.)으로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가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행위가 따랐고, 기생 라합도 행위가 따랐다. 말과 지식만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다.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말이다.(26절)

바울은 믿음(자기 의를 쌓아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닌)을 통해서 의롭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는 것을 통해 의롭다 인정하셨다는 논리로서 칭의론을 말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이 말과 지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말과 지식뿐 아니라 행함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맞는 말이고, 어떤 충돌도 없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바울의 칭의론은 매우 기독교적 독특성을 가지는 반면, 야고보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논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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