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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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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C.S.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 혼외정사, 이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아내에 대한 견대를 말합니다. 이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여성의 관점으로 볼 때 논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생각을 정리하는데는 유익합니다.



1. 이전에 성적 충동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만 다루었으나 이제는 올바른 쓰임새, 즉 결혼생활에 대해 다루려 함. 다루기가 꺼려지는 주제이다. 

  1) 이 주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지극히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2) 본인이 결혼 해 본적이 없으므로...(이 당시까지는 독신이었다. 후에 1956년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


2. 기독교의 결혼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라는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짝임.


  [혼외정사에 대한 입장]

  1)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악하게 보이는 것은 원래 모든 차원에서 연합되도록 이루어진것에서 딷 하나(성적인 연합)만을 때어낸 땃이다. 

  2) 기독교적 자세란, 성적 쾌락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씹어서 미각적 쾌락만 얻으려하면 안되는 것처럼, 성적 쾌락 역시 그것만 떼어내 즐기려 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혼에 대한 입장]

  1) 교단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 조금씩 다른 것이 유감이지만, 적어도 이혼이 일종의 외과수술처럼 살아 있는 몸을 잘라내는 일과 같다는데에는 모두 동의한다.(이는 현대인들의 관점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2) 이미 살펴본 덕목에서 <정의>란 약속을 지키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서 한 결혼에는 죽음이 서로를 갈라 놓을 때까지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노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약했는데, 그것에 충실해야 함은 당연한 덕목이다.

  3) 성적 충동 역시 다른 충동과 마찬가지로 약속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진지하게 한 서약이 아니라는 것으로도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거짓으로 서약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순결에 대한 요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 

  4) 이혼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죄인 간음의 죄(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를 짓는 것입니다. 

  5) 서약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약속으로 자신을 묶으려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하겠다는 약속은 사랑의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유효하다. 

  6)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굳이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1) 자녀들을 위해 가정을 지킨다.

   (2) 여성들이 남성들이 싫증낼 때마다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한다. 

   (3) 추가적인 이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감정은 시동만 걸어주고 점차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사랑의 엔진이 돌아가면서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자꾸 극적 감정의 사랑만을 찾아서는 안된다.(그런 감정적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고, 유지 해서도 안된는 것이다.)

    * 사랑을 느끼는 감정과 사랑을 하는 관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사랑을 느끼는 감정은 차의 시동을 걸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사랑하는 관계의 유지를 통해서 결혼의 엔진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은 두번째 사랑이다. 


 6) 이혼을 막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의 과도한 생각

   (1) 그리스도인들이 유권자나 의회 의원으로서 이혼 법률에 자신들의 관점을 반영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관점을 강제하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만약 회교도가 누구도 술을 못 마시게 하도록 법으로 정한다면 본인은 화가날 것이라고 말한다. 

   (3) 비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법으로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법을 통제할 것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에 대해서]

1. 머리가 왜 필요한가? 부부가 서로 동등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설사 머리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왜 남자여야 하는가? 

  1) 그것은 결혼이 영속적이기 때문이라고 루이스는 본다. 서로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머리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의견이 달라질 경우 어떻게 하는가? 할 수 있다면 대화를 통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가? 두 사람이라 다수결로도 불가능한다. 서로 일치 할 수 없다면 결론은 둘 중에 하나다. 각 자 따로 자기의 결정대로 살든지 아니면 둘 중에 누군가는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은 영속적인 것이기에 따로 살 수는 없는 것이고, 둘 중에 한 명은 결정을 내리는 머리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연합체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 루이스의 관찰에 의하면, 여성 자신들도 아내에게 휘둘리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남성은 가정 밖 사람들에 대해서 언제나 더 공정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대게는 더 공정하다. 그러나 여성은 자녀와 남편을 위해 세상과 싸우는 일을 한다. 여성들이 더 가정 중심적 편향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남편의 역할은 이러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편애가 가정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살피는 것이다. 


  - 루이스의 견해에 대해서 여성분들의 견해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루이스는 이렇게 정리를 했지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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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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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7장] 예레미야를 읽다가 보면, 수십년 간의 결혼 생활 속에서 참고 살았던 남편이 아내와의 별거를 통보하기 전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정말 오래 참고 인내했구나, 할만큼 하셨구나... 하는 생각과 그 아내 해도 너무하네.. 하는 생각을 반복하게 됩니다.(내용이 기니 읽으시려면 <묵상과 적용>부분만 읽으세요.) 



[정리1. 내용의 일목요연한 정리]


1.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에서 예배하러 오는 유다 사람들에게 선포함

  1)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3절)

  2)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말라.

  3) 지금 하고 있는 죄악에서 돌이키면 너희는 이곳에 살게 되리라.

  4) 너희들은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간음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면서도 이 집에 들어와서는 <구원을 얻었나이다>하면서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다.(10절)

  5) 너희는 이 집이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 계셨던 실로에 가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라. 그들이 불러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실로에서 행한대로 이곳에서도 그와 같이 행하리라.


2.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16절)

  1)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위하여 구하지 말라. 듣지 않으리라. 

  2) 이들의 하는 행위를 보라.

   (1)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는 불을 피우고,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해 하늘의 여왕을 위해서 과자를 만들며,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하나님의 노를 일으킨다. 

 3) 하나님은 사실 애굽에 나올 때 번제와 희생제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는데,  그런데 너희들은 순종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완악하게 하여 등을 돌렸다. 

   (1) 너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이 없이 보냈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목이 곧아 너희 조상보다 더 악을 행했다. 

   (2) 예레미야 네가 이 백성에게 이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27절)


3. 유다가 도벳 산당을 지은 것에 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1) 유다가 여호와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이 가증한 것을 두었다. 

  2)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여 그곳에서 자녀들을 불살랐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 생각하신 것도 아니다. 

  3) 이곳을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 하지 않고, 죽음의 골짜기라고 할 만큼 이곳을 죽음의 시체로 가득 채우겠다. 

  4)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라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서술적으로 표현하기]


유다의 죄악에 대한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성전 문 앞에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내용은 너희들이 지금의 죄악에서 돌아오면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인데, 지금 이곳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고 있고 향락가도 아니고 성전에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메시지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측된다. 역시 이들은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를 미친 사람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이 여기에 있고, 나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하는 신앙적 안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헛된 생각이다. 이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실로에서도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간구에도 응답하지 않으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들의 죄가 가증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한 중보와 간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들은 조상들의 악함보다 더 완악하기 때문이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지적한다고 한들, 이들은 이것조차도 듣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세운 도벳 사당은 하나님 앞에서 대놓고 악을 행한 것인데, 하나님께 이곳을 도벳이라 혹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하지 않고, 죽음의 골짜기라고 말하도록 그곳에 시체를 쌓을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참된 메시지는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들려지곤 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냈고,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예레미야의 지적은 그들의 죄에 대한 것이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 곳에서 평안이 살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의 죄와 유다의 죄악을 객관적으로 봐서 이 장면이 이상해 보이지 않지만, 당시 유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상한 장면처럼 보일 것이다. 

 

  1) 죄를 지적하려면 성전이 아니라, 향락가를 찾아 가는 것이 적절할텐데... 적어도 이들은 예배드리러 오는 정도의 신앙은 되는 사람들인데... 왜 이들을 향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하는 것인가? 

  2) 이들은 문제없이 유다 땅에서 잘 살고 있고,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예레미야의 요청은 너희가 회개하면 여전히 이곳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별 효력이 없는 것 같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유대인들.. 이들은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유다 백성들 중에서는 좀 나은 사람들일텐데 이들의 입장에서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도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자기 자신보다는 저 도심에 있는 죄인들에게나 적용된다고 생각하면서 예레미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예레미야를 통해서 회개의 말씀을 전할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는 아닐 것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마저도 이 메시지를 무시한다면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전혀 나와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음성을 자신을 향한 음성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겸손과 자기 성찰이 있다면 우리는 멸망의 위험 속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결혼해서 살면서 맺힌 억울함을 쏟아내는 책이다. 


예레미야를 읽다가 보니 마치 결혼하고 참고만 살았던, 남편이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와서는 아내와 별거를 선언하기 전에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그간의 억울함과 황당함을 사람들에게 털어 놓고 있는 모습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들마다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며 아내의 잘못을 또한 남편이 정말 힘에 넘치도록 인내하며 사랑하며 견디어 왔구나 하는 것을 공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억울함을 들는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읽으시면 더욱 공감가시리라 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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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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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을 읽다 보면 여러가지 권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물론 권면 하나하나를 단독적으로 문자적으로 적용해도 무관하겠지만, 그렇게 읽다보면 전체적인 맥락을 잃고 권면이 파편처럼 흩어지게 된다. 임팩트가 약해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맥락에서 굵직하게 어떤 권면인가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이와같이 권면이 많이 나오는 본문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문단을 나누면서 정리함]

1. 아내들에게 하는 권면

  1)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

   (1)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행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2) 단장은 외모에 치장되는 것으로 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것으로 하라.

     : 전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했다.

     :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으로 단장했다.

2. 남편들에게 하는 권면

  1)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

  2)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3)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성도들을 향한 권면

  1)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

  2)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

    :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악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

  3)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4)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으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다만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준비하게 하라.

  5)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선행을 비방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6) 그리스도도 십자가의 선행을 통해서 영으로 옥에 내려가셔서도 정죄되지 않고 오히려 인정받고 올라가심.

*벧전 3:18~22 내용이해(정리 3, 묵상 및 적용 참고)

 

[정리2. 본문의 내용을 내가 이해하기 용이하게 재정리함]

어제에 이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의 본문의 일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3가지 대상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첫째는, 아내들에게 하는 권면이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정결함으로 단장하라고 말한다. 이 땅에 나그네된 아내의 덕목은 남편에 대한 순종과 정결이다.

둘째는, 남편들에게 하는 권면이다. 남편들에게 요구되는 권면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아내를 향해서 사랑하여 동거하고, 연약함을 알아 귀히 여기라고 요청한다.

셋째는,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권면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형제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며,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할자(적)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전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자기 본연의 일을 하고, 복수하지 말고 사랑하며, 선한 양심으로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하면 결국은 사람들에게도 인정함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남편이 믿지 아니함으로 가정에서 나그네된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

당시 믿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아내들을 향해서 꾹 참고 견디라고, 아니면 주를 위해 가저을 버리라고 권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한다. 진심으로 순종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오히려 남편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단장하라고 한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아내된 도리를 다 하라고 요청한다. 아니 다른 아내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으로는 변하지 않았던 남편이 이런 행동(복음적 행동)을 통해서 남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지론이다.

2. 남편은 아내를 힘으로 다스리지 말고 사랑과 배려로 가정을 이끌어라.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남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랑과 배려가 뭍어나는 인격적인 가장이 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남편의 모습이다.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배려로 대하는 관계가 진정한 남편의 모습이다.

3. 난해 구절(3:19)에 대한 해설(본문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옥에 내려가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했는데, 그 의미인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벧전 3:17)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3:16)의 논리를 이해시키려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동원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신 사건’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즉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영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내려갔다. 이 영들은 누구인가? 노아의 홍수때 복종하지 않던 자들이다. 이들은 노아의 가족 8명 만 빼고 모두 심판에 이른 것처럼 이들은 악인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고, 그곳에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서 그곳에 있는 악인들에게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효과를 얻고 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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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만두 사랑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아이들이 깨기 전에 큐티 작업을 하려고 부지런히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한다.

얼마후 아내가 일어난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주방을 오가며 냉장고를 여닫는다. 그러다 잠시 냉장고에서 뭔가를 커내 들고는 내게 묻는다.

"아침, 누룽지 먹을래? 만두 먹을래?"

몇일 전 아침에도 누룽지를 끓여주려던 아내에게 소리치면 얼마전에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둔 만두를 먹고 싶다고 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아마 그걸 의식해서 내게 만두를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 것으로 예측되는 대목이다.

나는 손에 든 냉동된 누룽지를 봤기에, 이미 아내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았지만, 만두국을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잠깐 생각하더니 누룽지를 넣고 얼린 만두를 꺼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어느덧 아내는 내 뒤에 와 있었다. 약간 놀랬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아내 왈
"만두가 그렇게 좋아?"

"응" 나는 답했다. 

내가 물었다. 약간의 농울 섞어서...
"남편에게 만두 주는게 아까워?"

"응"
"만두가 줄어드는게 너무 아까워"


아내는 남편보다 만두를 아끼는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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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2장은 디도가 그레데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대상 별로 권면하고 있는 그 내용과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대상은 늙은 남자, 늙은 여자(젊은 여자), 젊은 남자, 종. 이렇게 다섯 부류로 나누어 권면한다.

1. 신중하라.

늙은 남자들을 향해서도, 젊은 남자들을 향해서도 마지막 전체적인 권면가운데에서도 '신중하라'는 권면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젊은 여자들에게도 신중하라는 권면으로 늙은 여자들로 하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사실은 늙은 여자들은 당연히 신중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젊은 남녀, 늙은 남녀 모두에게 신중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NIV는 셀프 컨트롤이라고 번역했고, 다른 번역본에서는 센서블이라고 번역했다. 원어적으로는 절제하는, 사려깊은, 신중한 이란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교회 안의 모든 대상들에게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여 흥분하고 신중하지 못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교회가 흥분을 조장하고, 감정을 의도적으로 증폭시켜 절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비성경적인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성도들로 하여금 감정을 가라앉히고(감정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신중히 생각하도록 그래서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되어야 한다.

충동하고, 선동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위험한 것은 없는 것이다.

2. 성도들의 행동지침의 근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책잡힐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5,8,10절)

  교회의 성도들은 적극적인 면에서는 사랑과 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늘 그렇게 살수는 없다.(늘 이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에너지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는 그 기준을 좀 낮추어야 한다. 그 기준이란, 책잡히지 않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최소한 책잡히는(흠있는) 삶을 살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이것도 힘든것은 사실이지만)

   물론 모함하는 사람들과 꼬트리 잡는 사람들의 모함까지 우리가 다 빗겨 갈수는 없을 것이다.(이들은 근거없는 사실과 억지 확대해석으로 모함하는 자들이니) 그러나 이들에게 책망할 어떤 정당한 빌미를 만들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니엘이 책망 잡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도 책망잡힐 것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귀한 귀감이 된다.(그러나 악한 자들의 모함 속에 책망잡힐 일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그래서 거룩하고 선해야 하며, 자신의 역할(당시 사회적 한계가 있었지만)_ 심지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과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 있어서도 _을 소홀히 하지 않으므로 책망받지 않도록 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만 봐서는 안된다. 늘 주변 사람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질서도 봐야 한다. 무조건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해서는 그들의 비판과 책망에 빌미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종교적 열심이 너무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이런 무모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과 관습의 기본적인 인식 위에서 지혜롭게 생활해야 한다. 그래야 비난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3. 젊은 여자들에 대한 권면의 방법

이것을 성경적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은 디도에게 젊은 여자들에게 대한 권면은 본인이 직접하라고 하기보다는 늙은 여자를 통해서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분들이 오늘날 권사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권사들을 통하여 젊은 여인들을 권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 같다.

또한 목회자와 젊은 여자들의 직접적인 대면을 조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은 미혹의 시대에는 그런 이유에서라도 너무 가까운 접촉은 피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

4. 종과 가정안에서 여자의 역할에 대한 견해

바울의 서신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결혼한 여자를 향해서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권면한다.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권면을 한다. 또한 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인에게 순종하고 종의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서, 종과 노예가 없는 사회에서 이 권면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 것인지에 대한(적어도 노예제도의 성경적 근거나 남성 상위의 성경적 근거라고 볼수는 없는 것이다) 고민이 생긴다.

난, 바울이 당시의 관습과 제도라는 상식 속에서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할 것에 대한 빌미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행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바울의 권면이 아니었나 싶다.

종은 더 종되도록 한 것이다. 당시의 보통 종은 신분적으로는 종이어서 겉 모습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척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은 더 진실된 종이 되라는 권면이다.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더 진실되고, 더 정직한(9,10절) 종이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아내된 여성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여성이여 해방하라는 권면으로가 아니라 더 본질적인 아내가 되라고 권면한 것이라 보인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남성 중심의 사회였으니, 기본적으로 그런 관념이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남편을 존중하고 복종하는 아내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는 권면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종과 아내의 리버럴한 생각의 시작은 교회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부르고 대하는 평등사상,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당시 사회의 관습과 제도에 반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곳처럼 여겨졌을 것이고, 이것을 위협적으로 보았을 것은 당연하다. 교회가 커질수록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울은 <평등하다, 대등하다>와 같은 측면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거나 권면하여 그 혼란을 더 격화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오히려 매우 래디컬한 방식으로 권면을 한 것이다.

 

종은 참된 종이 되라.(진실하고 정직하며 성실하여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종)

아내는 참된 아내가 되라.(마치 남편에게 종속된 자처럼 남편의 말에는 순종하고, 가정의 일을 잘 돌보는 자가 되라)

주인은 참된 주인이 되라.(종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고, 형제처럼 따듯하게 대해주라.)

남편은 참된 남편이 되라.(아내된 여인을 사랑하되, 목숨을 걸고라도 책임져주는 남편이 되라)

 

바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책망받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평등적(인격적) 가치관의 나라가 형성될 것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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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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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풀어가는 것도 좋지만, 글이 너무 길면 페북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죠? 그래서 오늘은 짧게 가보렵니다. 보통 서신서의 반은 이론이고, 나머지 반은 실천과 적용이라고 봅니다만, 제가 보니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골 3장에 실천적 요구(땅의 행실을 버리고, 위의 행실을 행하는)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오늘 보게 되는 것은 골 2장에서 <금욕주의>에 대해서 세상 학문의 영향이지 참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식은 아니라고 본것이라면, 


골 3장은 <쾌락주의>에 대한 경계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금욕주의(율법주의자)도 아니지만 쾌락주의(율법폐기론자)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되기를 힘쓰는 자들이면서
부부 안에서는 복종과 사랑,
부모 자식 간에는 순종과 인격적 대우
종과 상전 사이에서는 성실과 의와 공평
(에베소서도 동일한 구조, 동일한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금욕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쾌락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능하게 보이기도 하고(순종,복종해야 하니)
무력하게 보이기도 하고(사랑하고 용서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려고 하니)
무지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요령이 없고, 사람 다룰줄 모른다고 여겨지니)

그 모든 오해를 감내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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