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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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였다. 


  *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 주전 538년 이후 18년인 주전 520년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가 왕이 된지 2년째이다. 그 해 6월 1일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2.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따지심

  1) 이 백성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함.(여론이 그러함)


   * 몇 몇 사람들은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수도 있지만, 다수의 여론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반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공동의회를 통해서 성전을 다시 짓자는 의견은 부결되었는지 모른다.


  2)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게 되었는데, 너희들은 판자로 만들어진 집에 거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피고 스스로 다시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지금 너희가 많이 뿌려도 수확이 적고, 먹을 지라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듯하지 못하며, 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같이 되지 않느냐?

   * 넉넉하지 않아서 내것으로 채우고 모으기에 힘쓰지만, 그것이 전혀 쌓이거나 배부르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심. 자기가 채우고 나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논리에 빠지도록 하는 사단의 유혹일지 모른다.


3. 하나님이 귀환한 백성들을 방해하심


  1)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2)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3)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집으로 가져가면 하나님이 불어버렸다.

  4) 왜그런지 아느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는 것에만 빨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수고하여 얻으려고 했던 모든 것에 한재를 들게 하였다. 


  * 하나님은 백성들의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하시는 분이기도 하시다. 훼방꾼처럼 여겨지기도 하신다. 그러나 왜 그리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엉뚱한 일에 집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집착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는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의 핸드폰을 빼앗고, 텔레비전을 끄며, 용돈을 제한한다. 그래야 부모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물론 상한 감정으로)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귀환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을 하신 것이다. 


4. 그제서야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


  1)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다. 

  

  2) 학개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었다. 

  3) 하나님께서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4) 그리고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다. 


  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2년(주전 520년) 6월 24일이었다. 



[묵상 한 모금]


1. 성전 재건에 대한 의욕이 꺾이고, 제도적인 방해가 있자 성전 재건이란 사명은 잊혀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고 그곳에 정착하여 사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곳에서 생존을 위한 삶도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여도 충분한 채움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채우기 위해서 고민해 보고, 노력해보며 살았다. 그러나 충분하지 못했다. 그렇게 18년의 시간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성전을 돌아볼만큼 여유롭게 되지 못했다. 


2. 기다리고 참고 인내하셨던 하나님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학개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명을 잊고(부르심을 잊고) 자신의 생활에만 집착하여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에 책망하셨다. 더불어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서 형편은 좋아졌는가? 라고 묻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충분한 것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풍요를 막고,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으나 이들은 오히려 재물과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고 정작 하나님을 보진 못했다. 


3.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에 비해 지속적으로 충분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 7절) 자시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기도원도 가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부족하면,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누우며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 못하거나 인생길이 막혔다면,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적어도 신앙인들은 말이다. 


4. 학개 시대의 성전 재건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 건축과 기계적으로 대응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이 당시 성전 재건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과 부르심 속에서 진행된 것이지만, 우리가 짓게 되는 교회라는 것은 그와 같은 사명과 부르심은 성경 안에서 명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개서를 보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의미를 살펴야지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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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책)


1.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상실된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재구성이다. 모든 대화에 있어서처럼, 쌍방은 나름대로 공헌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것이다.

 

2. 역사적 사실들은 단순히 스스로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각자 이미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사상의 해석틀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별도의 특별한 렌즈를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별도의 렌즈는 다른 사람들(비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것도 볼 수 있게 해주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별도의 렌즈는 보통의 렌즈를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을 '통제'하며, 상식적인 신념이 특수한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4.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것 모두와 그 외에 더 많은 것을 본다. 그 이유는 별도의 렌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에 비해서 실재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고 개선장군과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겸손과 중용의 태도가 좀더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가 전체를 볼 수 있는 렌즈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희미한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6. 역사 연구는 인간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찬양이나 비난을 찾기 위한 판단자로서의 자세를 피하는 것이 좋다. 오히려 인생의 모든 측면, 특히 역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인간적 자세는 공감하는 자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래야만 한다. 


 - 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 로너드 웰즈, IVP / 1장에서 부분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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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라는 말의 전문적 의미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공동체가 믿어 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신앙은 '신화적'이다.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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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24장] 모든 일을 최종적인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인생의 마무리, 가나안 정복의 마무리를 24장을 통해서 합니다. 핵심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을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에 따른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지요. 마무리까지 깔끔한 여호수아. 리더십의 모형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

  1)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조상은 강 저쪽에서 거주하면서 다른 신을 섬겼으나

  2)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가나안으로 부르고 그에게 이삭을 줬다.

  3)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는데, 에서는 세일 산을 소유했고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4) 거기서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냈고, 애굽에 재앙을 내려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 홍해에서 너희는 살렸고, 너희를 좇던 애굽의 병사들은 내가 멸하였는데 너희들이 이 모든 것을 너희 눈으로 봤다. 

  5)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매 싸울 때,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고 나는 그들을 멸절시켰다. 

  6) 모압 왕 발락이 너희와 싸울 때,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려고 할 때, 오히려 발람이 너희들을 축복하였다.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었다. 

  7) 내가 왕 벌을 보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는데, 이것이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한 것이 아니다. 

  8) [결론] 너희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땅과 건설하지 않은 성읍을 얻었다. 그 가운데 거주하면서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2. 이제 우리가 여호와를 위해서 결단해야 할 일

  1)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2) 만약 여호와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백성들의 고백: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하리라. 여호와는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올라오게 하셨고, 우리 목전에서 큰 이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 백성들의 결단에 대한 여호수아의 경고와 언약 체결

  1)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 예언함.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2)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셨다가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3) 백성들은 강력하게 부인하며,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고백한다. (21절)

  4) 여호수아는 그렇다면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버리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권면한다. 

  5) 백성들은 여호와만을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다고 다시 고백한다. (24절)

  6)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함.

  7)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증거로 삼음.

  8) 언약을 체결하고 각기 기업으로 돌아갔다. 


4. 여호수아서의 마무리

  1)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었다. 

  2) 여호수아를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인 딤낫 세라에 장사했다. 

  3)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그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 

  4)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다. 

  5)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쓰기]


[여호수아의 마지막 권면] 여호수아가 장로와 수령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세겜으로 부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수령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세겜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결단을 통한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이끈다.


여호수아는 먼저 이들에게 우리 조상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조상은 강 저편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우상을 섬기던 그 자리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불러오셨다. 그리고 씨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는 이삭을 주셨고,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셨다. 에서는 세일 산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애굽을 나오게 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적을 봤고, 대적자들을 어떻게 하시는가도 경험했다.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요단 저편에서도 아모리와 전쟁에서도 모압의 위협(발람의 저주)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켜 오셨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열매를 거두어 먹고 있다고 먼저 역사적인 정리를 한다. 


그 뒤를 이어서 이들을 향해 결단을 촉구한다. 이제 우리가 믿을 신을 정해야 한다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데, 너희들은 어떤 신을 섬기리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촉구하자 이들도 여호와만을 섬길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결심을 듣고 여호수아는 이들을 향해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들의 잘못과 죄를 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호수아는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복을 내리셨다가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백성들은 절대로 이방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다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는다. 그리고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은 여호수아가 죽어 장사 지내게 되었다는 것, 그제서야 비로소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했다는 것,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어 장사지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메시지와 생각들]


1. 다 경험하고 다 아는 내용이지만 결단이 필요하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지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시 회고하고 정리해 준다. 그 이야기는 모여있던 지도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거나 함께 경험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결단할 것을 촉구하신다. 심정적으로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마 이스라엘 무리 중에는 은근히 한 두개씩 가나안의 우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23절) 그러니까 심정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명확하지만, 보험처럼 우상을 한 두개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모두 아는 내용이라고, 다 그럴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모두 한 두가지 말하지 않는 자기만의 우상을 붙잡고 있다.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한 두가지의 불필요한 것들을 쥐고 있다. 결단은 그것마져 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내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결단은 선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선 안에서 행하든지 선 밖으로 나갔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속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결자의 의지를 점검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여호와만을 섬길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성들이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쩌면 이들의 연약함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수 있다. 암튼,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계속 의심했고,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고 재차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들과 언약을 체결한다. 언약의 체결이란 서로의 언약에 대한 내용에 대한 온전한 숙지와 함께 그것을 체결하려고 하는 그 사람의 의지가 명확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이기 때문이고, 언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명확하게 한다. 


이제 여호수아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또한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서 어떻게 대하셨는가?에 대한 진행이 어떻게 될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를 지나 사사기에 이르면 그것을 확인해 갈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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