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레미야 2장 7~8절 #배은망덕 #반역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구절의 내용 정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의 열매와 아름다운 것들을 먹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은 오히려 이 땅에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제사장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 땅과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세운 자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세운 선지자들은 오히려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다.

[구절의 의미]
한 마디로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바람을 망각한채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며 대적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땅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일반 백성 뿐 아니라 제사장, 율법을 다루는 자, 관리, 선지자까지 모두 그와 같은 행태를 당연하게 행하고 있는 것에 하나님은 기가 막힌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 생각난다. 주인이 포도원 농장을 만들고 그 농장에 필요한 장비를 다 마련해주고 그 농장을 일꾼들에게 맡겨놓고, 그 결실을 기대하여 종을 보내었더니 일꾼들이 종을 때려 죽이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조차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비유는 지금 하나님이 느끼시는 배신감을 잘 보여주는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묵상]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존재이고, 양심없는 포도원 일꾼과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땅을 더렵혔고, 언제 우상을 숭배했습니까? 반문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역으로 질문하신다. 그렇다면 내가 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했겠느냐? 네가 그런 행위가 없었다면(네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아니 인간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그것이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의 행태라면) 내가 왜 내 아들 예수까지 십자가에 잔혹하게 죽게까지 했겠느냐? (내가 착각하고 오버했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너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해라. 너의 실체를 보고 십자가로 갈 수도 있지만, 먼저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에 너를 비추고 나서 너의 실체를 발견해라. 반역한 이스라엘이 바로 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이다. 이제 그 앞에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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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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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베드로전서를 지나 베드로후서로 들어왔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책입니다. 보통은 앞 부분에 가벼운 인사가 들어가는데 베드로후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긴장이 되고, 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지만, 겁먹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 보면 크 어려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의 정리]

1. 편지 서론에서 말하는 베드로의 본론적인 이야기(부르심과 택하심)

  1) 하나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이미)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 약속을 모르고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

  3)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

    (2) 이런 것이 없으면,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9)

  4)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실족하지 않으리라.

     :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2. 베드로는 재차 삼차 이 사실을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우리가 이 장막(육체)에 살고 있는 동안은)

  1) 너희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한다.(12,13)

  2) 베드로가 떠난 이후에라도 계속 해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4,15)_ 곧 장막을 벗을 때가 되었다고 고백함(죽음에 대한 임박함?)

  3) 나는 우리 주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은 내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봤기 때문이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것을 본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다.

    (2) 또 더 확신한 예언(성경)이 있는데, 그것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정리2. 본문 내용을 다시 정리]

베드로후서는 처음 시작부터가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분위기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전제를 먼저 깔아놓고 시작한다.

1. 우리는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한즉 실족함이 없어 오히려 넉넉하게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베드로는 이와 같은 보배로운 소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죽더라도(장막을 벗음) 이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친히 본자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근거는 <확실한 예언, 곧 성경>이다. 성경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너희는 그 뜻이 밝혀질 때까지 신중히 해석해야 한다. 사람의 뜻으로 사사로이 풀거나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우리가 성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성화를 위한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근사한 약속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보장된 약속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생명을 얻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의 형상(참여)에 까지 약속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모든 자원,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을 보장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성품의 형상을 본 받는 자가 되다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과대포장해서도 안되겠지만, 과소포장해서도 안될 것이다. 인간을 또한 구속된 인간을 무능한 죄인으로만 규정해서도 안된다. 종종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낮은 영적 자존감만 가지고 살아간다. 교만의 반대는 낮은 자존감이 아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다. 겸손은 낮은 자존감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 조종 우리는 겸손과 낮은 자존감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래서 성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매우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본다.

2. 베드로는 자신의 본 경험(변화산의 영광)도 근거했지만,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 성경을 강조했다.

베드로는 사도로서 예수를 친히 본자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산 영광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베드로도 그 사실을 언급하고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베드로는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의 경험은 자신의 죽음(장막을 벗는 것)과 더불어 약화되어 사라지지만, 더 확실한 예언인 성경은 성도들과 함께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서 그 확실성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성경을 풀때는 사사로이 함부로 풀거나 성급하게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하듯이 명백한 뜻이 나올 때까지 성급히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19절)

성경을 읽고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것은 좋은데, 좀 더 그 뜻이 명확하게 떠오를때까지 좀 기다려주고, 묵상하고 생각해보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성급하게 은혜만을 얻고 가려고하는 방식의 성경묵상은 인스턴트 묵상처럼 여겨진다. 반복되는 인스턴트 음식의 섭취가 금새 질리게 하고 건강을 손상시키듯, 쉽게 알짜를 끄집어 먹으로는 경건생활이 빈약한 신앙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까지 고대하며 기다릴 수 있는 묵상이 실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하게 한다. 경건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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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수녀의 차이
_자하철에서 생긴 일.(2012.7.2. 제훈교 월요반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어제 저녁 늦게 용산에서 급행을 탔습니다. 전철칸을 이동하면서 빈자리를 찾았는데, 빈자리가 하나 보였는데 연세가 있으신 수녀님이 앉아계신 자리였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기위해 이어폰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 다음역에서 많은 사람이 탔고 그 중에는 술취한 분이 수녀님 앞을 비집고 들어와서 그 앞에서 몸을 늘어뜨린채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도 자칫하면 수녀님에게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 보였습니다. 술이 꽤 취했고 아저씨가 그리 교양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수녀님도 좀 당황하시고 움츠리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만약 이 아저씨가 수녀님에게 약간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거나 그러면 도움을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마음 한편으로 이 아저씨의 불안함을 보면서 말입니다. 수녀님을 보호해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은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것으로 인한 두려움도 있었지요. 그러나 주님도 그리하시지 안으시겠나는 생각을 하면서...암튼, 그 술취한 아저씨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은 짐을 주섬주섬 챙기시더니 자리를 피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히 험한 일 안당하시는게 낫겠다는 생각에.

그런데 수녀님은 술취한 그 분께 자리를 양보하시고는 자기는 멀리서 왔으니 술도 많이 드신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서 가시라는 것이다. 술치한 아저씨는 과도하게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난, 수녀님이 자리를 옮기실 줄 알았다. 그런데 수녀님은 그 앞에 서시고 술취한 분의 쓸데없는 주정에도 성의껏 답해주셨다. 난 당황하며 그 모습을 다 지켜보게 되었다.

술취한분은 수녀님의 손을 잡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고, 수녀님은 그분의 횡설수설에도 귀 기울여 주셨다.

수녀님 본 인이 있는 곳은 강원도 인제인데, 거기서 노인들을 돌보시고 있다고 오늘은 일이 있어 멀리 부천에 가는 길이라고... 술 취한 분에게 인제 오실일 있으면 들리시라고...

부천역에 내리실때까지 술 취한 아저씨의 무례함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따듯하게 대해주시는 것을 난 보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난 생각했다.

목사인 나는 싸우려고 준비하고
수녀님은 품고 안으시려고 준비하시는 구나...

내 모습 속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게 됩니다. 물질과 성공의 종이되어 버린 교회도 있지만, 싸우려고만 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분은 충분하다. 나를 희생해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양극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가독교는 속물이거나 싸움꾼이거나. 나도 그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제 저녁 수녀님은 제게 많은 것으 가르쳐 주시고, 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많은 짐을 손수 들고 가시는 연세 많으신 수녀님의 모습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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