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도덕 중 <순결>보다 더 인기 없는 것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용서가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 그러나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에 화를 내게 된다. 


2.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용서다.

  1)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명백한 사실이다.)

  2) 용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먼저 생각하면 좋다.

   (1)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먼저 쉬운 대상과 일로부터 시작하라. 

 

   (2)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은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싫어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제 자신의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저 자신은 사랑해 온 것이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이 그와 같은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를 미워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행해야 한다. 

  2)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이다. 

  3) 기독교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 본다.(루이스 입장)

    (1) 살인하지 말라는 <죽이다>와 구별되는 의미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관계가 모두 간음이 아니듯, 구분되어야 한다. 

    (2) 평화주의자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견해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반(세미)평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4. 그렇다면,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벌을 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2)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어야지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해서는 안된다. 

   (2)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누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 들때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 

  3)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의미다. 

  4)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것이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와 상관없이) 대하듯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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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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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C.S.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의 결혼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 혼외정사, 이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아내에 대한 견대를 말합니다. 이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여성의 관점으로 볼 때 논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생각을 정리하는데는 유익합니다.



1. 이전에 성적 충동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만 다루었으나 이제는 올바른 쓰임새, 즉 결혼생활에 대해 다루려 함. 다루기가 꺼려지는 주제이다. 

  1) 이 주제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지극히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2) 본인이 결혼 해 본적이 없으므로...(이 당시까지는 독신이었다. 후에 1956년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


2. 기독교의 결혼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라는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짝임.


  [혼외정사에 대한 입장]

  1)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악하게 보이는 것은 원래 모든 차원에서 연합되도록 이루어진것에서 딷 하나(성적인 연합)만을 때어낸 땃이다. 

  2) 기독교적 자세란, 성적 쾌락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씹어서 미각적 쾌락만 얻으려하면 안되는 것처럼, 성적 쾌락 역시 그것만 떼어내 즐기려 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혼에 대한 입장]

  1) 교단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 조금씩 다른 것이 유감이지만, 적어도 이혼이 일종의 외과수술처럼 살아 있는 몸을 잘라내는 일과 같다는데에는 모두 동의한다.(이는 현대인들의 관점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2) 이미 살펴본 덕목에서 <정의>란 약속을 지키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서 한 결혼에는 죽음이 서로를 갈라 놓을 때까지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노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약했는데, 그것에 충실해야 함은 당연한 덕목이다.

  3) 성적 충동 역시 다른 충동과 마찬가지로 약속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진지하게 한 서약이 아니라는 것으로도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거짓으로 서약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순결에 대한 요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 

  4) 이혼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죄인 간음의 죄(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를 짓는 것입니다. 

  5) 서약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약속으로 자신을 묶으려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하겠다는 약속은 사랑의 감정이 사라진 후에도 유효하다. 

  6)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굳이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1) 자녀들을 위해 가정을 지킨다.

   (2) 여성들이 남성들이 싫증낼 때마다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한다. 

   (3) 추가적인 이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감정은 시동만 걸어주고 점차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사랑의 엔진이 돌아가면서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자꾸 극적 감정의 사랑만을 찾아서는 안된다.(그런 감정적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고, 유지 해서도 안된는 것이다.)

    * 사랑을 느끼는 감정과 사랑을 하는 관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사랑을 느끼는 감정은 차의 시동을 걸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사랑하는 관계의 유지를 통해서 결혼의 엔진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은 두번째 사랑이다. 


 6) 이혼을 막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의 과도한 생각

   (1) 그리스도인들이 유권자나 의회 의원으로서 이혼 법률에 자신들의 관점을 반영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관점을 강제하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만약 회교도가 누구도 술을 못 마시게 하도록 법으로 정한다면 본인은 화가날 것이라고 말한다. 

   (3) 비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도록 하는 법으로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법을 통제할 것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에 대해서]

1. 머리가 왜 필요한가? 부부가 서로 동등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설사 머리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왜 남자여야 하는가? 

  1) 그것은 결혼이 영속적이기 때문이라고 루이스는 본다. 서로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머리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의견이 달라질 경우 어떻게 하는가? 할 수 있다면 대화를 통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가? 두 사람이라 다수결로도 불가능한다. 서로 일치 할 수 없다면 결론은 둘 중에 하나다. 각 자 따로 자기의 결정대로 살든지 아니면 둘 중에 누군가는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은 영속적인 것이기에 따로 살 수는 없는 것이고, 둘 중에 한 명은 결정을 내리는 머리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연합체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 루이스의 관찰에 의하면, 여성 자신들도 아내에게 휘둘리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남성은 가정 밖 사람들에 대해서 언제나 더 공정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대게는 더 공정하다. 그러나 여성은 자녀와 남편을 위해 세상과 싸우는 일을 한다. 여성들이 더 가정 중심적 편향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남편의 역할은 이러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편애가 가정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살피는 것이다. 


  - 루이스의 견해에 대해서 여성분들의 견해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루이스는 이렇게 정리를 했지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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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도덕, 즉 그리스도인의 '순결'(chastity)이라는 덕목에 대해서


1. 기독교에서 말하는 '순결'과 사회적 규범인 '정숙함'(modesty)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1) 정숙함은 예의 범절 중 하나인데, 이 규범은 주어진 사회 집단의 관습에 따라 생긴다. 

     예) 노출 정도, 대화의 주제 허용 범위 등 따라서 시대마다 바뀜

  2) 그러나 순결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범이다. 


  * 태평양 제도의 소녀나 옷을 칭칭 감고 살았던 빌토리아 시대의 숙녀나 다른 의상을 입었음에도 동일하게 정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순결'에 대한 기준은 서로 있어왔다. 

  * 욕정을 일으키려고 예의범절을 깨뜨리는 것은 순결을 범하는 것이지만, 무지와 부주의로 깨뜨리는 사람은 그저 예의없는 것에 불과하다.  


2. 순결은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이지만, 피해갈 수 없는 덕목이다. 


  1) 성욕은 식욕하고 다르다. 식욕은 종종 식욕의 본능을 넘어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욕은 다르다. 사람의 성적인 욕망을 모두 허용한다면 엄청난 사회 문제가 생기고 말 것이다. 


    (1) 스트립쇼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구경을 한다. 만약 먹는 음식을 보여주는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구경을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매우 이상하게 볼 것이다. 물론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오늘날 이시대가 과거 빅토리아 시대(스트립쇼 공연이 없던 시대)보다 성적인 소비가 적은 시대일까요? 더 풍요로운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적인 욕구에 있어서 만큼은 끊임없는 욕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 성적인 욕구는 음식에 대한 욕구와 다르다. 음식 아닌 것을 먹거나 음식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적인 욕구는 그런 방식으로 점점 극대화된다. 사람들은 억제된 성욕이 변태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성욕을 억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지난 20년간 성에 대한 쉼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욕은 건강해 졌는가?  오히려 그렇지 않다. 더욱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 성에 대해서 쉬쉬해서 골치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이 이런 골치거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가 쉬쉬했던 것이다. 


3.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1) 인류가 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번식하고 거기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란 의미

    :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다.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들 중 육체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한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위의 말을 지지한다. 


  2) <현재 성적 본능이 도달한 상태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틀린 말이다. 

   (1) 음식을 즐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절반이 음식을 삶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음식 그림을 보면서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느라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부끄러운 성욕이 된 것에 대한 책임

  1)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뒤틀려 있는 기관 때문에

  2) 우리의 순결하지 않은 삶을 옹호하는 선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는 자란다. 

  3) 돈을 긁어 낼 목적으로 우리의 성욕을 자극시키는 사람들이 많다.(성만 생각하는 사람은 구매 저항력이 약하다.)


  * 하나님은 이런 상황, 이런 시대를 감안해서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치료를 받을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럴 마음조차 없는 것같다. 그것이 문제다.


   (1) 우리의 뒤틀린 본성과 마귀의 유혹 그리고 현대의 온갖 선전들이 합세하여 <우리가 억누르는 욕망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하며 지극히 온당한 것이므로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거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태도>라는 거짓 의식을 가르친다. 

    : 욕망을 분출해서 행복해지는 경우는 없다.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가 필요한 법이다. 강하게 발동되는 욕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온당하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유는 다르지만, 본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이는 위생학적의미로, 어떤 이는 사회학적인 의미로) 기독교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이 다른 것보다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원칙중에 하나인 것이다. 


   (2) 많은 이들이 기독교적인 순결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고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음.

      :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려고 하고, 해 내는 것은 멋진 일이다. 온전히 하지 못했다면 용서를 구하면서 거듭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과정이 그 덕목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혼의 습관을 훈련시켜 줍니다. 


   (3)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을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성적 욕망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한 '억압된'이란는 용어는 '거부하다', '참다'라는 뜻의 억제된(suppressed)과 구별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된 성적 욕망은 성적 욕망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에 잠재의식 속에 파고들어 왔다가(대게는 아주 어렸을 때) 알아 볼 수 없는 형태로 위장해서 현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성인이나 청소년들이 의식되는 욕망을 거부하려는 노력은 과거의 억압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다른 종류다. 


5. 성도덕이 기독교 도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하지 않는 것을 최악의 악으로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육체의 죄는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쾌락 중에가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이다. 영적인 쾌락이란.


  (1)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즐거워하는 것

  (2)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선심 쓰는 척하면서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3) 험담을 즐기는 것

  (4) 권력을 즐기는 것

  (5)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 말로 악한 죄다. 


내 안에 있는 동물적 자아가 짓는 죄보다 악마적 자아가 짓는 죄가 더욱 악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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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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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논의

1. 기독교가 말하는 선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2. 인간이라는 기계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서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본격적인 논의 전 잠깐 확인하고 가야할 내용

1. 기독교 도덕이 인간이라는 기계를 올바로 움직이는 기술이라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1) 정신분석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의학 이론 및 기술과 프로이드를 비롯한 몇 몇 사람들이 거기에 덧붙여 놓은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아주 분명하게 분리해야 한다. 프로이드와 같은 사람은 신경증 치료에는 전문가지만, 일반 철학에서는 아마추어입니다. 그러니 신경증 치료에 대한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도 그의 일반 철학에 관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분별있는 태도입니다. 


  (2) 프로이드와 다른 이들이 첨가한 철학적 요소들만 제외한다면, 정신분석학 그 자체는 적어도 기독교와 배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도덕과 중복되고 있으므로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도덕적 선택에는 두가지 요소가 관련되어 있다. 

1. 하나는 선택하는 행위


2. 다른 하나는 선택하는 사람의 심리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선택의 원재료가 되는 다양한 감정과 충동 같은 것들. 원 재료에도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1) 이른바 정상적인 재료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것들

     예) 실재로 위험한 사물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 /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2) 다른 하나는 잠재의식에서 무언가 잘못되는 바람에 생긴, 아주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재료들. 

     예) 고양이나 개미를 터무니없이 무서워하는 감정 /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비뚤어진 감정.

   * 정신분석 학자들이 하는 일은 두번째 종류의 속하는 비정상적인 감정들을 제거해 주는 것, 즉 선택하는 행위에 좀더 좋은 재료들 제공해 주는 것이다. 


  [소결론] 도덕은 심리학자들이 도우수 있는 영역이 아닌, 선택하는 행위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전쟁에 나가야 하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다. 


첫째: 위험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이 있지만, 도덕적인 노력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둘째, 셋째: 그릇된 잠재의식 속에서 터무니없는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도덕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싸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정신분석학자가 그들을 치료했다. 첫번째 남자와 같은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는 여기서 끝나고, 이제부터는 도덕적인 문제가 시작된다. 둘째는 도덕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전쟁터로 나가고, 세번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긴다. 이때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순전히 도덕적인 문제로 정신분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따라서 회개가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사람은 원재료에서 나온 선택의 결과만을 본다.(왜곡된 재료들의 결과들로 말미암아 파괴적인 것들이 그 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원재료만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재료로 무엇을 했느냐를 보고 판단하신다.(그런 원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도덕적 선을 행하려고 했었는가로 판단하신다.) 마지막 날에는 과장된 자기 원재료가 제거되고, 왜곡되었던 자기 원재료도 모두 온전해 질 것이다. 그 때 어떤 사람에게는 거품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큰 격려가 될 것이다.)


기독교 도덕을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는 것과 같은 거래라고 생각하는 것


1. 매번 선택을 내리는 행위는 그 결과보다 그 선택을 하게 되는 마음의 선택과 관련된 것이다. 

2.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3. 우리는 평생에 천국의 피조물로 자기 자신을 바꾸어 가든지, 아니면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게 된다. 

4. 따라서 기독교 저자들의 이상한 고백, 생각으로 짓는 죄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끔찍한 행동에 대해서는 회개만 하면 다 용서받을 일처럼 간단하게 다루는 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선명해 진다. 


1.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이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는 사람은 자신이 자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2.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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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과 관련하여 기독교가 주고 있지 않은 것>

1. 이 영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다. 있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황금률에 대해서)

2. 어떤 도덕을 특정시대 특정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세부적 정치 프로그램이 없고 그런 것을 노리지도 않았다.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1. 그것은 기독교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만 그렇다. 


2.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일은 사실 우리 같은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가 사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단편적인 내용들...


  (1) 성경은 사회에 놀고 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분별없는 사치품을 만들지 않고, 그런것을 부추기는 분별없는 광고는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독교는 좌파적 성향을 가지는 것 같다. 


  (2) 그러나 성경에는 우파적 경향의 요구도 한다. 정당하게 임명된 관리에게 순종할 것, 남편에게 순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인기없는 말이지만)


  (3) 만약, 경제생활이 아주 사회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가정생활과 예의 범절은 오히려 구식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 방문한다면 매우 기이한 인상을 받고 돌아올 것이다.(낯선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는 취하고, 일부는 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과 구약시대의 유대인 그리고 중세의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충고에 대해서 우리가 명백하게 거슬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자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 <투자 제도>라는 것으로 들어와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주식회사와 같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세 문명은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해서 한결같이 비난했다는 점이다. 


  (4) 자선(charity)과 같은 제도도 성경에서 분명이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선이 필요없는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여유있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난, 헌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선을 넘어 주변의 친척과 가족들까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필요들이 있다고 봐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더 큰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돈 욕심보다는 두려움_생활의 안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_입니다. 


<정리하면서>


자시의 말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덜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것이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너무 진보적이라고 말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사회의 청사진 그리기를 방해하는 진짜 암초에 정면으로 부딪힌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바를 정말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입장을 지지해 줄 내용을 기독교에서 끌어다 쓰려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_또는 심판자_을 만나야 할 곳에서 '내 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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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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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기본 덕목


[전통적인 측면에서 기본 덕목]


기본 덕목: 4가지_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

신학적 덕목: 3가지


[기본 덕목]


1. 분별력(Prudence)

  1) 의미: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


  2) 착하기만 하고 어리석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3)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이의 마음과 어른의 머리다. 


  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새 지성이 예리해 진다는 것이다. 존 버연 처럼 말이다. 


2. 절제(Temperance) 

  1) 의미: 절제는 특별히 음주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2) 절대 금주(?) 


  3) 결혼이든 고기든 술이든 영화든 절대금지가 아니라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4) 골프나 오토바이나 옷이나 카드놀이 혹은 애완견에 온통 정신이 팔린 사람도 술취한 것 만큼이나 무절제한 사라이다. 


3. 정의(Justice)

  1) 의미: 지금 우리가 공정함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옛날에는 정의라고 불렀다. 

  2) 정직함이나 공평한 교환, 성실함, 약속을 지키는 일 등 삶의 모든 부분이 포함된다. 


4. 꿋꿋함(Fortitude)

  1) 의미: 꿋꿋함에는 두가지 종류의 용기(1. 고통속에서 버티는 용기, 2. 위험에 맞서는 용기)가 포함되어 있다. 


[주의]


1. 정의롭거나 절제있는 특정 행동을 한다는 것이 그 사람 자체가 정의롭거나 절제 있다는 뜻은 아니다. 


2. 여기서 말하는 '덕목'이란 특정 행동이 아니라 인격적 특질을 가리킨다. 


  (1) 옳은 행동을 했더라도, 그 동기가 옳지 않으면 특질이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2) 그저 하나님이 정하신 한 묶음의 규칙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3) 성품은 현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세에도 필요한 것이다.(천국에는 다툴일이 없으니까 필요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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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홀파청년평원 목자훈련과정

 

진행/문의: 김수억 목사

기간: 20131-3(매 주일)

대상: 현 목자와 예비 목자

내용: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와 개인 경건훈련(암송, 큐티, 설교일지)

준비물: 교재(필독서), 암송카드, 설교일지, 큐티일지.


진행계획


주차

날짜

주교재 스터디(전체 33 챕터)

암송

기타

1

1/13

chapter. 1-2

 

 

2

1/20

chapter. 3-5

말씀을 먹을 것(4:4)

큐티, 설교일지

3

1/27

chapter. 6-10

기도할 것(요일 5:14,15)

큐티, 설교일지

4

2/10

chapter. 11-14

교제할 것(10:24,25)

큐티, 설교일지

5

2/17

스페셜 모임

 

 

6

2/24

chapter. 15-18

봉사할 것(6:9,10)

큐티, 설교일지

7

3/10

chapter. 19-22

죄 자백할 것(요일 1:9)

큐티, 설교일지

8

3/17

chapter. 23-26

성령 충만(5:18)

큐티, 설교일지

9

3/24

chapter. 27-30

 

큐티, 설교일지

10

3/31

chapter. 31-33

전체 암송 테스트

큐티, 설교일지

 

 

 

 

 

 

매주 과제:

1) 주교재 해당 내용 읽고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정리해 오기

2) 매주 암송구절 암송해 오기: 매주 필기 테스트 / 마지막 시간에는 전체 테스트

3) 매주 큐티 일지(매일)와 주일 설교일지 제출.

 

상벌규정

1) 암송시험, 큐티, 설교일지 미제출자나 불성실하게 작성한 목자

2) 지각, 결석의 경우

* 방법: 훈련첫날 1만원 선불로 제출 성의있게 훈련을 잘 받는 사람들은 환불과 더불어 시상, 성의있게 훈련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최대 전액 환불받지 못할 수 있음.

3) 주교재 요약정리 미제출자의 경우는 따로 구별하여 지도목사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커피 제공 후 숙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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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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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여기서부터는 3부로서 기독교와 도덕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한다. 도덕은 인생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잘 사용하기 위한 메뉴얼과 같은 것이다. 도덕을 말하기 위해서는 3가지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대부분이 공감할 것임) 둘째는 각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들, 셋째는 인간과 인간을 만든 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둘째와 셋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게 공감하니까.



3. 그리스도인의 행동

3-1. 도덕의 세 요소


1. 도덕이란 말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

  하나님은 '누가 재미있게 지내나 맨날 감시하다가 결국은 훼방을 놓는 분'이라고 말함(초등학생)

  도덕이란 무엇인가 감섭하는 것, 우리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는 훼방꾼이라는 생각


2. 도덕 규칙이란 인간이라는 기계를 잘 움직이게 만드는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 

  1) 도덕 규칙이란 인간 기계에 무리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 적절하게 잘 사용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2) 아직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게 '그렇게 하면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은 간섭처럼 들리겠지만, 잘 사용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고 그 규칙에 익숙해 져야 한다. 


3. 그렇다고 여기서 도덕 규칙이라는 것이 도덕적 이상(완벽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1) 도덕적 이상을 포함한 모든 완변함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1) 완벽한 테니스 선수도 없고, 완벽한 직선을 그릴수도 없다. 완벽한 운전사가 될 수도 없다. 


  2) 도덕적 이상주의는 단순히 이상적인 취향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다.


  3) 도덕적으로 좀 더 '이상'에 가깝게 되었다고 해서 '이상'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좀 덜 하고, 음란한 짓을 좀 덜하려고 노력하고, 횡포를 좀 덜 부린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점점 교만해지게 되는데) 이런 것은 계산을 좀 더 잘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계산을 완벽하게 하길 원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칭찬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산을 완벽하게 하지 못할 때, 자기가 불편해 지는 어려움을 겪을 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나중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편을 끼칠 수 있게 된다. 


4. 인간이라는 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고장이 날 수 있다. 

  1) 개인들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동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로, 속임수를 쓰거나 횡포를 부릴 때 일어남

  2) 각 개인의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각기 다른 기능과 욕구 등)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하는 경우.


   예) 편대를 지어 항해하는 배들에 비유: 서로의 항로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하고, 양호한 엔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곡을 연주하는 악단에 비유: 연주가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연주자들의 악기가 잘 조율되어야 하고, 다른 악기들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배들의 경우 목적지가 틀리면 실패한 것처럼, 도덕 규칙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5. 도덕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세 가지 관련사항

  1)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있다. 

  2)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 또는 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다.

  3)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1) 항에 대해서만 고려를 하는 경향이 있다. 1)항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기준이다. 2)항과 3항에 대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배가 서로 부딪히는 경우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엔진과 같은 것이 고장나서 발생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1)항부터 도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2)항이 더 근원적일 수 있다. 아무리 배를 잘 조정하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배가 조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고 결함 투성이라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도의 개선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각 개인의 용기와 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제도 속에서도 예전에 하던 짓을 계속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법으로는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3) 항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배에게 피해룰 주지 않는다(1항)는 한계 내에서 내가 타고 있는 이 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나 그 배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주인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을 때와 대략 70세 정도를 살다가 죽을 존재로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70년 정도 살다 죽을 인생은 못된 성질과 시기심이 있다 손  치더라도 70년 정도 지난다고 한들 크게 심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100만년 동안 강화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지옥이 되고만다.  또한 이 차이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이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약 각 개인이 70년만 살다가 죽는다면 천년동안 계속될 국가나 민족 혹은 문명이 개인보다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히 산다면 개인은 국가나 문명보다 단순히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한 존재로 격상하게 된다. 


6. 결론

  도덕에 관해 생각할 때, 세 가지 분야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 첫번째 분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불일치는 두번째에서 심각해 지면, 세번쩨 분야에서 더욱 커집니다. 이번 장부터 다루게 될 3부에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조망할 생각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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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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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본 장에서 루이스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사역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역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 루이스는 영향력이 미치는 과정에 대한 설명(다양한 견해가 있으므로)에 대해서는 이해를 돕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본질은 암튼, 효력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루이스가 이해한 설명을 해본다.(대속, 인간의 상태, 회개의 개념, 회개의 필요성, 회개의 능력,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 대속의 개념 등)



<예수에 대한 판단>

우리는 그를 자기의 주장대로 하나님으로 보든지 아니면 그를 미치광이 혹은 그 보다 못한 자였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루이스는 아무리 봐도 예수를 미치광이나 그보다 못한 자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정말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하나님이고 지금도 하나님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예수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가?>


1. 성경은 예수가 고난 받고 죽임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1) 루이스는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와 같은 효과를 이루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그 자체로 기독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갖느냐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는 아니라고 한계를 정한다. 


  2) 루이스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효력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한다. 

    예)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 체력적으로 회복되고 원기를 되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타민이나 단백질 이론을 통해서 더 구체적인 이해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혹 그런 설명이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영향력]

  (1)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바깥에서부터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역사의 지점이다. 

  (2) 우리가 원자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사건을 완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3) 음식이 우리에게 어떻게 효력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음식을 먹음으로 효과는 얻을 수 있다.


2.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기본)공식

  1)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

  2)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다. 

  3)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


  [루이스가 제안하는 하나의 이론]

   (1) 그리스도가 자원해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면받았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이론.

      : 어떤 사람은 사면해 줄 작정이면 그냥해 주면되지 왜 죄없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말인가? 질문할 수 있음.

     [답] 이 벌을 즉결재판소의 '처벌'로 생각하지 말고, '빚'으로 생각하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죄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계산을 치른다'나 '비용을 부담한다'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2) 인간이 빠진 곤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스스로 서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것이란 점이다.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라는 것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이다.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이 도와 주실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는 것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분 자신의 추론 능력을 우리에게 조금 빌려주셨고, 그분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셨기에 우리는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어린 아이가 글을 배울 때, 부모가 함께 손을 잡고 글을 써주듯이 그가 우리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 사실 하나님은 회개와 관련하여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돕기 위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자기 뜻을 포기하고, 고난을 겪으며 심지어 죽을 수도 있게 되었으므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써야 할 모든 과정을 함께 써내려갈 수 있는 존재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까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셔야 했다. 


     <질문: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이 지극히 쉬웠던 것 아니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어떤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쉬웠다는 것이 우리가 그를 거절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의지해야 할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글씨를 지도하고 있는 어른의 실력이 어린 아이보다 낫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하면서 그 어른에게서 배우지 않고 오히려 아직 글도 모르는 동료들에게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있는가? 

    (2) 물에 빠진 사람이, 한 다리를 강둑에 두고 팔을 뻣어 손을 내민 사람을 향해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오히려 그 사람의 유리한 조건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보다 더 강한 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는가? 


    (3) 이것이 저자가 <대속>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그림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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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루이스는 현재 악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보다 윌등한 하나님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한다. 루이스는 선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그 선한 세상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신 것도 그의 뜻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반대자들의 논리에 대응하면서 이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전논의들>

악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적 관점과 이원론적 관점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악이란 선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왜곡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선과 악을 대등한 관계로 보는 이원론의 관점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기독교적 관점이 실재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질문들>

그렇다면 악한 권세가 현재 이 세상의 군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이상한 분이 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하는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루이스의 설명>

1. 자녀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과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자녀와는 차이가 있다. 

  1) 자녀에게 자유를 준것도 어머니의 뜻이었다. 

  2) 마찬가지로 분명히 어머니의 뜻한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뜻한 바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2. 이 우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1)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을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사랑이나 선 그리고 기쁨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전쟁 상태가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자유 의지를 통해서 나오는 진짜 선을 행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치러야 할 과정으로 생각하셨던 것으로 봐야 한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또 다른 질문들>

1. 하나님은 왜 이리 쉽게 부패하는 재료로 피조물로 만드셨을까? 

  좋은 재료일 수록 옳은 길로 가면 더 선해지지만, 그른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악해지는 법이다. 소보다는 개가, 개보다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이, 어른 보다는 천재적인 성인이 더 그렇습니다. 초인적인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2. 어두운 권세는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1) 인간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에는 분명하다.

  2) 그러나 우리 자신이 타락했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분명하다. 

   (1)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의해서 타락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문제와 관련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렸다. 성적인 것은 죄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2) 사탄이 지은 죄도 이와 같은 죄이다. 

  3) 이런 사탄과 인간의 시도(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가려는)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넣어야만 달릴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휘발유를 넣어야 달리는 엔진을 만든것 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넣고 달리려고 할 때 문제는 발생하고 만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평화나 행복은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명과 제도들은 처음에는 잘 굴러가는 것 같으나 곧 비참과 파멸로 빠지게 되었다. 


3. 이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1)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양심,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을 남겨 주셨다. 

  2) 좋은 꿈이라는 것을 인류에게 보내 주셨다.(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희망)

  3) 하나님은 한 특정한 민족을 택하여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수세기에 걸쳐 그들의 머리에 심어 주셨다. 

    : 그 민족인 바로 유대 민족이고, 그 심어주신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다. 


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유대인 중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으로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다니는 사람이 나타났다.


  1) 이 사람은 범신론자는 아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밖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아닌 다음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다. 


  2) 이 사람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상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할 때 이런 일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내는 것이기에 그렇다. 


  3)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 예수에 대해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사실은 온유와 겸손과는 관계가 먼 이야기(자신을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말들)를 그가 많이 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말이다. 이것은 예수를 단순히 도덕적인 스승 정도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평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판단의 결단을 촉구하는 루이스]

우리는 예수가 그의 말대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으로 여겨 그의 입을 틀어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며 그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하는 헛소리는 삼가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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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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