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2-2 하나님의 침공] 실재하는 우주의 선과 악에 대한 대립. 이원론으로 풀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풀것인가? 루이스는 기독교적 관점이 우주의 실재성을 더 잘 설명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악이란 독립된 힘이 아니라 선에 종속된 변형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악마를 타락한 천사라고 말한 것도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 루이스가 말한 단순하기 그지 없는 말.


 1) 무신론자들의 주장: 우주는 무의미하다.

 2) 물 탄 기독교의 주장: 하늘에 선한 하나님이 계시니 만사형통이다. 여기에서는 죄니 지옥이니 악마니 구속이니 하는 어렵고 무서운 교리들은 전부 제쳐 놓는다. 


2. 실재하는 세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도 단순할 수 없다.(복잡하고 어려울 수 밖에 없다.)


  1) 단순하게 보이는 것도 실재에 들어가면 매우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2) 단순한 대답 이상의 것을 요구하면서 왜 대답이 단순하지 않냐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6살짜리 어린애한테나 맞을 기독교를 내세워 놓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것은 어리석다.(너무 단순회 시킴)

  3) 종교뿐 아니라 실재는 매우 복잡하고 말끔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다. 

예) 의자를 보는 과정, 태양과 행성간의 모습과 규칙에 대해서도 

  4) 오히려 짐작할 수 없고 인간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기독교를 믿는 이유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어떤 것이 아니다. 

  5) 기독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다. 실재하는 것들이 대게 다 그렇다. 


3. 본론적인 논지: 우주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관점은 두가지다. 


   1)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은 원래 좋았는데, 나빠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할 원래 모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는 관점

  2) 이원론적 관점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동등하며 독립적인 힘이 있어 우주는 그 두 힘의 끝없이 싸우는 전쟁터라고 믿는 것이다. 

    (1) 두 힘 내지 두 영 또는 두 신(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한)은 아주 독립적인 존재이다.

    (2) 두 힘은 모두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 자처할 수 있는 권리를 더 가진 것도 아니다. 아마 두 힘은 각각 자기가 선하며 상대방이 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4. 이원론적 관점의 오류에 대해서 

  1) 어떤 신은 선하고 어떤 신은 악하다고 규정할 때, 이것은 제 3의 존재 즉 두 힘 중에 하나는 거기에 부합되지만 다른 하나는 부합되지 않는 어떤 법칙 내지는 기준을 우주에 끌어들이게 되는 셈이 된다. 

  2) 이는 그 기준을 따라 두 힘을 판단하게 되는 것을 볼 때 그 두 힘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기에 그 제 3의 존재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일 것이다. 

  3) 즉 선하고 악하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는 진정한 궁극적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릇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악을 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악을 행할 때에는 악을 통해 쾌락을 느끼거나(가학성 변태성욕자 처럼) 아니면 악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은 선한 것인데, 그것을 그릇된 방식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혹은 과도하게) 악이 되는 것이다. 


  선은 선 그 자체이지만, 악은 선이 부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먼저 선한 것을 원하고, 그 다음에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충동을 왜곡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왜곡시킬 좋은 충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이란 선의 왜곡인 것이다. 악한 힘이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선한 힘이 다스리는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서 악마를 타락한 천사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악이 원형이 아니라 원형에 기생하는 것임을 인식한데서 나온 말이다. 


5. 기독교적 관점이 더 실재에 근접한 설명이다. 


  1) 루이스는 참된 기독교가 이원론에 아주 가깝다는 것을 인정한다. 

  2) 그러나 기독교는 이 우주 안에 있는 어두운 권세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로서 본래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후에 악하게 변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원론과 구별된다.

  3) 이 우주가 전쟁중이라는데는 기독교도 이원론과 동의한다. 

  4) 그러나 이 전쟁이 독립적인 두 세력간의 전쟁은 아니다. 기독교는 이 전쟁을 일종의 내란 내지는 반란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한다. 

  5)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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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2-1.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1. 우선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가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을 필요가 없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2) 무신론자들이 믿는 것은, 세상 모든 종


교를 지탱하는 중심점은 하나의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종교와의 차이에 있어서 기독교가 옳고 다른 종교들은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것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기 때문에 차별성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모든 다른 종교를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종교 속에서도 정답에 근접한 답이 있는 법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진다. 


2. 믿음과 관련하여 인류를 나누는 기준

  1)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다수와 믿지 않는 소수로 나눌수 있다. 

     (1) 그리스도인: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 현대의 미개인들, 스토아학파, 플라톤주의자, 힌두교도, 회교도 등과 같음

     (2) 현대 유럽의 유물론자(소수)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2) 하나님이 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선한 존재 혹은 의로운 존재로서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가?로 구분해 볼 때


   (1) 범신론(선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존재): 헤겔과 힌두교도들

   (2)  선한 존재: 유대인과 회교도와 그리스도인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 범신론은 인간이 제 몸을 움직이듯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기독교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듯 하나님이 우주를 창안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화가와 그림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이 파괴되어도 화가는 죽지 않는다. 


3. 기독교는 전투적인 종교다.(기독교가 믿는 것)

  1)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다.

  2)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버렸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바로 잡으라고 명하신다. 

  4)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명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믿음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질문] 선하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왜 잘못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범신론자들은 암이나 빈민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적인 관점에서 보기만 한다면, 이런 것들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텐데' 라고 답한다.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지적인 존재가 만든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라고 쉽게 답을 할 수있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자신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답변에 귀를 막아왔었다. 


루이스의 질문은 세상이 너무 잔인하고 불의하다는데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정의>니 <불의>니 하는 개념은 어떻게 갖게 된 것인가? 직선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굽은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악하고 굽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 선과 직선에 대한 인식이 선재하기 때문이 아닌가?(물고기는 축축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내가 축축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주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에 빛이 없고 따라서 눈을 가진 생물도 없다면 우주가 어둡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정리] 무신론자가 왜 세상이 불의하고 악한가? 라고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절대적 기준을 가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정말로 절대적 기준을 가진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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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어떤 사람은 종교문제는 이미 과거에 끝난 문제로 시계를 거꾸로 돌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 3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1) 시계가 잘못 가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거꾸로 돌리는 것이 더 현명한 일 아닌가!

  2) 잘못된 길로 접어들엇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보를 위해서는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선재해야 한다. 

  3) 수학의 예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잘못된 공식으로 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바른 해법으로 풀어야 한다. 


  [소결론] 지금 세상의 상태를 보면 인정하시겠지만, 인류는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되돌아 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2. 본격적인 <종교 선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1) 지금까지 도덕률 배후에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까지만 이야기했지, 특정 종교의 신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도 하지 못했다. 성경이 없이도 알아올 수 있는데까지 온 것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격적인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1) 누군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2) 그가 우리 안에 둔 도덕률이다. 이것은 내부 정보이기 때문에 더 좋은 증거가 된다. 

     이것을 볼 때, 우주 배후에 있는 존재가 옳은 행동(공정한 처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 용기, 신뢰, 정식, 신용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3)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선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상냥하고 동정많은 분이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덕률에는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률은 올바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4) 만약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미워하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절대 선이 우주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없고,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다. 다음날이라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이다."

3.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좀더 유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독교는 결국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은 낭패감에서 출발하는 종교다. 따라서 그 낭패감을 먼저 겪지 않는 한 아무리 위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들 소용이 없다. 


[결론]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하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전쟁 전 국제 정치에 품었던 몽상에서 이제 막 깨어난것처럼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도 몽상에서 깨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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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1. 돌이나 나무에 해당하는 이른바 자연법칙은 단순히 하나의 표현법(현상에 대한 설명)에 불과함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 너머에 무엇인가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 


2. 반면 인간 본성의 법칙 내지는 옳고 그름의 법칙은 인간 행위(보여지는 것)라는 현실의 사실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재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법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 이제 논하려고 한다.


1. 인간이 우주에 대해서 가지는 두 가지 관점

  1) 유물론적 관점: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지만,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 

    우연의 산물로서 우주와 생물은 발생하게 되었다고 본다. 

    [결론] 우주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없다.


  2) 종교적인 관점: 우주의 배후에는 그 어떤 것보다 정신(mind)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고 본다. 

     그 존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우주를 만들었다고 본다. 

     [결론] 우주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있다.


2.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자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을까?

 

  1) 일반적으로 과학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데 과학은 그것을 파악하는데 한계를 가진다. 



   * 과학은 관찰을 통한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다. 과학이 관찰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니다. 배후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진술은 아니다. 과학이 훗날 전 우주에 있는 것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만으로는 그 배후의 존재에 대한 힌트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2) 과학 말고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주 중에 하나이면서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을 통해서다. 


  * 그러나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인간이다. 우리에게 인간은 단순한 관찰대상자 일뿐 아니라, 우주의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앞에서 확인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지 아니한, 도덕률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3. 따라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앞에서 도덕률, 인간 본성 법칙, 옳고 그름의 법칙과 같이, 우리 안에 누군가가 심어놓은 법칙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것을 심어놓은 배후의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론]  인간만의 경험을 놓고 모든 우주에 다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논리가 아닌가?

    우체국 아저씨가 집집마다 봉투를 두고 갈 때, 우리는 그것을 다 열어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어떤 내용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편지 봉투를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연 봉투에서는 언제든지 편지가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다.(다른 사람의 봉투는 열어볼 수 없으니까...)


   인간으로서 우리가 열 수 있는 유일한 봉투는 인간 자신뿐이다. 우리는 나라는 인간을 열어보았을 때,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한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정리] 루이스는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간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한다. 지금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 무언가는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법칙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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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일반적인 자연 법칙(중력과 같은)과 다른 <인간 본성의 법칙>이 실재하는 법칙(존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법칙)이라는 것을 논증한다. 



1. 일반적인 자연법치과 인간 본성의 법칙의 차이점


  1)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법칙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법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표현법에 불과하다.

    예) 돌이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은, 돌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법칙) 돌은 던지면 떨어지게 마련이다라는 뜻이다. 즉, 그 사실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여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법칙이 따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분명히 알 수 없다.(따로 다루어야 할 문제다.) 


  2) 그러나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때의 법칙은 확실히 '인간이 실제로 늘 하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말한 것처럼(1장에서) 많은 인간들이 이 법칙을 따르지 않으며, 단 한명의 인간도 완전하게 따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인간의 실제적 설명과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즉, 다른 무엇인가가 더 들어오게 된다. (인간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다르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있게 된다.)



2. 자연법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있다. 


  1) 자연 법칙을 따르는 대상을 향해서 좋다 나쁘다를 규정할 수 없다. 종종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다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유익하다와 그렇지 않다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나무는 충분한 그늘을 제공하니 좋은 나무다. 그렇지 못하니 나쁜 나무다 / 이 돌은 모양이 영 나쁘다 와 같이)


  2) 그러나 사람들이  <그는 지금처럼 행동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할 때, 물질에 좋고 나쁘다는 평가를 하듯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나의 이익과 불이익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다. 


     (예) 기차에 먼저와서 창가에 앉은 사람과 나 몰래 내 가방을 치우고 앉은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둘 다 불편하지만, 전자는 비난하지 않지만, 후자는 비난한다.(불이익=나쁨)

     (예) 내게 유익을 준다고 할 찌라도 우리는 악하게 판단하기도 한다. 전쟁중에 적국의 배신자는 우리에게는 유익하지만, 우리는 그를 버러지로 여기기 때문이다.(이익=나쁨)



[정리] 중력법칙(자연법칙)은 단순히 무거운 물체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사실에 불과하지만, '도덕률' 곧 '인간 본성의 법칙'은 단순히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공상도 아니다. 인간은 이 생각을 도저히 없앨 수가 없다.(만약 이것을 없앤다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언급하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헛소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법칙> 혹은 <인간 본성의 법칙>은 여하튼 실재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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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주장은 간단하게 하면 두가지다.


1.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내용을 정리해 보자. 


1. 우리는 많은 다툼을 하면서 살아 간다.


2. 다툼의 근거는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호소한다.

  1) 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냐?라고 따지지 그런 기준따위는 집어치워!라고 말하지는 않는다.(기준을 부정하면 싸움이 형성될 수 없기에)

   2) 따라서 대부분의 싸움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의 합당성의 문제다. 

   3) 이로 보건데,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일종의 합의가 없다면 싸움은 무의미하다. 


3. 사람들은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Law of Nature)이라고 불렀다. 

  1) 오늘날은 자연법하면, 중력 법칙, 유전 법칙, 화학 법칙 등을 가리키지만


  2) 이전 사상가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뜻에서 였다. 즉 중력의 법칙에 모든 인간이 지배를 받듯, 모든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3) 중력의 법칙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거부할 수 있다. 


  4) 이런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 있지만, 인류 보편적으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것)

   (1)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히틀러 조차 비난할 수 없다. 


  5) 문명이나 시대에 따라 도덕간에 차이가 나긴 해도, 그것은 전적인 차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1) 예컨데 고대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인도인, 중국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도덕들을 비교해 보면, 그것들이 서로 아주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2) 가족애와 민족애에 대한 규정은 시대와 문화마다 다르겠지만, 이기주의가 높이 평가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3) 아내를 몇 명을 두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달랐지만, 무분별하게 여자를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에는 공통적이었다. 


  6)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입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예) 조약을 깨뜨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해!와 같은.


  [소결론] 인간은 모든 문화와 시대 속에서 <자연법>으로 받아들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4. 그럼에도 이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1) 우리는 이 자연법을 지키는데 실패했다.(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책을 사서 읽으라!)

  2) 우리는 많은 변명을 늘어놓고,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한다. 

  3) 이것은 싫든 좋든 우리 안에 <자연법>이 얼마나 깊이 있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4) 우리는 자신의 나쁜 습성에 대해서는 여러 변명을 대고,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면서도 좋은 습성에 대해서는 늘 자기 공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다. 


  [소결론] 우리는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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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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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을 제가 이해하기 쉬운 논리를 따라 정리해 봅니다. 참고하세요.



1.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본래 방송에서 발표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3권의 책으로 나왔다.(1942-1944)


2. 이 책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분들: 기독교 <교파> 중 어디를 택할까 고민하는 분들.

   : 물론 저자는 영국 성공회의 평범함 평신도다.


3.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지 않는 것


  ...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을 저와 같은 입장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 믿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 그리고 아마도 유일한 봉사는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4. 저자가 교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

  1) 모든 주제에 대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2) 어떤 사안은 정말 중립적일 때도 있고, 때로는 논쟁에 대한 답이 아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3)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 분명한 자신의 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순전한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이라는 목적 때문에 나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자 한다. 


    예) 성모 마리아의 문제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과 철저한 개신교 사이에 예리한 대립이 있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논쟁의 중심으로 끌려가 버릴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침묵한다. 


  4)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사안의 경중도 각자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5) 이 책의 3부에서 도더을 다룬 몇 몇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한 것도 있는데, 그 이유는 저 자신이 당면하지 않은 유혹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다. 

     예) 자신은 도박에 대한 유혹에는 매우 둔감하다. 이런 부분은 다루지 않았다. 또한 산아 제한과 같은 문제도...


5. 이 책의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저자가 한 노력

  1) 저자는 이 책을 쓰고자 할 때,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두가(모든 교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점에 대해서만 다루려고 했다. 


  2) 검증을 위해 이 책의 2부의 초고를 네 명의 성직자(영국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로마 가톨릭에 속한 성직자)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고, 사소한 몇 가지 지적 외에는 다섯 명의 생각이 일치했다.(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검토를요청하지 않음. 교파보다는 개인과 학파간의 차이일 것이기 때문에)


  3) 그 간의 서평들과 저자가 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서 판단할 때, 이 책이 다른 점에서는 흠이 있다 해도 최소한 이미 동의된 또는 공통적인 또는 중심적인 또는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는 일에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4) 이 책은 기독교에서 유의미한 <최대공약수>를 찾아냈고, 그것은 비기독교적인 신념들 사이에 있는 간극을 명확히 하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6.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 <기독교의 공통되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한 것에 대해서 


  1) 그 교리를 받지 않지만 나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2) <신사> 문장을 수놓은 외투를 입고,상당한 땅을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칭찬의 말로 변형됨.

  3) <그리스도인> 원래의 정의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쁜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7. 이 책 순전한 기독교를 기독교의 교파와의 관계에서 비유하자면

  1) 순전한 기독교는 여러 방으로 통하는 문들이 있는 현관 마루와 같다.(여기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함)


  2) 그러나 마루는 기다리는 장소이거나, 방문을 열어볼 수 있는 자리 일뿐 의자와 음식이 마련되어 있는 곳은 방안이다. 

  3) 마루는 계속 머물며 살 곳이 못된다. 아무리 열악한 방이라도 마루 보다는 낫다. 

  4)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면, 현관 마루에서 기다릴 생각을 해야지 아예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은 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한 방이 아닌, 그 집 전체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규칙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5) 페인트 칠에 현혹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 스타일이 어떤가를 볼 것이 아니라, 교리가 참된가?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를 봐야 한다. 

  6) 그렇게 해서 방을 정하게 되었다면, 다른 방을 택한 사람들과 여전히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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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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