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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4절.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절.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절.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절.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성경내용 정리]

1.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 떼들이 바다에 몰사하게 되자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읍내와 여러 마을에 다니면서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알렸고,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보려고 왔다. 

2. 그들이 와서 본 것은 그 귀신 들렸던 자(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그 마을에서 귀신들려 통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그들은 이 귀신들린 자가 얌전하게 앉아있었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3. 그 현장에서 귀신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 떼에게 벌어졌던 일을 본 사람들이 찾아온 무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그들의 반응은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는 것'이었다. 

4.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다시 배에 올라 떠나고자 하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네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났었는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을 네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있었던 큰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고,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일을 놀랍게 여겼다. 


[질문하기]

1.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의 군대 귀신을 내쫓아 준 것을 보고 왜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자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을까?(17절)

  1) 너무나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생겼을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적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2) 돼지에게 벌어진 일을 들었다. 수 천 마리의 돼지 떼가 예수님으로 인해 일순간 몰살되었다. 그 피해의 크기에 그들은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떤 큰 힘을 가진 분이 내게 유익을 줄지, 아니면 해로운 대상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없었던 상태'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떠나 달라'고 요청했을지 모르겠다. 


2. 왜 예수님은 함께 있겠다는 그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하지 않고, 이 일을 네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이전에 보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시기도 하셨는데 그것과는 상반된 조처를 하심)

  1)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다. 귀신들려 고통 받았던 사람은 그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귀신들린 자를 집에 둘수 없었고, 마을에 머물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었기 때문에 마음 아팠을 것이다. 주님은 제일 먼저 그 귀신들린자와 귀신들린 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먼저 이 기쁜 소식(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을 알리도록 하셨다. 

  2) 그러나 귀신으로부터 자유해진 사람이 가족들에게만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인근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전해졌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 일을 놀랍게 여기게 되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적극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그 놀라운 일을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간증이라고 볼 수 있는) 또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묵상하기]

예수님께서 행한 놀라운 일을 보면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는 것을 본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두려어했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 권능과 힘은 나에게 도움이 될지 나에게 해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내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힘이라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내곁에 두어야 하지만, 내가 예측할 수 없는 힘이 내 주변에 있을때 그것은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의 요소가 되고 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없는 것이 났다고 볼수 있다. 그들은 또 많은 돼지 떼를 잃어버릴수도 있는 것이다. '이 지방에서 떠나소서' 그러나 그 힘이 나를 귀신에게서 해방시켜준 힘이고, 내 가족을 고통 속에서 자유하게 해준 힘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귀신들린 자와 그 가족들이 경험했듯이) 예수님께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된다. 

귀신으로 인해 고통당했던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구원자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자에게는 예수님은 자신의 도움이 될지 해로움이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능력을 가진자에 불과하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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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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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시자 그 귀신들린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라건데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2. 예수님은 그 귀신을 향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그 귀신들린 자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다’고 말했고 더불어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길 간구’했다. 

3. 마침 거기에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 있는 것을 보고 ‘간구하되’ 자신들을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셨고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다. 그 이후 이천마리 되는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해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게 되었다. 


[질문하기]

1. 귀신을 쫓아내시는 다른 이야기와 좀 다른데, 어떤 점이 두드러지는가? 

  1) 이전에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의 경우, 예수님께서 귀신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귀신으로 인해 고통 당했던 사람에게 자유를 허럭하셨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 사건도 큰 맥락에서는 귀신을 제압하신 사건이란 측면에서는 유사하다.

  2)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에게 이름을 물으셨고, 그 귀신은 자신의 이름(군대=우리가 많다)과 규모를 알렸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해서는 ‘간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7절. 원하건대 / 10절. 간구하더니 / 12절. 간구하여 이르되) 심지어 예수님은 귀신의 간구에 대해서도 일부 들어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돼지에게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서 허락하셨다.)

2. 이런 독특한 점을 통해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인격성이 귀신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다. 단순히 힘으로 제압하는 모습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귀신들의 이름을 묻고 그들의 간구와 원함에 대해서 일부 반영해주는 인격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강한 힘과 더불어 여유있는 인격성을 보여주신다. 

  2) 예수님의 이런 인격성이 귀신을 옹호하시거나 심판을 거두시는 것으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결국은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로 빠져 몰사한다. 돼지들의 죽음이 있었지만, 그 귀신들렸던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묵상하기]

예수님은 힘과 권세로만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되심의 권세를 명확하게 보여주셨지만, 그 이후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시는 모습을 본다. 심지어 귀신들을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으셨다. 그의 이름을 물으셨고, 그들의 원하는 요구에 대해서 일부 허락하시기까지 하셨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여유라고나 할까? 하나님의 인격성으로 불러야 할까? 왜 돼지 떼에 들어갔는가는 그리 중요한 이슈는 아닌거 같다.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여유있는 관심과 인격적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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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_학교라는 이름의 정글(엄기호)


[저자의 제안]

1. 폭력적이지 않는 교육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대안교육이니 열린교육이니.. 다 마찬가지다.)

2. 왜냐하면 교육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인데, 훈육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인 용어다.

3. 따라서 우리는 폭력적이지 않는 교육을 말할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 자체를 폭력적으로 이해하는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


[질문]

1. 교실 안에서의 문제를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본 것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폭력: 형사 사건의 문제로 치부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랬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중재의 역할을 하면 정리가 되었다.)

       요즘: 도덕과 인륜의 문제_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 저자는 구조적 문제로 봄(우정이 넘을 수 없는 벽)


2.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제자훈련 과정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인격적인 제자훈련? 이란 말은 모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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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은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 성장은 상실과 자기 세계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p짱 이야기는 그와 같은 교육이야기를 한다.

  :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2. 그러나 다른 다수의 학생들은 교실 내에서의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3.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교육은 대학만을 목표로 할뿐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교육의 과정은 목적을 위해 폭력이 허용된다.


4. 수업시간에 영화를 보고 난 후 학생들의 견해

  1) 교사의 재량권을 확보해주는 교육환경이 한국과 달랐다. 학부모의 반발에 대해 교사의 편에 서준 교장선생님

  2) 학생들의 발표가 인상적.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모습이 한국 대학생들과 비교되었다. 


5. 학생들의 예상외의 반응

  1) 돼지를 키워 생명의 소중함을 알도록 하자는 교사의 제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학생들.(모순적 독단적 행동)

  2) 한국 내 열린교육의 허상: 한 번도 열린적이 없는 교육, 의지와 상관없이 참여해야만 하는 교육

  3) 방식은 체험을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교사 중심의 교실, 교실에 민주주의는 없다.


6. 교실은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앖다. 

  1) 과거부터 교실은 폭력적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됨

  2) 지금은 폭력의 문제를 형사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인륜의 문제로 가져간다. 

   - 어떻게 학생이 그럴수 있지? 어떻게 친구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지? 와 같은 질문.

  - 그러나 학교는 우정의 공간이 아니라, 권력적인 공간이다. 공부는 하나의 권력이 되어 잘사는 아이와 힘쎈 아이와 결합하고 반에서 가장 덜 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못살고 공부 못하고 못생기고 무엇보다 덜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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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실이다. 이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자. 폭력이 없다고... 열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실에 민주주의가 왔다고 착각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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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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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청년 아웃리치를 다녀오느라 작업을 한 동안 못했네요. 이제 약간식 정신도 돌아오고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 봅니다. 오늘은 베드로 후서 2장입니다. 먼저 1장에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을 통해서 살펴봤습니다. ^^ 미리 정리해 놓은 것이 이럴때 도움이 되는 군요.

베드로는 변화산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도였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성경이라고 말했지요. 그래서 성경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되고 신중하게 그 뜻이 이해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더군요. 그런 흐름 속에서 2장으로 들어가 봅니다.

[정리1. 본문 내용 정리]

1. 그러나 너희 중에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 거짓선지자들이 너희를 유혹하는데 이들은 멸망을 스스로 취하리라.

  1) 이들은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다.

  2)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고, 그들은 탐색으로 지어낸 말로 이득을 삼으니 반드시 심판당하게 되리라

  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용서하지 않음. 노아 때의 세상을 심판함으로 경건한 가정을 보존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건치 않음으로 의로운 롯이 악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신다.

  예) 특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와 주관하는 자를 멸시하여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그를 비방하는데, 이들은 마치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멸망을 당하고 만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죄를 범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이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다.

 

2. 만일 그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라.

  1) 도리어 처음부터 의의 도를 알지 못한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2)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워버린 격이되었다.

 

[정리2. 본문 내용의 재정리. 내 방식으로 정리하기]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함으로서 이단을 받아들이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범죄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운명은 심각할 것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거짓된 가르침 뿐아니라 더러움에 빠진 자요 정욕가운데 행하는 자며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건하며 불의한 자들이라.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위해서라도 이들을 반드시 분리하며, 이들의 운명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이들의 앞날에 캄캄한 어둠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들은 의의 도를 알고,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처음형편보다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자기 멋대로 풀어서 해석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이 크다.(단순한 해석의 미숙이나 실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악한 의도와 미혹으로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불경건한 사람이다. 그리고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인 것이다.)

2. 특히, 거짓된 해석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그들을 세상의 정욕과 탐욕적인 삶으로 유혹하는 자들은 오히려 한 때 믿는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 정도의 참담함이 있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구별하고 보존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4. 얼마전 이단에 빠진 사람은 다시 용서받지 못하는 건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친구의 가까운 사람이 기존교회에 다니다가 이단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마 그 친구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은 오늘 본문(벧후 2장)에 언급된 표현때문에 목회자들 사이에, 혹은 사람들 사이에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했다.

5.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들의 특징은 단순히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다.

  1) 벧후 2장에서 말하는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다.

  2) 이들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여 자신의 탐욕과 정욕의 근거로 삼는 사람이다. 이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3) 잘못된 확신과 미혹에 빠져 잠시 이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는 차별이 있다고 보인다. 교회에 다니다가 순수하게(?) 이단에 빠지게 된 사람들은 성경을 더 열심히 알려고 하다가, 혹은 신앙적 열심을 통한 하나님의 종말때의 상급을 바라는 마음으로 빠지는 경우가 다수다. 이분들의 문제는 무지와 그릇된 열심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동기까지 악하다고 볼 수는 없다.

  4) 벧후 2장에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과 정욕을 위해 사사로이 성경을 해석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미혹하여 타락하게 끔 하는 역할(노아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브올의 아들 바람처럼... 의도적인 악을 통해 경건한 자들을 미혹하려고 함)을 주도적으로 의식적으로 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봐야 한다.

  5) 무지로 인해, 그릇된 열심으로 인해 이단에 빠지게 된 것과는 차별을 두어서 봐야 할 것이다. 이단에 빠졌다고 해서 다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만 볼 수는 없다.

  [약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들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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