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말 4:1-6 신약으로 이어지는 구약의 끝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심판의 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은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타 없어질 것이다. 반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의로움이 해처럼 비추게 될 것이다. 의인들이 악인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심판의 때가 이르기전 엘리야를 보내셔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일을 먼저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절별 해설

4:1 <<뜨거운 용광로와 같은 날이 오고 있다>> 철을 녹일만큼 뜨거운 불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라도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만한 자와 악한 자는 용광로 앞에 지푸라기 같은 존재다. 그 날에 교만한 자와 악한 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4:2 <<그러나 나를 섬기는 너희에게는>> 이 땅에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전혀 다른 날이 된다. 의로움이 해처럼 비춤으로서 자신들이 의를 지켰던 것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치료하는 광선을 통해 상처입은 것이 회복될 것이다. 그래서 눌려있던 삶은 회복되어 외양간에서 풀려난 송아지처럼 자유롭게 뛰놀 것이다.


4:3 <<그 날에 내가 이 일을 이루겠다>> 심판의 날에 교만한 자,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기 백성을 완전히 회복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고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심으로 이 말씀을 듣는 자 중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믿음의 인내를, 교만한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4:4 <<모세에게 명령한 율법과 규례를 기억하여라>>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로 통치되는 나라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을 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백성들은 돌이키고,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다시 간직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준비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4:6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게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할 것이다>>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엘리야의 역할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와 자녀 모두의 마음을 서로 다시 돌아오게 하여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중재 노력이 다시 한번 있게 됨을 말라기는 알려주시면서 구약을 마친다. 


기도

하나님, 이 땅의 백성들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놓치지 않은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 마지막 책의 마지막 4장의 마지막 부분(4-6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고난의 길을 가시기 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그 장소에서 나타난 구약의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이기 때문이다.(마 17:1-3)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사랑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세우셨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심으로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의 자녀들에게, 또한 자녀들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에게 돌이키게 한 사역을 감당하셨다. 예수님의 초림은 말라기에서 예언하고 있는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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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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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한 모금]


1. 말라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교만하고 악한 자들에게 대한 불 심판의 날이다. 완전히 소멸될 것을 말씀하신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된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임에는 분명하다. 그 날이 되면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며,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의 징후는 주님의 재림 때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초림때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헤롯의 무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과 목동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는 이 둘은 분명하게 갈리기 보다는 서로 섞여있기도 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게 배신했다가 다시 쫓게되는 과정이 있듯이 말이다. 


2. 말라기 서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의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했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엘리야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난 구약의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다. 이것은 말라기서 4장의 말씀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의 역할,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하셨다는것과 또한 엘리야의 역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기 위한 역할 모두를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3.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마쳤다. 구약 전체를 마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만족감이 있다. 감사하다. 





[성경 한 장]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라.

   (1)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2)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용광로 불 같은 심판의 날이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처럼 불타 없어질 것을 말한다. 교만한 자와 악행하는 자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신다.


   (3)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4)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5)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영광과 승리를 보장하며, 악인을 밟아 재와 같이 여기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교만한 자와 경건한 자를 대조하며, 교만한 자는 멸망하며 경건한 자는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하신다. 



2. 너희는 하나님이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2)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3)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 다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서 지키게 하려고 하셨던 법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역할을 위해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셨다.(마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봤던 구약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다.) 모세는 법을 대표하는 인물로, 엘리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백성의 상한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역할로 언급된다. 법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는 역할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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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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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엘리야의 시대가 가고 엘리사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고 해도 그의 시대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오늘은 옛 시대의 마지막과 새 시대의 시작이 만나는 장입니다.

 

[정리1. 내용의 정리]

1. 엘리야의 승천
  1)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올리고자 하실 때, 엘리야를 길갈에서 벧엘로 보내심
  2) 엘리야는 엘리사를 길갈에 있으라 했지만, 엘리사는 엘리야를 쫓아서 같이 감.
  3) 벧엘에 왔을 때,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를 여호와께서 데려갔실 것을 엘리사에게 알렸고, 엘리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4) 엘리야는 엘리사를 벧엘에 두고 여리고로 가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쫓아감.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도 엘리사에게 하나님이 엘리야을 데려갈 것을 알림.
  6) 엘리야는 엘리사를 여리고에 두고 요단으로 가려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쫓아감.(3번)
  7) 엘리야가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넜고, 선지자의 제자 50명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8)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했고, 엘리사는 갑절의 역사를 구한다고 했다.
  9)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보면 이루어지리라고 말함.
  10) 두 사람이 길을 갈 때, 불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데려감.
  11) 엘리사는 자신의 옷은 둘로 찢고,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요단을 치매 물이 갈라지고 엘리사가 다시 요단강을 건넜다.

2. 엘리야에게서 엘리사에게로
  1)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의 성령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게 나아가 엎드려 경배했다.
  2) 그들이 엘리야의 몸을 찾아 보겠다고 강청하매, 엘리사가 허락했으나 찾지 못함(사흘동안)

3. 엘리사의 기적
  1) 여리고에 있을 때,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이곳은 위치는 좋은데 물이 좋지 못하여 토산이 익지 못한다고 말하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가지고 오라고 하고 그것을 물 근원에 던져 물을 고쳤다.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지금까지 이르렀다.
  2)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갈 때, 길에서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리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고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 아이들 42명을 죽임.
  3)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재구성]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과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로 하신 것 같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위기는 엘리사나 선지자의 제자들도 대게는 눈치채고 있는 분위기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옮기셨고, 그 때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그 지역에 두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쫓겠다고 고백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간절히 쫓았고, 그로 말미암아 기대하는 영적인 복을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요단에서 요단 건너편으로 엘리야를 데리고 가신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로 엘리야를 데리고 올라가신다. 이 장면을 엘리사는 바로 곁에서 보았고 엘리야가 올라간 그 자리에 엘리야의 겉옷이 남겨져있었다.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고, 엘리야의 옷을 챙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요단을 갈랐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에게 있는 성령의 역사가 엘리사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고 그 앞에 경배했다.


엘리사에게 권능이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여리고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문제를 가지고 엘리사에게 나온다.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엘리사는 소금을 물근원에 뿌림으로 해결해 준다. 생명과 열매를 회복케 한 사건이다.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가던 중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로 놀린 것에 대해서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함으로 아이들 42명이 암곰 두 마리에 의해 죽게 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안주함을 넘어서는 엘리사의 강한 영적 열망

본문을 통해 강조되는 것은 엘리야가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왠만한 선지자의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엘리사도 알고 있었다. 엘리야는 지역을 옮길 때마다 엘리사를 그 곳에 두려고 했다.(선지자 생도들의 지역 책임자로 두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을 마다했다. 끝까지 엘리야를 쫓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이 역사가 갑절이나 자신에게 전수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 같다.(9절)

결국 엘리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야를 쫓았고, 엘리야의 승천을 봤고, 마침내 엘리야의 영적 권세의 두 배를 받게 된다.

엘리사는 안주하지 않았다.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역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될테니 더이상 쫓지 말고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갑절의 영적 은혜를 얻기 위해서 엘리사는 불투명한 여행을 엘리야와 계속해서 함께 했던 것이다.

영적 성장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엘리사도 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안주함을 극복하면 열정에 대한 성취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2. 잔혹한 사건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것

엘리사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 42명을 저주하여 죽게 한 사건은 엘리야가 50부장과 오십명의 병사들을 두 번이나 죽게 한 사건과 같이 설명하기가 곤혹스러운 사건이다. 상식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놀린다는 것으로, 그것도 어린아이들을, 그것은 42명이나 죽인 사건.... 그것도 엘리사가 말이다.

난 이 사건을 계시적인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엘리사가 어떤 권세와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생명을 살리고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사역을 했다. 즉 엘리사에게는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엘리사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심판하는 능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엘리사는 생명을 살리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엘리사가 가진 권능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지, 목사들에게 저주권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엘리사 사역 초반에 엘리사가 받은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크고 두려웠는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 정도 선에서 봐야 할 사건으로 보인다.

물론,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 엘리사가 경솔하고 충동적이었다는 것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엘리야가 두려움으로 인해 100명의 사람들을 불로 죽인 것이나, 엘리사가 철없은 아이들 42명을 죽게한 사건은 컨트롤 되지 못한 파워가 가지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특별한 권세(힘)는 컨트롤 될 수 있는 장치를 전제할 때에만, 유익하다 할 수 있겠다. 견제 장치가 없는 권세는 위험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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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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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것 같은 열왕기상도 꾸준히 하다보니 금세 마치게 됩니다. 오늘은 열왕기하 1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아합이 죽고 이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아합 왕이 죽고 나서 국력이 약화되었다.(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했다.)


2. 아하시야가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1)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다.(병이 쉽게 낫지 않고 오래갔다.)
  2) 아하시야는 신하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는가를 물어보게 하였다.
  3)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서 왕의 사자를 만나게 했다.
  4) 엘리야는 왕의 신하를 만나서 이스라엘에 땅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다그친다. 그러면서 아하시야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한다.
  5) 왕의 신하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아하시야는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것을 알게 됨


3.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부르기 위해 오십부장을 세 번 보냄
  1) 왕은 엘리야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냄
    : 엘리야가 불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함
  2) 왕은 두 번째 오십부장을 다시 보내 엘리야를 불러오게 함
   : 두 번째 오십부장도 엘리야가 불을 내려 모두 죽게 함.
  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을 다시 보내 엘리야를 부르게 함.
   (1) 세 번째 오십부장은 무릅을 꿇어 엎드려 엘리야에게 간구했다.
   (2)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3) 그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두려워말고 내려가라.
 4)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에게로 내려가서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말하였고 왕은 죽었다.
   (1)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었기에 여호람(아합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반복되는 문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 (3, 6, 16절)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이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아합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합의 죽음은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속국이었던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게다가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만나고, 쉽게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던 아하시야는 에그론에 있는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해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처사였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데, 자기 백성이 다른 신을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묻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호와는 사자를 보내 엘리야에게 이 일을 알리고 엘리야는 왕의 사신을 만나, 아하시야의 잘못을 책망하고 결코 낫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을 대언한다. 이 소식은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엘리야를 불러야 겠다고 생각했다.(내 생각에는 아하시야가 정신을 차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너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엘리야를 부르기 위해 보낸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가 모두 불에 태워져 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이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엘리야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중에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는 이세벨에 대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자신과 오십명의 생명을 귀히 여겨달라고 하는 요청을 했고, 그 요청은 엘리야의 마음을 움직였다.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 내려갔고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하고 결국은 아하시야는 아들도 없이 죽게 된다. 그래서 그의 형제 여호람이 왕이 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하시야의 죄는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데, 다른 신을 찾아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질투는 괜한 질투가 아니다. 자기 백성, 자기와 언약을 맺은 백성 사이의 질투인 것이다. 자기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찾아갔다면 질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질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혼한 관계가 아니거나, 건강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시야가 다른 신을 찾으러 가자, 하나님은 질투하시어 엘리야를 보내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쿨하지 않다. 그의 자녀들의 관계에 있어서 혹 그의 영적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쿨하지 않으시다. 관계없는 남이라면 모를까 어찌 자기이 자식에게 있어서, 아내에게 있어서 쿨하실 수 있는가? 그럴수 없는 분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기에 작은 잘못에도 발끈하시는 것이며, 헛된 눈길에 하나님은 민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량이 넓은 분이시지만, 쿨하시지는 않으시다. 그의 자녀, 그의 아내에게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은 책임있는 가장이시요 남편이기 때문이다.

 

2. 두려움(이세벨 트라우마)은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몇 장면 중에 한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무고한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인들을 두번이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무고했다는 것과 엘리야가 잔인하게 이들을 죽게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두번이나 반복해서 행했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일을 행한 자가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던 엘리야라니...

그러나 엘리야도 사람이다. 엘리야는 큰 권능(불 내리는 권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도 역시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큰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이세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왕상 19장)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게 한 후 이세벨이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두려워 숨었고 오히려 죽기를 바랬다. 조금전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했고, 그로 인해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불렀지만, 그 배후에는 이세벨이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또다시 이세벨 트라우마가 생각났고, 두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자신의 힘을 남용하는데까지 가지 않았나 싶다. 두번의 대형 사고 이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있은 후 엘리야는 세번째 찾아온 오십부장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내려간다. 

강력한 힘을 불완전한 존재가 갖게 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악인이 강력한 힘을 가질 때, 세계의 평화가 위협받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엘리야는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큰 상처로 말미암은 두려움이 함께 공존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힘이 잘못 쓰여진 사건이 오늘 본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흥분한 엘리야를 찾아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 엘리야는 불완전 했지만, 통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통제를 따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았다. 불완전할 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너무 큰 잘못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힘을 가진 자여,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다스려라. 주 안에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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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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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 악한 왕이 었지만, 얼마나 악했는지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다. 지난 장에서 아람 왕에 대해서 한 잘못은 자칫 교만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어느 정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마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것은 치졸하며 악한 행위다. 아합을 통해, 이세벨을 통해 무고하게 흘린 피가 이스라에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정리1. 내용 정리]

1. 나봇의 포도원 사건
  1) 이스르엘에 아합의 왕궁 가까이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다.
  2) 아합은 그 포도원을 갖고자 해 다른 포도원이나 돈으로 구입하려 했으나 나봇은 자기 조상 대부터 내려오던 포도원을 팔기 원치 않았고, 하나님께서도 금하신다고 생각했다.
  3) 아합이 그 일로 왕궁으로 돌아와 눕고 식사도 아니하자, 이세벨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4)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왕이 뭐 이런 일로 자리에 눕는가? 책망하고는 이세벨이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나봇에게  하나님과 왕을 모독한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라 함.
  5) 나봇은 거짓 증인자들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이세벨은 그 일을 아합에게 고한다.
  6) 그런 일이 마치고 아합은 그 포도원 밭으로 간다.

2. 나봇의 포도원에서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다.
  1) 하나님의 명령으로 엘리야가 아합을 나봇의 포도원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다.
  2) 엘리야의 심판 예언
   (1) 엘리야가 아합에게 책망함.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2)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피도 핥게 되리라.
   (3)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 너를 쓸어 버리고, 네게 속한 자를 모두 멸할 것이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안처럼 멸절하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함.
   (4) 이세벨도 마찬가지다.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에서 이세벨을 먹게 될 것이다.
   (5) 아합과 같이 악한 자가 없었던 것은 그가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좇아내신 아모리 사람과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고 가증히 행함.

3. 아합의 겸비함과 하나님의 누그러짐
  1) 엘리야의 이모든 말을 듣고는, 아합이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베에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풀이 죽어 다녔다.
  2) 하나님은 아합의 이 모습을 보시고는 아합의 겸비함이라고 보시고, 재앙을 아합의 때가 아닌 그 아들의 시대에 내리겠다고 하신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아합의 개인적인 사건들 중에 가장 치졸한 사건이 언급된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나봇의 포도밭을 얻기 위한 아합이 나봇의 반대로 얻을 수 없게 되자,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게 함으로서 나봇의 포도밭을 아합이 차지하게 끔 한 사건이다.


한 나라의 왕이 작은 포도원 하나를 갖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며 자리에 누운 것과, 권력과 힘으로 그것을 부정하게 빼앗아 왕에게 돌린 이세벨의 모습이 등장한다. 또한 이세벨의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장로와 귀족들.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나봇. 이 사건을 하나님을 통해 듣고 알게 된 엘리야.


권력을 중심으로 한 모략과 거짓, 그리고 살인까지. 아합이 작은 포도원을 갖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확대되고 있고 이것을 별 문제 없이 누리고 있는 아합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이와 같은 죄악을 범한 아합과 이세벨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알리신다.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아합이 겸비함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잠시 누그러진다. 그리고 그 재앙이 아합의 때가 아닌 그 아들의 때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아합 치졸해도 너무 치졸하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스르엘 왕궁 근처에 있는 포도원이 가지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인 나봇이 팔기를 거절했다. 나봇에게는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 자신의 선조로부터 내려온 땅이었고,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아합의 치졸함은 여기서 부터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포도원을 갖지 못하자 그는 마음에 병이 나 버렸다. 침실로 들어가서는 등지고 누워버렸다. 밥도 먹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포도원을 가지지 못한 것과 왕의 제안이 거절되었다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 가지고... 이것이 아합의 수준이다. 왕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없다. 왕의 대범함도 풍요로움도 찾아 볼 수 없다. 초딩 아합을 보는 것 같다.

인격과 덕망을 갖추지 못한 채 왕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그 백성들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아합은 아버지의 덕으로 왕이 되었지만,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 그에게 왕의 품위와 인격을 찾아 볼 수 없다. 왕의 자질이 없는데 왕이 된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의 나오고 이제 삼자구도로 정리되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인가? 제발 대통령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세우지는 말아야 겠다. 정말 덕망있는 사람,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그 인격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하겠다. 경제 대통령이란 말.. 사실 처음부터 그것은 잘 못된 것이었다. 좀 덜 먹고 좀 덜 쓰고 좀 빠듯하게 살아도 우리가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우리 대통령이 부끄럽지 않고 자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빠는 돈은 많이 못 벌어와도,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라고...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떳떳하게 외치고 싶은 것처럼, 나는 그런 대통령을 원한다.

권력을 등에 업고 나봇의 포도원이나 탐내는 건, 그건 왕이 아니라 조폭이나 할짓이다.

2. 이세벨, 악해도 너무 악하다.

궁상을 떨고 있는 아합을 보고 기가막혀 했던 사람은 그의 아내 이세벨이다. 이세벨은 왕이 뭐 이런 일로 궁상을 떨고 있냐고 남편인 아합을 뭐라 했다. 그리고 이세벨은 간단하게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귀족과 장로들을 매수한다.(위협할 수도 있고) 그들은 거짓 증인을 세우고, 느닷없이 나봇을 고소해서는 법정에 세운다. 각본대로 거짓 증언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봇의 변명도 채 들어보기도 전에 형을 집행해 버린다. 나봇은 경황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이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권력형 비리가 아닌가? 권력형 폭력이고 권력형 살인이 아닌가? 권력을 통해 없는 죄도 만들고, 재판도 조작하고, 결국은 사람도 죽이고 그리고 나서 자신들이 가지고자 했던 것들을 가지는 권력형 죄악.

많은 선지서에 지적하고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권력과 힘을 가지고 약자를 억압하며 그들의 작은 것마져 약탈해가는 자들의 죄에 대한 지적. 결국 그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유가 아니었던가?

여전히 권력은 그 힘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흐르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을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모략과 술수로 무력화한다. 또한 약한 자의 것은 작은 것마져 빼앗아 가려고 한다. 이것이 절대 권력이 가지는 무서움이다. 이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부정과 부패 그리고 왜곡의 고리를 만든다. 따라서 권력은 견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견제하는 기관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한다. 그래서 삼권분립이 나온 것 같은데... 우리 나라에게 그 역할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시민사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무한 권력은 무한의 악을 만들고 결국은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 하나님, 아합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다니... 정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듣고 아합은 풀이 죽었다. 잠깐이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것 같다. 그리고 마음이 겸허해 진 것 같다. 잠깐이겠지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해 주신다. 그것을 겸비한 것이라고 인정해 주신다...

하나님이란 분... 참 놀랍다. 그 악한 아합에게서 잠시 보였던 <겸비>를 놓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 진노를 당대가 아니라 아들의 때로 옮기시겠다고...

하나님은 심각한 죄인을 보시면서도 그의 죄만 보시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 간혹가다 할 수 있는 작은 <선의>를 눈여겨 보신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것에 가산점을 주시고 <긍휼>의 근거로 삼은신다. 만약, 이런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면, 긍휼을 얻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죄인이라고 우리는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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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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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화려한 승리 다음에 찾아오는 비참한 절망. 엘리야에 대한 18장과 19장에 언급한 대조적 상황입니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 올 수 있는 가장 큰 절망에 대해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절망한 엘리야를 어떻게 다시 세우시는지 살펴봅시다.

[정리1. 본문 내용 정리]

1. 이세벨의 위협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일과 모든 선지자를 죽인 일을 이세벨에게 말함.
  2) 이세벨은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 내일 이맘때가 되지 전에 엘리야를 죽일 것을 예고함.

2. 엘리야의 낙망과 도피
  1) 엘리야가 상황을 파악하고 사환과 함께 유다까지 도망갔다가 거기서 사환은 두고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소원함. 그리고 그 아래에서 잠듬.
  2) 천사가 찾아와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줌. 엘리야는 다시 눕자 천사가 다시 왕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권함.
  3) 이에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름

3. 엘리야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1) 호렙산 굴에 있더니,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여기 있는가 물으심. 엘리야는 본인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그래서 나만 남았는데, 내 생명 마져 빼앗으려고 한다고 고백함.
  2)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 서라고 하심
   (1)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2)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했다.
   (3)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다.
   (4)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가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대답한다. 엘리야는 본인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그래서 나만 남았는데, 내 생명 마져 빼앗으려고 한다고 고백함.
  3)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심.
   (1)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
   (2)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
   (3)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4) 하사엘의 칼을 피한 자는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한 자는 엘리사가 죽이리라.
   (5)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었다.

4. 다시 사역을 시작한 엘리야
  1) 엘리야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 그를 부름.
  2)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엘리야에게 나아옴
  3) 엘리사는 소를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어 먹게 했다.

[정리2. 본문 내용의 재정리]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의 싸움은 멋진 한판승으로 엘리야가 이긴다. 그런나 그 이후다. 아합을 통해 자기 선지자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는 급히 사환 한 명과 유다로 피신하고, 거기서도 사환은 남겨두고 광야로 하루 길을 더 간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런 엘리야에게 천사들은 다정한 위로와 격려로 먹을 것을 먹여 힘을 주고, 결국은 호렙 산까지 이르도록 한다.


호렙 산에서 엘리야는 굴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밖으로 나온 엘리야에게 큰 바람이 일어나 바위와 산을 가르는 듯 했다. . 그러나 하나님을 보이지 않았다. 지진이 있었다. 불이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세미한 음성이 들린다. 너는 왜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자신의 처한 상황,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알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까지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세가지 사명을 주신다.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것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는 것과 엘리사를 기름부어 다음 사역을 준비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말씀하신다. 그런데 엘리야야 너 말고도 바알에게 무릅꿇지 않은 사람 칠천명이나 더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었는지, 제일 먼저 엘리사를 찾아 제자로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낙심은 점진적으로 찾아 오기도 하지만, 순간적으로 찾아 오기도 한다.

엘리야는 갑자기 낙심했다. 어제의 큰 승리로 그는 매우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아합도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불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삼년간의 가뭄끝에 바알 선지자들을 심판하고 나니 비가 온 것으로 봤을 때... 아합은 그간의 잘못을 뉘우칠 줄로 기대했던 것 같다. 더불어 이제 이세벨의 영향력은 완전히 축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아합은 변하지 않았고, 이세벨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 졌다. 오히려 자신만 더 큰 위협에 처해질 처지가 되었다. 그 동안 숨어 살 때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드러난 지라 목숨을 유지할 방법도 없어 보였다. 낙심이 찾아왔다. 절망이 찾아왔다. 두려움을 넘어 무기력이 그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1) 내 안에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면 안된다.

엘리야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충분한 승리였을 것이고 샴페인을 터뜨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합은 완고했고, 이세벨은 독했다. 오히려 엘리야가 위협당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신중함이란... 완전한 승리 앞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심하는 것이리라 본다.

  (2) 악은 생각보다 강하다.

악이 강하지만 한 번 무너지면 무기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악은 생각보다 강하고 질기다. 악에 대한 나이브한 생각이 오히려 반격을 당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아합과 이세벨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악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부패의 고리는 얼마나 강한지.. 학연과 지연의 고리는 얼마나 질긴지... 그래서 개혁은 힘든 것이다. 선빵에 끝나지도 않고, 다윗의 물맷돌 한 방으로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긴장하고, 계속 주시하고, 계속 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절대 권력, 절대 부는 반드시 부패한다.

2. 하나님의 처방이라는 것이...

낙심한 엘리야를 향해서 내린 하나님의 처방이라는 것이 그리 신통치 않아 보인다. 아합과 이세벨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낙심한 엘리야를 격려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합과 이세벨 보다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강한 바람으로도, 지진으로도, 불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셨다. 이건 아니지...

그리고 하신다는 말씀이 '왜 여기 있냐?'는 것이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은 아닐텐데..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직면한 이 어두운 상황을 설명하고, 마지막 남은 꺼져가는 촛불같은 자신도 곧 죽게 될 처지에 있음을 호소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처방은 지금 당장을 기약하시는 처방이 아니라, 나중을 위한 처방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참고 견디며 다음을 도모하자고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너 말고도  7000명의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신다. 칠천명을 데리고 아합과 싸우든지, 이세벨을 죽이라는 약속도 아니다. 다만, 참고 견디고 미래를 도모하라고만 하신다.

현재의 악과 부패에 대한 즉각적인 답을 원한다. 우리는. 그 답이 없으면 우리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숨어 버리고 닫아 버리고 만다. 그런데 하나님은 즉각적인 해결을 주시지 않으시고는, 현재는 참고 견디라고 하시면서 다만 다음을 기약하자고 하신다. 다음을 기약하자... 하나님의 처방이란 참 받아들이기 힘들지만...그래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엘리야처럼 낙심 속에서 털고 일어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5년을 무력하게 참고 견디면서 살아왔다. 다음을 기다리면서... 이제 그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5년을 참아 온 사람들은 올 대통령 선거를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렸을 것이다. 이제 그 때가 온 것이다. 누가 그 다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참아 왔던 5년을 보상해 줄, 혼란에 빠지고 눈을 가리어 버린 지난 5년을 회복시켜 줄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생각해야 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지난 5년이 다시 반복되는 일만은 막아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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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엘리야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갈멜산의 대결>입니다. 아마,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통쾌한 이야기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이야기 속으로 가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비가 오지 않은 지 삼년이 지난 후에
  1)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하셨다. 이제 비를 내릴 내리시려 하셨다.
  2) 그 때 사마리아에는 기근이 너무 심해서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와 함께 물의 근원과 시내를 찾아 꼴을 얻어 가축들의 죽음을 막으려고 했다. 사마리아 전역을 다님.
  3) 그러는 중에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났고, 엘리야는 아합를 만나겠다고 함.
  4) 오바댜는 확실히 만날 것인가를 확인하고, 아합을 불러 엘리야와 만나도록 한다.
  5) 오바댜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선지자들을 이세벨로부터 구한 적이 있었다.(50명씩 100명을 굴에 숨겨서 먹을 것을 주었다.)

2.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다.
  1) 아합은 엘리야를 향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한다.
  2)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는 내가 아니라, 아합과 당신의 아버지라고 답한다. 왜냐하면 아합과 아합의 아버지가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3)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 산으로 모으게 하라고 요청하고 아합은 이에 응한다.

3. 갈멜산에서의 대결
  1) 엘리야는 갈멜산에 모인 백성들을 향해 어느 때까지 둘 사이를 머뭇거릴 것인가? 하고 책망한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고 결단을 촉구한다.
  2) 송아지 둘을 가져오게 하고, 불을 붙이지 않은 채 서로 자신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그가 하나님임을 확인하자는 제안을 하고 백성들은 옳다고 화답한다.
  3) 먼저 바알의 제사장들이 그들의 신을 불렀다. 정오가 되도록 답이 없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향해 약을 올린다.(묵상하는지 혹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길을 행하는지 혹은 잠이 들었을 수도 있으니 큰 소리로 부르라고 말한다.)
  4) 바알의 선지자는 큰 소리로 불러도 대답이 없자, 자신의 몸에 피를 흐르게 하면서까지 부르지만 저녁 때까지 응답이 없었다.
  5) 이제 엘리야가 나선다. 백성들을 가까이 부르고, 제단을 수축하게 하고 열두개의 돌을 취하였다. 그 돌로 제단을 쌓게 하고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게 했다.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통 넷에 물을 채워 번제물과 나무에 붓기를 세 번이나 했다.
  6) 엘리야가 여호와께 내게 응답하소서 외친다.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 번제물을 태움.
  7) 백성들이 보고 엎드리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을 하고,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두 잡아 죽이도록 했다.

4. 갈멜산 이후
  1) 엘리야는 아합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권면한다. 이제 큰 비가 올 것을 알린다.
  2)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한다. 사환을 일곱 번을 보내 바다 쪽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3) 바다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는 것을 사환에게 듣고는 아합에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고 알린다. 곧 큰 비가 내리게 된다.
  4)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해 그가 이스르엘로 가는 동안 아합 앞에서 달려갔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

본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비를 막으신 후 3년 만에 다시 사마리아 땅에 비를 내리시는 이야기다.


3년간의 가뭄은 너무 심한 것이어서 왕의 가축들마져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 되고 만다. 이에 다급한 아합은 친히 오바댜를 데리고 나와서 물 근원과 시내 주변을 찾아 다닌다. 혹시나 가축들을 먹일 꼴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 때, 3년간 숨어지내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아합을 만나고자 먼저 오바댜에게 나타난다.(오바댜의 역할은 그 동안 아합이 엘리야를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와 아합의 통치 아래에서도 오바댜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엘리야를 만나 아합은 다짜고짜 이스라엘의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엘리야는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집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고는 바알을 제사장을 불러 모으라고 제안한다. 아합은 이에 응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공지하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은다. 많은 백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궁금하여 함께 모인다.


엘리야의 제안에 따라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시합을 한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오전 오후 바알을 불렀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후 엘리야가 제단을 수축하고 제물을 얹고 물을 붓는다. 그리하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다. 그러자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고 사람들은 두려워 여호와를 경외한다. 엘리야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도록 한다. 완전하게 여호와 하나님과 엘리야의 승리로 끝난다.


그 이후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가 올 것을 알리고 먼저 성으로 마차를 타고 가도록 한다. 정말 많은 비가 와서 엘리야가 마차를 타고 간 아합보다 앞서서 갈 정도였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엑스트라로 보이는 <오바댜>는 엑스트라가 아니다.

본장에서 중요한 인물은 엘리야와 아합이다. 갈멜산의 대결도 결국은 이 둘간의 대결로 보여진다. 그런데 등장하지 않아도 될듯한 <오바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이름도 낯설고  본장이후로  등장하지 않는것 같다. 그런데 잠깐이기는 하지만, 오바댜는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고 엘리야를 아합과 만나도록 주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바댜의 등장은 당시 아합의 통치 속에서도 하나니믈 경외하는 신실한 백성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합의 신하로 있으면서도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죽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선지자들을 50명씩 굴에 숨겨서 살려주었던 인물이다.

경건한 사람은 모두 순교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합의 편이되어 하나님을 등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세속의 정부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은 살아있다. 사단의 가장 가까운 곳에 그 사단을 대적하여 굳건하게 서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같지만 사살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악한 권력 속에서도 오바댜는 생존했고, 그로 말미암아 더 많은 주의 백성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하만의 계략이지만) 때 유대인들은 다 전멸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때, 에스더는 왕의 부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하나님은 오물 속에서도 꽃을 피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완전한 어둠은 없고 완전한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빛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생존하여 때를 기다린다.

 

2. 성도의 싸움은 박빙의 싸움이 아니라 넉넉한 싸움이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싸움의 관전 포인트는 누가 이기고 졌느냐에만 있지는 않다. 그 과정이다. 바알의 선지자가 어떻게 졌고, 하나님의 선지자인 아합이 어떻게 이겼는지의 과정을 봐야 한다.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시간을 썼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흘렸는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열심이나 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다.

엘리야는 먼저 제단을 수축했다. 그리고 그 수축하는 과정에서 12개의 돌을 가지고 올 것을 말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메시지화 하는 것이다. 또한 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부으라고 한다. 넉넉히 부어 완전히 젖도록 했다. 인간적인 노력과 잔기술로는 불이 붙을 수 없도록 했다. 하나님의 불이 아니고서는 불이 타오를 수도 없게 한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짧은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바로 응답하셨다. 이것이 세상의 싸움과 다른 싸움이다.

넉넉한 싸움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조기 축구 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 넉넉한 마음으로 하지 않을까? 상대팀이 사람이 많아도, 아니 점수를 몇 점 주어도, 작은 파울에도 관대해 지지 않을까? 왜? 실력이 다르니까? 수준이 다르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대해서 좀 더 여유로울 수는 없는지...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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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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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아합과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16장에서 아합이 등장했으니, 이제 17장에서는 엘리야가 등장하고 등장하자 마자 아합에게 선제 공격을 하고는 도망칩니다.

[정리1. 내용의 정리]

1.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나타나 엘리야의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가 오지 않음을 예언함.
  1) 그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지냄
  2)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고, 시냇가의 물을 마시며 지냄
  3) 가뭄이 심해 시냇가의 물도 마르자,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도록 인도하심

2. 시돈의 사르밧 과부를 만나다.
  1) 엘리야가 시돈의 사르밧에 갔을 때, 나뭇가지를 줍는 여인을 만남
  2)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고, 떡도 좀 달라고 요청함
  3) 그 여인도 사실은 먹을 것이 없어 남아 있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약간을 가지고 아들과 한 번의 음식을 해서 먹고는 죽을 생각이었다.
  4)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신에 떡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비를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5) 엘리야의 말대로 하자 그의 말대로 그 식구가 여러 날을 먹을 수 있었다.

3.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다. 
  1)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병들어 죽게 되자 과부는 엘리야에게 억지를 부리며(내 죄가 생각나서) 하소연 한다.
  2) 엘리야는 그녀의 아들의 시신을 받아 가지고 자신의 거처로 가서 침대에 눕힌다.
  3) 엘리야는 자신이 우거하는 이 집에 재앙 내린 것을 하나님께 한탄함
  4) 엘리야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구한다.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
  5)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의 혼이 돌아오고 아이는 살아남.
  6) 과부는 엘리야를 향해서, 내가 이제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알았다고 고백함.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아합의 등장과 함께 엘리야가 등장한다. 엘리야는 등장할 때부터 아합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에 비가오지 않을 것을 예언하고, 아합의 피해 그릿 시냇가로 숨어 지낸다.


엘리야의 도피 생활 중에 하나님은 엘리야의 먹을 것을 까마귀를 통해서 채워주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이동하라고 하시고, 한 과부의 집에서 어려운 시절을 지나도록 했다. 그 과부의 집은 어려운 시대에 가난한 집안 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집에 신세를 지고 오히려 죽음의 위협이 있는 그 집에서 과부와 그 아들의 먹을 것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일을 만난다. 과부의 아들이 중병에 걸려 결국은 죽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엘리야는 아무것도 손쓸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간 평온하게 지내던 과부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아들의 죽음의 원인을 그 선지자에게서 찾게 된다.(억지라는 것을 알지만, 아들을 잃은 과부의 심정에서 그런 비난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런데 그것이 엘리야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진진하게 이 아들의 생명을 살려주시길 바란다. 몸을 세 번 펴서 그 아들의 위에 엎드리자 그 아들의 혼이 돌아와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과부의 입을 통해 처음 등장한 엘리야 선지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의 입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이 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엘리야, 아합에게 선빵을 날리다.

엘리야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드러나고 나서 아합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아합에게 선제 공격을 함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다. 그 이전에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공로를 했고, 당시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없다. 그저 등장과 함께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아합에게 선빵을 날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는 선지자들을 우습게 알고 죽이는 왕이었기 때문이다.(18:4) 그래서 엘리야는 선빵을 날리고는 도망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상대할 수 없는 왕이었지만, 참을수도 없었던 왕이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엘리야처럼 선빵을 날리고 도망치는 수 밖에.

주먹한번 휘둘러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억울할 일이다. 아마 엘리야도 다른 선지자들처럼 이세벨의 계략에 의해 언젠가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대로 죽느니 주먹이라도 한 번 휘둘러 보는 것은 어떤지... 엘리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합에게 나아갔지만 역시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숨게 하시고 그로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신다. 종종 뒷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선 날려야 할 선빵을 날려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도망치더라도. 통쾌하지 않겠는가!!

 

2. 엘리야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서야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열왕기상 17장에서 핵심은 과부의 입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엘리야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17:24) 엘리야는 처음 아합에게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예언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해 줄 사람은 없었다. 가뭄 예언의 뒤에 이어지는 사르밧 과부를 만나서 음식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을 통해서 볼 때 엘리야의 <하나님 사람>됨을 인정 받은 것이다.

따라서 과부의 음식 문제를 해결해주고, 죽음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 엘리야는 이제 사람들에게도 참된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증받게 된 것이고, 그가 처음 아합에게 예언했던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먹는 문제, 죽음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고 하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땅은 언제가 먹는 문제(먹는 것이란 결국 경제 문제고 경제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죽는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한계가 아니겠는가?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겠는가? 국가겠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 해결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지도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안목이 있어서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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