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한 장]


1. 끝날에 이르러서 될 일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다.


  1)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다.

  2) 많은 이방 민족들이 그 산으로 가며 이르기를 

   (1)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2)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3)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 끝날에는 여호와의 전이 세상에 높이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가 세상의 왕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방 민족들도 높이 들리신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될 것이다. 


  3) 여호와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신다. 먼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실 것이다. 

   (1)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2)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

   (3) 그래서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지 않고 전쟁을 일삼지 않을 것이다. 

   (4) 각 사라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다. 두려워할 자가 없을 것이다. 


  * 하나님은 자신 앞에 모여든 열방의 백성들을 판결하실 것이다. 그로 인해 칼과 창같은 상대를 해하는 무기는 사라지고, 보습과 낫과 같은 생산적인 도구로 변화될 것이다. 자신의 수고한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것을 빼앗길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인 결단]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할 것이다.(5절)


------------


2. 여호와께서 이방 백성들의 박해에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심


  1) 그 날에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받게 한 자를 모을 것이고,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선택된 백성)이 되게 하고,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할 것이다.

  2)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3) 이전 권능 곧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 미래에 있을 일을 말씀하신다. 지금은 절며, 쫓겨나며 환난을 받는 자며 나그네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은 백성이 되게 하고 강한 나라가 되게 해서 돌아오게 하시며, 여호와가 영원히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게 할 것이다. 


3.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

  1)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2)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라.

  3)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4)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고 조롱할 것이다. 시온이 더럽게 되었다. 

  5) 그들은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함이다.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함이라. 


  * 이방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자신들의 힘은 강하고, 이 백성들의 힘이 무력함으로 조롱하고 무시하여 짓밟고 있지만, 그 이후에 하실 하나님의 일을 이들은 알지 못한다. 이 과정이 아이를 낳기 위한 고통의 과정이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6) 결국,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같이 그들을 모을 것이다.(해산 후에 아이를 낳은 모습이다.) 그 때는 시온이 일어나 이방을 칠 것이고, 뿔과 굽으로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다. 

  7)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 



[묵상 한 구절]


1. 미가 선지자는 미래에 있을 일을 알리지만 현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일을 밝히는 것을 현재의 의미를 밝히는데 목적을 둔다. 따라서 선지서를 읽을 때, 막연한 미래적 성취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은 선지자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현재적인 우리의 삶을 위해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그림은 명확하다. 그들이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산 위에 우뚝 서게 될 것고, 이방 백성들은 그 하나님 앞에 판결을 받기 위해 모여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재판관이 되어 선악간에 분명한 판단을 내리시면, 이 땅은 모든 시시비비가 사라지고(하나님이 최종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이 땅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화평의 나라가 오는 것이다. 


3. 그러나 지금은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기 위해 고통하는 과정과 같은 시간이다. 해산의 고통이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듯이...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비참해지고, 무력해지고, 환난가운데 있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아이를 낳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즉, 지금 받은(혹은 이제 곧 받게 될) 고통스러운 시간은 여인이 아이를 낳기 위해 고통을 거쳐가야 하는 것과 같은 시간이다.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기다린다면 반드시 아이를 낳을 것이다. 하나님은 흩어져 있던 자기 백성들을 불러모아, 강한 나라가 되게 할 것이다. 


4. 선지자란,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진자다. 그러나 점쟁이와는 다르다. 점쟁이는 미래의 결과를 바꾸기 위해 어떤 빠르고 쉬운 처방을 쓰는 것이지만, 선지자는 미래를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밝힘으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견디어 내도록(낙심하지 않도록/절망하지 않도록) 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다운 품위를 잃지 않도록 견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한 장]


1. 하나님께서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을 향해서 책망하신다. 


  1)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1) 그런데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고 있다. 

   (2)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기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3)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한다.


  *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심각하게 착취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뼈까지 모두 발라 먹는 묘사를 통해 통치자들의 악이 얼마나 잔혹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2. 그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짖을 찌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셨고 

   /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리라.


------------

3. 선지자들의 죄를 지적하심


  1) 그 당시 선지자들은 자신의 입에 물것을 주면 평강을 외치나

  2) 그 입에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었다. 


  *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사역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의 탐욕에 사로잡힌 사역자들임을 지적한다. 


4. 그러므로 

  1)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어둠을 만나리니 점을 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으로 선견자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술객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 


  3) 반면,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 거짓 선지자들은 영적인 어둠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미가 선지자 만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참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

5.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에게 하시는 경고

 

  1)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

  2)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도다.

  3)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4)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5)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리라! 이런 식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6. 이러므로 너희(우두머리, 통치자, 제사장, 선지자)로 말미암아


  1)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2)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3)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 시온과 예루살렘과 성전..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이곳이 큰 심판과 재앙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우두머리, 통치자, 제사장, 선지자)의 죄악이 그 근거가 된다.



[묵상 한 모금]


1. 크게 3개의 구조로 되어있다. 죄에 대한 고발과 그로 말미암은 심판의 내용이 나오는 형식인데, 처음에는 야곱의 우두머리와 통치자들의 죄에 대한 고발이다. 두번째는 선지자들의 죄에 대한 고발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우두머리와 통치자 그리고 제사장과 선지자를 모두 포함한 죄에 대한 고발이고 그에 따른 심판이다. 


2. 우두머리와 통치자들의 죄는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무엇을 위함인줄을 알지 못하고, 그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하여 오히려 자신을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데, 악한 방식으로 그리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자 그것이 왜 자신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그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권력은 없다. 권력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 자신의 공로로부터 얻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권력은 폭력이 되고 악이 된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부여하는 절차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하나, 일단 권력이 주어지고 나면 그 권력자로부터 분리되고 마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3.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죄는 이들은 직업적 종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사장은 삯을 위해 일하고(삯이 없으면 안한다.)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을 친다.(돈을 더 벌 수 있다면, 점도 친다) 이들은 신성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잊은 채 물질에 사로잡혀버린 직업적인 종교인에 불과하다. 종교에서조차 세속적인 가치관이 관여하자 더이상 그 사회를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해 버린 것이다. 


4. 권력자들의 타락, 종교 지도자들의 세속성... 이것이야 말로 이 땅이 막장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권력자들의 타락이야 지금 내가 있는 곳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종교 지도자들과는 훨씬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 내부적 세속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정치와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경계하지만, 종교와 관련해서는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사람들간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멸망은 한 요소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과 종교 둘 다 실패할 때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라도 잘 버티면 큰 재난은 막을 수 있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한장 정리]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1)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2) 아내를 맞이하고 자녀를 낳아 자녀들로 결혼하게 하여 너희가 줄어들지 않게 하라.

  3) 사로잡혀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그 성읍의 평안함으로 너희 도 평안할 것이다. 

  4)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라.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않았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5)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너희를 돌보아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6)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다.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로 와서 기도하고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너희가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도리 것이라. 


  * 이 때는 시드기야 왕의 때로 1,2차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이 있고 아직 완전한 멸망(시드기야 9년)은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이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그 올무를 벗어나려고 하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곳으로 보내신 것이고 70년이면 마치고 돌아오게 될 것이니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며 번성할 것을 말씀하신다. 70년 이후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국적인 발언이며 비신앙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마치 예레미야가 친바벨론적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당시에 느헤미야의 이 발언을 그렇게 믿어 줄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2. 너희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해 선지자를 일으키셨구나 말하게 될 것이다.


  * 바벨론에 있는 포로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시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선지자이면서도 동시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동포들의 선지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도 예루살렘의 운명(완전히 멸망한 상황은 아직 아니기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그 역할까지 했다. 


  1)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닌한 너희 형제(유다에 남은 형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2) 하나님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고 쓸모없는 무화과 같게 하셨다. 

  3) 하나님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학대를 받게 하겠다. 그들은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4)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자에게(자신들은 재앙으로부터 피해갔다고 생각했을텐데) 완전히 멸절될 수 밖에 없는 재앙을 내리고, 오히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을 선포하며 70년간 그 땅에서 잘 살아 남아서 번성하라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을 따라 애굽의 고센 땅에 머물면서 400여년간 번성하였던 것처럼, 바벨론에서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3. 바벨론에 살고 있던 스마야가 예레미야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내어 예레미야의 활동에 대해서 질책함


  1) 스마야가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냈다. 

  2) 여호와께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해서 너를 성전의 감독자로 세운 것은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하는 자들을 목에 나무 고랑과 쇠 고랑을 채우게 하기 위함이거늘 어찌하여 예레미야에게 그와 같이 하지 않는냐?

  3)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여 '너희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고 선동하고 있다. 

  4)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가 쓴 글'을 예레미야에게 읽어 주었다. 


  *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넘어 바벨론에까지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스마야는 반대한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스바냐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지 못함을 질책했다. 예레미야처럼 거짓된 말을 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흐트러놓는 자를 막도록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 왜 예레미야를 방치함으로 여기에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냐는 책망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도, 포로로 잡혀간 바베론 현지에서도 모두 인정받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그랬다. 그 당시 누구에게나 불편함을 주는 메시지였다. 심지어 애국적 인사들에게도,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인사들에게도 또한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도 그의 메시지는 불편함이 되었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4.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임하셨다. 


  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구나'

  2) 그래서 내가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라. 그의 자손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복된 일을 보지 못하리라. 

  3)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손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누가 그것을 믿어 주었을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따라 소신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묵상 한모금]


1. 이 시대는 유다의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다. 멸망이다. 아직 완전한 멸망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례미야는 헛된 희망을 불어넣지 않는다. 회개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바벨론으로 가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열매를 거두어 먹고 살 것을 말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길러서 번성할 것을 말한다. 그곳에 정착하라는 것이다. 이런 냉정한 메시지는 유다의 멸망이 확정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회가 있지는 않는다. 일생의 대부분은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없는 시기가 온다. 회개할 수조차 없는 기회가 오고야 만다. 그 때는 운명을 돌이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돌이킬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털퍼덕...


2. 유다의 멸망을 전하는 그리고 유다를 정복하는 바벨론에 들어가서 그들의 평안을 빌면서 그들 안에서 일상적인 삶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유다에 남겨진 자들에게도 거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다에 남은 자들도 안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재앙이 따라와서 흩어질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바벨론에 잡혀가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 삶을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그들의 평안을 빌며 살아가라는 것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나라를 등지고, 하나님을 등진 채 그곳에서 평안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누가 예레미야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예레미야와 비슷하다. 누구에게도 인정받거나 환영받지 못하셨다. 친로마적인 사두개파에게도, 민족적 독립을 꿈꾸던 열심당원들에게도... 종교적 근본주의작인 바리새인들에게도...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셨다. 모든 그리스도이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늘 이런 오해를 삶의 한 부분처럼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말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한 장]


1.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지 4년 다섯째 달.


  *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가 주전 597년임으로, 이 때는 대략 592년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다의 완전한 멸망이 주전 586년으로 보면 약 멸망 6년의 상황임을 알게 된다. 완전한 멸망을 6년 앞둔 상황에서 선지자 하나냐와 예레미야 간의 이야기이다. 


2.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말했다. 


  1)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다.

  2) 바벨론이 빼앗아간 성전 기구들을 2년 안에 이곳으로 다시 되돌려 오겠다. 

  3)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여호야긴)와 유다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겠다. 


  * 하나냐는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유다의 희망을 선언했다. 그것도 2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했다. 바벨론의 멍에를 꺾을 것이다.(현재 바벨론의 멍에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빼앗긴 성전 기구들을 도로 가져오게 될 것이고, 포로로 잡혀간 왕과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희망과 격려가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공개적으로 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있는 선지자가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다음 날 조간 신문에는 하나냐의 말이 대서특필되었을 것이다. 


3. 이를 듣고 있던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그 자리에서 말했다. 


  1) 아멘, 여호와께서 정말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한다.

  2) 그러나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와 재앙과 전염볍을 예언하였다. 

  3)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의 예언은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레미야가 일어나 딴지를 건다. 제일 크게 아멘을 외치고, 정말 하나냐 선지자의 말처럼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곧 그 다음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냐의 메시지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 아니지만,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의 참됨과 거짓됨의 여부는 그 결과가 나타난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함으로 하나냐의 메시지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음을 말하였다. 

  * 예레미야는 27장에서 유다가 결국 바벨론의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와 다른 이야기를 하나냐가 했다. 누가 옳은가는 누가 목소리가 큰가로 결정할 수 없다. 다만, 역사가 그 사람의 옳음을 증명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마음에 안심을 주는 평화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임을 지적한다 하겠다. 


4. 하나냐의 반응과 예레미야의 행동


  1)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2년 안에 이처럼 우리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으시리라

 

  2) 예레미야는 자신의 길로 가버림.


  * 서로 자신의 메시지를 바꿀 의향이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둘다 옳을 수는 없다. 하나가 옳으면 하나가 틀릴 수 밖에 없고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5. 그 자리를 떠난 후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 임하였다. 

  

  1) 하나냐에게 가서,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다. 

  2)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을 섬기라. 내가 들짐승들도 그들에게 주었다. 

  3)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거짓 선지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4)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죄를 지적하고 금년에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5) 하나냐는 그 해 일곱달에 죽었다.


  * 하나님은 돌아가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냐의 거짓됨을 말씀해 주셨고, 그의 거짓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겠다는 저주(금년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이루어짐으로서 누가 참 선지자이고 거짓 선지자임을 밝히셨다. 

  * 결국, 유다는 바벨론의 종이 될 운명임을 본문은 더욱 명확하게 하고 있다.



[묵상 한모금]


1.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에 대해서 간단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평화를 예언하는 자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 평화와 안락에 대한 예언은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것이고, 그것은 참으로 그렇게 되어질 때까지는 그 사람의 참됨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낙관적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배격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성급하게 따르거나 그를 주목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2.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역으로 평화가 아니라 재앙과 심판을 예언하는 선지자에 대해서는 그의 참됨을 확인하는 것에 대해서 나와있지는 않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와 대조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일단 재앙과 심판을 말하는 선지자들에게 대해서는 긍정하는 것 같다. 재앙과 심판을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드는 것인데, 그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다. 모두 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사람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3. 우리의 귀가 평화를 말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쉽게 열리고, 재앙과 심판 그리고 경고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매우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를 좇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참된 신앙인이 되기도 하고, 거짓된 신앙인이 되기도 한다. 내게 칭찬하는 자들에게 너무 혹하지 말자. 내게 비판하는 자들을 너무 배격하지는 말자. 그래야 내가 참됨에 머물게 된다. 


4. 예레미야 28장은 어떤 메시지가 들려지더라도, 유다 앞에 놓여있는 현실은 바벨론의 종이 되는 현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가운데 가서 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렘 20장] 여호와의 성전 총감독 제사장 바스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친구에게조차 조롱당하는 예레미야가 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여호와의 입을 막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의 입의 통로가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입을 막고, 자기 이야기를 즐겨하는 자 바스훌의 운명과 같이 될지어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의 총감독 제사장 바스훌과의 갈등

  1)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다. 

  2)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풀어주매, 예레미야가 바스훌에게 예언을 한다. 

  3)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고, 마골밋사빕(사방으로 두려움)이라 하신다. 

  4) 너와 네 친구들이 두려움에 떨게 되고,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다. 

  5) 유다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고, 이 성읍의 모든 부와 왕궁의 보물도 탈취되리라.

  6) 바스훌,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며 너도 거기서 죽게 되리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2.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감당해야 할 고통에 대한 호소

  1) 여호와께서 권유하심으로 권유를 받고, 당신께서 강하사 나를 이기셨다. 

  2)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3)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했지만,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다시 하게 됩니다. 

  4) 내 친한 벗들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립니다. 잠깐이라도 유혹을 받게 되면, 금새 일어나 나를 치려고 합니다. 주여, 이들이 큰 치욕을 당하게 하소서.

  5)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하나님, 나의 사정이 여호와께 아뢰어졌으니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아게 보게 하옵소서.


3. 자기 자신이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

  1)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2)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에 복이 없었더라면

  3)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4) 내가 어찌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나가 이해한 방식으로 풀어쓰기]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던 예레미야가 결국 성전의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에 의해서 잡혀가게 된다. 그에 의해서 매를 맞고 목에 씌우는 나무고랑으로 채워지게 된다. 예레미야를 겁주어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음날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고랑을 풀어준다. 그 때 예레미야는 바스훌을 향해서 멸망의 예언을 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또한 바스훌가 그 가족이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죽을 것을 예언한다. 또한 그를 따르던 모든 친구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될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의 입은 바스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상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선지자직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입을 열때마다 파멸과 멸망을 말하는 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이 있었다. 우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고, 심지어는 친구들조차도 그를 꺼렸으며, 혹 작은 실수 하나에도 벌떼처럼 몰려들어 예레미야를 넘어뜨리려고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주신 말씀과 열정 때문에 말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그것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오히러 자신의 태어남을 한탄한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인데, 태어남으로 인해 져야할 어쩔수 없는 고통을 지게 된 것이 예레미야의 운명이다. 



[정리3.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메시지와 진전시켜야 할 생각들]


1. 하나님의 메시지를 막을 수 없다.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겁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수가 없었다. 예레미야를 풀어주는 순간, 예레미야는 또 다시 유다의 파멸과 멸망을 말하고 더 나아가 바스훌과 그 가족의 멸망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싫어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싫었던 것이고, 그것은 진리가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으려고 했고, 말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을 막을 수 없다.


2. 참된 선지자란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다. 


바스훌과 그의 친구들은 종교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짓 예언을 들었고, 거짓 예언을 전한 사람들이다.(6절) 이들이 잘 못된 정보를 들었던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이들은 옳은 정보에 대해서는 귀를 닫았기에 그릇된 정보, 듣기 좋은 메시지에만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반면, 예레미야는 참된 메시지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선지자였다. 그 스스로 그 메시지를 피하고 싶었다. 친한 벗들에게조차 조롱을 받아야 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태어남에 대해서도 후회가 막심했을 정도로 이 일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때, 감추고 있을 때, 입을 닫고 있을 때의 고통이 더욱 컸던 것이다. 참을수 없는 답답함으로 자기도 모르게, 참을수 없어서 터져 나온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메시지였던 것이다.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사람들이다. 목사 중에도 얼마든지 거짓 선지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과 야합하는 사람들, 성도들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닌 할 수 조차 없을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목사들... 이들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릇된 메시지를 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바스훌인가? 예레미야야인가? 자신있게 예레미야라고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스훌은 아닌가 돌아보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렘 5장 묵상과 적용] 평화란 선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선을 지키는 배려와 양보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용납하실 수 없는 예루살렘의 죄

  1) 만일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며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2)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 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에 불과하다. 

  3) 하나님이 그들을 치고 때리는데도 자신들이 징계를 받는 줄을 모른다. 얼굴이 바위같이 굳어 돌아오기를 싫어한다. 

  4) 하나님께서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어찌 이 일들에 대해서 벌하지 않겠느냐?

   (1)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 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인다. 

   (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

   (3)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하다. 무시하고 귀 기울이지 않음.

  5)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되고 이 백성은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를 것이다. 

   (1) 네가 모르는 나라를 통해서 너와 너희 자녀들이 먹던 것을 그들이 먹게 하겠다. 

  6)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 여호와께서 왜 이렇게 되도록 하셨는가? 하고 묻는 자가 있다면

   (1)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땅인 아닌 곳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도록 하리라 하라. 

  7)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한다.

   (1) 만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정함. 그래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넘지 못한다. 

   (2) 그런데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한다.

   (3) 너희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고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면,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한다. 

   (4)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5)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정리2. 내용을 풀어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말씀하신다. 


1. 단 한사람이라도 정의와 진리를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이 없다. 

2. 하나님이 잘못하여 때리고 징계를 해도 이들은 얼굴이 굳은 바위라 깨닫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를 기대하겠는가!

3. 내가 잘 먹여서 풍요롭게 하면, 그 힘과 여유로 창기를 찾아가니 어찌 재앙이 없겠는가!

4. 여호와의 존재감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 따라서 여호와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5. 만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한다. 심지어 성난 파도조차도 그렇다. 그런데 이 백성은 반역하는 마음에 그 한계를 넘는다. 

6. 악인들이 자기의 이익을 얻겠다고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 

7. 선지자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또한 좋게 여기니... 이 나라에 변화과 개혁은 물건너 갔다고 봐야 한다. 


이 정도니, 어찌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시겠는가!!


[정리3. 내용에서 묵상하고 적용해 볼만한 것은....다음과 같습니다.]


1. 만물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하는데, 사람 만큼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군요.


하나님께서는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으셨습니다.(22절) 그래서 성난 파도가 거세게 불어도 그것을 이길 수는 없게 하셨다고 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정하신 한계 안에서 움직입니다. 성난 파도라도 결국 그 한계를 넘어 육지를 삼키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그 정한 한계를 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의 죄는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고 맙니다. 하나님을 향한 죄의 허용도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허용된 죄(용납하실 수 있는 죄)까지도 넘어서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은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심판을 받고 재앙을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이 허용된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팍팍한 한계를 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고 하셨으니까요. 어찌보면 매우 넓은 한계를 주신 것이고 그 한계는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마침내 그 한계를 넘어설 때 심판과 재앙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고,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 어떤 행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오만과 부주의함이 그 선을 무시하곤 합니다. 그 때 관계는 깨지고 평화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평화란 선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선을 지키는 배려와 양보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부조리한 사회: 거짓말하는 선지자,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을 선호하는 백성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5:31)


진리를 말해야 할 선지자가 거짓말을 한다. 하나님의 권력을 대변해야 할 제사장이 자신의 권력으로 다스리려 한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질서를 왜곡하는 것이며 본질을 훼손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문제는 백성들이 그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진리를 선언하는 선지자를 백성은 싫어하며, 하나님에게만 의존된 제사장을 백성들은 싫어한다. 누가 누구에게 악영향을 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서로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상황 속에서 누구하나 이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도 내부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외부적인 파괴가 들어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내부적 변화를 이끌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외부적으로 이들을 흩으시며 이들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가? 악의 구조, 변화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지금은 내부적으로 변화를 열망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자정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이번 대선도 그런 자정 능력의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이런 노력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아직 소망이 있다는 것이니 다행이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이런 모든 자정능력이 그 결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구조적 악의 패턴에 의해 잠식당할 때, 그래서 역시 안돼라는 의식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생각을 짓누를때... 정말 그 때가 되면 우리의 마지막이 어찌될찌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외부적인 힘으로 깨뜨려지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번 대선 이후를 기대해 본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엘리야의 시대가 가고 엘리사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고 해도 그의 시대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오늘은 옛 시대의 마지막과 새 시대의 시작이 만나는 장입니다.

 

[정리1. 내용의 정리]

1. 엘리야의 승천
  1)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올리고자 하실 때, 엘리야를 길갈에서 벧엘로 보내심
  2) 엘리야는 엘리사를 길갈에 있으라 했지만, 엘리사는 엘리야를 쫓아서 같이 감.
  3) 벧엘에 왔을 때,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를 여호와께서 데려갔실 것을 엘리사에게 알렸고, 엘리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4) 엘리야는 엘리사를 벧엘에 두고 여리고로 가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쫓아감.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도 엘리사에게 하나님이 엘리야을 데려갈 것을 알림.
  6) 엘리야는 엘리사를 여리고에 두고 요단으로 가려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쫓아감.(3번)
  7) 엘리야가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넜고, 선지자의 제자 50명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8)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했고, 엘리사는 갑절의 역사를 구한다고 했다.
  9)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보면 이루어지리라고 말함.
  10) 두 사람이 길을 갈 때, 불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데려감.
  11) 엘리사는 자신의 옷은 둘로 찢고,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요단을 치매 물이 갈라지고 엘리사가 다시 요단강을 건넜다.

2. 엘리야에게서 엘리사에게로
  1)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의 성령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게 나아가 엎드려 경배했다.
  2) 그들이 엘리야의 몸을 찾아 보겠다고 강청하매, 엘리사가 허락했으나 찾지 못함(사흘동안)

3. 엘리사의 기적
  1) 여리고에 있을 때,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이곳은 위치는 좋은데 물이 좋지 못하여 토산이 익지 못한다고 말하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가지고 오라고 하고 그것을 물 근원에 던져 물을 고쳤다.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지금까지 이르렀다.
  2)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갈 때, 길에서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리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고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 아이들 42명을 죽임.
  3)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재구성]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과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로 하신 것 같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위기는 엘리사나 선지자의 제자들도 대게는 눈치채고 있는 분위기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옮기셨고, 그 때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그 지역에 두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쫓겠다고 고백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간절히 쫓았고, 그로 말미암아 기대하는 영적인 복을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요단에서 요단 건너편으로 엘리야를 데리고 가신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로 엘리야를 데리고 올라가신다. 이 장면을 엘리사는 바로 곁에서 보았고 엘리야가 올라간 그 자리에 엘리야의 겉옷이 남겨져있었다.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고, 엘리야의 옷을 챙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요단을 갈랐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에게 있는 성령의 역사가 엘리사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고 그 앞에 경배했다.


엘리사에게 권능이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여리고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문제를 가지고 엘리사에게 나온다.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엘리사는 소금을 물근원에 뿌림으로 해결해 준다. 생명과 열매를 회복케 한 사건이다.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가던 중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로 놀린 것에 대해서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함으로 아이들 42명이 암곰 두 마리에 의해 죽게 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안주함을 넘어서는 엘리사의 강한 영적 열망

본문을 통해 강조되는 것은 엘리야가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왠만한 선지자의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엘리사도 알고 있었다. 엘리야는 지역을 옮길 때마다 엘리사를 그 곳에 두려고 했다.(선지자 생도들의 지역 책임자로 두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을 마다했다. 끝까지 엘리야를 쫓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이 역사가 갑절이나 자신에게 전수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 같다.(9절)

결국 엘리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야를 쫓았고, 엘리야의 승천을 봤고, 마침내 엘리야의 영적 권세의 두 배를 받게 된다.

엘리사는 안주하지 않았다.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역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야 곧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될테니 더이상 쫓지 말고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갑절의 영적 은혜를 얻기 위해서 엘리사는 불투명한 여행을 엘리야와 계속해서 함께 했던 것이다.

영적 성장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엘리사도 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안주함을 극복하면 열정에 대한 성취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2. 잔혹한 사건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것

엘리사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 42명을 저주하여 죽게 한 사건은 엘리야가 50부장과 오십명의 병사들을 두 번이나 죽게 한 사건과 같이 설명하기가 곤혹스러운 사건이다. 상식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놀린다는 것으로, 그것도 어린아이들을, 그것은 42명이나 죽인 사건.... 그것도 엘리사가 말이다.

난 이 사건을 계시적인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엘리사가 어떤 권세와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생명을 살리고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사역을 했다. 즉 엘리사에게는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엘리사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심판하는 능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엘리사는 생명을 살리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엘리사가 가진 권능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지, 목사들에게 저주권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엘리사 사역 초반에 엘리사가 받은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크고 두려웠는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 정도 선에서 봐야 할 사건으로 보인다.

물론,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 엘리사가 경솔하고 충동적이었다는 것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엘리야가 두려움으로 인해 100명의 사람들을 불로 죽인 것이나, 엘리사가 철없은 아이들 42명을 죽게한 사건은 컨트롤 되지 못한 파워가 가지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특별한 권세(힘)는 컨트롤 될 수 있는 장치를 전제할 때에만, 유익하다 할 수 있겠다. 견제 장치가 없는 권세는 위험하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미가서 5장을 묵상하던 중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묵상한 글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고 결국은 멸망을 당하는 역사적인 상황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우상숭배와 불순종하는 범죄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심판이라는 측면이다. 그래서 바빌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측면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이 장차 얻게 될 구원을 위한 진통과정이라는 것이다. 진통이 없이 생명의 탄생이 없듯이,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과 구원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계일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과정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 5:3 쉬운성경)

주께서는 진통중인 예루살렘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 백성을 바빌론에 남겨 두실 것이다. 그런 뒤에 포로로 끌려갔던 그의 형제들이 유다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itistory-photo-1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야고보서 5장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전에 야고보서가 신약의 잠언과 같다는 말을 한것이 생각났다. 아니다. 구약의 선지서와 같은 느낌이 솔솔난다. 부자들을 향해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는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 것 같다. 야고보서 5장은 그렇게 시작한다. 

1. 부자들에 대한 경고

부자들의 재물 축적이 문제다. 약자에게는 덜 주고자 하고, 자기 자신은 사치했기에 그들은 위험하다. 또한 마지막 날에 부를 축적했기에, 나누지 못하고 자신의 것으로만 쌓았기에 그들은 울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2. 때(곧 다가온 심판)를 기다리고, 길이 참고 기다리라.마음을 굳게 하라.

농부가 열매를 기다리듯 기다리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 참고 때를 기다리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마음을 굳게 하라. 그리고 흔들리지 말라.

 

3. 맹세하지 말라.

너무 큰 확신을 가지지 말라. 그렇다고 여겨지고 판단되면 그렇다. 아니라고 판단되면 아니다라고 말하는 정도 까지만 하라. 맹세까지 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네가 맹세할 만큼 확실히 맞는 것인지, 확실히 그릇된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저 그 때에 내가 가진 역량을 판단해서 옳다 그르다 정도만 하라. 그러면 나중에 틀렸을 때에라도 내가 몰랐습니다 부족했습니다. 정도로 마무리 될 수 있다. 그런데 맹세까지 하고 그러면 수습이 어려워진다.

4. 기도해라.

고난당하고 있거든, 병든 자가 있거든 기도해라.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로 풀어가라. 풀릴 것이다.

5. 미혹된 자를 그 길에서 돌아오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